(광산김씨 홈피에 지곡님이 올린 글을 퍼 왔습니다)
미수 허목의 전설로 산 생애
인물이 빼어나면 전설이 따른다고 했듯이,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년)은 전설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그의 벼슬길이 전설을 낳을 만하다.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56세 때 처음으로 참봉이라는 미관말직에 천거되더니 81세에 이르러 우의정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전무후무한 예에 속한다.
두 번째의 전설은 그의 글씨에서 유래한다. 그가 쓰는 옛 전서(篆書)는 고기(古氣)와 기기(奇氣)를 띠고 있어 예술의 경계를 넘어 신묘한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 전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그의 학문은 넓은 분야에 걸쳐 있고, 지역적으로 경기 출신이면서 영남의 퇴계학파를 잇고 있다. 퇴계학 을 근기(近畿)에 심어 훗날 실학으로 꽃피울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다. 학통과 학문에도 전설은 깃들 수 있다.
그는 또한 온몸으로 전설을 점찍고 다녔다. 그는 낯선 곳을 찾아다니기 좋아했고, 가는 곳마다 학문과 풍모와 예술로 전설을 남겨놓곤 했다.
미수 허목은 선조 28년인 1595년에 한양 창선방에서 태어났다. 손바닥에 문(文), 발바닥에는 정(井)으로 읽을 수 있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스스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을 쥐고 정으로 밟네(握文履井) 자화상의 자찬
무늬가 손에 있기를 문이라
스스로 자하기를 문보이고
눈썹이 길어 눈을 지나치니
별호는 미수로구나.
有文在手曰文 自字曰文父
眉長過眼 別號曰眉叟
자서(自序)
그는 양천 허씨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교(喬)이고, 어머니는 나주임씨로 당대의 문장가 임백호(林白湖), 제(悌)의 딸이다. 백호의 호방 장쾌한 기질이 그에게로 전해져 반생을 초야에서 떠돌며 군고(窘古)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문보(文父) 외에 화보(和父)라는 자 가있고, 미수 외에 대령노인(臺嶺老人)이라는 별호가 있다.
미수는 19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명재상 오리 이원익의 손녀였다. 오리대감은 젊은 손서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고, “장래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거다”라고 하면서 남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그러나 훗날 50세가 넘도록 백두(白頭)에 있게 되자 그의 장모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는 야담도 전해온다.
미수의 아버지 교는 고령, 거창, 산음(산청)등 영남의 여러 지방 수령을 거쳤고, 그때마다 미수는 따라다녔다. 그는 23세 때 거창을 왕래하면서 성주로 가서 한강 정구를 찾아뵈고 스승으로 받들게 된다. 퇴계학의 적전(嫡傳)으로 일컬어지는 한강으로부터 미수는 학문의 진수를 전수받게 되었다. 한강의 학문이 다방면에 걸친 박학이고 무실(務實)을 주지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수의 학문 경향이 후일 근기 지방의 실학 조류와 이어진 연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수를 사숙해서 퇴계학의 맥락을 잇게 된 성호(星湖)이익(李瀷)은 그가 찬(撰)한 미수의 신도비 명에서 학문과 도덕을 극구 찬양한 끝에 ‘지금의 이른바 사범(師範)이고 옛날의 이른바 대신’이라 결론 짖고 있다. 미수로 해서 퇴계학이 영남학파와 근기학파로 나뉘어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수는 스스로 ‘평생에 돈독하게 고문(古文)을 좋아해서 일찍이 자봉산중(紫奉山中)에 들어 <공씨전(孔氏傳)>을 읽었고 늦게야 문장을 이루었다 자명비(紫銘碑)’고를 기록하고 있거니와, 천고를 거슬러 올라가서 고전자(古篆字)를 연구해 이른바 미수체 라는 독특한 글씨를 익혔고, 전적도 시원유교(始原儒敎)의 오경(五經)에 힘을 기울였으며, 20여 년간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해보고는 소득이 없자 다시 오경에 몰입하곤 했다.
고(古)를 좋아하는 그를 평해 학(學), 문(文), 서(書)에서 삼고(三古)를 체득했다고 하고, 특히 고전(古篆)은 동방제일 이라 일컫는다. 그가 과거를 보지 않게 된 또 하나의 연유가 있다. 32세 때 동학(東學 : 한양 四學중의 하나)의 재임(齋任)으로 있을 때 임금(宣祖)의 사친(私親)계운궁(啓運宮)이 죽었는데, 박지계(朴知誡)라는 사람이 추숭(追崇 : 죽은 후에 칭호나 벼슬을 올려주는 것)해야 된다는 여론을 일으키고 나섰다.
이에 미수가 임금의 뜻에 영합해서 예를 어지럽힌다고 질책을 하며 박지계를 유적에서 깎아 버렸고, 이를 전해들은 임금이 미수의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해 버렸다. 과거 정지령은 곧 해제 되었지만, 그는 이후 과거에 응시할 뜻이 다시는 일지 않았다.
그의 나이 42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영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난이 진정된 다음해에 영남의 의령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께서 그곳으로 피난을 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10년 가까이 남도의 곳곳을 방랑하게 되고,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기게 되었다.
효종 원년인 56세 때에 정릉참봉의 벼슬이 내려지자, 조금은 당황했던 것 같다. 늘그막에 처음 받아보는 벼슬이었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아니하면 (국가와)의리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서 한 달을 봉직하고는 떠나버렸다. 그에게 벼슬다운 벼슬이 돌아온 것은 환갑을 지난 62세 때 내려진 공조좌랑 그리고 용궁 현감이었다. 그러나 두 번 다 사양하고는 고향인 연천에 눌러앉자버렸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입궐했고, 곧 연천으로 돌아갔다가 65세 때 장령으로 다시 나오는 등 소명과 사퇴가 되풀이 되었다.
미수의 환로(宦路)에서 당쟁을 떼어놓을 수 없다. 사실 미수가 산 시대는 당쟁이 만개한 계절이었다.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정권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 한쪽이 정권을 쥐게 되면 그 내부에서 다시 갈등이 생겨나 두 편으로 갈라지곤 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나뉜 것이 그것이다. 미수는 남인에 속해있었고, 뒤에 청남의 영수로 받들어졌다.
이른바 예송(예에 관한 논란)의 발단은 이러하다.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왕위를 잇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효종이 돌아가시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조씨(趙氏)는 얼마만큼 복(服)을 입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조대비는 말하자면 효조의 계모인데, 왕이요 아드님을 위해 복제를 어떻게 정해야 옳으냐 하는 것이다.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기년(朞年 : 만 1년)’ 복제를 주장했고, 남인인 미수와 윤휴(尹鑴)는 ‘3년(만2년)’ 복제를 고집했다. 일단 서인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이 났는데, 이듬해 3월(顯宗 元年)에 미수가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갑자기 당한 일이어서 앞서의 결정이 잘못된 것 같으니 다시 고구(考究)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를 받아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이 반론을 들고 나왔고 미수도 맞받아 논전이 벌어졌으나, 임금이 앞서의 기년복을 재확인해서 사태가 가라앉는듯했다. 이때까지는 순수한 학문적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인인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가 ‘조대비 복제를 3년으로 하지 않은 것은 10년간이나 재위한 효종에게 국가의 적통(嫡統)을 인정하지 않는 저의가 들어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제는 당쟁, 아니 정권 차원으로 이 문제가 확대된 것이다.
서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는 몸이 되었으며, 이때66세인 미수도 덩달아 삼척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이때 모처럼의 고을살이에서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향약(鄕約)을 가다듬고 이사(里社)를 설치하며, 척주지(陟州誌)를 완성하고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워 고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척주동해비는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독특한 미수체의 전서 그리고 웅혼과 함축이 깃든 문장으로 해서 후세에 신비스런 전설을 남겨주고 있다.
동해안은 조수의 간만이 심해서 바닷물이 자주 시가지로 밀려들어 오십천이 범람했다.
주민들은 늘 홍수에 시달려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현종 초년에 미수 허목선생이 삼척부사로 부임해 와서 손수 글을 짖고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자 조수가 밀려드는 일이 닥 그쳤다. 그래서 일명 퇴조비(退潮碑 : 조수를 물러가게 한 비)라고도 한다.
이 비의 비문을 탁본으로 떠다가 집안에 간직해놓으면 화재가 일어나지 않고 모든 재앙의 근원이 되는 잡귀가 물러간다는 비문 신앙도 낳게 되어 오늘날 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삼척에서의 고을살이는 그런대로 보람도 있고 풍류도 있었다. 중장정계의 아귀다툼에서 멀리 떨어져 유유자적하게 지낼 수도 있었다. 고을에는 죽서루(竹西樓)며 서별당(西別堂)등 경승지에 세워진 누각이며 정자도 있어, 득의의 문장으로 기문도 짓고 행정의 틈틈이 독서도 부지런히 했으며, 그것이 싫증나면 거문고를 뜯으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2년 만에 고향 연천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한가로히 세월을 보내며 독서에 잠기기도 하고 저술에 정력을 쏟기도 한다.
그러다가 현종 15년인 1674년에 두 번째로 예송이 불붙었다.
그 해 2월에 효종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장씨가 돌아가시자 다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가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서인은 효종 상(喪)때와 같은 맥락으로 이론을 세워 대공(大功 : 9개월)을 주장하고, 남인역시 일관된 학설에 따라 기년(朞年)을 고집했다. 이번에는 왕의 결단으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고, 이에 따라 서인은 몰락하기 시작해 정국의 전환을 보게 되었다.
이어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서인 정권이 완전 무너지고 세상이 바뀌었다.
미수는 80세에 대사헌으로 특배되고 이어 좌참찬, 이조판서를 거쳐 81세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허적(許積)과 그의 아들 견(堅)의 권력 남용이며 방약무인한 행태에 위기감을 느낀 미수는 ‘허적이 정권을 농단 한다’는 상소를 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자 조정을 떠났다. 미수의 예단(豫斷)대로 허적은 스스로 만든 화근의 덫에 걸려 패가망신을 하게 되고, 남인 정권마저 무너져버렸다. 미수의 나이 86세 때 일어난,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었다. 그리고 미수는 숙종 8년인 1682년에 88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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