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에서 김해부 시례로 이주한 인물이었는데,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임진년에 휴가를 얻어 김해에 있으면서 감로사에 있는 안향(安珦)의 시판을 다시 판각하러 갔다가 일본군이 쳐들어 온 소식을 들었다.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데도 도망하여 달아남은 임금의 밥을 먹는 자가 감히 할 수 없는 바다. 하물며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관록의 몸에 있음에랴” 하고, 4월 23일 승려 100여 명과 바로 읍성으로 달려가다 길에서 일본군을 만나 싸우다 죽었다. 아들 안신갑(安信甲)이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자, 조선의 충신 안민이 여기서 죽었다고 쓰인 팻말을 일본군이 걸어 놓았으므로 뒤에 고향에 반장(返葬)하였다. 안민순절유적비(安愍殉節遺蹟碑)가 불암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