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스크랩] 寒岡 정구

자라가슴 2007. 3. 2. 23:48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25] 한강 정구
"해야 할 일을 겨를 없다고 놔둬선 안돼" 壬亂 와중에도 저술활동
벼슬상징 붉은띠  7세때 두른 일화 "너는 뜻만 크구나" 꾸지람 듣자
"뜻만 큰 게 아니라 요순의 기상 있어" 대꾸
역사서·지방지에 가장 심혈 기울여 ,주자학에도 관심…'무흘구곡시' 남겨

정우락<영산대 교수>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용추. 무흘구곡 가운데 마지막인 제9곡에 해당한다. 한강은 이곳을 '원두에 묘한 곳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별천지를 물으랴'고 노래했다.
용추. 무흘구곡 가운데 마지막인 제9곡에 해당한다. 한강은 이곳을 '원두에 묘한 곳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별천지를 물으랴'고 노래했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 보고 돌려 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교산 허균(許筠)에게 역사책인 '사강(史綱)'을 빌려 10년이 넘도록 주지 않은 것이다. 이에 허균은 정구에게 편지를 보내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 주기는 더디다 하였는데, 더디다는 말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라며 돌려주기를 독촉하였다.

정구는 저술에 남다른 점이 있고, 그의 학문은 가히 전방위적이었다. 성리서(性理書)가 있는가 하면 지리서도 있고, 의학서가 있는가 하면 문학서도 있다. 어쩌면 그는 서적 편찬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서적을 편찬하자면 다양한 책들을 참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때로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빌리기도 했을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허균의 책을 빌려 보고 미처 돌려 주지 못한 것도 이 과정에서 있었던 일인 듯 하다.

관동지방의 인문지리서인 '관동지'를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무(軍務)로 대단히 바쁜 시기에 한강은 조금의 여가라도 있으면 관동지방의 지지(地誌)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 인재 최현(崔晛)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그는 "완급은 진실로 다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겨를이 없다고 해서 놓아 두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금 서적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만약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해 두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에 보일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군사적인 일과 지방지 편찬이 그 완급의 측면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있는 자료들을 수집·정리해 두지 않으면 훗날 그 지방을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구는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면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역사서와 지방지였다. 64세 때 편찬한 '치란제요(治亂提要)'에서 밝히고 있듯이 역사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바로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지방지 편찬에는 참으로 집요한 측면이 있었다. '안민(安民)'과 '선속(善俗)', 즉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고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작으로 동복현감, 함안군수, 통천군수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문화를 지방지로 정리하여, 도합 7권이나 되는 지방지를 남겼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1587년 함안군수로 재직하면서 오운(吳澐) 등과 함께 편찬한 '함주지(咸州志)'가 유일하다.

정구는 주자학에 깊이 침잠하기도 했다. 주자와 관련된 운곡(雲谷)·무이산(武夷山)·백록동(白鹿洞)·회암(晦庵)에서 마지막 자를 따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를 편찬하는가 하면,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보고 그 느낀 점을 기록하기도 하고,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 특히 주자의 '무이구곡시'에 차운을 한 '무흘구곡시' 10수는 그가 얼마나 주자를 그리워하면서 주자학을 철저하게 체현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한다.

'무흘구곡시'는 정구가 배향되어 있는 회연서원(晦淵書院) 뒤편 봉우리인 봉비암에서부터 대가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의 용추에 이르기까지 절경 아홉 굽이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는 대가천 맑은 물소리에서 진리의 소리를 들었다. 이 시의 서시에서 밝힌 '주부자께서 일찍이
입암. 무흘구곡 가운데 제4곡에 해당한다. 한강은 여기서 '사곡 백척 바위에 구름이 걷히니, 바윗머리의 화초가 바람에 살랑거리네'라고 노래했다.2
입암. 무흘구곡 가운데 제4곡에 해당한다. 한강은 여기서 '사곡 백척 바위에 구름이 걷히니, 바윗머리의 화초가 바람에 살랑거리네'라고 노래했다.
깃들었던 곳(紫陽況復曾棲息),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萬古長流道德聲)'이라고 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땅에서 주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무흘구곡시'의 첫 수는 이러하다.



一曲灘頭泛釣船

風絲繞夕陽川

誰知捐盡人間念

唯執檀奬拂晩煙

첫째 굽이 여울목에 고깃배 띄우니,

석양 부서지는 냇가에 실같은 바람 감도네.

뉘 알리오, 인간 세상의 근심 다 버리고,

박달나무 삿대 잡고 저문 연기 휘저을 줄을.



이 시에는 정구의 성리학적 자연관이 내포되어 있다. 성리학적 자연관이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수양논리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봉비암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면서 인간의 다양한 감각적 욕망에서 발생하는 인욕(人欲)을 막고 물의 근원을 찾아 인간 심성의 근원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의 근심을 모두 버리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구의 성리학적 자연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여름이면 수려한 자연을 찾아 고성방가로 산천의 고요를 찢어내다가 급기야 환경오염에 일조를 하고 돌아오는 소위 문명인들의 반문화적 작태, 여기에 그의 성리학적 자연 인식은 강한 비판력을 행사한다. 정구의 무흘구곡 유적은 1782년 영재(嶺齋) 김상진(金相眞)이 그린 '무흘구곡도'가 남아 있어 그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구는 역사서와 지리서를 편찬하면서 민족의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주자학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면서 성리학적 자연관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탐험해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강학(寒岡學) 연구는 갈 길이 멀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인식하여 한강학의 어떤 부분은 퇴계를 계승하였고, 또 어떤 부분은 남명을 계승하였다는 수준에 그친다. 그러나 한강은 퇴계의 한강이 아니듯이 남명의 한강도 아니다. 남명이 퇴계를 비판한 근거로 든 구담천리(口談天理)가 한강에게는 없으며, 퇴계가 남명을 비판할 때 즐겨 거론한 노장적 기미 역시 한강에게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사적 현실과 주자학의 재인식을 통해 학문적 독보를 이룩하면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틀어 가장 많은 342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따라서 한강학 연구는 아직 출발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벼슬상징 붉은띠, 7세때 두른 일화

한강이 7세 때의 일화이다.

백씨 참찬공 괄이 일찍이 손님과 함께 앉아 있는데 7세의 한강이 붉은 띠를 두르고 나와 그 손님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손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무슨 벼슬을 했느냐?" 한강이 대답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대부의 벼슬을 해왔으니, 저는 마땅히 금빛 나는 옷과 붉은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험삼아 입어 본 것일 뿐입니다." 이에 백씨가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뜻만 커서 그렇습니다." 한강이 다시 말했다. "제가 뜻만 큰 것이 아니라 요순의 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은 책읽기를 산 오르기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개 독서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름에 있어 반도 가지 않아서 그만 두는 사람도 있고, 두루 돌아다니기는 하나 그 정취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반드시 그 산수의 정취를 알아야 비로소 산을 올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영남지리답사
글쓴이 : 松河 李翰邦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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