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岡 鄭逑의 『遊伽倻山錄』 硏究
朴 英 鎬
1. 머리말 / 376
2. 寒岡의 學問的 基底 / 377
(1) 窮理居敬 / 378
(2) 應用救時 / 381
3. 山行目的과 作者意識 / 385
(1) 山行動機와 登頂目的 / 385
(2) 修己와 處身의 必要性 認識 / 389
(3) 現實問題의 批判的 理解 / 395
4. 客觀的 敍述과 寫實的 描寫 / 398
(1) 事實의 客觀的 敍述 / 398
(2) 景物의 事實的 描寫 / 401
5. 맺음말 / 403
2. 寒岡의 學問的 基底 / 377
(1) 窮理居敬 / 378
(2) 應用救時 / 381
3. 山行目的과 作者意識 / 385
(1) 山行動機와 登頂目的 / 385
(2) 修己와 處身의 必要性 認識 / 389
(3) 現實問題의 批判的 理解 / 395
4. 客觀的 敍述과 寫實的 描寫 / 398
(1) 事實의 客觀的 敍述 / 398
(2) 景物의 事實的 描寫 / 401
5. 맺음말 / 403
寒岡 鄭逑의
『遊伽倻山錄』 硏究
朴 英 鎬
1. 머리말
寒岡 鄭逑(1543∼1620)는 朝鮮中期에서 전통적인 儒學의 바탕 아래 心學과 禮學의 대가로 尊崇되어 당시에 師表가 되었던 인물이다. 朝鮮朝 유학의 학맥으로 볼 때 寒岡은 退溪 李滉과 南冥 曺植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를 眉 許穆에게 전수함으로써 嶺南學派의 학문을 近畿學派로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문의 요체는 '窮理居敬'과 '應用救時'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退溪學과 南冥學을 집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유학자들은 자신의 고장에 소재하는 名山을 산행하는 가운데, 자연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조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실제로 명산을 유람하면서 경험한 사실이나 느꼈던 감흥을 漢詩나 遊記 등을 통해 표현한 작품은 사대부문학의 일부로서 손색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한국한문학사에서 '遊錄'이란 題名으로 기록된 경우는 朝鮮前期 嶺南士林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실제 산행을 통해 체험한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록함은 물론 자연 경물에 감촉되어 일어나는 다양한 감흥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행기록은 畢齋 金宗直의 '遊頭流錄'을 비롯하여 退溪 李滉의 '遊小白山錄', 南冥 曺植의 '遊頭流錄', 寒岡 鄭逑의 '遊伽倻山錄' 등으로 이어진다.
寒岡은 37세 되던 해인 1579년(선조 12년) 늦가을에 자신이 사는 고장의 명산인 가야산을 등정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보다 앞서 18년전에도 가야산을 등정할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산자락에서 관람하는 정도에 그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번의 산행에서는 자신이 가야산을 등산하는 과정에서 겪고 느낀 경험을 '遊伽倻山錄'이라는 기록물로서 남긴 점이다. 한강이 가야산을 등정하고 남긴 현실체험의 기행록인 '유가야산록'이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그의 현실주의적 학문 태도에서 기인한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선 그의 학문적 기저를 파악하여 '유가야산록'이 창작된 학문적 배경을 찾고자 한다. 다음에는 '유가야산록'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내용적인 측면과 기행 중의 다양한 감흥을 문학적으로 표출한 수사적인 측면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강이 가야산을 등정하게 된 목적과 일정을 파악하고 산행 도중에 경험했던 주요한 사실이나 감흥을 검토한 다음, 이러한 사실이나 감흥을 순차적으로 서술한 기록성과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학성을 검토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드러난 작자 의식이 한강의 여타 저술의 창작이나 학문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의 현실주의적 성격이 '遊伽倻山錄'이라는 구체적인 문학작품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2. 寒岡의 學問的 基底
한강은 일생동안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에 몰두하였고 방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敬'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心學의 수련은 현실생활에 긴요해야 할 것이므로 현실 생활을 통한 실천을 무엇보다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문의 요체는 '窮理居敬'과 '應用救時'로 집약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한강 학문의 현실주의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학문 태도는 사물이나 자연을 접하는 데에도 객관적인 시각을 마련하였다. 국토기행록인 '遊伽倻山錄'도 여기에 근거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1) 窮理居敬
寒岡의 학문 정신의 연원이 성리학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는 노력보다는 이미 선현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토대로 삼는 소위 '述而不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우선 '窮理居敬'의 측면에서는 退溪와 朱子의 학문 정신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窮理'와 '居敬'은 朱子가 '存心養性'을 위한 수양법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居敬'은 '主一無適'하게 자신의 덕성을 함양한다는 <中庸>의 '尊德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窮理'는 사물의 이치를 탐색하여 지식을 연마한다는 <中庸>의 '道問學'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주자의 '居敬'과 '窮理'라는 兩大綱領은 聖學의 입문으로, 또는 存養의 요법으로 인정되어 退溪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寒岡 또한 학문의 목적을, 仁을 구하는 '君子之學'으로 설정하고 인의 요체를 구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생동안 窮理와 居敬을 통한 이상적인 인격 완성을 위해 진력했던 것이다. 이는 寒岡의 학문적 관심과 독서 경향, 저술 내용 그리고 생활 태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寒岡의 학문에 대한 관심을 보면, 그는 時文을 익혀 科擧에 진출하는 학문을 단념하고 求道의 뜻을 지니고 성현의 학문에 정진하기를 기약하고 있다.
'居敬'은 '主一無適'하게 자신의 덕성을 함양한다는 <中庸>의 '尊德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窮理'는 사물의 이치를 탐색하여 지식을 연마한다는 <中庸>의 '道問學'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주자의 '居敬'과 '窮理'라는 兩大綱領은 聖學의 입문으로, 또는 存養의 요법으로 인정되어 退溪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寒岡 또한 학문의 목적을, 仁을 구하는 '君子之學'으로 설정하고 인의 요체를 구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생동안 窮理와 居敬을 통한 이상적인 인격 완성을 위해 진력했던 것이다. 이는 寒岡의 학문적 관심과 독서 경향, 저술 내용 그리고 생활 태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寒岡의 학문에 대한 관심을 보면, 그는 時文을 익혀 科擧에 진출하는 학문을 단념하고 求道의 뜻을 지니고 성현의 학문에 정진하기를 기약하고 있다.
선생은 항상 時文이 비루하고 저속함을 탄식하고 개연히 구도의 뜻을 가졌다. 이미 관례를 마치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선생은 묘령 때부터 지행에 돈독하게 힘써서 성현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였다. 스승에게서 학업을 받고는 각고의 노력으로 스스로 방과하지 않았으니 문리가 날로 통하고 사의가 날로 통달하였다.
위에서 寒岡이 젊은 시절부터 추구하고자 한 성현의 학문은 다름아닌 유학이요, 바로 성리학이다. 특히 20세에 退溪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에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단념하고 일생동안 성리학에 치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독서 경향 또한 程朱書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특히 <朱子語類>와 <朱子大全>, <心經> 등의 朱子의 性理書를 깊이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도 전적으로 주자를 법도로 삼았다.
매양 여러 책을 살핌에 몇 줄을 일별하고 의리가 긴요한 곳에 이르면 반드시 다른 책을 두루 찾아서 참고하여 고증해서 그 귀취를 지극하게 하였다.
선생의 학업은 널리 경전을 구하여 그 대의를 터득하였는데,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더욱 힘을 쏟았다. 靜字, 敬字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더욱 더 면려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寒岡이 독서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통독을 통해 대의를 파악하였고 특히 의미가 중요한 곳에서는 다른 서적까지 참고하여 그 의미를 궁구하는 실증적인 면모를 지녔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유학의 여러 경전 가운데 사서를 중점적으로 익혔다는 것은 바로 朱子性理學을 학업의 요체로 삼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리학 가운데 '靜', '敬'字의 공부를 더욱 치밀하게 하여 궁리와 거경을 일치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성리학에서 致知를 위한 道問學과 存養을 위한 尊德性을 병행함으로써 '知行合一'하려는 주자성리학의 수양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주리론을 지지하는 영남학파의 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세계 완성을 위한 '窮理居敬'에만 주된 관심을 가질 뿐 이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저술과 편찬 사업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런 가운데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진력하면서도 저술 사업에 적극적인 노력을 보인 이는 退溪 이후에는 寒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知行一致를 위한 노력의 결과 그가 저술한 성리서들은 후대에까지 주요한 사상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寒岡이 저술한 성리학에 대한 서적을 살펴보면 31세에 退溪의 <朱子書節要>를 분류하여 <改定朱子書節要目錄>을 편찬하였다. 56세에 <中和集說>, 59세에 <聖賢風範>, 61세에 <心經發揮>, 62세에 <濂洛羹墻錄>, <洙泗言仁錄>, <臥龍庵志>, <谷山洞庵志> 등을 편찬하였다. 이 중 <心經發揮>는 明代 程敏政의 <心經附註>에서 취사를 잘못한 점을 지적하고 程朱의 大訓과 敬에 관한 諸說을 모아서 저술한다고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退溪가 <心經後論>에서 지적한 면을 계승하여, 영남사림의 주자성리학적 학풍 속에서 <心經發揮>를 저술하였다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
대체적으로 주리론을 지지하는 영남학파의 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세계 완성을 위한 '窮理居敬'에만 주된 관심을 가질 뿐 이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저술과 편찬 사업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런 가운데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진력하면서도 저술 사업에 적극적인 노력을 보인 이는 退溪 이후에는 寒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知行一致를 위한 노력의 결과 그가 저술한 성리서들은 후대에까지 주요한 사상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寒岡이 저술한 성리학에 대한 서적을 살펴보면 31세에 退溪의 <朱子書節要>를 분류하여 <改定朱子書節要目錄>을 편찬하였다. 56세에 <中和集說>, 59세에 <聖賢風範>, 61세에 <心經發揮>, 62세에 <濂洛羹墻錄>, <洙泗言仁錄>, <臥龍庵志>, <谷山洞庵志> 등을 편찬하였다. 이 중 <心經發揮>는 明代 程敏政의 <心經附註>에서 취사를 잘못한 점을 지적하고 程朱의 大訓과 敬에 관한 諸說을 모아서 저술한다고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退溪가 <心經後論>에서 지적한 면을 계승하여, 영남사림의 주자성리학적 학풍 속에서 <心經發揮>를 저술하였다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
(2) 應用救時
'應用救時'의 정신이란 다름 아닌 '窮理居敬'의 현실적인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寒岡의 학문 정신이 실현되는 양상은 학문의 현실적인 실천을 중시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생동안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저술 활동을 한 측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寒岡이 실질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일상 생활에서 실용적인 분야에 얼마나 전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우선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寒岡이 실질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일상 생활에서 실용적인 분야에 얼마나 전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선생은 자품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영오함도 우뚝하였다. 학문에 뜻을 둔 이래로 부지런히 힘쓰고 각고하여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행실은 힘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은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예능은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문과 지리와 의방에 이르러서도 모두 강습하여 통달하였으며 관혼의 의례와 상제의 제도에도 정밀하게 연구하고 강습하여 밝았다. 천지간의 도리를 우리 선비들이 사업으로 여기지 않으면 누가 다시 담당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寒岡은 적어도 학문에 뜻을 둔 이래, 독서와 행실과 일과 예능의 각 방면에 두루 섭렵하는 굉박한 범위에 치력한 결과 天文, 地理, 醫方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였다. 특히 관혼상제의 제도에 대해서는 더욱 정밀하게 강습하였는데 천지간의 모든 도리를 유학자의 사업으로 간주하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분야는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특히 寒岡이 '敬義'를 행동의 지표로 삼아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南冥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인 의지는 산천의 경치를 보고서도 그 이름과 의미를 결합하여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난다. 자신이 오랫동안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했던 星州를 중심으로 '武屹九曲'이란 이름을 명명한 의도도 여기에서 발현한 것이다.
寒岡이 일생동안 익힌 학문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위와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는데, 여기에서 寒岡 학문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당시에 혼란한 양상으로 치닫던 현실 생활의 각종 예절이 일정한 기준조차없이 마구잡이로 시행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인륜의 근원적인 질서라 할 수 있는 禮를 확립하여 풍속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소산물로 寒岡은 禮書를 저술하여 조선중기 예학의 구심점이 됨은 물론 자신은 沙溪와 더불어 당시 禮說의 권위자로 인정되어 조정의 問禮에 답변할 정도까지 된 것이다.
특히 寒岡이 '敬義'를 행동의 지표로 삼아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南冥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인 의지는 산천의 경치를 보고서도 그 이름과 의미를 결합하여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난다. 자신이 오랫동안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했던 星州를 중심으로 '武屹九曲'이란 이름을 명명한 의도도 여기에서 발현한 것이다.
寒岡이 일생동안 익힌 학문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위와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는데, 여기에서 寒岡 학문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당시에 혼란한 양상으로 치닫던 현실 생활의 각종 예절이 일정한 기준조차없이 마구잡이로 시행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인륜의 근원적인 질서라 할 수 있는 禮를 확립하여 풍속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소산물로 寒岡은 禮書를 저술하여 조선중기 예학의 구심점이 됨은 물론 자신은 沙溪와 더불어 당시 禮說의 권위자로 인정되어 조정의 問禮에 답변할 정도까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편벽된 곳에 치우쳐 있어서 의지할 만한 예법이 없었다. 비록 명현과 석사가 우뚝하게 일어나 탐구하고 토론하였지만 유풍과 습속이 옮기게 됨을 면치 못하여 마침내 임시 제도로써 단정하여 일정하게 귀속할 수 없었다. 선생이 이러한 폐단을 깊이 연구하여 (중략) 또한 모두 모으고 증명하였는데 의례를 근본으로 삼고 시제를 참고하여 관혼상례에 각각 의절을 편찬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에 행할 수 있으면서도 옛날과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영남이 비록 문헌의 고장이라 일컬어지지만 을사년에 꺾이고 저지된 나머지 사람들이 방광함을 좋아하고 명교를 천하게 여겼다. 비록 사대부의 집안이라도 관혼상제에 속례를 사용하여 불교와 섞었다. 선생이 나옴으로부터 선비들이 서로 타투어 탁마하여 더욱 본받게 되었다.
한편으로 寒岡은 목민관으로 재임할 동안 각 지방의 沿革, 地利, 物産, 人物, 風俗 등을 기록한 邑誌를 남겨 그 지방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寒岡은 30대 후반부터 여러 지방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때마다 그곳의 사림들과 힘을 모아 읍지를 편찬하였다. 첫 임지인 창녕에서 38세 때 <昌山志>를 만들고 이어 <同福志>(42세), <咸州志>(45세), <通川志>(50세), <臨瀛志>(52세), <關東志>(54세), <福州志>(65세) 등을 편찬하였다. 그는 成川都護府使(55세)를 지낸 成川을 제외하고는 지방관 재임지에서는 반드시 읍지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永嘉志>, <春州志>, <平壤志>, <忠州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寒岡이 읍지를 편찬하게 된 배경은 南冥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2보인다. 그리하여 寒岡이 읍지를 적극적으로 편찬한 의도 역시 그의 응용구시적인 정신의 발현인 것이다. 그의 읍지 편찬은 이후 영남의 읍지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一善志>를 편찬한 崔晛과 <陟州志>를 편찬한 許穆 등의 학자들에게 그 맥락이 계승되었다.
또한 寒岡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 歷史書와 人物誌 등을 저술하여 후인들에게 훈계와 교화를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 방면에서 편찬한 책으로는 <古今忠謨>(56세), <成川守臣題名案>(57세), <景賢續錄>(62세), <治亂提要>(64세), <古今人物志>(65세), <儒先續錄>(65세), <歷代紀年>(73세), <一 先生實記>(75세), <經世紀年>, <古今名宦錄> 등이 있는데, <歷代紀年>과 <經世紀年>은 역사서이고 나머지는 인물지로 추정된다.
현재 전하는 것은 <歷代紀年> 뿐이지만 서문 등을 통해 볼 때 그가 이러한 역사와 인물에 대한 저술 의도 역시 實事求是的인 학문 정신의 표출임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역사서와 인물지 안에 각 인물의 행동의 득실을 기록함으로써, 이후의 목민관들에게 거울로 삼게 하려는 실질적인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寒岡은 기본적으로 인물 중심의 역사관을 지니는데 이러한 역사 의식은 應用救時的인 학문 정신의 발현으로 간주된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인물들의 사정과 득실을 논함으로써,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생활 태도를 지니게 하고 위정자들에게는 경계의 지표를 삼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읍지를 편찬하여 위정자를 경계함은 물론 풍속을 순화하고 백성을 교화하려는 취지와도 상통한다. 그리고 의학을 실생활에 요긴한 것으로 간주하여 <醫眼集方>, <曠嗣續集>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그 외에 지리와 천문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寒岡은 몸소 체득한 '窮理居敬'한 학문의 요체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천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의 실현을 시도하여 일정한 결실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應用救時'적인 정신이 제자인 眉 에게 전수되어 近畿實學派의 학문형성에 연원으로 작용한 측면은 바로 寒岡 학문의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후대 星湖, 茶山 등을 중심으로 經世致用學派라는 실학파가 등장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寒岡은 30대 후반부터 여러 지방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때마다 그곳의 사림들과 힘을 모아 읍지를 편찬하였다. 첫 임지인 창녕에서 38세 때 <昌山志>를 만들고 이어 <同福志>(42세), <咸州志>(45세), <通川志>(50세), <臨瀛志>(52세), <關東志>(54세), <福州志>(65세) 등을 편찬하였다. 그는 成川都護府使(55세)를 지낸 成川을 제외하고는 지방관 재임지에서는 반드시 읍지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永嘉志>, <春州志>, <平壤志>, <忠州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寒岡이 읍지를 편찬하게 된 배경은 南冥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2보인다. 그리하여 寒岡이 읍지를 적극적으로 편찬한 의도 역시 그의 응용구시적인 정신의 발현인 것이다. 그의 읍지 편찬은 이후 영남의 읍지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一善志>를 편찬한 崔晛과 <陟州志>를 편찬한 許穆 등의 학자들에게 그 맥락이 계승되었다.
또한 寒岡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 歷史書와 人物誌 등을 저술하여 후인들에게 훈계와 교화를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 방면에서 편찬한 책으로는 <古今忠謨>(56세), <成川守臣題名案>(57세), <景賢續錄>(62세), <治亂提要>(64세), <古今人物志>(65세), <儒先續錄>(65세), <歷代紀年>(73세), <一 先生實記>(75세), <經世紀年>, <古今名宦錄> 등이 있는데, <歷代紀年>과 <經世紀年>은 역사서이고 나머지는 인물지로 추정된다.
현재 전하는 것은 <歷代紀年> 뿐이지만 서문 등을 통해 볼 때 그가 이러한 역사와 인물에 대한 저술 의도 역시 實事求是的인 학문 정신의 표출임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역사서와 인물지 안에 각 인물의 행동의 득실을 기록함으로써, 이후의 목민관들에게 거울로 삼게 하려는 실질적인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寒岡은 기본적으로 인물 중심의 역사관을 지니는데 이러한 역사 의식은 應用救時的인 학문 정신의 발현으로 간주된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인물들의 사정과 득실을 논함으로써,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생활 태도를 지니게 하고 위정자들에게는 경계의 지표를 삼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읍지를 편찬하여 위정자를 경계함은 물론 풍속을 순화하고 백성을 교화하려는 취지와도 상통한다. 그리고 의학을 실생활에 요긴한 것으로 간주하여 <醫眼集方>, <曠嗣續集>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그 외에 지리와 천문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寒岡은 몸소 체득한 '窮理居敬'한 학문의 요체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천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의 실현을 시도하여 일정한 결실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應用救時'적인 정신이 제자인 眉 에게 전수되어 近畿實學派의 학문형성에 연원으로 작용한 측면은 바로 寒岡 학문의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후대 星湖, 茶山 등을 중심으로 經世致用學派라는 실학파가 등장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3. 山行目的과 作者意識
'遊伽倻山錄'에는 산행하면서 실제로 경험한 사실과 소감 등이 때로는 소략하게 때로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주요한 내용은, 산행 동기와 목적,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비롯하여, 수기와 처신의 중요성, 선현들의 행적에 대한 회상과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 경물을 보고 느낀 소감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날짜별로 순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러한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한강의 의식세계를 투시해 볼 수 있다.
(1) 山行動機와 登頂日程
무릇 이름난 산수를 유람하거나 등산하는 행위는 일찍부터 있어 왔고 이에 대한 체험이나 감흥을 표현한 작품은 사대부문학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한문학사에서 구체적인 산행 경험을 '遊記' 혹은 '遊錄'이란 題名으로 기록한 경우는 朝鮮朝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朝鮮前期에 저작된 '유록'들은 영남출신 사림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어지는 특징이 있다. 이는 사림들이 명산을 등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심성을 수련함과 동시에 꿋꿋한 기상을 기르려는 유학자들의 전통적인 목적의식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寒岡은 李伯愉, 恭叔 兄弟와 郭存養, 鄭德源, 沈存中, 金志海 등과 함께 산행하면서 수많은 경물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고 보고 느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溪塾에서 출발하여 溪塾으로 돌아오기까지 가야산에서 숙식하며 산행을 하였는데, 때로는 말을 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몸소 구석구석을 밟으면서 체험한 셈이다. 우선 가야산을 등정하게 된 동기와 준비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寒岡은 李伯愉, 恭叔 兄弟와 郭存養, 鄭德源, 沈存中, 金志海 등과 함께 산행하면서 수많은 경물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고 보고 느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溪塾에서 출발하여 溪塾으로 돌아오기까지 가야산에서 숙식하며 산행을 하였는데, 때로는 말을 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몸소 구석구석을 밟으면서 체험한 셈이다. 우선 가야산을 등정하게 된 동기와 준비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萬曆 己卯年 季秋에 나는 李伯愉 恭叔 형제와 더불어 沙村溪塾에 있었는데 郭存養도 와서 서로 모였다.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책을 읽으며 同人의 즐거움을 가진 지가 이미 며칠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倻山이 우리 고을 경계에 있으면서 仙區라는 이름을 차지하는데, 나는 전에 겨우 한번 보았지만 제군들은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欠事가 아니겠는가? 지금 단풍이 정말로 아름답고 구름도 자취를 감추었으니 한번 절정에 올라서 마음껏 바라보며 가슴을 씻는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물며 鄭德遠이 새로 永陽의 벼슬살이에서 돌아왔으니 더욱이 이 친구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제군들이 모두 좋다 하였다. 드디어 장비를 꾸렸는데 쌀 한자루, 술 한병, 반찬 한 그릇, 과일 한 상자였으며, 책은 <近思錄> 한 책과 <南嶽唱酬> 뿐이었다. 沈存中의 遊山하는 장비를 살피니 더욱 간략하였다. 이때가 이달 초열흘이었다.
늦가을에 沙村溪塾에서 동지들과 담화하고 독서하면서 며칠동안 '同人之樂'을 즐기다가 문득 고장의 仙區라 일컬어지는 伽倻山을 오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 간략하게 장비를 꾸려서 등정하게 되었다. 등정하는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자신이 거주하는 고장의 명산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으므로 정상에 올라가서 마음속에 쌓인 띠끌을 씻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다른 하나는 知友인 鄭德源이 멀리 英陽府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방금 돌아왔으니 그 친구를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결국 한강 일행이 가야산에 오르게 된 것은 단풍놀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심성을 순화하고 동지를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性理學의 대표적인 心性書인 <近思錄>과 朱子의 저술인 <南嶽唱酬集> 등을 소지하고, 산행 도중에 이들을 읽은 점으로 보아 이번 등정의 주요 목적이 산행을 통한 심성수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가야산의 우뚝한 모습을 보고 군자의 기상을 기르고 자연경물을 마음껏 완상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정상에 오른후 내려오는 길에 同行人들과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性理學의 대표적인 心性書인 <近思錄>과 朱子의 저술인 <南嶽唱酬集> 등을 소지하고, 산행 도중에 이들을 읽은 점으로 보아 이번 등정의 주요 목적이 산행을 통한 심성수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가야산의 우뚝한 모습을 보고 군자의 기상을 기르고 자연경물을 마음껏 완상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정상에 오른후 내려오는 길에 同行人들과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녁 무렵 蘇利菴으로 내려오는데 구불구불한 바위길이라 매우 힘들고 지쳤으니, 오르는 어려움보다 九分만큼도 줄지 않음을 보았다. 진실로 曺先生이 가르친, '從善如登 從惡如崩'이란 것이 오늘의 표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상봉에서부터 백운대를 지나 해인사로 돌아오려 하였다. 내가 제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왕래가 어찌 다만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과 같겠는가? 걸음마다 耽賞하면서 景物에게 맡길 것이로다. 오늘 등산에서 얻은 것이 이미 넉넉하니 어찌 또한 조용히 몸에 알맞게 하여 神氣를 기르고 난 뒤에 천천히 가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하산하는 길에 대한 논의를 하는 가운데 이번 산행의 목적이 드러나 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상봉에서 곧바로 백운대를 거쳐 해인사로 돌아오는 길이 가장 빠른 하산로이다. 그렇지만 이번 산행이 등정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경물을 완상하는 가운데 신기를 기르는데 있으므로 굳이 지름길을 택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내려오는 길에 봉천대를 다시 거쳐 거기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한밤중에 산사에서 울려오는 맑은 종소리를 듣고 저절로 깊은 성찰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한강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고장의 명산인 가야산을 등정하는 가운데 심성을 수양하고 꿋꿋한 기상을 기르려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己卯年(1579) 季秋인 음력 9월 10일에 沙村溪塾에서 계획하고 준비를 완료하여 이튿날인 11일에 출발하여 24일에 돌아오는 15일간의 일정이었다. 그리고 보름간의 산행을 마치고 이를 날짜별로 순차적으로 기록하여 일기 형식의 '遊伽倻山錄'을 저술한 것이다.
한강 일행이 가야산을 등정한 날짜와 장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산하는 길에 대한 논의를 하는 가운데 이번 산행의 목적이 드러나 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상봉에서 곧바로 백운대를 거쳐 해인사로 돌아오는 길이 가장 빠른 하산로이다. 그렇지만 이번 산행이 등정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경물을 완상하는 가운데 신기를 기르는데 있으므로 굳이 지름길을 택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내려오는 길에 봉천대를 다시 거쳐 거기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한밤중에 산사에서 울려오는 맑은 종소리를 듣고 저절로 깊은 성찰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한강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고장의 명산인 가야산을 등정하는 가운데 심성을 수양하고 꿋꿋한 기상을 기르려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己卯年(1579) 季秋인 음력 9월 10일에 沙村溪塾에서 계획하고 준비를 완료하여 이튿날인 11일에 출발하여 24일에 돌아오는 15일간의 일정이었다. 그리고 보름간의 산행을 마치고 이를 날짜별로 순차적으로 기록하여 일기 형식의 '遊伽倻山錄'을 저술한 것이다.
한강 일행이 가야산을 등정한 날짜와 장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일:沙村溪塾(계획완료)
11일:(출발)-狐嶺-松楸-寒岡-後岡
12일:後岡-先壟-架峴-深源-紅流洞-紅霞門-學士臺-海印寺
13일:學士臺-海印殿宇-內院寺-得劍池-內院寺
14일:內院寺-淨覺菴-成佛菴-圓明寺-上蘇利(奉天臺)-第一峯
15일:奉天臺-望見學士臺-兩石峯-中蘇利臺-圓明菴
16일:淨覺-得劍池-學士臺-海印寺-知足菴
17일:知足菴
18일:霽月潭-深源(迷失道)-道恩寺
19일:小臺-白雲臺-李善述溪亭
20일:先壟-虎坪-飯齋菴-軟石巖-舟巖-步川-立巖-叩盤谷
21일:舍人巖(捨身巖)-甑山-谷口-防谷-荒田-舍人巖-叩盤小屋
22일(自朝雨終日不止 靜坐淸談)
23일:立巖-岡舍-後川-赫臨齋
24일:景淸家-宋丈家-景淸家-溪塾(도착)
11일:(출발)-狐嶺-松楸-寒岡-後岡
12일:後岡-先壟-架峴-深源-紅流洞-紅霞門-學士臺-海印寺
13일:學士臺-海印殿宇-內院寺-得劍池-內院寺
14일:內院寺-淨覺菴-成佛菴-圓明寺-上蘇利(奉天臺)-第一峯
15일:奉天臺-望見學士臺-兩石峯-中蘇利臺-圓明菴
16일:淨覺-得劍池-學士臺-海印寺-知足菴
17일:知足菴
18일:霽月潭-深源(迷失道)-道恩寺
19일:小臺-白雲臺-李善述溪亭
20일:先壟-虎坪-飯齋菴-軟石巖-舟巖-步川-立巖-叩盤谷
21일:舍人巖(捨身巖)-甑山-谷口-防谷-荒田-舍人巖-叩盤小屋
22일(自朝雨終日不止 靜坐淸談)
23일:立巖-岡舍-後川-赫臨齋
24일:景淸家-宋丈家-景淸家-溪塾(도착)
위에서 보듯이 한강은 溪塾에서 출발하여 돌아오기까지 보름동안 가야산 일대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이름있는 곳은 빠뜨리지 않고 답사하였다. 종일 비가 내린 22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피곤한 몸을 잊은채 여행하였는데, 직접 답사한 후 기록한 지명이 약50여 곳이다. 그 중 가야산에 가는 도중의 기록인 11일은 간략하게 서술하였고, 가야산 기슭인 홍류동에 도착한 12일은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그리고 가야산 정상인 제일봉에 오른 14일의 기록은 전체 일정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으로 서술하였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15일과 16일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지족암과 백운대에서 머문 17일, 18일, 19일은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후의 기록들도 모두 있었던 사실이나 느낌을 간략하게 서술하는데 그쳤다.
사실 한강이 가야산을 산행한 후 실제로 체험한 사실을 작품적 소재로 삼아,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한 측면에서는 '遊伽倻山錄'이 기록문학으로서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확인하기보다는 작자가 경험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지를 탐색해야 할 것이며 작자가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까지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사실 한강이 가야산을 산행한 후 실제로 체험한 사실을 작품적 소재로 삼아,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한 측면에서는 '遊伽倻山錄'이 기록문학으로서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확인하기보다는 작자가 경험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지를 탐색해야 할 것이며 작자가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까지도 해명해야 할 것이다.
(2) 修己와 處身의 重要性 認識
유교 경전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大學>의 가르침은 '修己'와 '治人'으로 대별된다. 학자의 최고 목표인 '平天下'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인 동시에 근본인 '修身'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유학자들이 명산을 산행하는 주요한 목적이 바로 산의 기상을 본받아 처신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한강 또한 37세의 나이에 가야산을 등정하면서 봉우리마다 펼쳐지는 장관 앞에서 處身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14일 伽倻山의 절정인 第一峯에 오르기 바로 전에 奉天臺에 올라서 확 트인 경관을 보니 눈아래에 늘어선 만학천봉이 모두 개미집과 같다. 이러한 장관을 보기 전과 보고 난 뒤의 기상은 각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끝없이 높게 펼쳐지는 위대한 자연경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내면적인 지위도 이처럼 계속적인 연마와 수련을 통해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위가 훨씬 맑고 높으며 안목이 더욱 쾌활하였는데 萬壑千峯이 늘어선 것이 북돋운 개미집과 같았고 인간 세계는 아득하여 개미들이 모인 것 같았다. 곳곳의 촌락을 낱낱이 가리킬 수 있었는데 玉山과 松川이 빽빽하여 마치 한 아름으로 움킬 것 같았다. 그 안을 幅巾으로 에워싼 것처럼 생각하면서 본 것을 스스로 지키고 얻은 것을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우리가 오늘 큰 관람을 함으로부터 그 기상이 어떠할까? 애석하도다. 우리에게 손이 있어도 서로 잡고 와서 함께 이것을 보지 못했도다. 志海는 비록 부지런히 초청했으나 서로 믿고 여기에 이르지 못했으니 각각 분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친구들의 힘이 억지로 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실로 인을 이룩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남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겠는가? 오늘 여러분은 각각 서로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말아라. 뒷날 안목의 관대함이 오늘의 奉天臺가 아닐 것이다. 養靜이 말하기를, "여기의 지위가 진실로 높지만 그렇지만 다시 上峯이 있으니 어찌 이른바 '慮'字의 지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서로 여기에 그칠 수 없음을 경계한 것이다.
14일 伽倻山의 절정인 第一峯에 오르기 바로 전에 奉天臺에 올라서 확 트인 경관을 보니 눈아래에 늘어선 만학천봉이 모두 개미집과 같다. 이러한 장관을 보기 전과 보고 난 뒤의 기상은 각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끝없이 높게 펼쳐지는 위대한 자연경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내면적인 지위도 이처럼 계속적인 연마와 수련을 통해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위가 훨씬 맑고 높으며 안목이 더욱 쾌활하였는데 萬壑千峯이 늘어선 것이 북돋운 개미집과 같았고 인간 세계는 아득하여 개미들이 모인 것 같았다. 곳곳의 촌락을 낱낱이 가리킬 수 있었는데 玉山과 松川이 빽빽하여 마치 한 아름으로 움킬 것 같았다. 그 안을 幅巾으로 에워싼 것처럼 생각하면서 본 것을 스스로 지키고 얻은 것을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우리가 오늘 큰 관람을 함으로부터 그 기상이 어떠할까? 애석하도다. 우리에게 손이 있어도 서로 잡고 와서 함께 이것을 보지 못했도다. 志海는 비록 부지런히 초청했으나 서로 믿고 여기에 이르지 못했으니 각각 분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친구들의 힘이 억지로 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실로 인을 이룩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남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겠는가? 오늘 여러분은 각각 서로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말아라. 뒷날 안목의 관대함이 오늘의 奉天臺가 아닐 것이다. 養靜이 말하기를, "여기의 지위가 진실로 높지만 그렇지만 다시 上峯이 있으니 어찌 이른바 '慮'字의 지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서로 여기에 그칠 수 없음을 경계한 것이다.
寒岡 일행이 정상에 오르기 직전 一望無際格인 봉천대에 오른 감회를 적은 것이다. 일정한 세계를 경험한 후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세상을 보는 안목에 차이가 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孔子는 "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라고 하였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 거대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넓은 세상을 바라볼 안목이 생긴 것으로 자부하는 가운데 修己의 중요성을 떠올린 것이다. 사람에게는 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달라짐을 깨달은 것이다. "인을 이룩함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남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겠는가?"라는 구절을 연상하면서,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취의 차이가 결정됨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奉天臺가 높다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더높은 上峯이 존재함을 상기하면서, 修身의 境域에는 끝이 없음을 알고 현재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아야 함을 경계하였다.
일반적으로 산행할 때 등산시에는 정상을 바라보는 희망이 있기에 힘이 들어도 오를수록 새로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반면 하산할 때는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생겨 심회가 답답해질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세상살이를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지위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갈 때는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만 그와는 상반될 경우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성찰이 절실한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부분은 정상에 오른 직후인 15일과 16일의 기록에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산행할 때 등산시에는 정상을 바라보는 희망이 있기에 힘이 들어도 오를수록 새로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반면 하산할 때는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생겨 심회가 답답해질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세상살이를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지위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갈 때는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만 그와는 상반될 경우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성찰이 절실한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부분은 정상에 오른 직후인 15일과 16일의 기록에 나타난다.
(가) 內院菴에서 처음 오를 때 峯巒이 둘러 합하고 景物이 그윽히 아름다웠는데 오를수록 더욱 기이하여 새로운 생각이 층층이 생겼다. 奉天臺에서 내려올 때 더욱 얕고 좁음을 깨달아 가슴속이 局促하여 마치 喬木에서 그윽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듯하여 眷戀히 돌아보며 자못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處身이 신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所見이 조금도 낮을 수 없는 것이다. 구름 그림자가 조금 높고 달빛이 빛을 감추니 이미 奉天臺를 보지 못할 듯했기 때문에 心懷가 怏怏하여 차라리 보지 않은 것보다 더욱 한스러웠다.
(나) 일찍 일어나 앉아서 어제 奉天臺에서 내려온 것을 조용히 생각하니 처하는 곳이 점점 낮아짐에 속이 상하여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였다. 이 또한 存養이 익숙하지 못하여 만나는 곳마다 편안하게 여길 수 없는 잘못이다. 안정된 힘이 굳지 못하면서 문득 움직이려 함이 진실로 부끄럽다. 또한 요즈음 산행에 操存하고 密察하는 功業이 혹 빠짐이 많기 때문이리라. 이에 다시 절실하게 照管하여 더욱 힘 쓸 것을 생각하였다.
(가)는 산을 오를 때와 내려올 때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다. 사실 산이란, 그 존재 자체는 객관적 사물로서 변함이 없는데,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처음 오를 때는 산봉우리가 둘러 싸여 경물이 아름답게 보일뿐더러 오를수록 기이하게 새롭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내려올 때는 골짜기가 얕고 좁아서 가슴이 답답하여 마음을 안정할 수 없었다. 더욱이 구름이 달빛을 가려 奉天臺를 보지 못할 듯하니 심회가 불만스러워 차라리 보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일정하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이렇게 경물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고 보면 心志를 기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처한 위상에 따라 다르게 생각되므로 처신의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봉천대에서 내려온 이튿날의 기록이다. 처하는 위치에 따라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존양이 굳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안정되지도 못한 채 움직이려 하는 어리석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즉 '修己'도 안된 자신이 '治人'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듬해 38세인 寒岡은 東岡 金宇 의 추천으로 昌寧縣監이 되어 관직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아마도 가야산에 오를 무렵에는 수학하던 학문에 내심 어느 정도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졌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던 중 사물의 변화에 따라 주체력을 상실하는 心力의 축적이 부족함을 발견하고는, 心學에 대한 操存하고 密察하는 功業에 정진하기를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14일 한강 일행은 가야산의 정상인 제일봉에 올라서 조물주의 조화에 감탄하는 한편 산을 좋아하는 군자의 기상과 회포를 떠올린다. 멀리 사방의 명산을 바라보며 그 산아래에서 배출된 역사적인 인물을 회상하면서 한강 자신도 가야산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를 은근히 희망한다.
(나)는 봉천대에서 내려온 이튿날의 기록이다. 처하는 위치에 따라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존양이 굳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안정되지도 못한 채 움직이려 하는 어리석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즉 '修己'도 안된 자신이 '治人'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듬해 38세인 寒岡은 東岡 金宇 의 추천으로 昌寧縣監이 되어 관직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아마도 가야산에 오를 무렵에는 수학하던 학문에 내심 어느 정도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졌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던 중 사물의 변화에 따라 주체력을 상실하는 心力의 축적이 부족함을 발견하고는, 心學에 대한 操存하고 密察하는 功業에 정진하기를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14일 한강 일행은 가야산의 정상인 제일봉에 올라서 조물주의 조화에 감탄하는 한편 산을 좋아하는 군자의 기상과 회포를 떠올린다. 멀리 사방의 명산을 바라보며 그 산아래에서 배출된 역사적인 인물을 회상하면서 한강 자신도 가야산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를 은근히 희망한다.
스님이 말하기를, "아득한 한 줄기 남쪽하늘에 빠진 것을 메우는 것이 智異山입니다."하였다. 鄭先生은 어린 나이에 깃들어 살면서 덕을 쌓았고 曺先生은 만년에 은둔하면서 高節을 길렀다. 南方을 누르면서 제일의 명산이 되고 다시 兩賢에게 이름을 의탁했으니, 장차 천지와 더불어 함께 전해질 것이므로 또한 이 산에게 큰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蒼茫한 가운데 사람이 있는 듯하지만 보이지 않으면서 북쪽 모퉁이에서 머리카락을 조금 드러내는 것은 金烏山이다. 高麗 5백년 綱常을 의탁하는 곳이 단지 이 山中에 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바로 首陽山과 더불어 萬世의 뒤에 高尙함을 견줄 곳을 오늘에 보니 또한 우연이 아니다. 琵瑟山 아래에 雙溪가 있고 公山의 아래에 臨皐가 있으니 옛날 현인들의 훌륭한 향기를 후인들이 矜式하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었겠는가? 바로 타고난 천성은 높은 산을 바라보는 데에서는 막히기 어렵기 때문에, 이 산에 올라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이것을 생각하면서 계속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야산 정상에 올라 사방의 명산을 바라보고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회상에 잠긴다. 특히 한강이 존경하는 현인들이 모두 산에 의탁하여 산과 더불어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니 그 감회는 더욱 새로웠던 것이다. 남쪽 하늘가에 위치한 地異山에서는 一 鄭汝昌先生이 어린 시절 덕을 쌓았고, 南冥 曺植先生이 만년에 은둔하면서 절의를 길렀다. 남방에서 제일가는 명산에서 고절을 지킨 두 선생이 배출된 것은 오히려 이 산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분들로 인해 지리산의 명성은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쪽 모퉁이에 보일락말락 하는 것이 金烏山이다. 고려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 冶隱 吉再先生이 서식한 곳이다. 중국의 首陽山과 더불어 만세토록 高尙함을 견줄 곳이 바로 금오산인데 이는 冶隱先生이 있기 때문이다. 그외 琵瑟山 아래의 雙溪와 公山 아래의 臨皐 또한 절의를 지킨 현인들이 배출된 곳이다. 특히 臨皐書院에는 圃隱 鄭夢周先生이 배향되어 그 충절을 아직까지 기리고 있다.
이처럼 名山과 賢人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타고난 천성을 보존하기에는 높은 산을 바라보며 기상을 기르는 것이 좋다. 우뚝한 산과 높은 기상이 상호간에 상승작용을 일으켜 역사적인 인물이 배출되는 것이다. 寒岡이 伽倻山을 등정하는 주된 목적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내심 가야산과 함께 후세에 이름을 남기리라 자부하면서 명산의 기상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기상은 한강이 산처럼 꿋꿋한 기상을 지니며 일생동안 '出'보다는 '處'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학문과 저술에 침잠하는 동기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한강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욕을 버리고 자연의 원리를 체득하는 심성수양의 공간으로 제공되기도 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지표로 삼을 처세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인 결합의 결과물로서 역사적인 현인이 배출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인간을 버리고 자연에만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터득한 이치를 현실에 적용하여 儒者로서 순수한 입장에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산수를 기행하면서도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서 우리는 한강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3)現實問題의 批判的 理解
이처럼 名山과 賢人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타고난 천성을 보존하기에는 높은 산을 바라보며 기상을 기르는 것이 좋다. 우뚝한 산과 높은 기상이 상호간에 상승작용을 일으켜 역사적인 인물이 배출되는 것이다. 寒岡이 伽倻山을 등정하는 주된 목적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내심 가야산과 함께 후세에 이름을 남기리라 자부하면서 명산의 기상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기상은 한강이 산처럼 꿋꿋한 기상을 지니며 일생동안 '出'보다는 '處'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학문과 저술에 침잠하는 동기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한강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욕을 버리고 자연의 원리를 체득하는 심성수양의 공간으로 제공되기도 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지표로 삼을 처세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인 결합의 결과물로서 역사적인 현인이 배출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인간을 버리고 자연에만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터득한 이치를 현실에 적용하여 儒者로서 순수한 입장에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산수를 기행하면서도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서 우리는 한강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3)現實問題의 批判的 理解
寒岡이 儒者로서의 의식과 안목을 일찍부터 소유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꼿꼿한 심성과 의지를 대변해 주는 것으로, 15세에 지은 '醉生夢死嘆'이란 시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소년 한강에게 비쳐진 斯世의 現況은 그의 심정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天賦의 至善한 良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혼탁한 세상살이에 시달린 나머지 거기에 흡수되어 아득한 꿈속을 헤매다가 늙어만 간다. 良心과 正心이 再起不能일 만큼 私와 邪가 득세하는 현실이지만, 양심회복의 가능성을 '貞'에 두고 自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리라 다짐한다. 현실에 대한 憂患의 표출은 昏迷한 斯世를 匡正하겠다는 강한 의식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斯道失墜의 현상은 師弟間이나 君臣間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立雪賦'에서는 무도한 세상에서 사제간의 도리가 망실되었음을 통탄하였고, '歎時'에서는 관리들이 주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꼬집었다. 관리의 타락은 국가의 기강이나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忠信과 愛民意識을 지닌 臣者가 절실한 상황이다. 한강은 혼자서는 堪耐하기 어려운 旣成社會의 모순에 대한 대응책으로 '隱'을 통한 養志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한 삶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면서 미래지향적인 것이기에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의식이 가야산을 유람하는 가운데 도처에서 발견된다. 13일에는 海印寺의 경내를 두루 관람하였다. 사찰을 여러 번 중수하여 웅장하고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 것을 보고, 웅장한 경관에 매료되기보다는 이렇게 만들기까지 백성들의 공력이 얼마나 소비되었을까를 먼저 떠올린다.
이러한 斯道失墜의 현상은 師弟間이나 君臣間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立雪賦'에서는 무도한 세상에서 사제간의 도리가 망실되었음을 통탄하였고, '歎時'에서는 관리들이 주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꼬집었다. 관리의 타락은 국가의 기강이나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忠信과 愛民意識을 지닌 臣者가 절실한 상황이다. 한강은 혼자서는 堪耐하기 어려운 旣成社會의 모순에 대한 대응책으로 '隱'을 통한 養志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한 삶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면서 미래지향적인 것이기에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의식이 가야산을 유람하는 가운데 도처에서 발견된다. 13일에는 海印寺의 경내를 두루 관람하였다. 사찰을 여러 번 중수하여 웅장하고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 것을 보고, 웅장한 경관에 매료되기보다는 이렇게 만들기까지 백성들의 공력이 얼마나 소비되었을까를 먼저 떠올린다.
일찍 일어나서 近思錄 몇 판과 南嶽唱酬序文을 보는데, 金博士가 또 보기를 청하여 잠시 學士臺에서 서로 만나고 인하여 殿宇의 뜰 사이에서 배회하였다. 이 절은 신라 哀莊王 때 창건하였는데 여러 번 중수를 거쳐서 웅장하고 화려하며 몹시 아름다우니 백성들의 힘이 또한 여기에 많이 소비되었다.
해인사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사찰임은 감탄할만한 일이지만 이렇게 중수하기까지 백성들의 수고로움은 엄청났을 것이다. 신라시대 창건 당시부터 여러 차례의 중수를 겪었을 것이므로 백성들의 생활상과 비추어보면 단순히 감탄만 할 일은 아니다. 화려한 사찰의 위용에 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녹아있는 공력의 수고로움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는 한강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눈에 비친 당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은 아래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14일 成佛菴에 도착하였는데 마루와 방에는 먼지만 가득하고 스님은 거처하지 않았다. 산속에 있는 절에까지 부역을 부과하여 스님들이 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게는 오죽하였겠는가? 부역과 조세에 시달리는 곤궁한 백성들의 삶은 알 만한 것이다.
14일 成佛菴에 도착하였는데 마루와 방에는 먼지만 가득하고 스님은 거처하지 않았다. 산속에 있는 절에까지 부역을 부과하여 스님들이 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게는 오죽하였겠는가? 부역과 조세에 시달리는 곤궁한 백성들의 삶은 알 만한 것이다.
1리쯤 가서 成佛菴에 도착하니 伯愉가 먼저 앞 대를 오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암자 안으로 들어가니 거처가 淨覺菴과 같고 아주 오래 되지는 않았는데 스님은 없었다. 마루와 방에는 먼지가 가득하여 잠시도 머무를 수 없었는데 어제 深源에서도 스님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 또 여기를 보니 어찌 年歲가 부족해서가 아니겠는가? 賦役의 번거로움에는 산속 스님들도 견디지 못하게 하여 곳곳마다 그 거처를 텅비게 하였구다. 산속 스님들이 이와 같으니 시골 백성들은 알 만하도다. 궁벽한 시골 곳곳마다 집은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는 곳이 얼마인지 모를 지경이다.
어제 深源에서도 암자에 거처하는 스님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 成佛菴 역시 빈 절이다. 절에 스님이 없는 것은 찾아오는 신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깊은 산속에까지 무거운 부역을 부과하므로 스님이 견디지 못해서 거처를 비운 것이다. 산속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일반 시골의 모습은 더욱 심할 것이다. 궁벽한 시골에는 집만 있고 사는 사람이 없는 곳이 얼마인지도 모를 지경이라고 하였다. 산중의 빈 절을 보는 순간 시골의 빈 집을 떠올리는 그의 태도에서도 현실인식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寒岡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遊伽倻山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典籍의 편찬이나 官職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당시에 각종 예절이 일정한 기준조차 없이 혼란하게 시행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禮를 확립하여 풍속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소산물로 禮書를 편찬하여 禮學의 구심점이 됨은 물론 조정의 問禮에 답변할 정도로 禮說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가야산을 등정한 이듬해인 38세에 昌寧縣監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관직에 나아가지만 京職보다는 外職을 주로 하였다. 이는 궁핍한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현실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함은 물론이다. 한편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각 지방의 邑誌를 편찬하였는데, 이 또한 治民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각 고을에 부임해 보니 고을을 알 수 있는 문헌자료가 없어서 治者로서 어렵고 유감스러운 마음에서 집필하게 되었다고 편 찬동기를 밝히고 있다.
寒岡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遊伽倻山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典籍의 편찬이나 官職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당시에 각종 예절이 일정한 기준조차 없이 혼란하게 시행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禮를 확립하여 풍속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소산물로 禮書를 편찬하여 禮學의 구심점이 됨은 물론 조정의 問禮에 답변할 정도로 禮說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가야산을 등정한 이듬해인 38세에 昌寧縣監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관직에 나아가지만 京職보다는 外職을 주로 하였다. 이는 궁핍한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현실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함은 물론이다. 한편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각 지방의 邑誌를 편찬하였는데, 이 또한 治民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각 고을에 부임해 보니 고을을 알 수 있는 문헌자료가 없어서 治者로서 어렵고 유감스러운 마음에서 집필하게 되었다고 편 찬동기를 밝히고 있다.
4. 客觀的 敍述과 寫實的 描寫
이제 '遊伽倻山錄'이 지니는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遊錄이 일어났던 사실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하는데 그친다면 문학작품으로서의 의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가 접한 사물이나 겪은 사실을 기록할 때,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敍述과 描寫를 효과적으로 접목시켜 형상화한다면 작품으로서 의의는 충분할 것이다. 즉 사실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단계를 넘어 문학적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기록문학으로서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1) 事實의 客觀的 敍述
산행 중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객관화시켜 기록한 경우이다. '遊伽倻山錄'에는 이와같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소박하게 기록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야산에 이르러 처음 경관을 완상한 곳이 홍류동 계곡이다. 雲山과 水石이 어우러진 절경을 마음껏 관람하고 점심을 먹은 후 학사대를 향하는 즈음이다. 오전에 홍류동 계곡을 묘사한 화려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게 사물과의 거리를 저만치 둔 채 저녁무렵까지의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조금 후 술 한잔을 먹었는데, 裵童子가 미싯가루를 주길래 또 먹었다. 먼저 배동자를 보내서 절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나와 제군들은 천천히 시냇가를 몇리쯤 걷다가 말을 몰고 紅霞門에 이르렀다. 스님들이 나와서 맞이하는데 信悅이란 스님은 오래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 먼저 향도하게 하여 외물이 비치는 方丈(작은 방)에 들어갔는데 조금후 피리를 불며 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金博士와 李忠義의 일행이라 하며 보고자 하였으나 피곤하여 사양하였다. 저녁에 學士臺에 오르니 밤중이 되었는데 돌자리가 너무 차가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걸어서 뜰로 나오니 달빛이 맑고 깨끗하였다. 술을 가져와 반잔씩 마시고 얼마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산행 중 일상적인 사실을 꾸밈없이 기록하고 있다. 점심 식사후에 있었던 시냇가의 산보와 평소에 아는 스님을 만난 일, 지인들의 방문 등 일련의 사실을 객관화시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는 학사대에 올랐는데 잠자리가 바뀌어 잠이 오지 앉자 술을 약간 마시고 잠을 청한 사실을 서술하였다. 여기에서 한강이 여행 중 실제로 일어났던 행위를 객관적 시각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18일의 기록에서도 실제적 행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거의 7리쯤 걸어가니 비로소 道恩寺가 보였는데, 돌길이 무너져서 걸음을 옮기기가 더욱 어려웠다. 조금 가다가 바로 쉬었는데 피곤과 갈증이 모두 심하였다. 가파른 절벽 아래에 남은 샘물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 곁에 둘러 앉아 막 물을 부어 점심을 먹으려는데, 志海가 아이를 불러 작은 통을 가져오게 하고는 몸소 덮개를 열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으면서 마치 자랑하는 氣色이 있는 듯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일컫기를, 반드시 珍味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우리들의 피로함을 마땅히 풀어주리라고 하면서 각각 주목해서 보았다. 이미 꺼내니 삶은 밤을 가루로 만들어서 꿀과 타서 彈丸처럼 만든 것인데 며칠동안 막혀 있어서 푸르스름한 색이 통에 가득하고 시그러운 냄새가 코를 찔러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산에 들어오던 날 家人에게 특별히 명하여 산중의 특미로 만드려 했겠지만 꺼내보니 얼마되지 않는 사이에 냄새와 빛깔이 모두 변해버렸다.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탄식하며 안타까워 하였고 諸君들 또한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간수하는 방법을 몰랐겠지만 앞서 자랑하던 낯빛이 웃음거리가 되는 처지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深源을 지나 道恩寺를 향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일어난 사소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돌길이 험해서 어렵게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모두 피곤과 갈증이 심한 정도였다. 이때 일행 중 志海가 작은 통을 꺼내서 자랑하듯이 덮개를 열었다. 모두들 그 속에 진미가 있어서 피곤함을 풀어주리라 기대하면서 주목하였지만 결국 냄새와 빛이 상해버렸기 때문에 안타깝게 되었다. 처음 자랑하던 낯빛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志海의 처지를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산중의 특미로 만들기 위해 삶은 밤에다 꿀을 타서 알맹이를 만든 후 며칠 동안 소중하게 보관한 친구의 정성까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켜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景物의 寫實的 描寫
다음 18일의 기록에서도 실제적 행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거의 7리쯤 걸어가니 비로소 道恩寺가 보였는데, 돌길이 무너져서 걸음을 옮기기가 더욱 어려웠다. 조금 가다가 바로 쉬었는데 피곤과 갈증이 모두 심하였다. 가파른 절벽 아래에 남은 샘물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 곁에 둘러 앉아 막 물을 부어 점심을 먹으려는데, 志海가 아이를 불러 작은 통을 가져오게 하고는 몸소 덮개를 열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으면서 마치 자랑하는 氣色이 있는 듯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일컫기를, 반드시 珍味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우리들의 피로함을 마땅히 풀어주리라고 하면서 각각 주목해서 보았다. 이미 꺼내니 삶은 밤을 가루로 만들어서 꿀과 타서 彈丸처럼 만든 것인데 며칠동안 막혀 있어서 푸르스름한 색이 통에 가득하고 시그러운 냄새가 코를 찔러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산에 들어오던 날 家人에게 특별히 명하여 산중의 특미로 만드려 했겠지만 꺼내보니 얼마되지 않는 사이에 냄새와 빛깔이 모두 변해버렸다.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탄식하며 안타까워 하였고 諸君들 또한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간수하는 방법을 몰랐겠지만 앞서 자랑하던 낯빛이 웃음거리가 되는 처지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深源을 지나 道恩寺를 향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일어난 사소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돌길이 험해서 어렵게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모두 피곤과 갈증이 심한 정도였다. 이때 일행 중 志海가 작은 통을 꺼내서 자랑하듯이 덮개를 열었다. 모두들 그 속에 진미가 있어서 피곤함을 풀어주리라 기대하면서 주목하였지만 결국 냄새와 빛이 상해버렸기 때문에 안타깝게 되었다. 처음 자랑하던 낯빛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志海의 처지를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산중의 특미로 만들기 위해 삶은 밤에다 꿀을 타서 알맹이를 만든 후 며칠 동안 소중하게 보관한 친구의 정성까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켜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景物의 寫實的 描寫
寒岡은 伽倻山을 등정하면서 눈에 비친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여 거기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自然玩賞'에 있어서 객관적인 안목으로 핍진하게 서술하였다는 일반성을 가지기도 한다. 경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묘사는 '유가야산록' 뿐 아니라 그의 시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12일 가야산에 이르러서 처음 만나는 계곡인 紅流洞의 물소리와 산봉우리, 온갖 나무와 바위들이 뒤엉킨 절경을 묘사하고 있다.
12일 가야산에 이르러서 처음 만나는 계곡인 紅流洞의 물소리와 산봉우리, 온갖 나무와 바위들이 뒤엉킨 절경을 묘사하고 있다.
물은 어지러운 돌틈을 따라 거세게 흐르는데, 뿜어대는 소리는 우뢰가 내리치는 듯하고, 쏟아지는 모습은 대낮에 비가 날리듯 어지럽게 숲을 씻어낸다. 간혹 머물러서 깊은 소에 쌓이기도 하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산봉우리는 우뚝하게 빼어나고 골짜기는 구불구불하게 깊은데, 소나무와 회나무가 울창하고 바위와 절벽이 으리으리하다. 시내를 따라 오르내리기를 8,9리쯤 하였는데 걸음마다 맑고도 기이하여 깜짝 놀랐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이다.
홍류동 계곡은 일찍이 많은 遊人들이 저마다 자취를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孤雲 崔致源의 시 한수를 읊고 난 직후이다. 벅찬 감정으로 부푼 가슴을 진정하고 눈앞에 다가선 경관을 묘사하고 있다. 골짜기를 거세게 흐르는 물소리는 우뢰가 뿜어대는 듯, 대낮에 비가 흩날리는 듯 어지럽게 숲속을 씻어내고 있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골짜기에는 깊은 소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양편의 가파른 언덕에는 소나무와 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개울을 따라 오르내리는데 걸음마다 기이하여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임이 분명하다. 계곡의 경관을 청각, 시각, 촉각 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도록 형상화하였다.
15일 가야산 제일봉을 오른 후 내려오는 길에 봉천대에 다시 올랐는데 정오를 지나자 구름이 걷히고 화창하게 개인 날씨에 모습을 드러낸 봉천대의 장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15일 가야산 제일봉을 오른 후 내려오는 길에 봉천대에 다시 올랐는데 정오를 지나자 구름이 걷히고 화창하게 개인 날씨에 모습을 드러낸 봉천대의 장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정오를 지나 흰 태양이 하늘에 나타나자 흐르던 노을이 다 걷히고 산악이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밝게 펼쳐지고 빽빽하게 나열되어 눈을 따라 둘러보니 한 눈 아래에 들어왔다. 혹 사람이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 칼을 모은 것 같기도 하고, 혹 붓을 꽂은 것 같기도 하여 여러 봉우리와 여러 골짜기들이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을 다 응접하려면 참으로 겨를이 부족하고 말로는 그 형상을 다 형용할 수도 없었다. 이 저녁 무렵의 봉천대는 다시 그 원광을 마음껏 보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무렵 봉천대에 올라서 구름과 노을에 싸였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가야산의 군봉들을 묘사한 장면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선명하면서도 빽빽하게 늘어선 산의 모습들이다. 각양각색으로 나열되어 있는 자태를 다양한 비유를 끌어와서 묘사하였지만 그래도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벅찬 감정을 누른 채 후일을 기약하면서 사물과의 객관적인 거리를 둔 것이다.
한강이 자연경물을 묘사할 때 주로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표현수법을 사용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21일에 舍人巖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사인암의 경관을 완상하기 위해서였다.
한강이 자연경물을 묘사할 때 주로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표현수법을 사용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21일에 舍人巖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사인암의 경관을 완상하기 위해서였다.
舍人巖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고 舍人巖을 지나며 말에서 내렸는데 모두 水石을 翫賞하기 위해서였다. 淸奇하고 幽絶하여 스스로 사람을 즐겁게 하여 돌아가는 것을 잊게 하였다. 산에는 가파르게 솟은 봉우리와 푸르게 둘러싸인 병풍이 있고, 소나무에는 울창한 무성함과 우뚝솟은 곧음이 있었다. 또한 돌틈에는 삐쩍 마른 것이 있었으며 구렁속에는 거꾸로 걸린 것도 있었다. 단풍 또한 이미 붉은 것과 아직 붉지 않은 것, 이미 시든 것과 아직 시들지 않은 것 등이 있었다. 모두 완상할 만한 것들이었으며 우리의 갈길을 더디게 하는데 도움을 준 것들이었다.
여기에서도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파른 산봉우리와, 울창하고 곧은 소나무, 돌틈이나 구렁 속의 비틀어진 마무, 울긋불긋한 단풍 등의 다양한 자태를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펼치듯이 독자들의 시선을 표현대상인 자연을 향하도록 집중시키고 있다.
5. 맺음말
일기 형식의 기행문인 한강의 '遊伽倻山錄'은 체험한 현실을 기록하려는 욕구에 의해 지어진 작품이다. 이는 경험한 세계를 중시하는 그의 현실주의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강은 金宗直의 '遊頭流錄'에서 비롯된 영남사림들의 유록 창작이라는 문화적 배경 아래 이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曺植의 '遊頭流錄'과 가장 흡사한 체제를 구사하였다.
이상에서 '遊伽倻山錄'의 창작 배경으로 한강의 학문적 기저를 먼저 살폈고, 다음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산행목적, 작자의식 등을 밝혔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서술이라는 기록성과 묘사라는 문학성을 밝혔다. 이상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寒岡은 일생동안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에 몰두하였고 방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敬'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心學의 수련은 현실생활에 긴요해야 할 것이므로 현실 생활을 통한 실천을 무엇보다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문의 요체는 '窮理居敬'과 '應用救時'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면모에서 우리는 한강 학문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학문 태도는 사물이나 자연을 접하는 데에도 객관적인 시각을 마련하였는데, '遊伽倻山錄'도 여기에 근거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산행동기는 늦가을을 맞아 고장의 명산을 유람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실상 산행을 통하여 심성을 수양하고 꿋꿋한 기상을 기르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등정일정은 9월 10일에 溪塾에서 출발하여 24일에 돌아오는 보름간이었다. 보름동안 가야산에서 머무르면서 이름있는 곳은 빠짐없이 답사하였고, 거기에서 겪은 일과 느꼈던 감흥을 '遊伽倻山錄'에 담았다.
셋째, '유가야산록'에 나타난 작자의식은, 수기와 처신의 중요성 인식과 현실문제의 비판적 이해를 들 수 있다. 한강은 산행하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대하면서 수기와 처신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였다. 한편으로 선현들의 행적을 회상하는 가운데 현인과 명산의 긴밀한 관계를 상기하면서 자신도 가야산과 더불어 역사적인 인물이 되려는 포부를 지닌다. 그리고 작자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에서 체득한 이치를 현실적인 인간의 생활에 비추어 보고 부조리한 현실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산행 중에도 유자로서 곤궁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잊지 못하였다. 해인사의 화려한 경관을 보고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연상하고 산중의 사찰이 빈 것을 보고 궁벽한 시골의 빈 집을 생각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피판적 이해는 다른 전적의 편찬 동기나 지방관을 자처한 그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넷째, '유가야산록'에는 사실의 객관적 서술과 경물의 사실적 묘사가 효과적으로 접목되어 있다. 등정 순서에 따라 고유지명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가운데, 실제 일어났던 일이나 경험했던 감흥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사실을 서술하는 가운데 작자의식이 투영됨으로써 단순한 기록성을 넘어서서 그 문학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자연 경물에 대한 직서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록문학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게 된다.
한강의 국토기행록인 '遊伽倻山錄'을 포함하여 그가 창작한 여타의 저술도 현실주의적 성격에서 기인함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실주의적 성격은 후대 眉 를 통해 近畿實學派의 연원으로 기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현실주의적 성향은 그의 예학과 실학 등의 학문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성격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 셈이다. 이를 통해 한강의 현실인식이나 세계관 등의 구체적인 모습을 탐색한 셈이며, 아울러 朝鮮中期 道學者와 朝鮮後期 實學者의 인식세계를 연결하는 맥락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遊伽倻山錄'의 창작 배경으로 한강의 학문적 기저를 먼저 살폈고, 다음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산행목적, 작자의식 등을 밝혔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서술이라는 기록성과 묘사라는 문학성을 밝혔다. 이상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寒岡은 일생동안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에 몰두하였고 방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敬'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心學의 수련은 현실생활에 긴요해야 할 것이므로 현실 생활을 통한 실천을 무엇보다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학문의 요체는 '窮理居敬'과 '應用救時'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면모에서 우리는 한강 학문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학문 태도는 사물이나 자연을 접하는 데에도 객관적인 시각을 마련하였는데, '遊伽倻山錄'도 여기에 근거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산행동기는 늦가을을 맞아 고장의 명산을 유람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실상 산행을 통하여 심성을 수양하고 꿋꿋한 기상을 기르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등정일정은 9월 10일에 溪塾에서 출발하여 24일에 돌아오는 보름간이었다. 보름동안 가야산에서 머무르면서 이름있는 곳은 빠짐없이 답사하였고, 거기에서 겪은 일과 느꼈던 감흥을 '遊伽倻山錄'에 담았다.
셋째, '유가야산록'에 나타난 작자의식은, 수기와 처신의 중요성 인식과 현실문제의 비판적 이해를 들 수 있다. 한강은 산행하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대하면서 수기와 처신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였다. 한편으로 선현들의 행적을 회상하는 가운데 현인과 명산의 긴밀한 관계를 상기하면서 자신도 가야산과 더불어 역사적인 인물이 되려는 포부를 지닌다. 그리고 작자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에서 체득한 이치를 현실적인 인간의 생활에 비추어 보고 부조리한 현실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산행 중에도 유자로서 곤궁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잊지 못하였다. 해인사의 화려한 경관을 보고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연상하고 산중의 사찰이 빈 것을 보고 궁벽한 시골의 빈 집을 생각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피판적 이해는 다른 전적의 편찬 동기나 지방관을 자처한 그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넷째, '유가야산록'에는 사실의 객관적 서술과 경물의 사실적 묘사가 효과적으로 접목되어 있다. 등정 순서에 따라 고유지명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가운데, 실제 일어났던 일이나 경험했던 감흥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사실을 서술하는 가운데 작자의식이 투영됨으로써 단순한 기록성을 넘어서서 그 문학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자연 경물에 대한 직서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록문학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게 된다.
한강의 국토기행록인 '遊伽倻山錄'을 포함하여 그가 창작한 여타의 저술도 현실주의적 성격에서 기인함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실주의적 성격은 후대 眉 를 통해 近畿實學派의 연원으로 기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현실주의적 성향은 그의 예학과 실학 등의 학문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성격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 셈이다. 이를 통해 한강의 현실인식이나 세계관 등의 구체적인 모습을 탐색한 셈이며, 아울러 朝鮮中期 道學者와 朝鮮後期 實學者의 인식세계를 연결하는 맥락이 될 것이다.
출처 : 영남지리답사
글쓴이 : 松河 李翰邦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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