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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성 안신갑

자라가슴 2018. 6. 6. 22:43


          이만성 (李晩成)


◇선무원종공신 3등◇1571 함안군(咸安郡) 광정리(廣井里) 1630
자는 대기(大器) 호는 연암(淵菴) 본관은 인천(仁川)  어려서부터 호방한 기상이 있어 삼종형인 인원군(仁原君) 휴복(休復)과 더불어 황암 박제인(朴濟仁)에게 수학하고 그후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사사하였다.
17세 때에 함안 북쪽 아견연(阿見淵)에 악어(鰐魚)비슷한 괴상한 동물이 숨어 살면서 가축을 잡아 먹으므로 고을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이만성이 그 괴물을 잡아 죽였다는 사실이 함주지(咸州誌)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2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제포첨사(濟浦僉使)가 전사하고 김해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창(單槍)으로 김해성으로 달려가는데 김해부의 서쪽 덕교(德橋)에 당도하니 뒤에서 "대기" "대기"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이숙(李潚)과 박진영(朴震英)이었다. 적병(賊兵)이 핍근하여 형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얼른 되돌아와 두 사람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함양(咸陽) 산청(山淸)등지에서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안신갑(安信甲) 안황(安璜)과 함께 산청 환아정(換鵝亭)에서 진을 치고 강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 하여 화살을 날려 많은 적을 사살하니 남은 적병들이 패주(敗走)하였다. 갑오(甲午)년에 곽망우당(郭忘憂堂)이 만나보기를 요청하고 악비(岳飛) 관우(關羽)의 충성과 용맹이 있다고 칭찬하며 장게를 올려 진위장군(振威將軍) 용양위부사과에 제수(除授)되어 진주(晋州)의 두진별장(豆津別將)을 겸임하였다.
을미년(乙未年)에 대구(大邱)의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 서사원(徐思遠) 손처눌(孫處訥) 이주 등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적군의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정유재란에 다시 왜적이 침입하여 함안 땅을 지나다가 평암(平巖)에 장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떼를 지어 몰려왔으나 이만성의 의병진용에 대항하다 패망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이만성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판관(判官)을 제수하였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얼마후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자(陞資)하였다. 저서로는 이만성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연암실기(淵菴實記)가 전해지고 인근 고을 유생(儒生)들이 포양(褒揚)을 진정한 여러 통의 문건(文件)들을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다.
※참고자료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함주지(咸州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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