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 최강 장군>
<최균 최강 장군이 태어난 효락리에 향사를 위해 세워진 소천정 전경>
최균(최강)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곤계봉 아래 소대 본가에서 태어났다. 3남을 두었는데 첫째는 균이요, 둘째는 계요, 셋째는 강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균의 나이는 55세, 아우 강의 나이는 33세였다. 강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두형을 부모같이 따라 모든일을 형들에게 먼저 품달하고 혼자 마음대로 하는일이 없었다. 27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출세를 서두르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의 뜻을 밝히니 형 균도 결의를 하고 넷째아들 진호도 출전한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의 제1부대는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14일 상륙을 한다. 17일 왜적은 배를 타고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에 이미 상륙해 노략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1. 구만전투 1) 왜적과의 정면 승부를 피해 배둔을 우회하여 구만동구 본진으로 돌아온 최강은 정예병과 8장사(박연홍, 정준, 최용호, 최각호, 최진호, 안신갑, 정곽 등)와 함께 적을 추격하여 참두한다. 2) 구만면 작지동에 나응벽, 나언린, 나치문의 만석꾼이 있었는데 피난길에서 돌아온 주민을 위해 술잔을 베풀다 왜적에게 일가족이 몰살 당하게 된다. 급보를 전해들은 최균과 최강은 달려가 적을 무찌른다.
<개천면과 구만면이 갈라지는 경계지역 지금은 평길>
2. 담티고개 방어 담티재는 두 고을 경계에 자리한 지점인데 길이 험하고 막히고 좁은곳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 진을 치고 주민들을 모아 군사와 장수가 많이 주둔한것 처럼 위장술을 쓴다. (4~5개의 횃불을 손에 쥐고 늘어서있기, 북치고 함성지르기, 횃불 든 사람과 군사들이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군사가 계속 불어나는것 처럼 보이기 등) 균은 본진의 방어를 맡고, 강은 담티고개를 본진으로 유격전을 벌여서 진주의 관군을 도왔다.
<임진란 창의 공신탑에 새겨진 기록화>
3. 초유사 김성일 1590년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될때 통신부사로 다녀온후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라고 복명했다. 임진왜란 후 파직 되었다가 죄를 씻을 기회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 되었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우고,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최강 장군은 김성일 초유사의 부름을 받고 진주로 가 조종도, 이노, 강칭, 이정,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과 결의를 다진다. 적군이 사천에 진을 치려 할때 열무다리에서 포위 공격해 많은 적을 죽였다. 또 창원에 웅거한 적이 진해 적과 상통해 고성을 거쳐 진양으로 이동하려는것을 이달장군, 곤양군수 이광악과 협력해 무찌른다. 적이 다시 진해,고성을 함락 시키고 사천에 둔을 치고 진양으로 향하려 할때 최강이 김시민과 함께 대둔령을 숨어 넘어 요로에 은복하고 있다가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죽이고 삼성(三城)을 도로 찾았다. 이에 적들은 웅천과 김해쪽으로 쫓겨났다.
4. 1차 진주성 대첩 1592년 10월 3일 2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아군의 지원부대들은 적과 교전을 하며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성 외곽 전투에서 이긴 왜병은 5일부터 진주성 포위, 7일부터는 진주성을 10겹으로 에워싸며 작전을 개시했다. 이날밤 고성의 고성현감 조응도, 주부 정유경, 최강, 이달 등과 함께 구원부대로 합류한다. 관민이 일치단결한 이 전투는 아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김시민은 총상을 입어 39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5. 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풍신수길은 30만 대군이 동래성에서 진양성으로 바로 침략하도록 지시했다.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최강과 이달 장군은 구원에 나섰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두골평에서 적과 싸워 피난민 3백여 명을 구했다.
<서생포 ~ 웅천 왜성분포 - 현재 지도에 표시된 동그라미는 모두 왜성이 있는 지역>
6. 안민령 전투 전국적 의병봉기, 이순신 장군의 연승, 명의 지원군 파병 등으로 왜군은 밀리기 시작하고 서생포(울산)에서 웅천에 이르는 남해안에 성을 쌓고 응전했다. 이 지역에 머무는 왜군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창원에 머물던 소서행장의 막료 장수의 지휘병력중 일부가 백성이 지어놓은 전답에 주민을 강제동원해 수확물을 거두게 했다. 이에 선거이가 출동했지만 패하게 되고 최강이 지원을 나섰다가 김해에 있는 왜군들과 창원의 웅천 안민령 고개에서 맞부착치게 된다. 적의 이복병에 도리어 당하게 되자 최균의 계략에 따라 적진에 돌을 던져 교란시켜 많은 전과를 올리게 된다.
<배둔성이 있었던 장소>
7. 배둔전투 9월에는 배둔성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분전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창원, 진해의 둔적과 고성의 왜적이 밤에 몰래 내도(來道)한다는 걸 정탐하고 매복, 공격 소탕한다. 충무공 이순신 산하 군대가 사량, 웅천 두곳의 전투를 할때 도왔다. * 고성성은 부산과 진해 방면에서 진주성을 공격하려는 왜적에 의해 여러차례 짓밟히고 다시 빼앗으며 공방전을 하던 곳이다. 담티고개의 진소는 영남일원의 보급창 역할과 임진왜란 7년간의 요새지로서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