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신갑(安信甲) 順興안씨 15세
자는 義勇 호는 壯庵
초계군수(草溪郡守) 장군(將軍)
1564∼1597,9,22
殉節’
정려(旌閭)충신 증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 통훈대부 행초계 군수 안신갑지려 명정(忠臣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通訓大夫行草溪郡守安信甲之閭命旌
贈 通政大夫 掌隷院 判決事
품계;정3품관-추증(追贈)병조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등 등차,
宣祖大王下敎曰忘死赴敵.勇如飛골(산비둘기골)復雪國恥求忠臣孝之明此之謂歟선조대왕 께서 왈자기의 몸도 돌보지 아니 하고용감이 싸워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나라의수치를 씻어장렬이 돌아 가셨으니 국가의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일 것이다
안신갑(安信甲)[1544~1597]은 조선 후기 함안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순흥(順興). 할아버지는 안공진(安公軫)이다. 아버지는 감찰관을 지낸 안민(安敏)이며, 어머니는 최운철(崔雲喆)의 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안민이 왜장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의 대병과 김해에서 전투를 치르다 전멸하자 부친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의병에 가담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초계 군수에 제수되었으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산음(山陰) 전투에서 적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멸하자 환아정(換鵝亭)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사망하였다. 선조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기며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죽음도 잊어버린 채 적에게 송골매와 같은 용맹으로 나아가 부친의 복수를 하고 나라의 치욕을 설욕했으니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를 일컬은 것이 아닌가?"
선조가 판결사로 추증하였다. 두릉 서원에 안희(安喜), 안민과 함께 배향되었다.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신산리 산140-2번지에 정려각이 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와가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려각 안의 현판에는 '충신 증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 통훈대부 행초계 군수 안신갑지려 명정(忠臣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通訓大夫行草溪郡守安信甲之閭命旌)'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정려각은 1937년 건립된 것이며 정려각 옆에 애마(愛馬)와 갑옷, 투구를 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