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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치통감의 통감시대

자라가슴 2006. 8. 31. 00:20
1. 戰國時代 槪觀
 
 
春秋戰國時代는 周 왕실의 東遷(B.C. 770)으로부터 秦나라가 중국을 통일(B.C. 221)하기까지의 약 550년 간을 일컫는다. 이는 다시 春秋時代(B.C. 770-403)와 戰國時代(B.C. 403-221)로 구분한다. 春秋時代는 孔子의 《春秋》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周의 東遷에서 晉이 三分되어 韓 魏 趙로 나뉘는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戰國時代는 《戰國策》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三晉의 성립 이후 秦의 중국 통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春秋와 戰國은 모두 東周 시대에 속한다. 이 두 시기는 외형상으로 이렇다 할 뚜렷한 차이는 없었지만 정치 상황이나 사회 정세면에 있어서는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구질서의 해체가 서서히 진행되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모든 것은 한꺼번에 변화하게 되는데, 전국시대 10년 간의 변화는 춘추시대 몇 십년 간의 변화에 해당하는 급격한 것이었다. 전국시대의 주요한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周나라 이래로 지속되어 온 봉건제도의 골격이 와해되었다. 春秋時代의 제후들은 周나라 초기 봉건제도의 면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戰國時代에 이르러 韓 魏 趙 三家가 晉을 나눠 갖고, 田氏가 齊나라를 찬탈한 뒤에는 예전 봉건제도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戰國七雄 가운데 연나라를 제외하고는 周의 왕족인 姬씨 성을 가진 제후는 없게 되었다. 또한 春秋時代 이래로 中原에 자리 잡고 있던 大國들은 모두 주변 七雄의 잠식으로 거의 멸망하고 말았다.
 
둘째, 周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大義名分 또한 존재치 않게 되었다. 戰國時代에 이르면 주나라 왕실은 더욱 쇠미하여져 그 지위는 제후의 일개 卿大夫만도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尊王攘夷이 외침은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셋째, 전쟁의 양상이 더욱 참혹 격렬하여졌다. 春秋時代의 전쟁은 대부분 車戰이었고 전투 기간도 하루였다. 반면 戰國時代의 전쟁은 병력 면에서도 각국이 백만 또는 60만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주력도 전차가 아닌 보병으로 바뀌었다. 또 전국시대의 국제관계는 약육강식의 현실 아래 전쟁 양상 또한 점점 참혹 격렬해지게 되었다. 한 차례의 전쟁으로 수 십만명이 죽는 경우도 허다 하였다.
 
넷째, 군신 간의 지배 관계 및 통치조직에 있어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戰國時代에 들어오면서 世族으로 대표되는 특정지배계층이 소멸하게 되는데, 이로 인한 정치 사회적 공백은 관료제의 형성과 전제 군주의 출현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전쟁이 극렬해짐에 따라 각 나라 고유의 사상과 제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형벌과 포상에 맡기는 법가의 사상이 예교의 회복을 외쳤던 유가의 사상을 대체하게 되었다. 封建制度는 郡縣制度로 대체되었고, 井田制는 阡陌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士人 계층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인재 경쟁으로 귀족들이 士를 양성하는 기풍이 성행하였고, 士의 유세도 성행하여 온갖 현란한 논설로 백가가 쟁명하는 상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종 학술과 기예가 다방면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과 진보를 보았다.
 
춘추 말기에 천하는 4대 세력이 대립하는 형세를 나타내었다. 북방에는 晉나라가 있었고, 남방에는 楚나라, 동방에는 齊나라, 서방에는 秦나라가 있었다. 이를 이어 吳와 越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中原의 세력 균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4강 가운데 晉이 가장 강하였고, 楚가 그 다음이었고, 그 다음은 齊와 秦의 차례였다. 이러한 상태가 변화하지 않고 晉나라가 계속 강대해졌다면 晉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周 威烈王 때 발생한 韓 魏 趙 三家의 晉나라 분할로 인하여 진나라는 세 개의 국가로 분열하게 되었고, 그 세력 또한 자연히 점차 약해지게 되었다.
 
晉의 분열에서부터 秦의 천하통일에 이르는 181년 간의 戰國時代는 각 나라의 성쇠와 판도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晉의 분열 이후 7국이 서로 얽혀 대치하면서 각기 세력의 균형을 이루던 처음 60여년 간에 걸친 시기이다. 韓.魏.趙 3家가 晉에서 독립하고, 田氏가 齊나라를 찬탈한 두 사건은 오래동안 지속되어 온 春秋時代의 국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周初 이래의 봉건의 틀은 붕괴되었고, 春秋時代의 局勢도 무너지고 말았다. 晉나라는 춘추시대의 유력한 제후국이었으나 이후 世家들의 다툼으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마침내 周 威烈王 23년(B.C.403)에는 晉의 大夫에 불과했던 韓.魏.趙 3家를 제후로 승인하기에 이른다. 비록 위압에 못이긴 것이긴 했어도, 이 일을 계기로 춘추 이래 유지되어오던 기강은 일거에 무너져 역사는 이를 戰國時代의 출발로 잡는다.
 
三晉은 그 지역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중국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고, 秦.楚.燕.齊 4國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므로 三晉의 强弱盛衰는 戰國時代의 판도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三晉 건국 초에는 魏文侯가 가장 두드러 졌는데, 그는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고, 卜子夏.段干木.田子方 등을 스승으로 삼는 한편, 李 (李克)을 등용하여 일련의 개혁정책을 시행하여 魏나라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魏武侯 때 이르러 점차 그 세가 위축되었다.
 
楚나라는 昭王을 이어 惠王이 즉위하면서 다시 강성해져, 悼王 때 吳起를 등용하여 법령을 가다듬고 관제를 개편하며 경제를 긴축하여 국방력를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변경의 땅을 개척하고, 남으로 百越을 평정하며 북으로 韓魏를 물리치는 등 강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지나친 개혁으로 귀족 계급의 원망을 사 悼王의 죽음과 함께 발생한 폭동으로 吳起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吳起가 楚로 달아나던 周安王 16년에, 安王은 齊 田和를 정식 제후에 봉하였다. 이때부터 姜齊는 田齊로 대체되었고, 역사는 이를 `田氏簒齊`로 일컫는다. 齊나라는 威王 때 이르러 그 세를 신장하는데, 卽墨大夫를 불러 상주고, 阿大夫를 불러 烹하는 등 강력한 개혁의지의 표명에 따라 나라의 기풍이 바로 서고, 또 騶忌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20여년 간 제후가 감히 齊나라를 넘보지 못하였다. 또 孫 을 등용하여 魏나라와 馬陵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나날이 국세를 신장하였다. 威王을 이어 宣王 또한 학문을 숭상하여 齊의 도읍 稷下에는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성황을 이루었다.
 
동방에서 齊나라가 이와 같은 治世를 이룩하는 동안 서편의 秦나라는 孝公이 商 을 등용하여 變法을 시행하고 있었다. 秦나라는 戰國 초에는 國境이 치우쳐 동방의 여러 나라와 동떨어져 후진을 면치 못하였다. 三晉과 齊.楚 등 山東의 나라들은 秦나라를 야만이라 하여 중원의 會盟에도 참여시키지 않고 輕視하였으므로 이에 발분한 秦孝公은 商 을 등용하여 變法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부국강병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商 의 변법은 사회 기층조직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연좌제를 실시하고, 생산을 독려하며, 軍功을 고취시켜 賞爵을 수여하며, 爵位의 고저에 따라 俸祿을 차별화하여 상하의 기강을 세우며, 軍功이 있는 자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變法은 시행 초기 상당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어 나라의 부강을 가져왔다. 이에 고무된 秦나라는 秦孝公 13년(B.C.350)에 수도를 咸陽으로 옮기고 冀闕의 궁궐을 세우는 한편 제 2차 변법을 시행하였다. 2차 변법은 봉건제도의 골격을 해체하고 전국의 城邑을 모두 31개 縣으로 나누어 縣에는 縣令과 縣丞을 두었으며, 井田을 폐하고 阡陌을 열어 토지의 개간을 권장하는 한편, 조세제도를 변경하고 度量衡을 통일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으로 秦나라는 막강한 國富와 군사력을 창출할 수 있었다. 秦孝公의 사망하자 평소 그의 개혁에 원망을 품었던 이들에 의해 商 은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의 變法은 계속 시행되어 秦나라는 엄격한 질서 아래 통치되어 그 세는 날로 강해졌다.  
 
제 2단계는 변법의 시행 이후 秦나라가 강대해져서 나머지 여섯 나라가 서로 합력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던 40여년 간의 시기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周顯王 32년에 秦惠文王에게 楚와 韓과 魏가 조회 오고, 44년 秦나라가 처음으로 왕을 일컬을 때부터, 周 王(난왕) 17년에 齊 韓 魏의 군대가 함곡관에서 진나라 군사에게 패하고, 19년 楚懷王이 진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기간이다. 변법 시행 이후 강대해진 秦나라가 무력으로 河西의 땅을 수복하자 魏惠王은 수도 安邑을 버리고 大梁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魏나라는 이로부터 國勢가 현저히 약화되고, 秦나라는 國力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를 계기로 秦나라는 동방 진출을 꾀하니, 이에 따라 列國의 세력 균형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合從.連橫의 주장이 크게 일어났는데, 合從이란 6國이 합작하여 秦나라에 대항함을 말하고, 連橫은 秦나라와 연합함으로써 스스로를 보전함을 말한다. 처음  蘇秦은 合從의 책략으로 6국의 從約을 이룩하여 스스로 從約長이 되어 6국의 相印을 두르고 趙肅侯에 의해 武安君에 봉해지기에 이르렀으니, 이때는 周顯王 36년(B.C.333)의 일이다. 그러나 6국의 合從은 여러 나라 간의 역학관계를 교묘히 이용한 것에 불과하였던 까닭에 合從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合從이 성립된 이듬해 秦나라의 책략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合從이 해체되자 趙肅侯는 蘇秦을 크게 견책하고, 이에 蘇秦은 수습을 핑계로 燕齊間을 오가다가 마침내 齊人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이후로도 수십년간 山東 지역에 판세를 좌우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유지되었다.
 
한편 蘇秦과 동문이었던 張儀는 秦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이를 그만두고 魏로 돌아가 魏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魏를 회유하여 合從을 깨뜨리고 秦과 連橫을 성립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張儀의 주선으로 秦과 魏는 동맹을 맺으니, 이에 合從은 무너지고 連橫의 일대국면이 전개되었다.
 
당시 南方의 楚나라와 東方의 齊나라만이 秦나라와 맞겨룰 수 있는 大國이었다. 秦나라는 이 두 나라의 合從을 경계하여 정치공세를 펼쳐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였고, 張儀를 楚나라로 보내 楚懷王을 책략으로 회유하였다. 張儀는 후에 다시 魏나라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으나 1년만에 세상을 뜨고, 그가 죽자 連橫의 약속은 일거에 무너지고, 다시금 合從의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蘇秦.張儀 이후로도 당시 수많은 유세객들은 合從.連橫을 時勢에 따라 주장하여, 각국은 離合集散을 거듭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秦나라는 영토를 두 배 이상 확장하며 魏나라와 楚나라에 일대 타격을 가함으로써 戰國時代의 판도에도 큰 변화가 일게 되었다. 
 
제 3단계는 秦나라가 천하의 대세를 장악하고 6국을 차례로 幷呑하여 멸하던 70여년 간의 시기를 말한다. 秦나라가 楚나라와 싸우며 西南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무렵 趙나라는 西北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趙나라는 북방에 자리잡아 春秋時代 狄人의 강역에 걸쳐 있었으므로 趙武靈王은 胡人의 戰術을 도입하여 全軍에게 胡服을 입히고 騎射를 익히게 하는 조처를 단행하였다. 이는 春秋 이래의 車戰을 騎戰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가 周 王 8년(B.C.307)의 일로, 趙나라는 군사력이 날로 증대되어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래로 趙나라는 惠文王에 이르기까지 국력이 지속적으로 신장되었다.
 
이 시기 趙나라 東北에 위치한 燕나라도 易王의 재위 기간 중에는 강성하였으나 燕王 의 즉위 후 재상 子之를 극히 신임하여 아예 왕위를 선양하니, 3년만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內亂이 발생하여 몇달 안에 수 만명이 사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틈을 타 남방의 齊宣王은 군대를 이끌고 燕나라를 공격하여 불과 두 달만에 燕나라의 도읍을 함락하고, 子之와 燕王 를 죽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간섭으로 齊나라는 燕나라에서 물러나게 되고, 燕나라 사람들은 태자 平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燕昭王이다. 周 王 2년(B.C.313)에 즉위한 燕昭王은 雪恥를 맹세하고 黃金臺를 쌓아 賢士를 초치하니 樂毅.鄒衍.劇辛 등의 賢士가 燕나라로 운집하였다. 燕昭王은 백성들을 어루만져 향후 10년 간 힘을 기른 뒤 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북변을 평정하였다.
 
燕나라를 정벌한 뒤 齊나라는  王 때 이르러 孟嘗君 田文으로 재상을 삼아 韓.魏와 연합하여 秦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秦昭王은 스스로 `西帝`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 齊 王을 `東帝`라 일컬어 추켜 세우는 한편으로, 齊 王을 교만에 빠뜨리며 동방의 제후들 간에 갈등을 야기시키는 책략을 구사하였다. 秦나라와 齊나라가 동서에서 양립하여 齊나라가 교만에 빠져 있는 동안, 燕昭王은 樂毅의 주선으로 趙.魏.韓과 연합하여 齊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齊나라 공격에는 秦나라까지 합세하였는데, 갑작스런 공격에 齊나라는 全軍이 붕괴되어 齊나라의 70여 성은 모두 함락되어 齊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방의 楚나라가 齊나라 구원을 명분으로 장군  齒를 보내  城에서 齊 王을 죽이니, 뒤에  人이  齒를 죽이고  王의 태자 法章을 세워 齊襄王을 삼고  城을 근거로 復國운동을 전개하였다.  城의 東北에 위치한 卽墨에서는 田單의 지휘 아래 燕나라에 항전하였다. 周 王 36년(B.C.279) 燕昭王이 갑자기 죽자 燕惠王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樂毅에게 齊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이에 田單이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燕惠王은  樂毅를 騎劫으로 대체하였다. 田單은 사졸들을 독려하여 燕軍을 기습하니 鬪志를 잃은 燕軍은 궤멸되어 한 달이 채 못되어 齊나라의 70여 성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齊나라는 비록 영토를 회복하였으나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國力은 크게 쇠약해졌고, 燕나라 또한 크게 위축되니, 결과적으로 秦나라만 더욱 강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秦昭王은 용병에 뛰어난 白起를 등용하여, 昭王 14년(B.C.293)에 白起는 韓.魏 연합군을 伊闕에서 격파하여 24만명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계속하여 白起는 楚나라 國都인  城과 西陵을 함락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일련의 패배로 楚나라는 서방의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여 그 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써 趙나라를 제외하고는 6국 중에 秦과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없게 되었다. 伊闕의 대패로 魏나라는 河東의 땅 4백리를 秦나라에 바치게 되고, 이에 秦나라는 동으로 趙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趙惠王이 齊나라와 협력하며 秦나라를 견제하자, 노한 秦나라는 趙나라를 공격하였으나, 平原君과 藺相如, 廉頗 등이 버티고 있던 趙나라를 이길 수 없었으므로 秦昭王은 周 王 36년(B.C.279)에  池에서 趙惠王과 수호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며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秦나라는 白起의 주도 아래 楚와 魏를 잇다라 공략하여 수십만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고, 이러한 확장의 과정에서 秦과 趙는 마침내 閼與에서 정면 충돌 하였으나 趙奢의 책략에 힘입어 趙나라는 秦軍을 크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해 뒤 趙惠文王이 죽고 孝成王이 즉위하자 秦나라는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秦昭王 47년에 王 을 장수로 하여 上黨을 침략하였다. 이에 上黨 백성들은 長平으로 달아나 趙軍에게 의탁하였고, 廉頗는 굳게 성을 지키며 秦軍과 교전하지 않았다. 이때 范雎가 秦의 재상이 되어 유언비어를 퍼뜨려 廉頗를 趙括로 대체케 하고 장수를 王 에서 白起로 교체하였다. 廉頗를 대신하여 들어온 趙括은 명령체계를 모두 바꾸고 지휘관을 교체하여 가벼히 출격하였다가 秦軍에게 40여일을 포위되었다가 싸움터에서 죽고, 趙兵 40만명도 일시에 항복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 참혹한 전투로 趙나라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때가 周 王 55년(B.C.260)의 일이었다. 이로써 秦나라는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秦나라가 천하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유리한 地勢와 막강한 군사력, 정치적 역량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長平의 전투 이후 6국의 멸망은 사실상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秦昭王은 范雎를 相으로 삼고부터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范雎는 대외정책의 기조를 `遠交近攻`에 두어 三晉을 공략하니, 楚나라와 齊나라의 세력 또한 점차 쇠미하여졌다. 長平의 전투가 있은 지 두 해 뒤에 秦나라는 趙나라 邯鄲을 대거 침공하였는데, 趙나라가 목숨을 걸고 싸우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趙나라의 存亡은 6國의 存亡이 걸린 문제였으므로 제후들은 군대를 내어 趙나라를 구원하였다. 다시 趙나라 平原君은 처남인 魏나라 信陵君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秦나라의 위협을 받은 魏王이 출병을 꺼리자, 信陵君은 兵符를 훔쳐 晉鄙를 죽이고 兵權을 탈취하여 8만의 군대를 이끌고 齊.楚와 연합하여 秦나라를 맹공하니 秦軍은 크게 패하였다. 信陵君은 감히 魏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趙나라에 머물렀다.
 
周 王 59년, 秦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韓을 공격하고, 다시 趙를 쳐서 20여성을 빼앗고 9만명을 참수하였다. 이때 周王室의 王畿가 秦軍에게 유린되자 위협을 느낀 周 王은 몰래 제후와 연합하여 秦나라에 항거하려다 일이 발각되니, 周 王은 이에 秦나라로 들어가 그 땅과 백성을 秦나라에 바치고, 오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록 東周君이 있었으나 周 王의 죽음으로 平王의 東遷 이래 515년간 지속 되어온 東周는 멸망을 맞았다. 西周를 합하면 855년간 존속되었던 周王朝는 이에 이르러 실제적인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趙나라 邯鄲의 큰 상인이었던 呂不韋는 邯鄲에 인질로 와 있던 秦王子 異人을 보고 奇貨라 여겨, 당시 秦太子 安國君의 正室인 華陽夫人이 후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책략을 써서 그를 양자로 입양시켰다. 秦昭王이 죽고 安國君이 왕위에 올랐으나 사흘만에 병으로 죽고, 이에 異人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秦莊襄王이다. 그는 呂不韋를 승상으로 삼고 河南과 洛陽의 10만호를 주어 文信侯에 봉하였다. 秦莊襄王은 영토 확장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장군 蒙 를 시켜 魏나라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魏安釐王은 급히 趙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趙에 머물고 있던 信陵君의 환국을 요청하였고, 信陵君은 제후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합종을 약속하고 秦에 항거하였다. 5國의 연합군을 이끈 信陵君은 河外에서 蒙 의 군대를 대파하고 곧장 函谷關까지 쳐들어가니, 信陵君의 이름이 천하에 크게 떨쳤다. 이에 秦나라는 다시 魏王과 信陵君을 이간하니, 이에 실망한 信陵君은 몇 해 뒤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북방의 趙나라에서는 李牧이란 걸출한 장수가 나와 趙의 北邊을 지키며 흉노를 막았는데, 長平과 邯鄲의 전투 이래 국사력을 상실한 趙나라를 燕나라가 자주 침략하자, 趙悼襄王은 李牧으로 하여금 燕軍을 치게 하여 이를 깨뜨렸다. 秦나라는 燕.趙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遠交近功으로 燕王喜와 함께 趙를 쳐 두 나라 사이에는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秦莊襄王이 재위 3년만에 죽고, 그 아들 秦王政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뒷날 秦始皇이 된다. 秦王政이 13세에 즉위하자 呂不韋는 相國이 되어 섭정하였다. 秦王政의 생모는 원래 呂不韋의 情人으로 그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후일 이 추문이 발각되어 呂不韋는 蜀으로 귀양가다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秦王政은 유세객을 혐오하여 逐客의 명을 내렸다. 이때 객경 李斯는 逐客을 반대하는 글을 올려 이해득실을 따져 물어 秦王은 逐客의 명을 취소하고 李斯를 크게 등용하였다. 李斯는 6국을 멸하기 위해 6국의 군신을 금전으로 매수하는 한편으로 대규모의 군사 공세를 펼쳐 韓나라를 필두로 하여, 趙나라도 차례로 멸망하고 말았다. 燕나라 태자 丹은 일찍이 秦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秦王政 15년에 秦나라를 탈출하여 燕나라로 도망쳐 왔는데, 수모를 당한 원한을 갚으려고 자객 荊軻를 보내 秦王政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燕나라도 마침내 秦의 공격을 받아 B.C.222년에 망하고 말았다. 이를 전후하여 魏나라와 趙나라도 망하고, 마지막 남았던 齊나라 마저 秦王政 26년(B.C.221년)에 망함으로써, 마침내 6국은 秦나라에게 모두 멸망하여 183년에 걸친 戰國時代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2. 秦漢時代 槪觀
 
 
秦始皇은 중국을 통일한 지 겨우 2대 15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어 漢高祖 劉邦이 나라를 세우고 長安에 도읍을 정하니, 역사는 이를 일러 西漢 또는 前漢이라 일컫는다. 前漢은 13帝 214년(B.C 206-A.D 8)에 걸쳐 지속되었으나, 王莽에게 찬탈되고 말았다. 王莽의 新王朝도 불과 15년만에 망하자, 이를 이어 光武帝가 漢나라를 중흥하여 王統을 회복하였다. 그는 도읍을 洛陽으로 옮겼는데, 역사는 이를 東漢 또는 後漢이라 말한다. 後漢은 또 14帝 196년(A.D 25-220)간 이어졌고 曹丕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兩漢은 모두 합쳐 410년이 된다. 그후 魏.蜀.吳 세 나라가 솥발처럼 마주 선 채 또 66년이 흐른 뒤에 晋武帝 司馬炎이 통일하였다. 秦始皇 26년에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이래 삼국이 통일되기까지를 모두 합치면 무려 5백년에 이른다. 이 5세기 동안의 역사는 자연히 兩漢이 4백년 一統之局의 주체가 되니, 秦始皇의 秦나라와 王莽의 新나라 및 3국은 잠간 동안의 과도기가 된다. 秦始皇이 토대를 쌓아 西漢의 선구가 되었고, 삼국으로 갈린 뒤로는 東漢의 殘局이라 하겠다.
 
秦漢 시대는 중국 斷代史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中古 이래 중국의 疆域 구획과 행정제도를 비롯하여 학술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秦漢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자신을 `漢人`이라 일컫고, 중국의 학문을 `漢學`이라 하는 것도 모두 이 `漢朝`에서 따온 것이다. 漢王朝의 기틀을 마련했던 秦帝國은 비록 통일한 뒤 15년만에 망하고 말았지만 분명히 한 시대의 획을 긋고 있다. 秦始皇의 통치 아래 봉건제도는 모두 폐지되어 郡縣制度로 바뀌었고, 또 북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남으로  越을 평정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였고, 수레바퀴를 규격화 하였다. 2천년 간 지속되어 온 봉건시대를 마감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통일을 최초로 완성하여 중앙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방에까지 바로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판도를 더욱 확장하여 秦나라의 40개 郡은 이후 중국 疆域의 기초가 되었다.
 
秦나라는 중앙에 三公을 두어 行政.軍事.監察을 각각 분장하였고, 다시 九卿을 두어 庶政을 분담하였다. 지방에는 위로 郡에는 守를 두고 縣에는 令長을 두었으며 均田은 중앙에서 관리하였다. 중앙의 三公 중에서 左右丞相이 모든 관리를 관장하며 황제를 보필하였다. 秦始皇은 특별히 李斯를 중용하여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李斯는 당시의 일대 정치가였으니 그로 말하면 엄격한 法家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功利와 陰謀에 힘을 쏟아 仁義를 돌아보지 않았다. 秦始皇이 6국을 멸함에 있어서도 李斯의 계책을 채용하였고, 통일한 뒤 수많은 제도의 마련도 李斯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李斯의 謀略에 秦始皇의 추진력이 결합되자 秦帝國은 날로 번성하여 갔다. 그러나 백성의 목숨을 가벼히 여기고, 더하여 가혹한 부역과 형벌로 거리에는 죄수가 줄을 잇고, 마주보며 말만 해도 죽이니 차츰 暴政의 길로 내달아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秦始皇은 재위 37년 째 되던 해 沙丘에서 죽었다. 이에 2세황제 胡亥가 즉위하자 잇단 궁정 내부의 정권 쟁탈 투쟁의 와중에서 李斯는 피살되고 정치는 趙高에 의해 천단되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戍卒 陳勝과 吳廣이 擧義하자 일시에 群雄이 떨쳐 일어났고, 6국의 후예들 또한 기회를 보아 궐기하여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楚나라 장수 項燕의 후예로 項梁과 項籍은 叔姪간으로 會稽太守를 죽이고 吳에서 기병하여, 楚懷王을 옹립하여 楚國 復興을 외치자 大江南北의 호걸들이 이에 호응하여 형세가 가장 성대하였다. 沛사람 劉邦도 沛縣의 자제들을 이끌고 楚軍에 가세하여 項氏와 더불어 싸움에 참여하니, 이 시기에는 자못 6국 부흥의 기상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秦나라 장수 章邯이 대군을 이끌고 동쪽을 쳐서 陳勝과 吳廣, 魏王咎와 項梁이 잇달아 전사하였다. 章邯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趙王歇을 鉅鹿에서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楚懷王은 기회를 타서 진용을 정비하고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한 길은 북으로 趙나라를 구원하고, 한 길은 서쪽으로 秦을 습격하였다. 項羽가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진격할 때 배를 가라앉히고 가마솥을 부순 뒤 황하를 건너 鉅鹿에서 秦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리고, 章邯의 항복을 받아내고 秦나라 군대 수십 만명을 섬멸하였다. 劉邦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關中 땅을 공격하여 咸陽 가까이에 진격하였다. 이때 마침 秦나라 조정에는 政變이 일어나 趙高가 二世를 죽이고 그 조카 子 을 세우니, 子 이 또 趙高를 죽였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는데 楚軍이 성 아래에 이르자 마침내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秦나라는 이에 망하고 말았다. B.C 207년의 일이었다.
 
項籍이 秦軍을 깨뜨린 뒤 위엄이 크게 떨쳤다. 이에 동방 제후의 군대 수십 만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函谷關을 치려다 劉邦이 먼저 점령하여 秦王朝가 이미 멸망한 것을 알았다. 이에 項籍은 咸陽의 宮室을 불사르고 秦王 子 의 일족을 죽었다. 당시 項籍은 동방 제후 연합군 통솔의 책임을 맡았던데다 또 戰勝의 위세를 타서, 마침내 스스로 盟主가 되어 천하를 18개로 分封하여 새로운 질서를 건립하였다. 그는 劉邦을 몹시 꺼렸으므로 劉邦을 봉하여 漢王을 삼아 巴蜀 漢中에서 왕노릇하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西楚覇王이라 하며 彭城에 도읍하여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는 한편, 사람을 보내 楚懷王을 살해하였다. 이 시기는 6국 부흥의 국면이 변하여 項籍 1인의 천하가 되었다.
 
項籍은 비록 용감하고 싸움에 능하였으나 위인이 강퍅하고 자만이 지나쳐 정치적 감각은 부족하였다. 그의 그릇된 판단과 정치적 착오는 제후들이 다투어 일어나 항명케 하여 그가 彭城에 돌아오자 마자 齊와 趙가 곧바로 반란하였다. 그가 이룩한 신질서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더욱 큰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劉邦도 이러한 형세를 타서 漢中에서 秦嶺을 넘어와 다시 關中을 취하고, 다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 동으로 진격하여 項籍과 더불어 중원을 놓고 자웅을 결하였다. 한편으로 장군 韓信을 파견하여 일군을 이끌고 河北을 따라 魏나라와 趙나라 및 代와 齊를 잇달아 멸하여 彭城의 후방을 위협하니, 楚는 삼면에서 포위당한 형세가 되었다. 劉邦이 項籍과 중원에서 오가며 5년 넘게 苦戰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일컬어 `楚漢之爭` 또는 `劉項之戰`이라 일컫는다. 전쟁 결과 項籍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東城으로 달아나 烏江에서 자살하였다. 項籍이 죽자 劉邦은 정식으로 황제를 일컫고 나라 이름을 漢이라 하고는 새 도읍지를 咸陽 동남 쪽에 세우고 長安이라 일컬으니, 그가 바로 漢高祖皇帝이다. 漢高祖는 項籍을 멸한 뒤 또 이어 여러 지역을 평정하여 漢高祖 12년에 이르러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고 정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해 고조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漢高祖 劉邦은 起義한 이래 秦을 멸하고 楚를 꺾어 나라를 안정시키기까지 반생을 전쟁터에서 지내며 최전방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더욱이 楚漢相爭의 몇 년 동안은 후방의 큰 일은 모두 승상 蕭何가 국가 건설에서 정부 조직, 법제 정비 및 수도인 長安의 宮室 造營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위임받아 처리하였다. 蕭何는 劉邦과 더불어 함께 起義하여 劉邦이 가장 신뢰했던 측근이었으므로 그에게 일체의 모든 대권을 맡겼던 것이다. 蕭何는 본래 秦의 관리였으므로 秦나라 법을 환히 잘 알았다. 때문에 건국 후 일체의 정치 제도와 법률은 대부분 秦나라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漢高祖가 죽자 아들은 惠帝 劉盈이 帝位를 계승하였다. 惠帝는 몸이 약해 병이 많아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므로, 呂太后가 조정에 임하여 궁정과 국가의 대사를 직접 주장하였고, 조정의 政事는 승상이 담당하였다. 蕭何가 죽자 曹參이 승상을 이었는데, 그는 蕭何가 제정한 政令를 조금도 고치지 않고, 일을 줄이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데만 힘을 쏟았다. 역사는 이를 `蕭規曹隨`의 미담으로 일컬어 왔다. 曹參 또한 오래지 않아 죽고, 王陵과 陳平, 周勃 등이 차례로 승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開國의 元老들이었고, 대부분 漢高祖의 옛 신하였으므로 승상의 권한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呂太后는 만년에 呂氏를 중용할 생각으로 劉氏를 억압하였으나 다행히도 陳平과 周勃 등 老臣이 宗室과 연합하여 呂氏들을 죽여 없애고 高祖의 아들인 代王 劉恒을 맞아 帝位를 잇게 하니, 그가 곧 漢文帝가 된다.
 
漢文帝는 西漢 시기 가장 어진 임금으로, 그는 言路를 개방하고 肉刑을 폐지하였으며 생활은 검소하였다. 재위 23년 동안 宮室을 造營하지 않았고, 대외전쟁도 치르지 않았다. 이를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文帝가 죽자 景帝가 文帝의 통치 방식을 이었는데 전후 39년에 이르는 文景 兩朝 사이에 국가의 재정은 넉넉하여졌고, 백성들은 편안하니, 역사는 이 시기를 `文景之治`라 일컫는다.
 
이 시기 유일한 불행은 景帝 3년에 발생한 吳楚 7國의 반란 사건이었다. 불과 석 달만에 평정되어 사회의 안정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으나, 한나라 정치 제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원래 漢高祖가 건국했을 당시에는 봉건제도를 반쯤 회복시켜 王과 侯 등의 작위를 두어, 郡縣제도와 봉건제도가 병존하였고, 또 맹서하기를, "劉氏가 아니면서 왕노릇 하는 자는 천하가 함께 이를 친다"고 하였었다. 이에 따라 여러 王은 모두 劉氏로 중앙 정부의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랐으나, 吳楚 7國의 난은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이후 국가는 여러 藩邦의 세력을 약화시켜 漢武帝 이후에는 王은 한 개 郡에, 侯는 한 개 縣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王侯들은 조세를 받아 의식의 충족함을 누릴 뿐 政事에는 관여할 수 없었고, 政事는 모두 중앙에서 파견된 王相과 侯相이 주장하였다. 이들은 郡縣制 下의 郡守와 縣令의 소임을 담당하여, 漢나라는 封建의 이름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郡國制로 통치되었다.
 
文景之治를 거치는 동안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원기를 회복한 한나라는 인적 물적으로 크게 넉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출현한 강력한 군주가 바로 漢武帝였다. 漢武帝는 이름이 徹이니, 곧 景帝 劉啓의 아들이다. 즉위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고, 이후 그는 54년 간이나 재위에 있었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패기에 넘쳐 넉넉한 경제적 축적을 바탕으로 천하의 인재를 끌어 모아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서로 西域과 교통하였으며, 남으로  越을 취하고, 동북으로 朝鮮을 정벌하였고, 서남으로 西南夷를 물리쳐 중국의 판도를 두 배나 확대시켰다. 武功의 성대함 뿐 아니라 文治 방면에서도 많은 중요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百家를 물리치고 五經博士와 제자를 두어 儒學만을 존숭케 하였고, 文學의 인사들에 대해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또 13州에 刺史와 司隸校尉를 두어 지방에 대한 監察을 더욱 강화하였다. 鹽.鐵.  를 전매하여 국가 경영과 변경 개척의 재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후대 학술 사상과 정치 경제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漢武帝는 사치를 좋아하여 대규모의 宮室을 조영하는 한편, 멋대로 노닐며 神仙을 추구하는데 국력을 지나치게 소비하였다. 계속된 정복 전쟁으로 인한 지나친 국력의 소모로 만년에는 경제에 파탄이 오고 도적이 점차 일어나게 되었고, 법망은 엄혹하였다. 게다가 참혹한 巫蠱의 화가 발생하여 궁정은 피로 물들고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만 수 만명에 달하였다. <출처 :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홈피에서>
출처 : 사림서당 요천시사
글쓴이 : 남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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