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선생선대

[스크랩] 安珦

자라가슴 2006. 5. 16. 16:09

안향 (安珦 , 1243~1307)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출처 : 사림서당 요천시사
글쓴이 : 남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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