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百 五十年 前( 1868年)朝鮮朝 高宗 때에 國令으로 全國에 社倉 制度를 創設하여 國民 生活 向上을 推計하였다. 그때 昌原은 荒蕪地 化 되어 民衆의 苦痛이 極甚한지라 그 救濟策으로 社倉制를 設置하였다. 同時에 出納 任職에 指定된 當時 退隱 安斗喆 公 께서는 私財로 巨額을 所出 하여 六年間 貸納하고 面民이 塗炭에 처함에 稅金 貸納 및 救恤에 對備한 바 일부 여유 資金으로 學舍(당시 崇廣학교 지금 上南초등학교의 전신)를 龍池洞에 建設 한 바 있다. 學者에게 新學問과 孝悌 및 忠信指導를 敎育하고 指示하였으니, 곧 東方의 創學 志操인 高麗 文成公 晦軒 安珦先生의 19代孫으로 傳統 傳受에 包含된 바 있다. 이때 丙子(1876년)에 先生이 卒하니 이어 社倉制가 閉止 되었으니 面民은 救恤精神을 追慕 頌德하여 글로서 서로 聯名하니 당시 崇祿大夫陸軍副長 申箕善께서 喪門 하여 府尹이 先生의 行蹟에 感動하여 碑文과 碑閣을 撰記하고 知府監理(韓昌洙)行狀을撰하니 吃窩(李根玉 進士)實記를撰하고 一山(趙昺奎)墓碣銘을撰하며 小山(金琦浩)碑文을撰 하였고 많은 有名人이 撰碣文을 作頌 하시었다. 面民은 先生께서 救恤에 앞장서고 學校를 設置하니 父子(斗喆.貞錫)의 功과 努力을 告하기 위해 官民이 힘을 모아 碑刻을 昌原 中心地인 龍池 마을의 崇廣학교 터에 建立 하였고, 그 후 先生의 長子 通仕郞 繕工監 假監役(諱:貞錫 號:嘯軒 河陽縣監을 除授받음 )께서 父親의 家業을 이어 받아 田畓 수백을 獻供 하였으나 그때 나랏일이 어수선 하여 善意가 미치지 못해 不得이 그만두고 新文物을 나누시고 儒敎와 道義를 崇尙 하시고 辛亥年에 卒하니 韓日合邦의 翌年이라(1911年) 合邦후 碑刻의 耕地에 日帝時 通信隊가 建設됨으로 玄孫인 承達께서 柳花亭으로 移建 하여 保存한 바 昌原市 都市計劃으로 來孫 宅英께서 옮겨 案山大谷에 保存 되었으나(三翠堂 安龍鎬撰 新碑建立1981年) 昆孫熙常이가 昌原市의 協助로 이곳 昌原의집 境內로 移轉 하였다. 退隱安公 表石文 大韓 光武 2年 戊戌(1898年) 6月 日豎 捐社俸錢 殖利置田 舊倉雖廢 新蓄猶全 保民一坊 蠲役屢年 片石不泐 永世名傳 宗孫 熙鎭 昆孫 熙常 熙坤 昆孫女 熙玉 貞烈 癸巳년 2013년 5월 일
조선조 고종 5년(1868)에,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국령(國令)으로 사창(社倉)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때 창원(昌原)지역은 연이은 흉년으로 황무지화하여, 민중의 고통이 극심한지라 그 구제책으로 사창을 설치하였다. 출납 임직에 지정된 퇴은(退隱) 안두철(安斗喆)공은 사재로 거액을 출연하여 6년간 대납(貸納)하고, 도탄에 직면한 면민들을 위해 세금을 대납하고 구휼에 대비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의 여유 자금으로 상남(上南)초등학교의 전신인 숭광학사(崇廣學舍)를 용지동(龍池洞)에 설립하였다. 이 학사에서 신학문과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교육하였으니, 선조이신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의 정신을 후대에 계승한 것이다.
1876년에 퇴은공이 졸하고 이어서 사창제도가 폐지되었으나, 면민들이 공의 구휼 정신을 추모하여 연명으로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숭록대부 육군부장 신기선(申箕善)이 문상을 하고 비각기문을(碑閣記文) 찬하였다. 한편 진사 흘와(吃窩) 이근옥(李根玉)이 실기(實記)를 엮고, 부윤 한창수(韓昌洙)가 서문을 썼으며, 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가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후에 공의 장자 소헌(嘯軒) 정석(貞錫)공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전답 수백 무를 헌공하고 흥학에 힘써 신문물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유교의 도의를 숭상하였다.
처음에 송덕비를 창원의 중심지인 용지마을 숭광학교 터에 건립하였으나, 일제의 국토 강점으로 그 땅에 통신대가 들어서자, 공의 현손인 승달(承達)공이 유화정(柳花亭)으로 이건하였다. 다시 창원시의 도시계획으로 내손(來孫) 택영(宅英)공이 안산대곡(案山大谷)으로 옮겨 보존해 오다가, 곤손(昆孫) 희상(熙常)이 창원시의 협조를 받아 이곳 창원의집 경내로 이건하였다.
2013년 계사(癸巳) 5월 일
종손 희진(熙鎭), 곤손 희상(熙常) 희곤(熙坤), 곤손녀 희옥(熙玉) 정열(貞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