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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자라가슴 2008. 5. 12. 10:16
우리나라에 선불교禪佛敎가 최초로 들어온 것은 통일 신라초기로써 달마선이 아직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 4조 도신道信으로부터 전수받은 법랑法朗에 의한 것이었다.

이어서 신행信行이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하였다.
그러나 선禪이 신라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남종선 계통의 지장地藏으로부터 심인心印을 이어 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헌덕왕 13년)과 826년(흥덕왕 1년)에 귀국하여 선법을
펼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그뒤 입당승入唐僧들이 귀국하면서 중국의 여러 선풍을 전하였고, 국내에 많은 선찰禪刹이
창건됨에 따라 선풍진작의 거점을 이루었다.

이에따라 신라말기부터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사실은 신라시대에는 구산문九山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쌍계사의 혜소문慧昭門이나 오관산五冠山의 순지문順支門이 구산문중에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독립산문으로 있었고,

또한 구산의 개조開祖는 모두 국사國師로 표기하였으나 사실은 나말려초에 국사제도國師制度가 있었을리가 없다.

국사제도는 고려 광종이후에 생긴 제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히 국사라고 부른 것은 고려 중, 후기의 의식구조에서 조작된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구산으로 정리되었을까?
그 이유는 신라말기의 사정이 아니라 고려중기에 정리된 것이므로 고려의 사정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현재의 정리된 문헌상 경상남도에서는 유일하게 구산선문을 개산한 창원시 봉림산(290메타) 봉림사

봉림산문의 제 2대인 심희審希가 봉림사를 개창한 인연에 대하여 최인곤(崔仁滾:최치원의 종제)이 쓰고 경명왕(景明王 917-924년)이 지은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昌原 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진례金海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당시 진례성進禮城 제군사諸軍事 소율희蘇律熙가 도道를

사모하는 정이 깊었고 소문을 듣고 간절하게 성밖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선사를
맞이 하였다.

그리고 사찰을 보수하고 법륜을 굴려 주실 것을 간청하기를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부친을 만난듯, 병든 사람이 훌륭한 의사를 만난듯 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 897~912년)이 특별히 정법대덕 여환如奐을 보내어 관언을 내려 멀리서 법력을 빌었으며 조서를 내림과 아울러 발우鉢盂을 하사하고 사신을 보내어 심신을 토로하게 하였다.

국왕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여 우르런 것은 모두 이와 같았으니 어찌 육신보살 및 청안율사만이 자못 어진 이들과 멀리서 왕의 존숭을 받겠는가? - 생략 -

그러므로 작은 절을 고쳐 지어 발길을 멈추었으며 '봉림'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다시 선원禪院을 열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심희는 그 당시 진례성 제군사 소율희의 지극한 후원으로 원래 있던 절을 고쳐 '봉림'이라는 산문을 개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율희는 누구인가?
소충자蘇忠子, 소율희蘇律熙 형제가 제일 먼저 사료에 나오는 것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 탑비문 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 塔碑文」에 의하면

"효공왕 11년(907년) 여름 행적行寂이 김해지방에 소율희를 찾아갔다"란 대목이 아닌가 한다.
소율희는 그 당시 김해 진례성을 지배한 지방호족地方豪族의 지배세력에 있었다.

소율희의 형인 소충자가 김인광을 무력으로 몰아내고는 얼마되지 않아 은퇴하게 됨으로써 김해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그 아우인 소율희에게 넘어갔다.

신라말기의 지방호족 가운데는 원래 중앙귀족 이었지만 뒤에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가 새로운 기반을 구축, 신라말기에 다시 대두하는 경우와,

한편으로는 지방에 토착하여 살면서 군현郡縣의 행정체계 밑에서 촌락민을 통제하는 구실을 담당하다가 신라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독립하여 실질적으로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주위의 다른 촌주들을 지배하여 마침내 호족세력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

골품제도骨品制度의 팽창에 의해 왕실이나 중앙귀족의 세력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통치권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들이,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입산한 승려출신들을 옹호하여 서로의 어떤 공통성과 공감성을 형성하여 후원내지는 신변보호까지 도움을 주게 되면서 선종출신 승려와의 교류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소율희는 미천한 촌주출신으로서 중앙정부의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은 출신중에 한사람이었던 금관가야의 왕족출신이며 김유신의 직계후손인 심희를 적극적으로 도와 신변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사찰을 중창하여 안주케 하니 마침내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이 개산하게 된 것이다.
봉림산파의 제 2대 심희(855~923년)는 경문왕 3년(863년) 9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곧바로 여주

혜목산慧目山에서 수업하다가 경문왕 8년(868년) 현욱의 입적으로 사법자嗣法者로 부촉을 받게 되었다.

현욱은 경주 박씨출신이다.
헌덕왕 16년(824년)에 당에 가서 마조도일의 법사法嗣인 장경회휘章敬懷暉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희강왕 2년(837년)에 귀국하여 홍척洪陟이 개창한 지리산의 실상사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문성왕 2년(840년)에는 여주 혜목산으로 옮겨와서 선풍을 진작하다가 경문왕 8년(868년)

심희에게 부촉하고 입적하여 뒷날 봉림산파의 개조로 추앙된 사람이었다.
심희는 현욱에게서 사법한 뒤에 국내명산의 유력遊歷에 나서 진성여왕 2년(888년)부터

효공왕 1년(897년)까지 10여년간 광주지방의 송계선원松溪禪院, 설악산 명주溟州지방의
탁산사託山寺 등지를 유력하다가 전국이 전장화戰場化한 가운데 김해지방이 선종의 요람지라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이 지방으로 옮겨와서 안주하게 되었다.
봉림산파는 심희의 사승師僧인 현욱을 개산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문제점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현욱은 837년(희강왕 2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경기도 여주에 있는 혜목산 고달사高達寺를 개창하여

선풍을 크게 떨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당집祖堂集』은 그를 소개할 때 붕림산이 아니라 혜목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현욱이 경문왕의 예우를 받으면서 28년간이나 고달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의 비문에 의하면 후에 심희와 찬유가 계승하게 되어

고달원은 희양원, 도봉원과 더불어 법손이 대대로 주지를 상속해온 3대 사원의 하나였다고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p.399는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보면 고달사는 그 법통이 철저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달원의 현욱, 심희와 찬유는 그동안 봉림산문의 고승으로 정리되어 왔으나 

혜목산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혜목산문을 고려 광종때까지 지속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봉림산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욱이 4년 동안 머문 봉림산보다 28년동안 머물면서 혜목산 고달사에서 입적하고,
그 문하들로 계속된 혜목산의 비중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또한 심희가 봉림사에서 경명왕 7년(923년) 입적하자 곧이어 제 3대 종주宗主가 된 찬유대에와서는 봉림산파의 중심지가 다시 혜목산의 고달사로 옮겨지고 있었는데,

아마 소율희 세력의 몰락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찬유는 고달사를 크게 중창하여 고려 광종대에는 지리산 지곡사智谷寺와 더불어

전국 5교 선찰의 하나로 선종교단의 통합과 법안종의 수입 등 불교개혁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많은 연구 검토가 필요한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봉림산파의 계보는 사실 찬유 이후의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게 현실이다.

봉림사가 존재한 후대까지의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2권 창원도호부 불우조에
"봉림사는 봉림산에 있다. 그리고 신라 집사시랑執事侍郞 최인곤이 지은 승僧 진경의 탑비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봉림사지에는 창원대학교에서 지표조사로 말끔히 닦여진 바닥만 드러내놓고 와편을 쌓은 무더기만 있을 뿐이다.

봉림사지에서 이전된 유물로는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제 362호」인 부도탑과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보물 제363호」가 1919년에 현재의 자리인 경복궁으로 옮겨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지귀동 봉림사지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6호)은 1960년에 현위치인 상북초등학교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삼층석탑의 기본양식을 따랐고 2층 기단위에 현재 하층 기단은 없어졌다.
봉림사의 폐사된 역사는 전래되지 않는다.

다만 현존하는 문헌상 제일 앞선 자료로는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봉림사 금무今無'라고 되어있어 이미 폐사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로 미루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연대인 1530년 부터 1799년까지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유적총람」에 봉림사의 폐사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밀양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봉림사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여주 이씨들은 선친이 별세하자 시신이 들어있지 않은 상여 세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유인하였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있는 상여를 운반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그 뒤 절은 폐허화하였고 여주 이씨의 가문도 역시 망했다고 한다.

그 때가 약 200년전의 일이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