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세 | 배중세지사 2008/04/09 00:51 창원의집(h9567) http://memolog.blog.naver.com/h9567/179 ◎ 이름: 교장 류춘우
◎ 조회: 162 사립 계광학교의 재발견
- 경남 교육의 횃불이었던 사립 계광학교의 항일정신과 영광 -
갑오개혁(1894) 때에 세계제국들의 침탈로 인한 새로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고종황제의 교육입국 조서(敎育立國 詔書)가 공포된 이후, 전국에 사립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현대화된 학교가 세워졌다. 우리고장 진해에도 사립 계광학교가 있어 많은 인재양성에 기여하여 왔다. 그러나 그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 계광학교(啓光學校) 개요
우리고장에서는 선교사를 통해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서양의 과학 기술 교육을 제대로 하고자 문석윤, 이우산, 배익하 등이 신학문 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현대식학교 건축을 계획하고 합심 노력하였다.
마봉산 기슭 진해시 마천동 157번지에 교무실 1칸, 교실 6칸의 기와집 교사를 문석윤 200원, 배익하 200원 그리고 전 면민이 양곡을 각출하여 제1차로 사립 계광학교를 신축한 것이 1908년 이전 일이다. 4년제 초등과와 2년제 고등과(중학과정)를 병설하였으며, 여성교육을 위하여 초등과에 여자부를 병설하였다. 문석윤, 이병두가 교장을 역임하다 아일랜드인 선교사 심익순과 호주선교사 라대벽 등의 도움을 받아 일제로부터 학교를 정식인가 받은 것이 3년 후로 보이며, 김창세 교장을 초빙하여 학교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 진 것으로 사료된다. 개교 10년 후 독립만세운동으로 교사와 학생은 2~3일 동안 모조리 진해헌병 본부로 잡혀가 고문과 조사를 받고 일경의 탄압에 의하여 학교는 4~5개월 동안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으로 더욱 향학열이 불타오르고, 지원자가 날로 늘어서 학교 수용이 한계에 다다라, 넘치는 학생을 마천교회와 소성재를 빌려서까지 수업하다가 학교의 확장이 필요하여 1921년 교장 김창세가, 외국인 선교사 맹호은 씨를 설립자로 하고 웅동지역 선각자 대표 배익하 씨로 기성회를 조직하여 140여명에게 기부금을 받고, 마천동144번지에 넓은 터전을 닦아 격식에 갖추어 제2차로 8 학급짜리 새로운 교사(校舍)를 지었다. 새 교사 건축으로 인해 경영난에 부딪혀 1922년 8월 배재황에게 의뢰하기도 하였으나 부채를 감당 못한 김창세 교장은 2선으로 물러나고 배익하가 후임교장 맡았다. 그러나 그도 경영난을 해결 못하고, 졸업생으로 조직된 교우회에서 학교경영을 전부 인수한 후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학생을 가르쳤다. 1930년 ‘항일격문사건’으로 4명의 교사가 구속되었고, 감독청의 10월 휴교 명령으로 인근으로 전학하기도 하였지만, 형편이 안 되는 청소년은 공부하고자 소사동 김영준 댁 고가 서당(야학당))에 모여 공부한 것으로 사료된다.
○ 계광학교(啓光學校)의 정신
계광(啓光)이란 “빛을 연다.” “빛을 인도한다.”는 뜻인데, 을사늑약(조약)으로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신교육(과학기술)을 통하여 국가를 재건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신을 내포한 것으로 계몽정신(啓蒙精神)과 일맥상통한다. 민족운동의 터전인 동시에 민족교육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사립 교육기관의 교육정신은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양성과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항일운동의 지도자 양성이 그 목표였다. 이 학교도 전국으로부터 수학, 영어, 물리 ,화학 등을 담당할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였다. 평안도 태생으로 임창문(任昌文), 이경학(李慶鶴), 이귀선(李貴善), 김용현(金龍炫) 등의 오산학교 졸업생이 와서 근무했었고, 김창세, 주기용(朱基瑢), 배재황(裵在滉)도 향토 사람으로서 오산학교에서 공부하고 깊은 인연이 연결되어 오산출신 인사들의 왕래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남강 이승훈의 정신이 이곳에서도 불타오르게 되었고, 운영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학교에서 한국 역사나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하지 못하게 감시가 계속 되었으나, 항일교육과 한국역사와 글은 은밀히 지도했고, 마을복습공부방을 많이 이용했다. 마을 공부방은 상급생의 책임 아래에 3~4명씩 가정기숙사를 운영하여 공부하도록 마련했다. 기상나팔소리나, 학교종소리로 함께 일어나면 냇가에 나가 체조하고 세수한 후 민족의식을 심는 기도와 애국가를 부르고 하루생활을 시작했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또한 상급생들도 함께 공부하며 학습에 전념했다. 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고등과정(중학교)이 개설되어 있어서 타 지역 보통학교 졸업생이 유학을 와서 공부하는 학생이 많았다. 교사들은 야간에도 순찰 지도했다. 그들은 스승이면서 민족지사여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조국의 광복이라는 비전을 학생들의 가슴에 심어주었고, 단군 탄생일과 같은 개천절이 되면 가까운 절간 깊은 산 속이나, 마봉산으로 학생을 인솔하여 기념식을 가지고(애국가를 4절까지 부름), 준비한 음식과 떡을 나누어주었다. 은밀히 민족혼을 불어넣는 교육, 애국애족사상 고취에 주력했던 교육이었다. 부강한 나라, 힘 있는 민족, 국권회복에 바탕을 둔 항일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학교가 일제의 휴교명령에도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강행했고, 3․1독립만세운동,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격문사건, 웅동적화비사(熊東赤化秘社)등의 핵심으로 계광학교 교사, 학생, 졸업생이 등장한다. 박응섭은 이것을 ‘문화적 민족적 선구자의 투쟁 정신’이요 ‘계광정신(啓光精神)’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 윤강회(輪講會)
장지연 선생의 제안을 김창세 교장이 수용하여 학생들에게 시국 문제에 대한 감각도 익히고 연단에 세워 발표시켜서 함께 토론하도록 하는 지도자 훈련이 윤강회를 통하여 진행 되였다. 한편 인근에는 일제의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로서 경명학교(안골), 개통학교(웅천) 가일학교(천가면 동선) 보성학교(천가면 천성) 대정학교(진해) 합성학교(김해) 창신학교(마산)가 연합하여 윤번제로 강연회 행사를 가져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칭찬과 격려로 민족정신 고취와 학술연마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모이기 쉬운 웅천, 웅동, 천가 등 진해지역 학생들은 매 토요일마다 강연회 행사를 가져서 실력을 다져 나갔다.
다음은 윤강회 때 어느 연사의 웅변원고의 일부분 입니다.
“지금이라도 슬기롭게 깨어나기만 한다면 우리의 살길은 있을 것입니다.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과 뜻을 뭉쳐야합니다. 힘이 없음은 무지해서입니다. 배워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을 알고 일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배우는 일에 힘씁시다.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조국을 다시 일으키는 일꾼이 됩시다.”
․계광학교 교가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 우리임 주 / 반도를 긍휼하고 광명한 빛 주사 / 세웠네, 한 학교 계광 학교.
․계광학교 경치가
1절 어두운 밤을 밝히려는 아침 태양은 / 머금고 토하는 듯 마봉산 밑에 /
청아하게 울려오는 가락 소리는 / 만민의 왕 메시야를 찬양 함이라.
2절 현관 앞에 달린 종이 원을 따라서 / 동서문에 떼를 지어 나오는 아침 /
가슴속에 가득한 것 사랑 두자요 / 밖으로 드러난 것 면강(勉康)이로다.
3절 두 팔을 어깨에 서로 걷고서 / 소근 소근 귀에 대고 말하는 모양 /
상긋 방긋 정의 향기 입에서 나고 / 상긋 방긋 웃는 얼굴 눈에서 난다.
․계광학교 개교기념일 노래
시월 20. 오는 날은 우리 학교 나시신 날/
기쁘고 기쁘다 우리의 학교 나시신 날.
○ 3․1독립만세운동과 검거, 투옥
웅동․웅천․천가․진해 그리고 김해지역까지 계광학교의 고등과로 학생들이 모였고, 3․1운동의 핵심도 계광학교였다. 교사는 주기용, 허 전, 이창문, 이경학, 박남정 등으로 모든 준비를 은밀히 했고,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다 투옥 당했으며 망명하였다. 배재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서울에 올라가 국내외 정세를 살피고 지인들을 만나서 독립 쟁취 의사를 밝혔다. 독립 쟁취를 위해 경남 일대의 책임을 맡고, 복사기(謄寫機)를 구입하여 도보로 돌아오면서 조직을 만들었으며, 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를 복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2월 하순 웅동에 잠입하여 대장동 236번지 이두용 씨(배재황의 외사촌 매부) 집 부엌방에 복사기를 숨겨 두었다. 밤마다 허 전과 주기용을 데리고 와 태극기 600매와 독립선언서 2,000매를 복사하여 숨겨 놓고 갔다. 한편, 학생을 통해 소치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보급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총각 낭군 주려고 구운 떡을 / 독립군 오도록 기다리네. / 조선의 독립 다 되었네.
암흑의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길은 우리민족의 민심 결집에 있고, 자손만대 번영을 위해 이 한 몸 죽는 것은 민족의 영웅이 되는 것으로, 반드시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의지를 백성들에게 심어야 한다. 이것이 희망이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알리고 일제의 대응상황을 살폈다. 세상에 민심부터 확고부동하게 사로잡아야 한다. 민심이 집결되지 않고, 의지가 부족하면 배신자가 생겨나고 그들이 사전에 밀고하면 허사가 된다. 구성원 모두가 독립을 향한 의지가 성숙할 때 독립만세 운동은 가능하다. 웅동은 허 전, 웅천은 주기용, 진해는 문이문(文二問), 상남은 배중세(裵重世), 김해는 강성문( 姜成文)으로 장유 등에 협력자를 얻어 독립만세운동을 맡겼다. 당시 배재황은 승복이나 하인배 복장으로 전국으로 복사기를 가지고 다니며 은밀하게 활동했다.
1982년 12월 1일, 경남신문은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중부경남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사료발굴이란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계광학교 학생이었던 정일천은 “마을의 공부방에서 상급생들이 수군수군하는 것을 보았다.” 또, 조장원은 “주일에 교회에서 주기용 선생님이 선언서를 읽으면서 언젠가는 거사를 할 터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고 그때 일을 회상하였다.
1919년 4월 3일, 거사당일은 날씨가 청명했다. 300명의 교사와 학생, 주민들이 운집한 사립 계광학교 운동장에서는 ‘독립선언서’가 힘차게 낭독되자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경청하고, 뒤이어 다 같이 외치는 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자 주변을 맴돌던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함께 외치는 등 그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군중들은 마치 갇혔던 봇물이 터져 흐르듯이 거의 미친 듯이 길을 두고, 산과 들을 메우면서 노도와도 같이 마천 냇가 장터를 지나고 소사에서 면장을 설득하여 합세하게 했다. 수원지를 지나 평발고개를 넘어 헌병 분대가 있는 4km 남짓한 웅천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결국 성난 백성들과 일제헌병이 마주쳐서 많은 부상자를 냈다. 군중은 이날 오후 2시 30분경 해산되고, 주모자격인 수십 명만 체포되어 일본 경찰(憲兵)에게 압송되었으며, 주기용을 비롯한 학교관계자들 몇 명은 그 뒤 며칠사이에 모조리 검거되어 진해헌병 본대로 이송되어 갔다. 검거된 선생과 학생 등 모두 32명이 체포되어 조사 받았다. 그들은 마산 형무소에 13명이 수감되어 6개월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우리 지역의 선조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이들 독립투사들이 만기 출옥하는 당일에 면민들은 가마를, 학생들은 제등을 준비하여 40리 되는 진해까지 가서 모셔오는 등, 민족 영웅들의 노고를 깊이 사례하는 축제를 가졌다.
이 고장의 선열들의 드높은 뜻을 우리의 가슴에 새겨오던 중, 그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민족자존의 고귀한 역사와 전통을 일깨우는 국민정신교육의 도장으로 삼고자 성창근 웅동중학교 제3대 교장의 노력으로 1982년에 웅동 3․1독립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완성)가 3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국비․도비․시비와 애국지사의 후손 및 이 고장 출신 인사들의 성금으로 1986년 6월 1일 착공하여 동년 8월 15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웅동 3․1독립운동기념비는 당초 마천 냇가( 소사천과 대장천 합류지점)에 세우고자 했으나 물가라는 점에서 반대의 소리가 컸고, 웅천과 웅동 중간지점 평발령, 현재 한국전쟁기념비가 건립된 그 장소도 거론되었지만 마땅한 장소로 미흡하여 다시 장소를 찾은 곳이 지금의 기념비기 세워져 있는 두동 의곡(구 국도 2호선)의 도로변이다. 이 비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여기, 우리민족의 강렬한 조국독립의 함성이 메아리친 역사의 고장
1919년 기미년 4월 3일
일제의 서슬 시퍼런 총칼 앞에 누구도 굴하지 않았다.
주기용, 이부근, 김일성, 배종인, 이동개, 정운조, 문석주, 김병화 그리고 이 고장의 3000 여 애국지사들….
그 애국심, 그 절개, 그 의기는 억겁을 두고 겨레의 가슴속에 등불이 되리.
○ 국치일의 두 차례 격문사건
1930년 8월 29일 국권피탈 20년을 맞이하여 “국치일을 기념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 약소민족은 일어나 크게 싸우자!”는 내용의 유인물이 3일에 걸쳐 용원과 웅천에 뿌려지고 포스터를 붙인 일이 발생하였다. “오늘은 8월 29일 망국기념일. 아~, 불행한 사회. 약소민족은 각성하라!” 또,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일본제국주의 파멸. 조선혁명 만세! 오늘은 8월 29일, 망국기념일을 잊지 말자! 우리들의 무기는 단결뿐, 궐기하여 싸우자!”
광고지 100장을 만들어 대중의 눈에 잘 뜨일 일곱 곳에 붙이고, 1930년 9월 21일 용원동에는 “진해만에 입항한 일본의 제1함대는 우리 국민을 위압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는 겁내지 말 것이다.” 등으로 되어 있어서 경찰이 계광학교 교원 조맹규, 조원갑, 조정호, 조명진 등 4명과 배익봉, 주재형, 이준도, 박남성, 서도명 등 을 호송하였다. 계광학교 교원의 구속으로 학교의 교과경영이 어렵게 되었다. 웅동지역에서 기미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한 사람들이 계광학교 교원들이어서 주목하고 있던 경찰은 격문사건에 4명의 교원들이 관련된 혐의를 가지게 되자, 좋은 기회로 삼아 학교에 압력을 가하고 휴교령을 내려 자격교원을 채용하지 아니할 때는 개교를 못하게 하였다.
○ 웅동 적화비사
1934년 10월 12일 부산경찰서고등계 형사가 와서 많은 청년남녀를 조사한 뒤 14일과 16일 19명을 호송하였다.(남자 : 김창세, 조맹규, 조원갑, 백태수, 백태식, 김창업, 조동규 / 여자 : 조맹임, 조영임, 조효순, 조남이, 조다순, 조명순, 김복남, 김정선, 배동순, 박순남) 17일에도 부산으로 호송된 사건(이승종, 김잠진)으로 동아일보 11월 보도에 의하면, 적화사건에 조맹규의 한 가족이 중심이 되어 적색사상을 주입 선동하고, 부산에 조선방직회사와 진해에 동양제사공장에서 뿌리를 내리는 조직으로 조사하였다. 부산, 마산, 대구, 진해, 밀양에서 60여명이 다 검거되었는데, 그 중에 웅동의 처녀만 30명이라고 했다. 경남적색교원노동조합 이명상 사건도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을 일제는 공산화 운동으로 몰아 혹독하게 다루었다. 항일운동은 비밀결사 조직으로 농민노동조합 등 계광학교 출신 선배들의 활약이다. 농촌복지(물산장려)와 계몽운동이 있었고, 해방이후 사립 계광학교에서 이 민족과 건국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 많이 나왔던 것이다.
○ 체육 대회
매년 여름방학 때면, 운동경기를 통하여 강건한 체력과 높은 기상을 배양하고자 외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교 측과 협력하여 경남 축구대회를 계광학교 교정에서 개최하였고, 또한 각 학교로 순회하면서 실시하기도 했다. 김해 합성 학교, 마산 창신 학교, 진해 경화․대정 학교, 웅천 개통학교가 참가하는 친선경기에서 계광학교가 우승하는 등 웅동 청년들의 기상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활발한 축구대회 활동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좋은 전통이 되어, 이 지역 친목의 밑거름으로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웅동중학교 교정에서 부락별 축구경기가 개최되었다. 1998년 웅동중학교가 두동으로 이전한 후에는 남양동 체육공원에서 경기가 개최되고 있다. 계광학교 축구응원가(배재황 작사)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계광학교 축구응원가
날세라 굳세라 쾌활용사들 / 받거나 차기를 번개같이 빠르게/
바다면 건널 뿐 산이면 넘을 뿐 /
언제나 언제나 우승은 내 것 / 나가라 싸워라 계광 건아야/
범같이 덤벼라 월계관 얻도록 / 플레이 플레이 계광.
○ 사립 계광학교가 남겨 놓은 것
사립 계광학교의 발견은 향토문화사연구의 작은 시작이다. 그때 교장 김창세와 교사들, 졸업생의 인물 연구를 통해 더욱 찬란한 계광정신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계광학교 출신의 기라성 같은 인물로는 이병상, 이병일(의학), 배길기(예술), 문광술(육종), 정일천(의학), 주기용, 김병진(국회의원), 김동진, 김영순(일본사시), 김달진(문학) 등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광복이후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배종협(장군), 대학의 신흥구 외 40여명의 교수와 학장과 박 일 교육장, 이병화, 서흥석, 이학윤, 이상복, 장천실, 이병길, 배의구, 이정희, 박준규 교장 등은 후학들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광복직후 혼란과 빈곤 속에서도 장영실은 경남 1호로 고등공민학교를 인가 받고,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무상 교사와 학생 46명이 지원 입대하여 학도병으로 출전한 학교이다. 나라가 침략을 받아 위태로울 때 앞장서는 학교로서 전상자만 18명이나 된다. 국가적 수난에 투철한 애국정신과 확고한 행동으로 목숨을 바쳤다. 이는 우리 지역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크나큰 자부심이자 자랑의 하나이다.
○ 우리의 다짐과 자세
우리지방에 신라의 고찰 성흥사가 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 때 승리한 안골포, 웅포, 학포 해전지에 이순신 장군의 얼이 살아있다. 그때 왜군이 침략해와 축성한 안골, 남산, 명동에 왜성이 남아있다. 이는 국력이 쇠약했던 치욕의 증거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으로 웅천읍성과 함께 복원되어야 할 역사적 현장이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진해의 혼을 심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와 진해의 정신을 더 발굴하고 다듬어 자기 주도적인 시민정신으로 승화, 계승 발전해야 하겠다. 진해사랑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국제적인 비전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발굴과 교재를 발간하여 진해인의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해정신문화원’의 설립이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신항만은 무궁무진한 해양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바다를 통한 물류중심도시로서 자원개발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력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아울러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 시점에서 후세 교육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유비무환의 자세로 힘을 길러 조국의 밝은 미래를 이룩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국의 정신문화를 부활시키고, 우리를 알고 세계를 아는 향토사랑과 긍지를 심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배명창 편, <우호산고> 1967
2. 정일천, <의료반세기> 1980
3. 강병선 편, <김달진 시 전집> 1997
4. 박응섭, <웅동중학교 학교경영안> 단기 4290년(1957)
5. 황정덕,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2004
6. 황정덕, <진해시사>(향토문화연구) 1987
7. 시사편찬위원회, <진해시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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