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姓名) 배중세(裵重世) 본관(本貫) 분성(盆城) 시대(時代) ?~1944년 자(字) 호(號) 단정(丹丁) 이력(履歷) 배중세(裵重世) 분성파 1895~1943(고종~) 호(號)는 단정(丹丁)으로 분성군(盆城君) 휘(諱) 원룡(元龍)의 22세손이며 휘 기홍(基洪)의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1919년 11월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등 동지(同志) 12명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抗日)무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1차 행동목표로 밀양(密陽)경찰서(警察署) 폭파계획을 추진하였다. 1920년 3월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다가 동지 곽재기(郭在驥) 등은 붙잡혔으나, 폭탄을 받을 사람인 공과 김병환(金鉼煥) 등은 붙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1925년 이른바 의열단원 양건호(梁健浩)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는데, 검거된 이유는 양건호(본명 李鍾巖)가 1925년 9월 입국(入國)하여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던 중 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는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 숨어 있도록 알선한 때문이었다.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43년 1월 예비검속으로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이듬해 1월 옥사(獄死)하였다. 1963년 대통령(大統領) 표창(表彰)이, 1977년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되었다. 배위(配位)는 김해김씨이며 진사(進士) 달근(達根)의 따님이다. 슬하에 장남(長男) 만갑(萬甲), 차남(次男) 천갑(天甲), 삼남(三男) 창갑(暢甲) 등 3남을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창원시 외동 당북산에 있다. <밀양시 역사속의 인물> 성명 배중세 한자 裵重世 시대 ?~1944년 비고 독립운동가 일명 동선(東宣). 창원군 상남면(上南面) 토월리(吐月里)에서 태어났다. 고향 토월리(吐月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기미년 3월 독립만세시위때 만세운동에 나섰다. 1919년 4월 3일 그는 창원군 진전면(鎭田面)에서 수천 농민이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는데 참가하여 군중대열에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선도하다 일부 군중과 더불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헌병 여럿을 때려 눕혔다. 그러는 동안 증원되어 온 헌병 경찰의 무력제지로 군중은 해산당하고 주동하여 선두에서 행동하던 사람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배중세는 경찰의 검거망을 피하여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만주로 망명하였다. 도중에서 밀양친구 윤세주, 윤치형을 만나 조국독립을 위해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길림으로 발길을 향하여 수도(水都)라 불리는 길림의 거리를 방황하다 황동규, 한봉근, 김원봉 등을 만나 의열단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1920년 의열단에서 폭탄을 국내로 들여올때 같이 활동하였으며 밀양에서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계획도 도와주고 서울로 가서 양건호, 곽재기, 윤세주, 윤치형 등과 함께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식산은행(殖産銀行)등의 정보를 살피다 미연에 경기도 경찰에 탐지되어 1920년 체포되어 1921년 3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여 의열단의 새로운 의거사업에 참여하여 국내 공작임무를 띠고 국내로 돌아와 대구부근 달서면 노곡동에서 양건호와 동거하며 정보교환을 하며 기회포착을 노리다 기습한 경찰에 검거되어 소위 "경북 폭탄사건"으로 1926년 12월 23일 징역 3년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광복이 될때까지 싸우기를 다짐한 배중세는 두번째 형기를 마치고 왜경의 독한 눈초리를 피해가며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43년 1월 다시 체포되어 구금되어 거듭되는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중병을 일으켜 1944년 1월 23일 대구형무소 감방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광복된 조국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지사 배중세 | 배중세지사 2008/04/16 17:51 창원의집(h9567) http://memolog.blog.naver.com/h9567/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