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磎先生文集 | ![]() | ||
端磎先生文集卷之十 | |||
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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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溪安公憙文集跋
士生天地間名流乎當時風振乎百代豈徒然哉蓋亦有本焉學問 根基以爲主於內事業英華
以發見於外易曰美在其中而暢於四 支發於事業美之至也余閱竹溪子遺稿詩文諸作渢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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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時之聞人遊雖爲親肄擧業而知學有內外輕重之分以窮理復 性爲主造詣旣深見識益廣
負當世重名二十七司馬三十五別試 文科壬辰東方大擾倡起義兵於金海遏截賊昌原往來
路大小凡 百餘戰輒破走之旣而丁外憂雖在干戈擾攘之中以禮克襄大事 翌年春收燼餘
四百人赴晋陽晋陽陷三子俱死遵父遺命入興州 白雲洞中以避亂訪先世遺蹟與旁近賢士
大夫相從其感憤憂愁 壹鬱不平之氣一於詩文發之亂定歷典州邑六十三以大丘都護 府
使在官卒此公之平生履歷大槪也嗚呼公抱負經濟早歲蜚英 處家則以修身學問爲急當亂
則以忘身殉國爲志居官則以克己 濟物爲務落落不屈節求合於當路以故沈於下僚而止然
其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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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亦可見公議之愈久不泯也然則事 業之於人爲大詩文特末耳或者以事業爲粗迹余特悉
著于篇云
1551(명종 6)∼1613(광해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언우(彦優). 호는 죽계(竹溪). 아버지는 형조참의 공진(公
軫)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택(宅)의 딸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수학하여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
문원정자·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 뒤 형조정랑·어모장군(禦侮將軍)·장단부사·단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대학』과 숙마(熟馬)를 하사받았고 군민들이 거사비(去思碑)
를 세우기도 하였다. 언제나 충효(忠孝) 2자를 내세워 모든 사물에 결부시키는 실천
위주의 학문을 하였다
. 1824년(순조 24)과 1832년에는 지방사림에 의하여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와 함안
의 두릉사(杜陵祠)에 각각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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