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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상

자라가슴 2018. 5. 27. 23:10

죽산 안전(安戩, ?-1298)과 그 후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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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와 고려사 절요의 안전(安戩) 기록
죽산 안전(安戩, ?-1298)의 처가 청주한씨 가계
안전(安戩) 문과방목 : 원종(元宗) 미상(未詳)년

죽산 안전(安戩, ?-1298)의 손자 안국서의 처가 문화유씨 가계
高麗後期 淸州韓氏家 人物의 政治活動

청주한씨세보 [淸州韓氏世譜 1949] 한강(韓康) 사위 안전(安戩 : ?~1298)
安戩 竹山人 政堂文學 父中郞將 洪祉
安惟忠 代言 安惟儉 都監判官 安惟敬

안전(安戩)의 4촌 매부 정가신(鄭可臣, 1224~1298)의 가계 : 나주鄭씨
정가신(鄭可臣)은 안전의 숙부 안홍우(安洪祐)의 데릴 사위로, 고려사에 열전이 있다.

안전의 처가 청주한씨나, 4촌 매부 정가신 집안이 호남(나주)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안전도 호남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안전(安戩, ?-1298)은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안영의(安令儀) 계]로 복야공의 증손이다.
    安令儀(古名 令弼, 追封尙書左僕射 上將軍)
    - 世亮(又云兵部郞中檢校軍器監行試尙書員外郞兼三司判官一云尙書戶部郞中賜紫金魚袋)
    弘祉(弘祥의 弟)
    - 전(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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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267), 역옹패설 (櫟翁稗說)의 안전(安戩, ?-1298) 기록

고전번역서 > 익재집(益齋集) > 역옹패설 전집 2(櫟翁稗說前集二)

밀직(密直) 안전(安戩)이 승지(承旨)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충렬왕이 환관 한 사람에게 참관(參官)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는 것을 공이 옳지 못하다고 고집하였다. 하루는 충렬왕이 공을 면대하여 타이르기를,
“이 사람이 나의 측근에서 부지런히 일한 지가 벌써 오랜 세월이 되었다. 경은 나를 위하여 억지로라도 6품의 벼슬을 주라.”
하고, 또 면전에서 그것을 쓰게 하니, 공이 부득이 낭장(郞將)으로 추천하였다.
조금 뒤에 공이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신은 재주 없는 몸입니다. 유악(帷幄)에 가까이 모시어 제품 전주(題品銓注)하는 일을 어찌 신과 같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현능한 이를 택하여 이 소임을 맡기소서.”
하여, 그 말이 몹시 간절하니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왕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니, 공이 또 그 뒤를 따라가 꿇어앉아,
“다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내일이면 마땅히 체대될 것이니, 내수(內豎)를 참관으로 추천하라는 명은 보류하시고, 후일을 기다려 주소서.”
하고 아뢰었다. 왕이 문지방을 넘어가다가 돌아보면서 성난 소리로,
“그리하라.”
하니, 좌우는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천천히 자리에 돌아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의견을 허락하셨다.”
하고, 드디어 참관 추천하는 일을 삭제해 버렸다.


이제현(李齊賢)과 안전(安戩)의 차남 유충(惟忠)은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의 증조부 국재(菊齋) 권부(權溥, 1262∼1346)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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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8권 > 경기(京畿) > 죽산현(竹山縣)
【인물】안전(安戩)
젊어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경상(慶尙)ㆍ충청(忠淸)ㆍ서북(西北) 삼도(三道)의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안초(安超)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叅判)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으므로 마음껏 진휼하고 공급하여, 한 지방이 그 덕으로 온전히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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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운(趙從耘,1607-1683)의 씨족원류(氏族源流)나 (구)죽산안씨 족보에 보면 그의 후손이 고려말 ~ 조선전기까지는 상당히 많았으나, 그 이후 끊어져 있다. 후손이 이미 상당히 많아진 단계에서 그 후대가 실제로 끊어지기는 힘든 것 같으므로, 후손은 있으나 계보를 잃어버려 다른 파나 본관으로 잘못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는 것 같다.

안전의 외손 쪽 후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7대손 안팽수(安彭壽)는 1492년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실록에 1496년부터 무려 93건의 기록이 나오는데, 1519년 황해도 연안부사에서 면직되는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안팽수의 사위가 판관(判官) 정유침(鄭惟沈)이고, 외손자가 유명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다. 송강(松江)은 안전(安戩)의 외9대손이 되며, 광주안씨 풍애(楓崖) 안민학(安敏學, 1542∼1601)과 종유하던 사이로, 그 후손들 간에도 근대까지 세교가 이어졌다.

참고 : 고전번역원 송강집 (松江集) 해제의 가계도

유계(兪棨, 1607-1664)의 시남집(市南集)에 실린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 행장에는 신죽산 안씨 시조 안원형(安元衡)이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안전(安戩, ? -1298)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는 1800년 무렵 안원형이 순흥 안목(安牧, 1290-1360)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이전에 안원형의 선조를 언급한 드문 기록으로, 사실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工曹參議安公行狀
    市南先生文集卷之二十四 行狀 三首 (한국문집총간 117_355a)

    公諱邦俊。字士彦自號氷壺。門人稱之爲牛山先生。安氏係出竹山。遠祖諱戩。以剛直著名勝國之世。十代祖諱元衡門下侍中。封竹城君。....

    먼 윗대 선조의 휘는 전(戩)인데, 고려시대(勝國之世)에 강직(剛直)하기로 이름 높았다.(遠祖諱戩。以剛直著名勝國之世。
위에서 승국(勝國)이란 말은 "이겨서 멸망시킨 나라"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고려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안전이 강직하기로 이름높았다고 한 것은 실제 고려사 열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1864년 간행된 안방준의 문집 은봉전서(隱峯全書) 부록(附錄下)에 실린 동일한 행장에는 [遠祖諱戩。以剛直著名勝國之世。] 부분은 없다.
    隱峯全書附錄下 [行狀] : (한국문집총간 081_535b)

    行狀 市南兪文忠公棨撰 

    公諱邦俊。字士彥。自號氷壺。學者稱之爲牛山先生。安氏系出竹山。十代祖諱元衡。門下侍中。封竹城君。....
아래는 안전과 그 후손에 관한 기록들이다.

● 안전(安戩 : ?~1298)의 계보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안영의(安令儀) 계]
安令儀(古名 令弼, 追封尙書左僕射 上將軍)
- 世亮(又云兵部郞中檢校軍器監行試尙書員外郞兼三司判官一云尙書戶部郞中賜紫金魚袋) -
- 弘祉(弘祥의 弟) - 전(戩) - 惟忠 - 國祥 - 女.(손경룡, 楊之壽, 信和宅主)

  • 죽산안씨 복야공파 고려 - 조선초 계보
    令儀-
    世亮-
    洪祥-
    永年-
    社-
    玹-
    受禔-
    僕射公派(諱 令儀)
    曾-
    季仁-
    -
    邁-
    迢-
    子誠-
    牧使公派(諱 子誠)
    子謹-
    進士公派(諱 子謹)
    子諴-
    別提公派(諱 子諴)
    子訢-
    子謙-
    縣監公派(諱 子謙)
    子詮-
    司果公派(諱 子詮)
    适-
    逑-
    山陰公派(諱 逑)
    洪祐-
    洪祉-
    戩-
    惟儉-
    惟忠-
    惟敬-




  • 오늘날 (구)죽산보에는 안전(安戩 : ?~1298)의 세 아들 유검(惟儉), 유충(惟忠), 유경(惟敬)의 후손은 모두 끊어진 듯 하나, 아들 유충(惟忠)이 권부(權溥, 1262-1346)의 사위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손위 동서이며,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유씨 가정보에 권부의 외손 쪽 후손으로 얼마간 나온다. 유충(惟忠),의 아들 국서(國瑞)는 문화유씨 유배(柳培)의 사위로 역시 문화유씨 가정보에 나온다.

    안동권씨 성화보 權溥-安惟忠- 國瑞 - 景 
    문화유씨 가정보 (1565) - 권부/안유충 후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 1565) : 유성비(柳成庇) - 유식(柳湜) - 유배(柳培) - 女: 안국서(安國瑞)
    가정보 안국서 후 :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v1] 68b
    안분 ~ 안팽수 :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v5] 17b=
    정유례 사위 안팽수 :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v5] 36b=
    安愼 : 녀 黃련 -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v10] 2a=

    (구)죽산안씨 분파도 참고

    아래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장모와 장인 묘지인데, 맏사위로 안전(安戩)의 차남 안유충(安惟忠)이 나옴. 안유충의 관직은 밀직우부대언(密直右副代言, 1344)과 대언(代言, 1346)이다.

    권부처유씨묘지명(權溥妻柳氏墓誌銘) : 변한국대부인 유씨 묘지명 병서 (卞韓國大夫人 柳氏 墓誌銘 幷序) 1344년

    권부묘지명(權溥墓誌銘) : 추성익조 동덕보리공신 삼중대광 수문전 대제학 영도첨의사사 사영가부원군 증시 문정 권공 묘지명(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三重大匡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永嘉府院君贈諡文正 權公墓誌銘) 1346년


    가정보에는 권부-안유충의 아래로 안국서의 후손은 나오나, 유배의 외손쪽으로는 무후로 되어 있다. 아마 유배의 딸이 안국서의 첫부인으로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안전의 아들 중 안유충은 장모가 문화유씨라 가정보에 후손이 수록되어 전하지만, 다른 두 아들은 후손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 같다. 조종운(趙從耘,1607-1683)의 씨족원류(氏族源流)의 안전 후손 계보는 가정보의 것을 전재한 것으로 한곳에 모아놓아 보기가 편하다. 안유충의 후손은 1500년대 중반까지 자세히 나오는데, 주요 부분은 표와 같다. 그 아래에 씨족원류의 해당부분 전문 이미지를 첨부한다.


    안전(安戩) - 유검(惟儉) - 경(敬)
    - 유충(惟忠) - 국상(國祥)
    - 국서(國瑞) - 경(景) - 芬 - 仲善 - 계성(繼性)- 팽수(彭壽)-女:정유침(鄭惟沈)
    - 舜壽  
    - 聃壽  
    - 崇壽 - 愼
    - 得貴 - 尙之 - 永昌 - 집(緝) - 정(禎), 祺, 福
    - 희(熙)- 世佑, 世佐, 世傑
    - 克昌 - 유(瑜)- 智, 義, 仁
    - 자창(自昌)- 구(璆)- 응정(應禎)
    - 永貴
    -女:金珠慶-女:王瑜-女:安處-安堡
    - 유경(惟敬)


    순흥 안보(安堡)는 죽산안씨 안중로(安仲老)의 아들 안소지(安紹之)의 사위

    안전(安戩) 문과방목 : 원종(元宗) 미상(未詳)년
    안전(安戩) 7대손 안팽수(安彭壽) 문과방목 - 1492

    정유침(鄭惟沈)의 아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8고조도 :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안전(安戩)의 외9대손
    정철은 중종 31년(1536) 음력 12월 6일에 현재 서울 자하문 밖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유침(惟沈)과 죽산 안씨(竹山安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태어날 때 부친은 영돈령판관이었고, 위로 자(滋), 소(沼), 황(滉) 세 형과 두 누이가 있었다. 큰누이는 인종(仁宗, 1515년~1545년, 재위 1544년~1545년)의 후궁인 귀인정씨(貴人鄭氏)이고, 작은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었다. 따라서 송강은 철부지 소년시절엔 누나를 만나러 대궐에 들어가서 자주 놀았다. 대궐에 들어가면 세자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 뒤에 )의 소꿉친구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에 따라다녔다.



    안집 (安緝)
    안집의 아들 안정(安禎)의 사위 순흥

    안상(安瑺)-1派14世-찬성공파

    女 安禎 竹山人

    죽산인(竹山人) 안정(安禎) - 안국서 후손, 안집의 아들

    http://cafe.daum.net/ahnjustice/O2CO/137

    안유 (安瑜)
    안유의 아들 安仁 의 사위 순흥안씨 안규
    http://cafe.daum.net/ahnjustice/O2CO/137

    안규(安珪)-1派14世-서파공파
    配 竹山安氏 父參奉 安仁  (안국서 후손 安克昌의 손자 安仁)

    http://botw.egloos.com/1060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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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의 손자 안국상(安國祥)의 사위 양지수(楊之壽)의 5대손이 유명한 서예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다.

    양기(楊起) - 양지수(楊之壽) - 양진(楊震) - 양치(楊治) - 양제달(楊悌達) - 양희수(楊希洙)  - 양사언(楊士彦)


    조선초기에 청주양씨 인물중에 양천록(楊天祿)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사위에 대하여 알고자 합니다.

    양천록의 아버지는 상서(尙書) 안국상(安國祥)의 사위로 찬성(贊成) 양지수(楊之壽)라는 인물입니다. 양지수(楊之壽)는 양천식(楊天植:典書), 양진(楊震:典書), 양천록(楊天祿:檢漢城)의 세 아들과 노왕궁주(魯王宮主), 이중화(李仲華:判書로 无后), 최유(崔裕:判書), 최운해(崔雲海:參判, 通川人, 右議政을 지낸 崔閏德의 아버지)에게 출가한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양천록(楊天祿)은 검한성(檢漢城)을 지냈으며 그의 사위로 이춘영(李春英:星州人, 胡簡公 李思芬의 아들, 司直), 라효순(羅孝順:丞), 안수희(安壽希:縣監), 원덕수(元德秀:原州人, 上護軍 元訓의 아들, 司直), 신유(辛裕:司直)를 두었습니다.


    http://www.yangga.com/cgi-bin/yangga/read.cgi?board=l_qa-1&nnew=2&y_numb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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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치(楊治)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퇴은(退隱). 증조할아버지는 도첨의 시중 양기(楊起)이며, 할아버지는 찬성사 양지수(楊之壽)이고, 아버지는 경안공(景安公) 양천진(楊天震)이다.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꼽히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아들이다. 세종단종의 유모였던 양혜빈(楊惠嬪)의 숙부이기도 하다.


    양기(楊起) - 양지수(楊之壽) - 양천진(楊天震) - 양치(楊治) - 양제달(楊悌達) - 양희수(楊希洙)  - 양사언(楊士彦)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5001014


    양순달(楊順達)
    부(父) : 양치(楊治)
    조부(祖父) : 양진(楊震)
    증조부(曾祖父) : 양지수(楊之壽)
    외조부(外祖父) : 조곤(趙琨)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57_001111&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양억(楊億) : 양지수 손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26_000491&isEQ=true&kristalSearchAre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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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의 후궁 혜빈 청주양씨 [惠嬪 淸州楊氏] : 양지수의 증손녀
    http://blog.naver.com/hahnguibok?Redirect=Log&logNo=2016305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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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趙絅, 1586-1669), 용주유고(龍洲遺稿) > 龍洲先生遺稿卷之十五 > 墓碣

    府使蓬萊楊公墓碣銘 幷序 a_090_266b
    ...........
    先生諱士彥。字應聘。號蓬萊。又號海客。其先本漢太尉楊震之后。七世祖起。當元成宗時。以相國陪齊國長公主釐降高麗。忠宣王封上黨伯。故爲淸州楊氏。有諱振。入國朝錄開國功。爲工曹典書。先生高祖也。是生諱治。爲黃海節度使。節度生諱悌達。宣敎郞。生諱希洙。敦寧主簿。主簿娶僉090_266d使文化柳湋之女。生先生及二季士俊,士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