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순흥안가의내력

자라가슴 2010. 6. 5. 22:03

가. 순흥안씨의 시조와 내력

 

순흥안씨 시조공은 고려 신종때 흥위위 보성별장을 지내시고 훗날 증손 문성공 휘 향자 공의 유행으로 신호위 상호군 으로 추공받으신 휘 자미공 이시다.

시조께서 흥녕(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 지방에 사시게 된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정주하여 관향으로 정함으로써 본관이 순흥이 되었다.

그러나 시조공께서 언제부터 순흥에 정착하시게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족보와 현 실기등에 의하면 2세인 추밀공 선조가 1201년생으로 이에 근거하여 시조공께서는 1200년대 이전 순흥에 사셧고 , 1170년에서 1180년정도에 출생한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시조공은 장자 휘영자 유자 ( 추밀공 1파 ) 차자 휘 영화 (별장공 2파) 계자 휘 영린 (교서공 3파) 3자를 두시고 순흥 안문을 이룩하신지 고려이래 언 900년년이라.

우리 순흥안문은 30여대에 세계를 명문가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덕성 이후 3대로 봉군하고 5세에 걸쳐 휘호를 받았으며 3세 밀직부사 태사공 휘 선조부터 14세까지 12대 장자의 등과는 조선조 국조방목의 기록으로 우리 안문이 유일하며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화를 입어 더이상 기록이 이어지지 않는다.

주자의 유학을 이 땅에 창명하고 학교 설립과 장학 제도 ( 섬학전 ) 을 통한 국학지능과 동방성현 18현중 한분으로써 , 성묘에 배향되신 4대 문성공 회헌 휘 향 찬성사겸판전의사사 5세 문순공 죽옥 휘 우기 국문학사에 빛나는 고려가요 죽계별곡 , 관동별곡 을 지으시고,

원나라 제과에 형제가 급제한 6세 문정공 근재 휘 축 및 정당문학 문경공 휘 보 대재학 문숙공 겸재 휘 목 7세 대재학 문혜공 휘 원종

려말의 명현 거유와 려말 조선초 8세 행조전서 경질공 원을 비롯하여 중종 명종대에 전성기를 이루어 많은 명신(상신)과 석학이 나와

순흥안씨를 6대성(이.김.최.안.정.박)의 반열에 드는 대성으로 칭하게 되었으며,

조선조 열성종 (태종,명종.선조.인조.숙종.영조.정조.순조.고종.순종)의 보유를 입은 후예 입니다.

 

나.직장공파의 내력 및 입착 유례

 

9세 판서공 휘 종락께서는 1388년 문과에 등과, 임청군수, 혜주목사를 지내시고 이조참의에 선임되었으나 , 조선의 개국으로 망업의 절의를 지키고자 신흥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시서와 무를 도량으로 하며 , 두문동 유사 72현으로 비록동의 단원별약(농막)에서 생을 사시었으며 후일

정손인 휘 심 (공조판서)정민공 휘 당 (좌의정)의 유현으로써 이조판서로 승직 되셨다.

공은 4자 3여을 두셨는데, 3자이신 휘 수(1390년)께서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 사성 으로 재능이 뛰어나 군자감 직장에 이르렀다.

봉록에는 관심이 없어 부공사후에 관직을 접고 파주로 퇴거하시어 경연을 탐구하셨으며,

당시 문장과 덕행이 일대 명유들의 추앙을 받으셨다 한다. 묘소은 수원에 있었으나 란를 거치면서 실종되어 명조 을유년 (1765년)에 기단을

함안 입곡에 추설하고 후일 추모제를 건립하여 내년 10월 상순 (10월10일.음)에 제사를 모시니 오문의 파조이시고 후손들의 직장공파라 합니다. 공은 3자를 두셨는데, 장자에 교위공 휘 창공. 차자에 감찰공 휘창렴. 계자에 부솔공 휘창직 이시다.

파조이신 10세 직장공 휘수의 장자 교위공 (11세) 휘창공 께서는 조선 중종조에 충순이 겸 절교위로, 동생인 사현부감찰 휘창렴과 함께

파주(경기도 파주)에서 기묘사화 (1519년) 과 신사무옥 (1521년)에 사마친인 정민공 휘 당 (좌의정.사림의영수)의 녹좌로 저 기묘명현의 두분께서 화를 피해 가솔을 이끌고 낙향, 파산 , 산인( 함안모곡 ) 이거. 경전을 탐구로 음순하셨고 구 거비가 있다. 또한 부설공 휘창직께서는 강원원도 춘천으로 이거하셨다. 파조의 손자는 참판공 (12세) 휘 우 이시며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으로 정직 . 이조참판겸지의금부사 이다.

증손은 참의공 (13세) 휘 공진이시며 장사랑으로써증직 . 병조참의 이시다.

파조의 현손인 사헌부감찰 모헌공 (14세) 휘 민 (장자) 대구부사 죽계공 휘 희(차자) 5대손인 행초계군수 장암공 (15세) 휘 신갑 (장자) .입창조이신 행용량이부호군 휘 명갑(차자) 에 이르러 조선의 최대위기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만나 모헌공과 장암공 두 부자는 충효절의로 순절하셨으며 난이 평정된 후 차자이신 호군공 휘 명갑께서 조부 참의공과 맏형의 유지인 영남의 동쪽으로 피하여 집안을 보전하라는 명을 받들어 함안 모곡에서 창원의 남쪽 정병산 아래로 이거, 입창조가 되시고 퇴거하게 되셨다(1598~1599).

충효절의로 순절하신 사헌부 감찰 모헌공 휘민공께서는 3자 3녀를 두셨으며 장자에 장암공 휘 신갑. 차자에 호군공 휘 명갑. 계자에 휘 영갑 이시고, 장자와 계자는 무구하다.

모헌공께서는 1592년 임진년 봄 휴가를 받아 하향하여 김해 감로사에 있는 문선공 회헌 선조의 시판이 회상되어 장차 갱신하고자 감로사를 방문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갑자기 왜적을 만나 김해성이 합락된것을 알고 인근 감로사의 승녀 100여명으로 의병을 조직. 읍성으로 가다 왜장 흑전장정이 이끄는 적과 전투를 하여 입석강(김해 부산사이의 강) 상에서 순사하셨다.(1592년 4월 23일)

왜적도 충의에 감복해 순사자의 품안에서 각패를 확인 . 나무에 "조선국 충신 안민 이곳에서 사" 라고 쓰고, 각패를 걸어놓은 후 포대로 사신을 가리워 묻어 나무를 세워 표식해놓은 후 , 왜적들은 약탈과 상륙을 하여 지나갔다. 당시에 김해성이 합락되자 김해부사 등 관리와 관군,백성은 겁을먹어 항복하고 도망하여 흩어져 숨어버린 상황에서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싸우다 순절한 충절에 대해 왜적도 감복하여 병난의 만행중에도 충신에 대한 예를 갖춘것이다.

공의 장자 장암공께서는 모헌공께서 적에게 변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노승으로부터 전해듣고 김해 입석 강상을 찾아 살펴서 길옆에 나무를 세워둔 표식이 있어 확인해보니 각패가 걸려있고 부공께서 순절해 계셨다.

적수들의 짓을 통분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 함안 선령에 장례지낸후, 부공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복수하기로 맹세하셨다.

모헌공의 장자 행초계군수 장암공 휘 신갑 께서는 왜적들이 창원 칠원을 합락하고 약탈하자 고을의 수령, 장수들은 피난하기 바쁜 상황이었으나 오직 부공의 원수를 값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왜가인 고성에서 의병장 외삼촌 최강 최균 이종사촌 이달과 함께 창의 의병을 모집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기전 창원 웅천성 전투와 이후 고성 함안 사천의 왜적방어에 나서 수차례 대공을 세웠다.(난중잡록.임진전란사.선조신록.쌍충실기.임진일록 참고) 정유년 (1597년)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재차 침략을 해오자 병속들에게 산음 (산청지방)의 황석산성은 영호남 요충지로 굳게 지켜서 병란을 막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산음으로 전진, 부대의 전술을 취하기도 전에 엄청난 왜적과 전투를 벌이게 되어 끝까지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힘은 다하고 화살도 떨어져 병속들에게 이르기를 , 나라의 치욕을 씻고 부공의 원수를 값지 못하게 됨에 차라리 자결이 왜적에게 굴복 당하는것보다 낫다고 하시며 , 갑옷을 입고 칼을 쥐며 환아정 깊은 연못 속에 투신, 순절하셨다.

함주지와 산서록에는 당시 남도의 날센 효장 2인이 있엇는데. 정기룡과 안신갑 이라고 전하고 있다.

난이 끝난후 이 사실이 조정과 임금에게 알려지고, 선조대왕은 장예원판결사로 추정되고 , 장군의 충효를 후세에 전하고자 어필과 아버지와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었으니 , 충신을 구하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 하시고, 하 교문 여각을 내리셨다.

함안(함안산인) 신산리 소재. 또한 선조 38년 (1605년.4월.26일) 도성지 신음에게 왜난의 무공이나 공적이있는 사대부와 천민도 책훈토록 하여 그 공을 후세에 전해 영광을 누리도록 하라는 의병을 교시 공은 선목원종공신 1등에 등차되었고, 군계도 병조판서에 추봉되셨다.

(선목원종공신녹권 참고). 한편 모헌공의 차자 대구부사 죽계공 휘 희 께서는 문무가 고명하여 1585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책을 지내셨고.

김해 교수로 왜란을 만나 분계하여 김해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100여차례 전투를 치르고 전공을 세워 난을 막았다.

왜란이 끝나고 호조 병조 정낭을 거쳐 단양군수 이천 장단 대구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배풀고 치적이 훌륭하여 그 공덕을 포상으로 두차례에 걸쳐 대학 서책과 숙마 1필을 하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나 많은 문집을 내셨다.

이러한 3부자의 임난공적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일향사림들의 발의로 함안군 여항면에 두릉사를 창건하시고 순조 32년 임진년 1833년에 모헌공 휘 민 장암공 휘 신갑 죽계공 휘 의 3현 (3부자)입비를 봉행 숭사 하셨으나. 고종5년 무진년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회철되어 그 구지에 경오년 1930년에 두릉서당을 재건하셨다.

입항조이신 행용량이부호군 휘 명갑 (15세) 꼐서는 함안에서 창원으로 이거한 당시 병화를 겪은뒤라 풍속이 어글어졌는데. 동네 재현들과 규약을 만들어 기강을 바로잡고 봄, 가을, 항읍내를 행하여 이름을 동계라 하여 대를 이어왔다.

공은 4자 5녀를 두셨는데, 장자에 경헌공(16세)수환, 차자에 수장, 3자에 수경, 4자에 수호 이시며, 경헌공은 퇴촌에 , 수장공은 북면 감계리에, 수경공은 안성에, 수호공은 내성에 세거하였고 경헌공 (16세)께서는 5자를 두셨는데, 장자는 세후, 차자는 세억, 3자는 세호, 4자는 세렴, 5자는 세명, 이시고 세후,세억께서는 퇴촌에, 세호께서는 김해, 세렴께서는 울산, 세명께서는 상천(진영)지방에 뿌리를 내리셨다.

 

퇴산서당은 임진왜란에 김해 입석 ( 섬바위 ) 강에서 왜군과 싸워 순절한 모헌공과 정유왜란의 산음 황석산성의 환아정에서 왜란과 싸워 순절한 장안공 유지를 받들어 보종 하신 호군공 3부자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조선 효종3년 1652년에 봉림구지에 사후로 건립되엇고,

충효의 이념으로써 서당으로 이용하엿으며 철종5년 1853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고종2년 1865년에 할수없이 퇴촌서재와 상림서재로 양립교육을 해오다 해방후 1957년 중건서당과 재실로 사용되었으나, 도시계획의 이주로 1990년 다시 중원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모헌공께서 순절하신 4월 23일에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우리 모헌공 자손들은 선대의 고귀한 충효정신과 넋을 기리 되세기고 보전하며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입창조로부터 15대손 400년간 집성촌을 이루며 오손도손 살아온 세거지가, 도시계획에 의해 창원시의 탄생으로써 이주하게 되엇고.

일부는 타 지방으로 떠나는 아픔을 겪어 현재 입창조 10세손인 두철공의 거주지 창원의집과 퇴산서당 세거비 고목이 유일하다.( 음4월23일  모헌공 안자민자 제위날입니디오전1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