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大夫之相厥攸居者莫不以都圻爲至善爲其密邇王化出入遊息周 旋乎禮樂文物之間德成而名易徹材達而用不滯進之可以贊黼黻聲 明之治處不失爲簪纓閥閱之望也然而其或値乘除更迭之際而猶且 濡忍貪冒徼倖於利害之塗而卒罹滔天之禍用殄夫名家之世者亦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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嘗不在乎是自非明哲君子炳幾於將然割戀於姑息視外至若懸疣之 思決者其孰能脫然遐翹自沈於荒野之曠而不見知而不悔哉聖人之 於易以遯尾爲厲而豫二之不終日爲介石之貞吉其旨微矣巴陵之茅 谷里其墻西一區爲安氏之庄安氏自勝國來世爲畿輔巨室若文成公 晦軒先生若文順公于器文淑公牧文惠公元崇景質公瑗贈判書從 約道學勳烈胙土錫謚史不絶書至判書之孫秉節校尉諱昌恭與弟監 察昌廉始謝京輦之舊乃南遜于遙遙千里之鄕自甘爲耕鑿之伍而不 思所以克恢先蔭以昌耀其來昆豈公之異於常情也其亦有甚不得已 者焉爾夫使世家賢胄決擧而長往者邦國之不幸也噫當恭僖王朝 相國安貞愍公爲一時善類所宗主引進趙文正諸賢泰茹彙征駸駸有 夬庭孚號之幾凡百君子莫不彈冠相慶而匝域含生方拭目以俟時雍 之休惟公以貞愍同堂切屬旣通名庠籍發迹蔭階若可以夤緣汲綆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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躐亨衢享鍾鼎綺紈之逸樂者而乃知微於羸豕之蹢躅觀象於過涉之 滅頂凛然若蹈春氷而履虎尾矣遂乃低回遠引淪落於草萊之汚而祛 聰黜智爲聾爲痴不自齒於賢士大夫之列而彼睢盱者亦無從以知世 間之有校尉安公矣及夫北門夜開而文正諸賢竝罹一網貞愍與諸子 亦次第及禍殆無噍類獨公不錄於株連之籍而夷然起處於茅谷之衡 門不失爲昭代之逸民而遺子孫以安夫非所謂明且哲者歟公則旣自 晦矣其平日行治之詳不可得而述矣其若子若孫俱能敦修世美不永 錮於仕路至其曾孫監察慜府使憙昆弟倡義于壬辰之難勳績頗著而 慜竟殉節于金海其子郡守信甲値丁酉再訌亦殉節于山陰公雖若果 忘於世者而蹟其貽謨於後者蓋不以鳥獸同群爲至而忠君愛國之忱 不以疏逖而間者玆可推知矣今其遺裔式繁分布于檜山金官之域而 猶以茅谷爲宗守之區乃相與諗曰使吾祖而安常重遷隨衆遲回於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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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賢良之列豈不翠其蓋而朱其輪乎其得有我後嗣於今日乎然則是 區也吾祖之所尋眞卜吉藏用蓄祉以基我後嗣於無極者凡在我後嗣 其於此致敬致重曷少遜於采食之邑系貫之鄕哉盍斲石以表之得出 入瞻式庶幾有所奉藉而典守之無怠也僉曰諾石旣具屬灝烈在瑩二 君問余以識其槪者余復之曰夫相時而能遷者知也傳業而能守者仁 也蓋亦莫非義也然而公之得有後於今日者豈亶地之是賴哉惟其冲 虛寡慾澹泊明志九陌之熱而我襟之凉群車之騖而我趾之徒造物者 無所猜而福集于謙爾持此而往夫何地而非茅谷也爲公後者其欲嗣 守公業亦惟體公之心不爲物先不與利爭約而不濫遯而不憫腴其內 而不慕乎外而已則天下之物將無與安氏競奪者而公之業其永不墜 矣其止其遷亦無往而非茅谷也二君曰唯唯請以此歸刻之石用詔夫 吾之子子孫孫
士大夫들이 그들의 居할 바를 相보는 者들이 누구나 莫論하고 都邑이 있는 京畿道地方으로써 至善을 삼지 아니하는 者가 없는데 그것은 王化가 매우 가까워 出入하고 遊食하면서 禮樂과 文物의 사이에서 周旋하며 德을 이루면 이름이 쉽게 貫徹되고 才能이 達通하면 登用이 막히지 아니하였고 나아가면 可히 黼발 (임금)과 聲明의 다스림과 도움을 줄것이며 野人으로 處하여 있더라도 簪纓(관복)과 閥閱의 明星을 잃지 아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武은 乘除하고 편실하는 즘에 當到하여 오히려 忍苦에 젖고 貪慾을 무릅쓰고 가면서 요행스럽게 利재의 길을 걷다가 끝내는 洪水가 일어 나듯하는 過를 當하여 저 名家의 世代를 무참하게 殺戮當하는 者들도 또한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스스로 明哲한 君子가 낌새를 밝게 알아차리고 將來를 꿰둘 듯 姑息한 미련을 잘라버리고 밖을 보는 것이 못된다. 가령 혹달린 生角으로서 判決하여 본다면 그것이 벗어 나듯이 발길을 멀리하여 스스로 荒野의 먼곳에 沈滯되어 살면서 알아줌을 받지 못하더라. 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낫다고 하겠느냐. 聖人께서도 周易의 遯卦(天山遯?)의 初六의 說明에 遯은 꼬리이기 때문에 가다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豫卦(當地豫?)의 六二의 說明에 「돌같이 단단하면 終日이 안되어도 貞하고 吉하리라」 하였으니 그 뜻이 隱微하도다.
巴倰(成安)의 茅谷里에 그 墻西(담장)의 一區는 安氏들의 田厓이다. 安氏는 高麗時代로부터 世代로부터 내려오면서 京畿를 輔佐하는 居室이 되었으며 가령 文成公이신 晦軒先生같은 분과 文順公이신 于器나 文淑公이신 牧과 文惠公이신 元崇과 景質公이신 瑗과 判書를 追贈받으신 從約과 같으신분들은 道學과 勳烈이 對土를 받으시고 謚號를 내리시어 歷史에 紀錄이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며 書恭公에의 孫子되는 兼節校尉(從六品官)이신 諱昌恭에 이르러서는 아우인 監察公(正六品官)이신 昌廉과 더불어 처음으로 서울의 옛집을 謝讓하고 그제야 南쪽으로 멀고먼 千里의 鄕里로 와서 隱遁하시며 스스로 밭갈이와 땅을 파는 隊伍가 되는 것을 甘受하며 生角하시는 바가 能히 先朝任의 蔭德을 품고서 그 다가오는 後孫들을 昌盛하고 빛나게 하려 하였으니 어찌 公이라고 日常人의 情과 다르리오만은 그것은 또한 매우 不得己한 점이 있었던 것이니 대저 世家의 賢胃로 하여금 決斷코 긴 移住를 가는 것을 擧行하게 된 것은 國家로서도 不幸한 일이 있었다. 아! 恭僖王(中宗)朝 때를 맞아 相國(左議政)이신 安貞愍(塘)께서 한때에 善類들의 宗主가 되시어 趙文正(先祖) 公等 諸賢들을 끌어다 進出시켜 泰녀가 彙征하여 駸駸하게 快庭孚號하는 幾微가 있었으니 凡百의 君子들이 누구나 다 冠을 털고서 서로 慶賀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둘려쳐진 城內의 生을 버리고 바야흐로 눈을 닦고서 和平한 時代의 아름다운 政治를 기다렸는데 公께서도 貞愍公과 同黨人으로 懇切하게 이미 이름을 庠籍에 通하여 所屬됨이 있고 足跡이 蔭官의 品階를 發함이 있어 가령 充分히 두례박줄로 물을 길러올리듯 因緣하여 좋은 집과 맛있는 飮食과 비단 옷을 입는 逸藥을 누릴수 있었지만 파리한 돼지가 깡충깡충 뛰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江을 건너온 者가 이마를 傷하게 마치 봄날의 이름을 밟듯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이 드디어 自己를 낮추어 멀리 草家의 더러움속에 淪落하여 聰明함을 버리고 智慧를 버리고 벙어리가 되고 어리석은 者가 되어 스스로 賢士大夫의 班列에 오르내리지 않고서 지내시니 저 눈을 부릅뜨고 사는 者들도 역시 따라서 世間에 校尉이신 安公에 계시는 줄을 알아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저 北門(乙卯士禍)의 禍가 展開되자 文正公 等 諸賢들이 모두 一網에 걸려들고 貞愍公과 여러 子弟들도 역시 차례대로 危始함이 미쳐서 살아남은 者가 없었으나 홀로 公께서는 株連의 籍에 紀錄되지 아니하여 平安하게 茅谷洞의 衡門에서 起居하고 居處하시며 昭代의 逸民이 되시어 子孫들에게 平安함을 물려주셨으니 대저 이른바 밝고도 또한 어진 분이 아니겠느냐? 公께서는 이미 自身을 감추고 사셨으니 그분의 살아게시던 날의 行績과 治積의 자세한 內容을 可히 얻어서 記述할수 없구나. 그분의 아들이나 孫子들도 모두가 能히 先世의 아름다움을 敦篤하게 닦아왔으나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혔으며 그분의 曾孫인 監察公愍과 府使公 憙의 형제분에게 이르러서는 壬辰倭亂 그의 아들되는 郡守인 信甲께서도 丁酉再亂때에 亦是 山淸에서 殉節 하셨으니, 公께서는 비록 世上에서 잊혀진 것 같지만 行績이 그 아름다운 꾀를 後孫들에게 남겨준 것이 대개 鳥獸와 同群이 되지 아니하였고 至極하였던 忠君愛國의 淸誠은 䟽遠하고 먼것으로서 離間할 者가 없으리니 이것으로서 可히 推測하여 알 수 있으리라. 지금 그분의 後裔들이 模範的으로 蕃盛하여 檜山(現昌原)과 金管(現金海)의 聲域에 分布하여 있으나 오히려 茅谷으로서 宗守의 區域을 삼고 있으며 그제야 서로가 告하여 말하기를 우리 祖先任으로 하여금 常情에 安住하면서 重하게 遷基되어 大衆들과 같이 當日에 賢良의 班列에 徘徊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그 日傘이 푸르고 그 수레가 붉었으리니 그렇다면 우리 後嗣들의 今日이 있었겠느냐. 그렇다면 이 區의 無窮한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무릇 우리 後嗣들이 그야말로 여기에 恭敬을 이루고 重大함을 이루어 어찌 조금이라도 菜食의 邑과 絲貫의 고을에 謙孫하지 아니하리요? 어떻게 碑石을 다듬어 衣示를 하여두고 出入하면서 瞻望하고 衿式함을 얻어서 거의 奉籍하고 典守하는 바가 있으니 게으름이 없지 아니하리요.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옳다」하였다. 碑石을 具備하여 놓고는 灝烈君과 在營 等 二君에게 付託하여 나에게 그 大槩를 紀錄하여 달라고 하였다. 내가 對答하여 말하기를 「대저 時代를 相보아서 能히 옮겨 사는 것은 知(슬기)이고 業을 傳하여 能히 지켜나가는 것은 仁이니 대개 역시 義아님이 없다. 그러나 公의 後孫이 今日이 있게 된 것을 얻게 된 것은 어찌 오르지 땅을 이에 힘입은 것 뿐이리요. 오직 그 仲虛하고 寡慾하며 瘠薄하고 明志하여 九貊의 熱에 우리들 옷것은 서늘하고 群居가 놀라도 우리 발길은 조용하였으며 造物者가 猜忌하지 아니하여 福이 謙讓에 모였으니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간다면 저 어느 地方을 간들 茅谷里가 아니겠느냐? 公의 後孫된 者들은 그 公의 業을 이어서 지켜가고저 한다면 역시 公의 마음을 體驗하여 物慾으로서 于先을 삼지 말고 이익 으로서 다투지 말며 절약하여 혼용하지말고 은둔하여 悶忙하지 말고서 그 內實을 살찌우고 그 外飾을 思慕하지 아니하여 간다면 天下의 萬物이 張次 安氏들과 더불어 競奪할 者가 없을 것이며 公이 業이 그야말로 永遠히 失墜되지 아니하리라. 그리하여 그치거나 그리하여 옮겨간들 어디를 가든 모?谷里 아님이 없으리라.」 하였더니 二君이 「그렇습니다」 하고 對答하고는 請컨대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碑石에 새기어 저기 우리 子子孫孫들을 詔勅하려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