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 | -수록문집 : 1)濯溪集, 全致遠 著 -간략목차 : 濯溪集 濯溪先生世系圖 濯溪先生年譜 卷一 卷二 附錄 卷三 附錄 全致遠
전치원(全致遠, 1527∼1596)의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선생은 1527년(중종 22년)에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하신리)에서 아버지 인(絪)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의 세계는생략한다 . 공이 남긴 문집은 『탁계집(濯溪集)』 5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선생은 15세(1541년)에 당시 재령(載寧)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할아버지(永綏)를 따라가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방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했다. 16세(1542년)에는 재령에 머물면서 여름에 『소학』을 가지고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을 찾았는데, 황강선생은 공에게 ‘『소학』 배울 나이가 이미 넘었으므로 제자로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 배우기를 청하였다. 공의 자질을 시험해 본 황강선생은 ‘장차 대성할 인재’라 생각하고 비로소 제자로 삼았다. 33세(1559년) 5월에는 스승인 황강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키워준 은혜와 가르쳐 준 은혜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례하면서 마음으로 3년복을 입었다.
급문 : 선생은 29세(1555년)에 삼가 토동정사로 南冥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30세(1556년)에는 퇴촌동(退村洞)에서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37세(1563년)에는 남명선생을 찾아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벼슬 : 선생은 67세(1593년)에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일 임진왜란시 유공으로 충절탁리증직사 이조판서(忠節卓異贈職事 吏曹判書)가 되었다,
강학및 교유 : 선생은 35세(1561년)에 황강(黃江)선생의 「묘갈명」을 남명선생이 찬하고 선생이 글씨를 썼다. 선생은 정자를 짓고 호를 濯溪라고 하였는데 이호는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구절중에서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발을 싯어야한다는 구절에서 씻을 濯자를 따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멀리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가을8월에 月窩 陳克元이 찾아왓다 이때 진격경이 따라와 선생과 함께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여기면서 이르기를 陳씨의 가문에 장차 점점나아감이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37세(1563년)에는 金宇웅 鄭逑 朴惺 盧欽 金沔 裵紳 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道義로써 交遊하였다 40세(1566년)봄에는 金紐가 찾아왓고 43세(1569년)에는 金紐가 찾아와 詩를 주었다 44세(1570년)3월에는 李孝元이 鷗亭으로 찾아왔고 靜窩 曺受天이 와서 공부 하였으며 48세(1574년)에는 李大期가 찾아와서 中庸을 읽자 濯溪先生은 誠明의 이치를 강론하였다 52세(1578년)봄에는 江亭을 완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벗삼아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정자는 후일 손자 全滎이 이름을 臥遊軒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쌍책면 건태리에 있다 59세가을에는 河渾 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詩를 주었다. 60세 봄에는 고양의 벽송정에 있었다. 가을에 盧欽 등과 황계폭포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李屹이 따라와 시를 남겼다. 61세에는 진주 도동으로 崔永慶을 방문하였고, 62세(1588년)에는 安克家를 방문하였다.
의병활동 : 선생은 66세(1592년) 여름 4월에 왜구가 밀어 닥치자 열군이 와해되었을 때 李大期와 함께 창의하여 토적할 것을 약속하고, 곽재우와 합세하였다. 당시 선생은 아들 우(雨)와 조카 제(霽)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다.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니 각자 고을 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지시하였다. 선생은 군내에 의병모집 통문을 돌렸으며, 모집된 의병은 외군(外軍)과 내군(內軍)으로 편성되어 내군은 이대기가, 외군은 선생이 통솔하였다. 이때 선생은 진영을 구축하고 몸소 훈련을 시키면서 많은 의병들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고, 관곡은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조직된 초계의 의병은 황강 변에서 6월 3일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6월 11일 낙동강 사막진에서 왜선과 왜적을 대파하였고, 6월 17일에는 낙동강을 도하하는 적을 물리쳤으며, 이 후 수 차례의 소규모 유격전과 대규모 전투에서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전으로 말미암아 왜군의 낙동강 도하를 차단하여 초계지방과 경상우도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이때에 約誓 感懷 라는 詩를 지어서니 이 詩를 살펴보자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운데
누가 다시 나라를 일으키고 적을 무찌를가
수모속에 살아 있는 것 오히려 부끄럽고
의병 일으켜 나라 구한다면 죽어도 영광 스럽네
나라위해 군대호령 할사람없는 것 한 스러운데
지금 당장 마음 맞는 백명을 얻었네
홍의장군 진영에 가서 도우자 하니
다음날 백마진영에 질풍같이 달리리라 ,
이 詩는 濯溪先生의 憂國衷情을 잘 드러낸 詩라고 할수있다
서원창건활동 : 선생은 38세(1564년)에 황강선생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 慶尙南道 地方文化財 136號)을 창건하였는데, 이 서원은 지금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 선생은 47세(1573년)에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선생묘갈명」의 글씨를 썼고,51세에는 掌令 李晩生의 遺集을만들었으며 55세(1581년)에 추곡 강몽린 상경(祥卿)의 계효당명(繼孝堂銘)을 지어주었다. 63세(1589년) 봄에는 금병팔첩(錦屛八疊)써서 장자(長子) 우(雨)에게 주었다. 8월에 주부자(朱夫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초서로 쓰고, 집에 보관하였다. 67세(1593년) 가을에는 박진사, 이언영이 찾아왔고,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탄(憤歎)하는 시를 지었다.
69세(1595년)에는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지었다.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선생은 64세(1590년)에 도내의 제현들과 더불어 최영경의 신원상소를 청하였는데, 이 때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이노 (李魯), 박제인(朴齊仁), 이정(李瀞), 오장(吳長), 문위(文緯), 하혼(河 渾)등이 모여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
향사 : 선생은 1596년(선조 29년) 12월13일에 70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에 의해 연곡사에 봉안되었고, 1702년(숙종 28년) 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全致遠의 門人; 茂城府院君 尹泂을 비롯한 垂足堂 全雨 梅竹窩 盧克誠 靜窩 曺受天 察訪 李大約 英叟 全霽 鳳谷 曺以天 十柳亭 金瑛등 다수 문인이 배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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