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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행록

자라가슴 2022. 7. 23. 18:55


권1 안씨행록        

문성공전(문성공전) 《고려사》

안향(안향)의 처음 이름은 유(유)이고, 흥주(흥주) 사람이다. 아버지 안부(안부)는 흥주 의원 출신으로 밀직부사에 이르러 치사(치사)하였다. 안향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원종(원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랑(교서낭)을 지내고 직한림원(직한림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내시원(내시원)에 속하였다.
삼별초(삼별초) 난에 안향이 적중에 빠졌는데, 적이 평소 명성을 들었기에 자기들 편으로 쓰려고 회유와 협박을 하면서,
“안한림(안한림)을 놓아준 자는 처벌한다.”
하였는데, 안향이 계책을 써서 탈출해 돌아오니, 왕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12년(1271) 사신의 명을 받들고 서도(서도)에 나가 청렴하고 신중한 정사를 하였다는 명성을 얻었다. 내시원에 돌아와서 상소하여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없앴다. 얼마 후 감찰어사(감찰어사)로 옮겼다.
충렬왕(충렬왕) 원년(1275)에 상주판관(상주판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당시 여자 무당 세 명이 요사스런 신을 받들고 백성을 현혹하면서 합주(합주)에서부터 여러 고을마다 돌아다녔고, 가는 곳마다 마치 공중에서 사람이 외치는 듯한 소리를 만들어 은은히 갈도(갈도)하는 듯하니 그 소리를 듣는 이마다 앞을 다투어 제사를 올렸으며 수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당이 이르자 안향이 그들을 잡아 매질하고 가두니, 그들이 신의 말에 의탁하여 재앙을 받게 한다며 협박하였는데, 상주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으나 안향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 후 무당이 애걸하여 안향이 석방하니 요사스런 일이 영영 없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안동(안동)에 이르러 아전에게 발을 씻게 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고을에 속한 아전인데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모욕을 주는가?”
하고, 여러 동료와 모의하여 힐책하려하자, 다른 늙은 아전이 안향의 얼굴을 살펴보고 밖으로 나와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분은 후일에 반드시 귀하게 될 사람으로 보인다. 가볍게 보지 말라.”
하였다. 상주에 머문 지 3년에 안렴사(안렴사)가 선생의 청렴한 정사를 조정에 보고하여 드디어 불러 판도좌랑(판도좌랑)으로 삼았다. 얼마 뒤 전중시어사(전중시어사)로 옮겼다가 다시 독로화(독로화)에 선발되었고, 관례에 따라 국자사업(국자사업)에 올랐고, 우사의(우사의)를 거쳐 우부승지(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 원외랑(정동행성원외랑)으로 삼았고, 얼마 뒤에 낭중(낭중)을 더하여 본국의 유학제거(유학제거)로 삼았다. 뒤에 부지밀직사사(부지밀직사사)로서 합포(합포)로 나가 군사를 위무하고 백성을 구제하니 고을이 편안케 되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첨의참리(첨의참리)가 되었다.
충선왕(충선왕) 즉위 후 참지기무 행 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부윤(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부윤)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참리(참리)가 되었고, 충렬왕이 복위되고 충선왕이 원나라로 갈 때에 안향이 배종하였다. 어느 날 원나라 임금이 급히 왕을 부르자 왕이 두려워하였는데, 원나라 승상이 나와서 말하기를,
“시종한 신하 중에서 우두머리가 입대(입대)하라.”
하여 안향이 들어가니, 승상이 원나라 임금의 뜻을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 왕은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
하여, 안향이 대답하기를,
“규방의 일이란 밖의 신하로서 알 바 아닙니다. 지금 이와 같은 것을 물으니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상이 이 말 그대로 아뢰니 원나라 임금이,
“이 사람은 대체(대체)를 아는 자이다. 먼 외방의 사람으로 여겨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
26년(1300) 찬성사(찬성사)에 임명되었는데, 권신이 시기하여 드디어 왕에게 넌지시 간하여 중찬(중찬)을 더하고 고령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게 했다. 얼마 뒤 다시 찬성사(찬성사)가 되었다.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해 가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양부)에 건의하기를,
“재상의 직무로 인재 교육보다 급선무가 없는데, 오늘날 양현고(양현고)가 고갈되어 선비를 양성할 수 없다. 6품 이상은 각각 은 1근, 7품 이하는 벼슬에 따라 차등 있게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키고 여기에서 이자를 취하여 섬학전(섬학전)을 마련하도록 해야 하겠다.”
하니, 양부에서 이 의견을 가지고 왕에게 건의하였고, 왕 또한 내탕고(내탕고) 전곡(전곡)을 보내 보조하였다. 밀직(밀직) 고세(고세)가 자신은 무인(무인)이라며 돈을 내려하지 않았다. 이에 안향이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부자(부자)의 도가 만세의 법으로 전하여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은 아비에게 효도하며 아우는 형에게 공경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돈을 내어 생도를 양성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무시함이니 옳은 일이겠는가?”
하였다. 고세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며 바로 돈을 내었다.
안향은 또 남은 자금으로 박사(박사) 김문정(금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현 및 70제자의 영정을 그려오게 함과 아울러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사서) 등을 구입해 오게 하였고, 또한 밀직부사(밀직부사)로 치사(치사)한 이산(이산)과 전법판서(전법판서) 이진(이진)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경사교수도감사)를 삼으니 궁궐 안의 학관(학관)ㆍ내시ㆍ삼도감(삼도감)ㆍ오고(오고)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과 칠관(칠관)ㆍ십이도(십이도)의 모든 유생들로서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유생 가운데 선배에게 예를 행하지 않는 자가 있어 안향이 노하여 벌을 주려하였는데, 유생이 사죄하므로 안향이 경계하기를,
“나는 그대들을 나의 자손처럼 여기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늙은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대접하였다. 이에 서로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를 이처럼 지성으로 대하는데, 만일 감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32년(1306) 9월에 첨의중찬(첨의중찬)으로서 치사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시호는 문성(문성)이다. 장사지내는 날 칠관(칠관)ㆍ십이도(십이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입고 노제(노제)를 지냈다.
안향은 장중(장중)하고 자상하여 모든 사람이 경외하였고, 승상부에 있으면서 정사를 잘 도모하고 과단성 있게 행하니, 동료들이 그의 뜻에 따르면서 오직 삼가하고 다투지 않았다. 항상 학교를 진흥하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비록 정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에도 마음속으로 잊은 때가 없었다. 그리고 빈객을 좋아하고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였으며, 문장은 맑고 힘이 있어 볼만하였다. 또한 인물을 잘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는데, 김이(금이)와 백원항(백원항)이 벼슬하지 않을 적에 안향이 두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후일에 반드시 모두 벼슬을 하리라.”
하였다. 또 이제현(리제현)과 이이(리리)가 동년생으로 모두 명성이 있었는데 안향이 그들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관찰한 후 말하기를,
“이제현은 귀와 장수를 누리겠으나 이이는 장수하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모두 들어맞았다. 만년에 항상 회암선생(회암선생)의 영정을 걸어놓고 존모하면서 호를 ‘회헌(회헌)’이라 하였다. 유금(유금) 한 벌을 간직하고서 늘 가르칠 만한 선비를 만나면 권하여 타게 하였다.
충숙왕 6년 기미년(1319)에 문묘 종사를 의논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안향은 비록 섬학전을 건의하여 설치했으나 어찌 이것만으로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반대하였는데, 문인 신천(신천)이 그 말을 적극 물리쳐서 마침내 종사하였다.
아들 우기(우기)는 충렬왕조에 급제하여 누차 국자전주(국자전주)ㆍ우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밀직부사(밀직부사)에 올랐다. 충선왕이 일찍이 안향이 호종을 오래하지 않고 돌아간 것을 유감으로 여겨 그의 아들 우기에게 죄를 내리려했으나 이윽고 사면되었다. 충숙왕이 즉위하여 밀직부사 겸 대사헌(밀직부사겸대사헌)을 제수했으나 얼마 후 파직되고 원윤(원윤) 조후(조후)가 대신하였다. 이는 조후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우기는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으나 안에서 도와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일찍이 합포(합포)에 나가 다스려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6년(1329) 검교 찬성사(검교찬성사)를 역임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언으로 박장(박장)을 명하였다. 아들은 목(목)이다.

원나라 고 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 문정공 안공 묘지명[대원고장사랑료양로개주판관고려국삼중대광흥녕부원군령예문관사시문정안공묘지명] 이곡(이곡)

내가 경사(경사)에 있을 적에 근재(근재)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문병을 하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그 아들 종원(종원)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내 자식을 잊지 마시게나.”
하고, 또 묘지(묘지)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생에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지만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백성 중에 억울하게 종이 된 자를 반드시 심리하여 양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만은 기록할 만한 일이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슬퍼 우선 대답하기를,
“병들었다고 어찌 다 낫지 않겠습니까. 어찌 말씀이 이렇게 급합니까.”
하였다. 아, 그는 천명을 미리 안 군자라고 할 것이다.
이윽고 세상을 떠나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나와 동년(동년)인 공의 아우 안보(안보)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에게 수업하였고 또 공이 직접 명하였는데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축(축), 자는 당지(당지), 관향은 복주(복주 안동) 흥녕(흥녕)이다. 증조부는 득재(득재)이고 조부는 희서(희서)이니 모두 본부의 호장(호장)을 지냈다. 아버지 석(석)은 급제하고서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관직은 모두 증직이다. 어머니는 흥녕군대부인(흥녕군대부인) 안씨(안씨)이니, 같은 고을 사람 검교 군기감(검교군기감) 안성기(안성기)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독서할 줄 알면서 힘써 배워 문장을 잘 지었다. 성균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금주사록(금주사록)에 보직되었고, 예문춘추관 검열ㆍ수찬에 뽑혔다. 다시 향시에 합격하여 사헌규정에 임명되었으며, 계해년에 또 향시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자년에 경사(경사)의 정대(정대)에서 제3부 갑과 7명 중에 들어 칙명(칙명)으로 개주판관(개주판관)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충숙왕)이 4년 동안 황궁[련곡]에 머물러 있었는데, 공이 동지(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욕이며,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배운 것이 이러하다.”
하고, 이윽고 글을 올려 왕의 죄 없음을 호소하니, 왕이 매우 아름답게 여겨 성균악정(성균악정)에 특진시켰다. 개수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예로 청하였으나 왕이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하였으므로 본국을 떠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악정(악정)에서 전법(전법)ㆍ판도(판도)ㆍ군부(군부)ㆍ전리(전리)의 네 총랑(총랑)으로 전직하고 우사의대부(우사의대부)에 영전하였다. 영릉(영릉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강릉도(강릉도)를 안무하도록 명하였다. 이 당시 저술한 문집(문집)을 《관동와주(관동와주)》라 한다.
재차 판전교 지전법사(판전교지전법사)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영릉에게 총애 받던 자들은 모두 쫓겨났는데, 어떤 사람이 공을 두고 쫓겨난 자와 친한 이라 하여 파직당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얻게 된 것은 자신의 덕 때문이고, 잃게 된 것은 친한 사람 때문이다.”
하였다. 얼마 후에 전법판서(전법판서)에 기용되었는데, 뒤에 또 내시 중에서 세도가 있는 자의 비위를 거스른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영릉(영릉)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 동지공거(전법판서동지공거)에 기용되어 지금의 판밀직사사 이공수(리공수) 등 33명을 뽑으니 세상에서 선비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다시 판서에서 감찰대부로 전직하였다. 악정(악정) 이상으로 있을 때는 항상 관직(관직)을 겸임하였으며 헌사(헌사)의 수장으로 있을 때에도 그대로였다. 이 때문에 원나라에 보내는 표전(표전)과 사명(사명)이 대다수 그의 손에서 나왔다.
계미년에 검교평리로서 외직으로 나가 상주 목사(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복주(복주)와 인접하였고 대부인이 고향에 있었으므로 왕래하며 문안하여 효도를 다하였다. 갑신년 봄에 충목왕이 새 정치를 하는데 먼저 정승 될 사람을 의논하여 부사밀직으로 불렀고 조금 뒤에 정당문학에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첨의평리(첨의평리)를 더하였고, 또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찬성사우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를 더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병이 났고 흥녕군(흥녕군)을 제하였는데, 대개 집정자들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명)이 내렸던 것이다. 그해 겨울에 공론이 떠들썩하게 일어나서 처음대로 복직하였다. 무자년 봄에 다시 발병하여 치사(치사)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초하루에 다시 흥녕군을 제수하고 품계를 개부(개부)로 올렸다.
21일에 이르러 부음(부음)이 들리자,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조문하고 예에 따라 부의하고 시호를 ‘문정(문정)’이라 하고 백관이 모여서 장사지내게 하니, 실로 공의 생애는 조금도 흠이 없었다고 이를 만하다. 7월 11일에 대덕산(대덕산)에 장사지냈다. 향년(향년) 67세였다.
부인은 감천군부인(감천군부인) 문씨(문씨)이니, 검교군기감(검교군기감) 문귀(문구)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종기(종기)는 보마배행수별장(보마배행수별장)인데 먼저 죽었고, 둘째 아들 종원(종원)은 급제하여 현재 유비창부사(유비창부사)로 있다. 딸은 별장 정양생(정량생)에게 출가하였다. 두 아우가 있는데, 보(보)는 급제하고 경사(경사) 을유년 과거에 합격하여 요양성 조마(료양성조마)에 제수되었다가 근친하러 귀국하여 현재 우대언(우대언)으로 있다. 집(집)은 급제하여 현재 성균좨주로 있다. 선공(선공)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공이 두 아우를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가르쳐 성인(성인)이 되게 하였으므로, 그 아우들이 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본국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어머니는 종신토록 나라에서 녹을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공은 두 아우와 함께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그 중씨(중씨)와 더불어 모두 중국 갑과에 합격하였으니 실로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이 모두가 또한 공의 교양(교양)의 힘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공정하였고 가정을 다스릴 때에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말을 할 때에는 명확하고 꾸미는 것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었으며, 착한 일을 보면 칭찬하여 마지않았기 때문에 칭송이 많았고 나쁜 일을 보면 피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 스스로 거처하는 곳을 ‘근재(근재)’라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그의 뜻을 알 만하다.
명(명)을 한다.

장수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 위비수야
나이가 칠순에 가까웠네 / 년부칠순
존귀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 위비귀야
지위가 봉군 중에서 제일이었네 / 위관제군
아우 있고 자식이 있으며 / 유제유자
덕이 있고 칭송이 있었네 / 유덕유언
나의 이 글 과장 아니니 / 아명불유
이곳이 바로 공의 무덤이라네 / 유공지분

계림부윤 문경공 안선생 묘지명 서문과 함께 [계림부윤시문경공안선생묘지명 병서] 이색(이색)

순흥안씨(순흥안씨)는 문성공(문성공) 안향(안향) 이하 높은 관직에 오른 이가 많았다. 문성공의 증손 정당문학 원숭(원숭)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등과하였고, 문성공의 족자(족자) 급제 휘 석(석)은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분이 근재선생(근재선생)의 아버지이다. 세 아들이 다 등과하였고, 근재의 아들과 지금 밀직공(밀직공)의 세 아들이 또 등과하였으며, 근재의 백씨와 중씨는 모두 중국의 제과(제과)에 올라서 조정의 명을 받아 한 세상에 빛났으니, 문성공의 자손으로서도 미치지 못한 바였다. 원조(원조)에서 과거를 보인 이래로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 부자 형제가 대를 이어서 과거에 오른 가문은 순흥안씨와 우리 한산이씨(한산리씨)가 있을 뿐이다.
가정(가정)선생이 근재에게서 수업을 받아 그 무덤의 명(명)을 지었고, 내가 향시(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선생이 또 주문(주문)이셨다. 내가 늙고 병들어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이어서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감히 선생에 대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한대(한대)의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처리에는 대체를 따르기를 힘쓰고 조금도 머뭇거리며 관망하지 않았다.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나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취하면 그만 마셨다. 문장은 화려한 문체를 버리고 사실을 취하여 뜻이 통하게 할 뿐이었다. 현릉(현릉)이 그의 어짊을 알고 크게 쓰려고 밀직제학으로 발탁하였으며, 감찰대부 제조전선사를 겸임토록 하였다. 다시 동지(동지)에 나아갔다. 을미년에 동지공거(동지공거)가 되어 안을기(안을기) 등 33명을 뽑았다. 이윽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선생은 스스로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고 여겼고, 아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얼마 뒤에 임금이 그를 실정에 어둡다고 여겼고 선생도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외직으로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계림부윤이 되었다. 병신년에 관제를 고칠 때에 미처 부르기 전에 시골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때마침 병이 나 탄식하기를,
“어머님께서는 무양하시나, 아우가 죽고 형님 또한 돌아가시고 나 또한 이러하니 어찌할꼬.”
하고, 또,
“천명이니 어찌하랴.”
하고는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아, 슬프다.
근재선생의 아들 밀직재상(밀직재상) 종원(종원)은 나와 동년 진사인데, 그의 매부 밀직재상 정양생(정량생)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문경공(문경공)께서 19세 때에 경신년 진사과에 합격하였을 때는 허(허)판서가 시관(시관)이었고, 그 해에 또 수재과에 합격하였을 때는 문충공 이익재(리익재) 또 우리 선인(선인)께서 엄하게 가르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문경공의 천품이 아름다운 것에 탄복하면서 더욱 어진 부형이 있음을 중하게 여겼습니다. 처음 지낸 벼슬은 광주사록 권지전교교감 예문검열 춘추수찬 예문공봉 문하주서 감찰규정 군부좌랑 좌정언 우헌납 전리정랑 감찰장령 전의부령 전리총랑 위위윤 감찰집의 우대언 겸 집의 전법판서(광주사록권지전교교감예문검열춘추수찬예문공봉문하주서감찰규정군부좌랑좌정언우헌납전리정랑감찰장령전의부령전리총랑위위윤감찰집의우대언겸집의전법판서)였고, 관직(관직)은 제학(제학)으로부터 대제학에 이르렀습니다. 중국 진사과에 오른 것은 을유년이고,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간 것은 갑신년 양광도 안렴사와 을유년 교주도 안렴사였습니다. 정유년 9월 4일에 순흥부(순흥부)에서 졸하여 장사지냈으니 향년 56세입니다.
지금에 22년이 지나도록 묘소에 지(지)를 못하였으니 슬픈 일입니다. 게다가 문경공(문경공)에게 자손이 없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부인 최씨가 아들이 없어 따를 곳이 없었고 따를 곳이 없어 수절하기가 어려웠으며, 우리들은 직무에 분주하여 그 사이에 마음 쓸 겨를이 없어 지체하던 중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슬픕니다. 당신께서 명(명)을 지어주어 장차 돌에 새겨서 광중(광중)에 넣는다면 아마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이름이 전하지 못할 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등과(등과)할 때 기록이 있고, 제명(제명)한 비(비)가 있으며, 안탑(안탑)에 이름을 남겨 중국 곳곳에 산재하니, 사람들이 보면 누구인들 ‘고려의 안씨 형제가 함께 과거에 올랐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풍모를 동해 밖에서 흠모하고 있으니 선생 무덤의 돌에는 새기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행적이 국사(국사)에 실려 있으니, 다른 날 《현릉실록(현릉실록)》을 편찬한다면 선생의 열전이 사책(사책)에 빛나서 반드시 전해질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 후손이 없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근세 명공(명공)ㆍ선인(선인)으로 남촌(남촌) 이시중(리시중)ㆍ우곡(우곡) 정밀직(정밀직)ㆍ급암(급암) 민찬성(민찬성)은 덕행과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고, 또 털끝만큼의 과오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후손이 끊어지는 것이 큰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다들 후손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의 뜻이 정해지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전선 제조(전선제조)일 적에 내가 붓을 잡고 그 뒤를 따랐었다. 어느 날 밤중에 왕이 선생을 불러들였고 바로 제수하는 일이 있을 참이었다. 이윽고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는 책력을 가져다 보고 이르기를,
“창귀날이니 당분간 중지한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음양의 구기(구기)를 싫어하였으므로, 꿇어앉아 아뢰기를,
“왕자(왕자)는 천시(천시)를 받들어 행하니 이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신다면 행하소서. 창귀날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선생이 처음 과거에 올라 장사랑 요양등처 행 중서성조마(장사랑료양등처행중서성조마)로서 승발가각고(승발가각고)를 겸하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명을 받고서 직무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공(불공)이다. 더욱이 조마(조마) 자리는 문서만 관장할 뿐 다른 사무가 없지 않는가. 나는 성(성)으로 부임하겠다.”
하고는 부임하니, 성관(성관)이 그 재능을 중하게 여기고 모두 예우하였다. 얼마 뒤에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나의 직무를 이행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는데도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이는 효도가 아니다.”
하고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어사(어사) 한중보(한중보)가 말하기를,
“이부(리부) 관원 중에 선생을 아는 자가 있어서 한림국사원편수관(한림국사원편수관)에 추천하였으나 성신(성신)이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불초한 나도 오히려 선인 뒤를 이어 한림에 재직하였거늘, 선생은 마침내 이러고 말았으니, 참으로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으니 문생(문생)이 곧 아들이다.”
하였다. 지금에 그의 문생 이보림(리보림)은 정당문학이고, 염국보(렴국보)ㆍ이인(리인)ㆍ우현보(우현보)는 모두 추밀재상 봉익대부(봉익대부)의 고관으로 있다. 또 그 외에 많이 현달하여 한 시대에 명성을 떨쳤으니, 불교를 물리치고 유학을 부지한 자는 초계(초계) 정습인(정습인)이고, 원수를 피해서 거친 들에서 은둔한 자는 광주(광주) 이원령(리원령)이었다. 이로써 인재를 성대하게 얻었다고 당대에서 칭송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보(보), 자는 원지(원지)이다. 조부 휘(휘) 모와 증조 휘 모는 모두 본부(본부)의 호장(호장)이었다. 외조는 검교군기감(검교군기감) 안 모이다.
명(명)을 한다.

아, 선생께서는 / 오호선생
학문이 완성되어 / 학저우성
조정에 대책을 올려 / 대책단지
명성 크게 떨치셨네 / 극진궐성
선왕을 보필하시어 / 상아선왕
묘당에서 국사를 주선하시고 / 주선묘당
문화를 널리 펴고 / 홍부문화
과거를 관장하시니 / 내벽춘장
우리 선비들에게 / 왈아유생
지극한 영예가 되었네 / 사위지영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으면 / 모로불양
내 마음 어찌 편안할까 / 아심호평
충효로 입신양명 / 충효립양
군자의 영광이었네 / 군자지광
그것이 혹시 온전하지 못하면 / 궐혹불전
어리석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니 / 비치칙광
그 마음 진달하여 / 내진기정
경주 고을 원으로 나가셨네 / 내윤월성
어머니는 평안하신데 / 모칙무양
도리어 질병에 걸리셨고 / 이질시영
아득히 저세상으로 떠나시니 / 운조호방
끝없이 상심하네 / 영의기상
덕 있는 분에게 아들이 없으니 / 유덕무자
하늘도 무심하도다 / 운하피창
아 선생이시여 / 오호선생
무덤가에 나무 아름드리로 자랐네 / 목공우영
천년 뒤에 전해지는 것은 / 천재지하
오직 그 이름인데 / 가전유명
이름 크게 드러나니 / 유명지창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로다 / 사유불망
죽계 근원 있으니 / 죽계유원
그 물줄기 길이 흘러가리라 / 기류지장

명나라 조선국 추충익대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녕부원군 양도공 안공 묘지명 서문과 함께 [유명조선국추충익대개국공신보국숭록대부흥녕부원군시량도안공묘지명 병서] 윤회(윤회)

안씨(안씨)의 조상은 순흥(순흥)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급제(급제) 석(석)이 학문에 힘써 집안을 일으키더니, 얼마 안 되어 깊이 숨어 자취를 감추어 시골의 착한 선비가 되었다. 그가 문정공(문정공) 축(축)을 낳으니, 원조(원조)의 제과(제과)에 합격하였고 고려를 도와 벼슬이 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첨의찬성사흥녕부원군령예문관사)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정사로 일대의 명경(명경)이 되었다. 그가 문간공(문간공) 종원(종원)을 낳았는데, 약관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청직)ㆍ요직(요직)을 역임하고 드디어 대정(대정)에 참여하였다. 개국(개국) 초년에 나라의 원로로서 덕을 쌓아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판문하부사집현전대학사)가 되었다가 그 지위에서 졸하였다. 우상시(우상시) 김휘남(금휘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므로 부인을 경혜택주(경혜댁주)로 봉하였다. 바로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은 휘가 경공(경공), 자가 손보(손보)이다.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조금도 부호가의 화려한 습속이 없었고, 온화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경건함은 천성으로 타고났다. 지정(지정) 25년 을사년(1365)에 사마시에 올랐고, 홍무(홍무) 5년 임자년(1372)에 산원(산원)에 보직되었고, 명년에 낭장(랑장)에 특진되어 사헌규정(사헌규정)을 겸하였고, 병진년(1376)에 의영고 부사(의영고부사)로서 동진사(동진사)에 합격하여 전리(전리)ㆍ전법(전법) 좌랑(좌랑)과 사헌지평(사헌지평) 등을 역임하였고, 예의정랑(례의정랑)에서 다섯 차례 전임되어 삼사좌윤(삼사좌윤)에 이르렀다. 다시 비순위 상호군(비순위상호군)으로서 판통례문사 진현관 제학(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을 겸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판전교사사 지제교 례의판서)가 되었고 또 전법(전법)으로 옮겼다. 이때 죄수를 불쌍히 여기고 공평하게 판결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황주목사(황주목사)가 되어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무마하니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였다. 임신년(1392) 4월에 밀직사(밀직사)에 들어와 좌부대언(좌부대언)이 되었고, 7월에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혁명하였을 때 공이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장상(장상)들과 더불어 추대하여 좌대언(좌대언)에 올랐다. 관제가 새로 시행되면서 익대개국공신(익대개국공신) 중추원 도승지(중추원도승지)에 승진되었다. 이때는 정사가 처음 시작될 시기로서 공이 제일 먼저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출납이 분명하고 진실하였고, 아름다운 계획과 중요한 건의를 올려 도움이 크고 많았다. 계유년(1393)에 사헌부 대사헌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도평의사사사 보문각학사)에 승진되었다. 공이 두 차례나 사헌부에 들어가 정직함을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기풍이 엄숙해졌다. 갑술년(1394)에 문간공의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자 자헌대부로서 흥녕군(흥녕군)에 봉해졌다. 공훈과 관직(관직)은 전과 같았다.
영락(영악) 4년 병술년(1406)에 판공안부(판공안부)로서 정헌대부에 가자되고, 판한성부(판한성부)로서 두 차례 더하여 숭정대부가 되었다. 무자년(1408)에 부친상을 당하여 약물의 봉양과 상장(상장)의 예식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니 보는 이들이 공경하고 우러렀다. 경인년(1410)에 태종이 송도에 거둥할 때 공을 개성유후(개성류후)로 삼았고, 병신년(1416)에 보국숭록대부 집현전 대제학에 특진되어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직무를 걱정하여 일을 잘 다스리고, 대신이 되어서는 장중한 모습으로 조정의 표준이 되었다. 공이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와 전라도ㆍ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서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치면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부지하며 너그럽고 간소하여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신축년(1421) 정월 10일에 정침(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75세였다. 공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과 지금 전하께서 급히 국의(국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중사(중사)를 시켜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양궁(량궁)이 애도하여 조문과 치제를 후하게 하고 유사로 하여금 대장(대장)을 하게 하였고 시호를 양도(량도)라 하였다. 2월 27일 경신일에 금천(금천) 백사동(백사동)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마음가짐이 곧고 신실하였고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였다. 일찍이 형세에 따라 처신하지 않았으며 또한 특이한 행동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 정성과 믿음으로 하여 거짓이 없었으며, 마음속으로 잘잘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드러내어 말로 교계하지 않았다. 그 겸손한 덕은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나타났으며, 본래부터 화려함을 싫어하고 검소함을 힘썼다. 만년에 한가히 생활하며 잘 나가지를 않았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으나 오직 기분이 흡족하게 할 뿐이었다.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흉금이 담담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다. 공의 형제 셋이 모두 명성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직 공만이 천복을 누려 나라의 원로가 되었다. 손자와 증손이 번성하여 문호가 더욱 창성하였으니, 적선한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부인 오천 정씨(오천정씨)는 문정공(문정공) 정사도(정사도)의 딸이다. 공신의 맏며느리라고 하여 의정택주(의정댁주)로 봉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이 순(순)이다. 현재 숭정대부 호조판서 보문각대제학으로서 정당문학 정공권(정공권)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숭직(숭직)은 용양사 상호군(용양사상호군)이다. 둘째 숭선(숭선)은 승정원 도승지이니, 경자년 과거에 장원을 하였다. 셋째 숭신(숭신)은 웅무사 호군 중추원경력(웅무사호군 중추원경력)이다. 넷째 숭효(숭효)는 중군사직(중군사직)이다. 맏딸은 사헌부 대사헌 이숙치(리숙치)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판통례문사(판통례문사) 조혜(조혜)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사헌부 감찰 김준례(금준례)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상호군은 평성부원군(평성부원군) 조견(조견)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어 사직(사직) 박강(박강)에게 출가하였다. 도승지는 상호군 송천우(송천우)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훈(훈), 둘째는 의(의)이다. 맏딸은 경창부승(경창부승) 김숙(금숙)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세자좌사경(세자좌사경) 조석문(조석문)에게 출가하였다. 호군은 광주 목사(광주목사) 이숙야(리숙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전(전)이고, 맏딸은 도염녹사(도염록사) 최민(최민)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직은 동지충추원사 이숙무(리숙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겸(겸)이고, 둘째는 눌(눌)이다. 딸은 모두 어리다. 대사헌은 딸 하나를 두어 인순부승(인순부승) 이계현(리계현)에게 출가하였다. 판통례는 5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 지당(지당)은 종묘서승(종묘서승)이고, 둘째 지은(지은)은 부사정이고, 셋째 지하(지하)이고, 넷째는 지한(지한)이고, 다섯째는 지주(지주)이다. 맏딸은 유학 조계번(조계번)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감찰은 4남 4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맹절(맹절)이고, 둘째는 맹의(맹의)이고, 셋째는 맹렴(맹렴)이고, 넷째는 맹치(맹치)이다. 맏딸은 유학 홍도상(홍도상)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현손(현손)은 약간 명이 있다. 박사직(박사직)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김부승(금부승)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전(전)은 2녀를 두었다. 녹사는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서승(서승)은 1남을 두었고 부사정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아, 참으로 번성한 가문이라고 하겠다.
명(명)을 한다.

높은 소백산 / 소백지산
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있고 / 상마창궁
기이한 기운이 응결하여 / 종기잉수
7상 5공이 나왔도다 / 칠상오공
후하게 양도공을 낳으니 / 독생량도
대대로 가업을 계승하였네 / 기구시승
오직 충과 효로 / 유충유효
전전긍긍한 삶 / 전전긍긍
공훈이 종과 솥에 새겨지고 / 훈명종정
명망이 사대부 사이에 중하도다 / 망중잠신
원로의 덕 / 로성지덕
시초와 거북처럼 신묘하였네 / 시구기신
살아서는 은총 높았고 / 생피수우
죽어서는 예우 빛났네 / 몰유전장
한 평생의 삶 / 애영종시
청사에 빛나고 / 청사증광
자손이 번성하여 / 자손승승
복록이 다하지 않네 / 복록미앙
돌을 다듬어 글을 묻어 / 참석매사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 용시유장

명나라 조선국 문간공 안공 묘비명 서문과 함께 [유명조선국시문간공안공묘비명 병서] 권근(권근)

공(공)의 휘는 종원(종원), 자는 사청(사청), 성은 안씨(안씨), 관향은 순흥(순흥)이다. 아버지 축(축)은 호가 근재(근재)인데, 원(원)나라 제과(제과)에 급제하고 고려에 벼슬하여 도첨의 찬성사(도첨의찬성사)가 되었다가 졸하였다. 시호가 문정(문정)이다. 일찍이 관동존무사(관동존무사)로 있을 때 지은《와주집(와주집)》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조부 석(석)은 급제(급제) 출신이고, 증조(증조) 희서(희서)는 본부 호장(호장)이다. 이분들이 덕을 쌓아 쓰지 않고 후손들에게 그 경사를 물려주었고, 문정공(문정공)이 학문에 힘써 가문을 일으켜 지위가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다. 감천군부인(감천군부인) 문씨(문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검교군기감(검교군기감) 귀(귀)의 딸이다. 태정(태정 원 진종(진종)) 을축년(1325, 충숙왕12) 5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노는 것을 일삼지 않고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므로, 아는 이들이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지정(지정 원(원) 순제(순제)) 신사년(1341, 충혜왕2) 공의 나이 17세에 좌사(좌사) 김광재(김광재)가 성균시(성균시)의 시관이 되고 시중(시중) 이암(이암)과 찬성(찬성) 정을보(정을보)가 예위(예위 진사시(진사시))를 맡아보았는데, 공이 한꺼번에 잇달아 합격하였다. 임오년(1342, 충혜왕3) 초에 임시로 전교교감(전교교감)이 되었다가, 3년을 지나 정식으로 전교시 교감이 되었다. 을유년(1345, 충목왕1)에 예문관(예문관)ㆍ춘추관(춘추관)에 뽑혀 들어가 두 검열(검열)을 겸하였다. 전부터 관(관)에 있는 자들이 거의 소방(소방)한 것을 숭상하여 왔는데, 공이 예법으로 다스려 관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병술년(1346, 충목왕2)에 거듭 수찬(수찬)ㆍ공봉(공봉)의 벼슬을 더하였다. 품계가 차 당연히 전임(전임)하여야 할 때 동료 심동로(심동로)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으므로 그에게 양보하여 먼저 전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정공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겸양이란 인격의 가장 으뜸이다. 내가 남에게 양보하면 남이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우리 가문에 인물이 있으니 더욱 창성하겠구나.”
하였다. 1년 뒤에 드디어 삼사도사(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이해부터 유비창 부사(유비창부사)ㆍ사복승(사복승)ㆍ공조령(공조령)으로 전임되었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업무를 잘 수행하여 칭찬과 명예가 더욱 널리 퍼졌다. 신묘년(1351, 충정왕 3)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에게 도관 좌랑(도관좌랑)을 제수하였고, 임진년에 군부 좌랑(군부좌랑)에 전임하였고, 계사년에는 전법 정랑(전법정랑)에 발탁되었다. 이때 전민(전민)의 형송(형송)이 모두 전법(전법)에 모여들었는데, 공이 공평하고 마땅하게 판결하므로 사람들이 그 밝음을 칭찬하였다. 갑오년(1354, 공민왕3) 가을 공의 나이 30세에 경상도 안렴사(경상도안렴사)에 뽑혔다. 하직하던 날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하여 묻자, 공이 다른 안렴사들보다 먼저 자세하고 절실하게 진술하므로 상이 좋다고 칭송하였는데, 과연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해 겨울에 판도(판도)에 전임하였고, 을미년에는 군부 정랑(군부정랑)으로서 여흥(여흥)을 맡아서 나가게 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임금이 원후(원후) 기씨(기씨)의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하던 그 일족을 목 베고, 공을 기용하여 전중시어사(전중시어사)로 삼아 헌강(헌강)을 떨치게 하였다. 정유년에 기거랑 지제교(기거랑지제교)가 되었다가, 봉사(봉사)를 올려 예부 낭중(예부랑중)에 개임(개임)되었고, 무술년에는 이부(이부)에 전임하였다. 그때에 정방(정방)을 폐지하고 전선(전선)하는 일을 이부(이부)ㆍ병부(병부)에 귀속시켰는데, 공이 그 일을 맡아 권귀(권귀)에게 아부하지 않으므로 동료들이 두려워하며 감복하였다. 경자년(1360, 공민왕 9)에 조산대부 시어사(조산대부시어사)에 이르렀고, 신축년 가을에 양광도 안렴사(양광도안렴사)로 나갔다.
그해 겨울에 홍건적(홍건적)이 송경(송경)을 침범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파천)하게 되자, 공이 먼저 충주(충주)에 가서 어공(어공)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의 측근 중에 어떤 일로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안렴사 종원이 충주에 도착하였다가 이미 조령(조령)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중사(중사)를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사자가 충주에 이르러 공이 관(관)에서 어공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 모함 당했음을 알고 잡아가지고 함께 와서 사유를 보고하니, 임금이 놓아주고 불문에 붙였다. 측근들이 또 참소하여 드디어 구속하였으나, 재상이 임금에게 죄가 없다고 아뢰므로 지청풍군사(지청풍군사)로 좌천시켰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 면직되었는데, 그곳 백성들은 지금까지 사모하고 있다.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도관 총랑(도관총랑)이 되었고, 갑진년에 전법 총랑(전법총랑)에 전임되었다. 신돈(신돈)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두르자,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영상(영상)이라 불렀고 사대부(사대부)들조차 다투어 붙좇았다. 한 집정대신(집정대신)이 공에게 말하기를,
“모(모) 등이 공을 영상(영상)에게 추천하였으니 간관(간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가서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어설프고 게으른 사람이라 권세에 따를 줄 모릅니다.”
하였다. 집정이 부끄럽게 여기고 도리어 공을 참소하여 강릉부사(강릉부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그곳에서 은혜로운 정사를 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7~8년 동안 종적을 감추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시서(시서)를 즐겼다. 홍무(홍무 명 태조(명태조)의 연호)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신돈(신돈)이 복주(복주)되자, 임자년 2월에 다시 사헌시사(사헌시사)가 되었고, 겨울에 전교령(전교령)을 가자하였다. 계축년에 우사의대부 지제교 직보문 충춘추(우사의대부지제교직보문충춘추)에 옮겼고, 갑인년에 좌사의(좌사의)로 개임(개임)되고, 을묘년에 성균 대사성(성균대사성) 판종부시사(판종부사사)를 역임하고, 통헌(통헌) 우상시(우상시)에 가자되었다. 병진년 봄에 대사헌(대사헌)에 임명되니 품계가 봉익대부(봉익대부)였다. 가을에 밀직사(밀직사)에 들어가 제학(제학)이 되어 대사헌을 겸임하였다가, 조금 뒤에 다시 밀직부사로 개임되었다. 정사년에 동지(동지)에 가자되었고, 무오년에 첨서(첨서)로 이임(이임)되었다. 기미년에 품계가 광정대부(광정대부)로 올라감과 동시에 판숭경부사(판숭경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파직되고 중대광 흥녕군(중대광흥녕군)에 봉해졌다. 경신년에 상의정당(상의정당)으로 다시 대사헌을 겸임하였고, 신유년에 순성보조공신(순성보조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문하평리 대사헌(문하평리대사헌)을 전대로 역임하였다. 임술년 봄에 또 순흥군(순흥군)에 봉해지고 순성익대보리공신(순성익대보리공신)의 칭호를 더하였다. 그해 여름에 지공거(지공거)가 되어 유양(유양)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 당시 선비를 잘 뽑았다는 칭송이 있었다. 유양은 지금 중추(중추)로 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현귀(현귀)하였다.
병인년(1386, 우왕12)에 정당문학 대진현 지춘추(정당문학대진현지춘추)에 임명되었다가 정묘년(1387, 우왕13)에 파직되고 다시 군(군)을 봉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 정월에 시중(시중) 최영(최영)이 정권을 잡고 탐오(탐오)한 권신(권신)들을 벨 적에, 공을 청렴하고 근엄하다 하여 문하찬성사 판전공(문하찬성사판전공)을 제수하고 전선(전선)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6월에 다시 상의(상의)가 되고 8월에 판후덕부사(판후덕부사)가 되어 그대로 전선을 관장하였다. 10월에는 예문관 대제학(예문관대제학)으로 판상서사사(판상서사사)를 겸임하였으니, 판상서는 곧 제조로서 전선의 일을 주관하는 벼슬이다. 기사년(1389, 공양왕1) 6월에 중대광 문하찬성사 판판도(중대광문하찬성사판판도)를 더하니, 세상에서 일컫는 이상(이상)이다. 봉명사신(봉명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성절(성절)을 축하하고 겨울에 돌아왔다. 공양군(공양군)이 임금이 되어 다시 대예문 감춘추(대예문감춘추)에 임명하였다. 경오년(1390, 공양왕2)에 판삼사사 대우문 영서운관사(판삼사사대우문영서운관사)에 임명되고, 신미년(1391, 우왕3)에는 올려 삼중대광(삼중대광) 흥녕부원군(흥녕부원군)에 봉하였는데, 늘 스스로 벼슬이 지나치다고 사양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1) 7월에 지금의 임금이 즉위하여, 공이 국초의 원로로서 청백하고 높은 덕망이 앉아서도 세상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다 하여 특진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집현전 태학사(특진보국숭록대부영삼사사집현전태학사)를 제수하였다. 계유년(1393, 태조2)에 판문하부사(판문하부사)가 되니, 품계(품계)ㆍ훈등(훈등)ㆍ관직(관직)은 전과 같았다. 갑술년(1394, 태조3)에는 공의 나이가 이미 70이었는데, 2월에 다시 봉명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어 연산참(연산참)에 이르렀다가 요동도사(요동도사)가 중국 조정의 명령이 있다고 막아 되돌아왔다.
3월 24일 병이 들어 집에서 졸(졸)하니,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문하좌시중) 평양백(평양백) 조준(조준)에게 교서(교서)를 받들게 하여 빈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고 부의를 많이 하였으며, 봉상시(봉상사)에서 ‘문간(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사(유사)가 의식절차를 차려 5월 경신일에 임진현 (임진현) 서국동(서국동)에 장례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대범하고 중후하였으며 풍채가 청신하고 명랑하였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였고 관직에 재직할 때에는 부지런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이재(이재)를 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일찍이 말을 급하게 하거나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지은 적이 없었으며, 남을 대하는 것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선행(선행)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늘 자제들을 타이를 적에는 망령된 말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맏아들 중온(중온)이 일찍이 안동(안동)의 원이 되었을 때에 친히 훈계하는 말 수십 조목을 써서 주었는데, 매우 자세하고도 절실하여 모두 법도가 될 만하였다. 집 뒤 언덕에 정자를 지어 ‘쌍청(쌍청)’이란 현판을 걸고 그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대접을 하였으나 풍성하고 사치한 것을 힘쓰지 않았으며, 거문고와 비파를 즐기지 않고 오직 예절과 마음으로 흡족하게 대접할 뿐이었다. 두 번이나 전선(전선)을 맡았으나 사사로이 청알(청알)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으며, 대간(대간)에 출입하면서도 대체를 따를 뿐 세쇄한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여러 조(조)의 정승을 역임하였으나 자신의 자제들을 위하여 은택을 구하지 않았고, 삼가 성헌(성헌)을 지키고 어지럽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의논은 관대하고 후하여 재상의 체모가 있었다. 밀직(밀직) 조운흘(조운흘)이 공보다 20여 년 뒤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그곳 부로(부로)들이 공을 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공의 생사당(생사당)을 지어 초상을 걸어 두게 하였다. 공이 죽자 부음을 들은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조문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공의 일생은 참으로 완전하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봉익대부 우상시(봉익대부우상시) 김휘남(김휘남)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곧 중온(중온)이니 봉익대부 밀직제학 집현관제학 상호군(밀직제학집현관제학상호군)이다. 판도판서(판도판서) 김안리(김안리)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를 못 둔 채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는 경량(경량)으로 지금 자헌대부 서북면도순문사 동중추원사(자헌대부서북면도순문사동중추원사)로 있다. 일찍이 밀직(밀직)으로서 양광도 관찰사(양광도관찰사)를 지냈는데,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임금이 서북 지방을 중시하여 잘 다스릴 인재를 뽑아 위임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구하기 어렵던 차에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므로 특별히 기용하여 다시 서북면 도순문사를 임명한 것이다. 셋째는 경공(경공)으로 추충익대개국공신 자헌대부 흥녕군(추충익대개국공신자헌대부흥녕군)인데, 역시 대사헌으로 전라도 관찰사(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이 세 아들이 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어머니 김씨가 경녕택주(경녕택주)에 봉해지고 해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을 받았다. 지금도 흥녕군이 좌명(좌명)한 공로로 전과 같이 봉작(봉작)되어 있고 녹봉이 변함없다. 넷째는 경검(경검)으로 가선대부(가선대부) 공조전서(공조전서)다. 대간(대간)을 역임하고 주군(주군)을 다스려 인재로 일컬어졌다. 여러 아들이 가훈(가훈)을 잘 받들었으며 청렴ㆍ근신하여 예를 지키는 것이 모두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 딸은 모관(모관) 유후(유후)에게 출가하였다. 그 역시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의 가정 사위에 걸맞다. 손자와 손녀가 몇이 있다.
도순문사(도순문사)는 대방군(대방군) 양천룡(양천룡)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이실(이실) 정씨(정씨)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이 민수(민수)이다. 흥녕군(흥녕군)은 정당문학(정당문학) 정사도(정사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순(순)을 낳았다. 현재 좌습유(좌습유) 벼슬에 있다. 공조 전서(공조전서)는 청성군(청성군) 한수(한수)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민동(민동)은 창고도감 판관(창고도감판관)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예빈시 승(예빈사승) 김맹성(김맹성)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생원(생원) 이윤상(이윤상)에게 출가하였고, 삼녀는 봉례랑(봉례랑) 김천(김천)에게 출가하였고, 4녀는 낭장(랑장) 이사흠(이사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사위 유 밀직(유밀직)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기(기)는 좌정언(좌정언) 벼슬에 있고, 차남 한(한)은 동부령(동부령) 벼슬에 있다.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습유(습유)는 정당문학(정당문학) 정공권(정공권)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장남은 숭직(숭직)이고, 차남은 숭선(숭선)이다. 유정언(유정언)은 밀직 이종덕(이종덕)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방선(방선)이고 차남은 방경(방경)이다. 또 판전교시사(판전교사사) 방순(방순)의 딸을 재취(재취)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방근(방근)이다. 동부령(동부령)은 대사헌(대사헌) 박경(박경)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김시승(김사승)은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장례를 치른 이듬해 여름에 흥녕군이 대부인(대부인)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공(선공)의 덕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파되어 있음은 속일 수 없지만, 오직 길이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석에 새겨 전하려 합니다. 당신은 우리 아들과 교유하면서 같이 학업을 닦았고 같은 때에 벼슬을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우리 선공의 일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예문관ㆍ춘추관에서 편수의 직무를 맡고 있으니, 선공의 묘에 비명(비명)을 짓는 일을 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글재주가 졸렬하다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명)을 한다.

우뚝 치솟은 산이 / 줄률고산
순흥(순흥)을 둘러싸 / 우흥시환
맑은 기운 응결하여 / 숙기유종
신령스러움이 내렸도다 / 내강궐신
이에 대인(대인)을 낳으니 / 내생석인
온후하고 공손한 자질 / 온온기공
높은 벼슬 끊이지 않았고 / 위관선련
70세 수를 누렸도다 / 수향희년
처음도 좋고 끝도 아름다우니 / 선시령종
훌륭한 자손들 이어져 / 유자유손
가문에 높은 벼슬 가득하도다 / 잠리영문
이는 모두 공의 가르침 덕분 / 교회지공
서국동(서국동) 언덕에 / 서국지원
커다란 저 무덤 / 하옥지분
바로 공의 유택 / 유공현궁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 벌석작비
나의 글을 새겨 / 원각아사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 영시무궁

명나라 조선국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수문전대제학 겸 판호조사 잉령치사 정숙공 안공 묘지명 서문과 함께 [유명조선국숭록대부판중추원사수문전대제학겸판호조사잉령치사시정숙공안공묘지명 병서] 변계량(변계량)

판중추(판중추) 잉령치사(잉령치사) 정숙(정숙) 안공(안공)을 장사지낸 이듬해 여름에 관찰사로 있는 둘째 아들이 공의 행실을 기록해 가지고 와서 무덤의 명(명)을 구하였는데, 나는 가문간의 우의로 보아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순(순), 자는 현지(현지), 본관은 순흥(순흥)이다. 증조는 고려 도첨의찬성사 흥령부원군(흥녕부원군) 문정공(문정공) 축(축)이니 원조(원조) 제과(제과)에 합격하였고, 호가 근재(근재)이다. 도덕과 문장이 당세에 스승이었고, 일찍이 관동안렴사를 지냈다. 그 때 저술한 《와주집(와주집)》이 세상에 전한다. 조부는 특진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특진보국숭록대부판문하부사집현전대학사) 문간공(문간공) 종원(종원)이고, 아버지는 추충익대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령부원군(추충익대개국공신보국숭록대부흥녕부원군) 양도공(량도공) 휘 경공(경공)이다. 어머니는 의정택주(의정댁주) 정씨(정씨)이니, 정당문학 오천군(오천군) 정사도(정사도)의 딸이다. 홍무(홍무) 4년 신해년(1371, 공민왕20) 10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10세인 경신년(1380, 우왕6)에 음직으로 행랑도감판관(행랑도감판관)에 보직되었고, 계해년(1383, 우왕9)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정묘년(1387, 우왕13)에 전의시(전의사)에 기용되었다. 무진년(1388, 우왕1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병과에 급제하였다. 경오년(1390, 공양왕2)에 성균학유(성균학유)로 직학(직학)을 지내고, 임신년(1392, 태조1)에 사재주부(사재주부)가 되고, 계유년(1393, 태조2)에 사헌감찰(사헌감찰)로 옮겼다. 갑술년(1394, 태조3)에 좌습유(좌습유) 지제교(지제교)로 있으면서 정사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어겨 병자년(1396, 태조5) 가을에 김해판관(금해판관)으로 나갔는데 치적이 제일이기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였다. 정축년(1397, 태조6)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세자우시직)으로 소환되었고, 무인년(1398, 태조7) 여름에 강원도 도사(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사헌잡단(사헌잡단)이 되었다. 이때 궁녀가 죄를 범하자 태조가 대사헌 조박(조박)에게 명하여 곧 죽이게 하였는데, 조박이 공에 고하여 공이 말하기를,
“사헌부는 형관(형관)이 아닙니다. 또 그 죄목을 바로잡지 않고 죽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조박이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강행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인명이란 지극히 중하여 죽이면 다시 살리지 못합니다. 갑자기 극형에 처하면 의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응당 유사에게 붙여 국문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조박이 노하여 공의 말한 내용을 아뢰었는데, 태조가 곧 깨닫고 공의 말대로 따랐다. 또 어느 날 백관이 경복궁 문밖에 모여서 동서로 나누어 앉았을 때 한 권귀(권귀)가 말을 타고 곧장 대궐에 도착하였는데 어느 누구도 감히 힐책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공이 그 종자(종자)를 잡아서 탄핵하고 권귀를 귀양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유쾌하게 여겼다. 그때 태종(태종)이 세자로서 그 일을 목격하였으므로, 왕위에 오른 뒤에 공을 보고 여러 차례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경진년(1400, 정종2)에 서북면 경력(서북면경력)으로 나갔다가, 신사년(1401, 태종1)에 통덕랑 병조정랑 겸 형조도관정랑(통덕병조정랑겸형조도관정랑)이 되었고, 임오년(1402, 태조2)에 조봉 내자소윤(조봉 내자소윤)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종부시 봉상시 부령(부령)으로 조산대부(조산대부)에 올랐다. 계미년(1403, 태종3)에 사평부 경력(사평부경력)을 겸하였으니, 이해로부터 사헌부 장령, 형조의 도관(도관) 의랑(의랑), 내자윤(내자윤), 봉상시와 종부시의 두 영(령)이 되고, 다시 판내자(판내자) 판통례(판통례)가 되었으며 모두 관직(관직)을 겸하였다. 여러 차례 품계가 올라서 통정대부가 되었다. 정해년(1407, 태종7) 겨울에 승정원 우부대언에 뽑혔으며, 무자년(1408, 태종8)에 우대언(우대언)에 이르러 임금을 도운 것이 많았고, 겨울에 이조 우참의에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좌참의에 옮겼고, 기축년(1409, 태종9)에 가선대부 좌군동지총제 보문각직제학 동지춘추관사(가선좌군동지총제보문각직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오르고, 가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신묘년(1411, 태종11)에 좌군총제 집현전제학(좌군총제 집현전제학)이 되었고, 갑오년(1414, 태종14)에 개성부유후(개성부류후)로서 가정대부(가정대부)에 오르고, 병신년(1416, 태종16)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기해년(1419, 세종1)에 공안부윤(공안부윤) 보문각 제학이 되었고, 가을에 호조참판이 되었다.
경자년(1420, 세종2) 겨울에 공조판서 자헌대부가 되었다. 계묘년(1423, 세종5)에 아버지 상사를 당하였는데, 함길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많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임금이 대신을 보내어 구휼하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특별히 공을 상중에서 기용하여 관찰사를 삼았으므로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착하자, 굶주린 백성들을 함흥부(함흥부)에 모아 직접 진휼하는 정사로 보살피니 백성들이 그 덕택으로 살아났다.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의정부 참찬으로 삼았다.
갑진년(1424, 세종6)에 호조 판서가 되니 전곡(전곡)을 맡은 지가 17년이나 되었는데, 경비 처리가 매우 광범위하고 많았으나 출납이 정확하고 밝아서 털끝만큼도 차질이 없었다. 정미년(1427, 세종9)에 정헌(정헌)의 품계에 올랐다. 기유년(1429, 세종11)에 의금부 제조가 되었는데 전후 8년 동안 송사가 너그럽고 공평하였다. 때마침 왜적이 길에 출현하여 잡으려다가 놓쳤는데 본부에서 집이 시체 곁에 있는 자에게 죄목을 씌웠다. 공이 이를 원통히 여겨 옥사를 늦추고는 많은 현상금을 걸었고 결국 진짜 적(적)을 잡아 그 원통함을 씻어 주니, 사람들이 공의 현명함에 탄복하였다. 또 어떤 과부가 무고로 난언죄(란언죄)에 걸려 국문에 불복하였는데, 옥관이 매질을 하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중대한 옥사인데 어찌 매질로 그 실정을 밝히겠는가. 응당 대질하여 아뢰라.”
하였다. 임금이 공의 말을 따라 하여 과부가 풀려 나왔다. 공이 판결을 공평하게 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경술년(1430, 세종12)에 숭정대부에 오르고, 다음해에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고, 임자년(1432, 세종14)에 판중추(판중추)로서 호조 판서를 겸하였으며, 을묘년(1435, 세종17) 가을에 의정부 찬성으로 호조 판서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다.
병진년(1436, 세종18) 여름에 임기가 찼으나 두 차례나 사양하여 다시 판중추가 되었다.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해에 충청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다음해 봄 정월에 임금이 공이 예전에 함길도를 진휼하여 치적이 있었다고 하여 도순문진휼사(도순문진휼사)를 삼았다. 조정에 올라 사은할 때 임금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대개 사람이 재주와 덕이 있으면 하늘에 호응하여 백성을 보전할 것이다. 옛날 당 태종이 인의(인의)를 힘써 행한 지 4, 5년이 못 되어서 곧 쌀 한 말 값이 서돈이 되는 효과가 있었으니, 내가 매우 사모한다. 왕위를 이어 받은 뒤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이룩하여 풍년을 기약하였으나, 해가 거듭 장마가 지고 가물어서 백성은 먹을 것조차 없다. 이 허물은 나의 부덕에 있는 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닦고 반성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기를 바란 지가 20년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경상ㆍ전라ㆍ충청 모든 도가 재앙을 입은 것이 근래에 드문 경우이고 충청도가 더욱 심하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돌보아 주는 것도 바랄 수 없다. 이에 대한 구황정책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 경(경)이 가서 경건히 처리하라.”
하였다. 공이 다방면으로 진휼하여 온 도가 온전히 살아났다. 여름에 숭록대부에 가자되었고, 기미년(1439, 세종21)에 본직으로 수문(수문)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한사코 사양하여 이내 치사(치사)를 받았다.
공이 병이 들자 글을 써서 여러 아들에게 보이기를,
“내 나이 70에 벼슬이 1품(품)에 이르렀고 자손이 아무 탈이 없으니, 비록 죽더라도 영광이다. 더구나 삶에 있어서 죽음이란 자연의 이치이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라. 상례 절차는 한결같이 《가례(가례)》를 따르고 불사(불사)는 행하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다. 나는 죽음으로써 산 사람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니 선영(선영) 곁에서 죽어 장사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하고는, 곧 나가 금천(금천) 별서(별서)에 거처하였다. 임금이 연이어 내의(내의)를 보내 진찰하고 반찬을 계속 내렸다. 경신년(1440, 세종22) 11월 28일에 정침에서 졸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애도하여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과 치제(치제)를 하고 관가에서 도와주었다. 다음해 신유년(1441, 세종23) 2월 초3일 경오일에 본현(본현) 북쪽 백사동(백사동) 언덕 선영 아래에 장사하였다. 공의 일생은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깊고 밝고 겸손하고 엄숙하였다. 어릴 때부터 말과 웃음이 적어,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한 모습이 재상이 될 그릇임을 알 수 있었다. 남의 선(선)을 드러내고 하자를 덮어주었으며, 친인척에게 더욱 후하여 혹 질병과 사상(사상)이 있으면 미천한 종복까지도 가진 것을 기울여 구제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에 시중(시중) 최영(최형)이 권간(권간)을 주벌할 때, 공의 진사시 좌주(좌주)가 연루되어 처형되어 시체가 교외에 버려졌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표류하였다. 당시 공의 나이가 18세였는데 종 하나를 거느리고 가서 찾아 장사지내니 식자들이 큰 그릇임을 알고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는 이익을 말하지 않고, 방안에 단정하게 앉아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사(공사)가 아니면 사람을 응접한 적이 없으며, 관아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올바름을 잡고 흔들리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를 따르기를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옛날 대신의 기풍이 성대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임금이 삼공(삼공)을 불러 비밀히 회의를 하였는데, 오직 공과 문경공(문경공) 허조(허조)가 참여하였다.
부인 정숙부인(정숙부인) 청성정씨(청성정씨)는 정당문학 청원군(청원군) 정공권(정공권)의 딸이다. 곧고 차분하여 부도(부도)를 가졌는데, 공보다 6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소 옆에 장례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맏아들 숭직(숭직)은 통정대부 판내자시(통정대부판내자사)로 두 차례나 주목(주목)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둘째 숭선(숭선)은 가정대부(가정대부) 경기도 관찰사이며, 경자과(경자과)에 장원 급제하여 일찍이 도승지를 지냈다. 셋째 숭신(숭신)은 조산대부(조산대부) 인순부 소윤(인순부소윤)인데, 공보다 1년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넷째 숭효(숭효)는 조봉대부(조봉대부) 평안도 경력(평안도경력)이니, 역시 단아한 선비다. 딸은 셋이다. 맏딸은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이숙치(리숙치)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숙치는 대사헌과 세 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둘째는 가선대부 공조참판 조혜(조혜)에게 출가하였다. 조혜는 청직(청직)을 역임하였고 인재로 칭찬을 받았다. 셋째는 승훈랑(승훈랑) 현풍현감(현풍현감) 김준례(금준례)에게 출가하였다.
판사(판사)는 평성부원군(평성부원군) 조연(조연)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고 대호군 박강(박강)에게 출가하였다.
관찰사는 상호군 송천우(송천우)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 훈(훈)은 돈녕부 판관 이후(리후)의 딸에게 장가갔고, 둘째 의(의)는 전(전) 녹사(록사) 윤효동(윤효동)의 딸에게 장가갔다. 맏딸은 사헌부 감찰 김숙(금숙)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이조 정랑 조석문(조석문)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갑인년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소윤(소윤)은 광주 목사 이숙야(리숙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전(전)은 공조 정랑 권택(권택)의 딸에게 장가갔다. 맏딸은 돈녕부승(돈녕부승) 최민(최민)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유학(유학) 조정규(조정규)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유학 박봉손(박봉손)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경력은 지돈녕부사 이숙무(리숙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다. 맏아들 겸(겸)은 공보다 1년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는 눌(눌)이다. 맏딸은 진사 강희맹(강희맹)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참찬(참찬)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병조 정랑 이계현(리계현)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을묘년 병과(병과)에 합격하였으며, 같은 이씨(리씨)가 아니다.
참판은 6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지당(지당), 둘째는 지은(지은), 셋째는 지하(지하), 넷째는 지한(지한), 다섯째는 지주(지주), 여섯째는 지원(지원)이다. 맏딸은 녹사(록사) 조계번(조계번)에게 출가하였는데, 역시 같은 조씨(조씨)가 아니다.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는 사용(사용) 우계충(우계충)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현풍(현풍)은 5남 6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맹절(맹절), 둘째는 맹의(맹의), 세째는 맹치(맹치)이고, 다음은 어리다. 맏딸은 부사정 홍도상(홍도상)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용(사용) 이세영(리세영)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1년 뒤에 죽었다. 증손은 모두 40여 명이다.
예로부터 성대한 가문을 보면 한두 대 전해지다가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공의 가문은 문정공(문정공) 이후로 대대로 훌륭한 재상이 나오고 오직 충성과 효도가 뛰어나니, 실로 원씨(원씨) 가문 4대에 걸쳐 다섯 공(공)을 배출한 것에 손색이 없고, 훈업과 덕망의 성대함은 더 나은 듯하다. 덕이 두터운 자는 그 후세에 경사가 넓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힌 성대한 공로가 더욱 후세를 성대하게 하여 그 자손들 번영이 원씨(원씨)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안씨(안씨)의 경사는 실로 끝이 없을 것이다.
명(명)을 한다.

어느 가문이 덕 있는 가문인가 / 숙위덕문
바로 죽계 안씨라네 / 죽계안씨
누가 그 근원을 열었는가 / 숙준기원
문정공이 시작하였네 / 문정이시
고관대작 연이어져 / 선련관면
대대로 전통 전하였네 / 세파청분
오직 공이 계승하여 / 유공극승
충성하고 근면했으니 / 이충이근
네 조정을 섬기며 / 익량사조
크게 치적을 베풀었고 / 대패궐시
사헌부에선 추상 같고 / 백대추름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봄 햇살 같았네 / 당발춘희
굶주린 백성들 / 증려고기
공이 구제하였고 / 공위활지
옥중의 원통한 일 / 안옥유원
공이 바로잡았으니 / 공위직지
오직 인이 성대하고 / 유인지성
지혜가 밝았기 때문이네 / 유지지명
실로 임금이 의지하여 / 윤협의비
은총이 날로 기울었고 / 은고일경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 국유대의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네 / 필자이결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 인년현차
산수 속에서 여생을 보냈네 / 산청수록
부귀하고 장수하니 / 부귀수고
일생의 삶 흠이 없었네 / 종시애영
모든 벼슬 중에 / 범백유위
누가 이보다 더 크랴 / 주여지경
더욱이 여러 아들 / 신공제자
문정공의 덕을 계승하였네 / 극초기덕
죽계수 흘러가는 것처럼 / 운운죽계
경사 끝없이 이어지네 / 류경무극
저 금천(금천)의 언덕에 / 유금지원
공의 무덤 있어 / 실공현댁
묘지명으로 표하니 / 명이표지
비석도 우뚝하네 / 유외사석

문정공전(문정공전) 《고려사(고려사)》

안축(안축)은 자가 당지(당지)이고 복주(복주) 흥녕현(흥녕현) 사람이다. 아버지 석(석)은 현리(현리)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학업에 힘써, 금주 사록(금주사록)이 되고 사한(사한)으로 임명되었다가 사헌규정(사헌규정)을 지냈다. 충숙왕 11년(1324)에 원나라 제과(제과)에 합격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요양로개주판관) 벼슬을 받았다. 이때에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안축이 동지에게 말하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의 욕이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이다.”
하고, 곧 원나라에 상서하여 왕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벼슬을 올려 성균악정(성균악정)으로 임명하였다. 원나라 개주수(개주수)가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마침 왕이 그를 등용하기로 정한 때여서 갈 수 없었다. 그 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우사의대부(우사의대부)가 되었다.
충혜왕이 즉위한 후에 강릉도존무사(강릉도존무사)가 되었다. 그 때 저작으로 《관동와주(관동와주)》라는 문집이 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판전교시사(판전교사사)ㆍ지전법사사(지전법사사)가 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한 후 충혜왕의 총애를 받던 자를 모두 쫓아냈는데 어떤 자가 안축도 쫓겨 나간 자와 친하였다고 하여 파면되었다. 이윽고 다시 전법판서(전법판서)로 등용되었다가 실세인 내관의 뜻을 거스른 것 때문에 또 파면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한 후 또 전법판서(전법판서)로 임명되었다가 감찰대부(감찰대부)로 전직하였다. 그는 악정(악정)으로부터 감찰대부(감찰대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관직(관직)을 겸임하였기 때문에 표문(표문)ㆍ전문(전문) 등의 문건들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뒤에 검교평리(검교평리)로서 외직으로 나가 상주목사(상주목사)가 되었다. 이 때 어머니가 흥녕(흥녕)에 있었으므로 그 곳을 왕래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한 후 소환되어 밀직부사(밀직부사)가 되었다가 계속 승진하여 첨의찬성사(첨의찬성사) 감춘추관사(감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이제현(이제현)등과 더불어 민지(민지)가 편찬한 《편년강목(편년강목)》을 증수(증수)하였고, 또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3대의 실록(실록)을 수정(수정)하였다. 당시 집정자(집정자)들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파면시켜서 흥녕군(흥녕군)에 봉하였다. 다시 복직하였다가 4년 뒤 병으로 치사하였고, 다시 흥녕군에 봉해졌다.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문정(문정)’이라 하였다.
안축은 마음이 공정하고 가정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으나, 네 번 법관을 지내는 동안 억울하게 노예가 된 자들을 반드시 양인이 되게 하였다.”
하였다. 아버지 안석(안석)이 일찍 죽었으므로 두 아우 안보(안보)ㆍ안집(안집)을 교육시켰는데, 그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보(안보)와 안집(안집)도 그를 아버지와 같이 섬겼다. 아들은 안종기(안종기)와 안종원(안종원)이다.
안종원(안종원)은 자가 사청(사청)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충목왕 때에 사한(사한)으로 임명되었다. 임기가 차서 응당 승진할 차례였으나 동료 심동로(심동로)가 연장자로서 벼슬이 낮았으므로 그에게 양보하였다. 이에 아버지 안축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양하는 것은 사람의 좋은 행실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사양하면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우리 가문에 인물이 났으니 아마 더욱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한 해를 지나 비로소 삼사도사(삼사도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초에 전법정랑(전법정랑)에 임명되었다. 이 때 농민들의 소송사건이 전법(전법)에 집중되었는데 그가 공정한 판결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명철함을 칭송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시어사(시어사)가 되었다가 양광도안렴사(양광도안렴사)로 나갔다.
왕이 홍두적(홍두적)의 난을 피하여 남방으로 갈 때에 안종원이 길에서 뵙고 앞서 충주로 가서 왕을 모실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시종(시종)들이 참소하기를,
“안렴사(안렴사)가 충주(충주)까지 가서 영(영)을 넘어 도망하였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믿고 사자를 보내어 잡아오라 하였는데, 사자가 충주에 가 안종원(안종원)이 객사에서 왕을 모실 차비를 서둘고 있는 것을 보고 데리고 같이 가니 왕이 그의 무고함을 알고 죄를 묻지 않았다. 왕이 음죽(음죽)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 피난 가고 없었다. 여기에서 안종원이 왕의 행차에 대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하였다 하여 순군(순군)에 가두었다가 지청풍군(지청풍군)으로 좌천시켰다. 뒤에 전법총랑(전법총랑)이 되어 내직으로 들어갔다.
신돈(신돈)이 정권을 잡아 휘두르자 사대부(사대부)들이 다투어 그에게 아부하였다. 어떤 집정자(집정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영상(영상)에게 추천하면 간관(간관) 자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속히 신돈(신돈)을 찾아가 만나 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안종원이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는 본래 게으르고 거칠어서 권세에 아부할 줄 모른다.”
하였다. 집정자가 부끄러워하고는 도리어 안종원을 참소하여 강릉부사(강릉부사)로 나가게 하였으나, 그는 그곳에서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오래지 않아 교체되자 그곳 백성들이 생사당(생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그 후 7~8년간 벼슬을 떠나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신돈이 처단되자 사헌시사(사헌시사)로 등용되었다가 우사의대부(우사의대부)로 전직하였다. 신우왕(신우왕)이 즉위한 후에 좌사의대부(좌사의대부) 유구(유구)ㆍ문하사인(문하사인) 김도(김도)ㆍ기거사인(기거사인) 박상진(박상진)ㆍ헌납(헌납) 임효선(임효선)ㆍ정언(정언) 노숭(노숭)ㆍ민유의(민유의) 등과 더불어 도당(도당)에 상서하기를,
“환자(환자)가 국가의 화근이 된 것은 진(진)나라의 조고(조고)로부터 내려오면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충선왕의 토번(토번)에서의 곤욕과 충혜왕의 악양(악양)의 재앙이 모두 백안독고사(백안독고사)와 고용보(고용보)의 소행 때문이었고, 전날 있었던 최만생(최만생)의 대역사건에서 극도에 달한 것입니다.
지금 임금이 아직 어리니 경험이 많고 사리를 잘 아는 노련한 사람을 친근히 하여 좋은 품성을 기르게 해야 하며, 환관이 조석으로 붙어서 잘못 인도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현재 혼전(혼전)에는 이미 도감(도감)이 있어서 때맞추어 조석 공양(공양)을 하고 있으니 환자(환자)들이 어지럽게 모여들어 세력 다툼질을 하는 자리가 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궁내에는 충직한 자 10명을 선택하여 청소를 시키는 정도에 그치게 하면 적당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여러 재상들의 깊은 고려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상금을 주고 또 이중으로 봉급을 주면서 나라의 경비를 허비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하고, 모든 쓸데없는 인원을 정리하여 다시 국가의 우환이 반복됨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 때 우왕의 나이 성년이 못되어 일체 나라 일이 재상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안종원 등이 이와 같이 건의하여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바란 것이었는데, 재상들이 이것을 유념하지 않았다.
성균대사성(성균대사성)을 거쳐 우상시(우상시)가 되었다가 대사헌(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집의 김승득(김승득) 등이 지대연(지대연)의 뜻에 영합하여 임박(임박)을 처단하였는데, 안종원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판숭경부사(판숭경부사)로 옮겼다가 얼마 안 가서 흥녕군(흥녕군)에 봉해졌다. 얼마 뒤에 문하평리(문하평리)로서 다시 대사헌(대사헌)을 겸임하고 순성보조공신(순성보조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동료들과 더불어 상서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환시(환시)들이 함부로 정권을 좌우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쳤기 때문에, 우리 선대 임금들은 신하를 잘 선택하여 덕행이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고 환관(환관)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게 하여 다만 궁궐을 청소시키는데 그쳤으며, 그들에게 문무관의 벼슬을 주지 않았습니다. 선왕(선왕)이 즉위한 초기까지 역시 예전의 제도는 준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환시(환시)들이 기회를 타서 권세를 잡고 많은 당파를 만들어 마침내 최만생(최만생)의 반역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전하 때에 와서 이득분(이득분)은 선대의 미미한 공로로 인하여 벼슬이 찬성(찬성)에 이르고 권세를 휘둘러 뇌물을 받고 조정 신하들을 참소하여, 중외의 신민들이 이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영명한 판단으로 그를 먼 곳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도당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벼슬자리를 함부로 차지하고 국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화가 우려됩니다. 선대의 제도를 본받아, 환관은 총명하고 영리한 자로 10명이 넘지 않을 정도로 선택하여 궁중에서 심부름을 시키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정리해 퇴출시키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장령(장령) 여극인(여극인)ㆍ윤취(윤취), 지평 성석연(성석연)등과 더불어 상서하기를,
“근래 명(명)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견책하고 죽은 왕에 대한 시호와 왕위계승에 대한 요청이 있을 때마다 회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금ㆍ은ㆍ말[마] 등의 요구액을 정해 놓고 공납케 하고 있는데, 그 수량이 너무 지나치게 많아 이것을 문무관과 산관(산관)에까지 거둬들여도 액수를 채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탐욕스럽고 분별없는 자는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이 기회를 타서 자기 물건을 팔아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여, 공납 중에 사사로운 물건이 십중팔구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사정은 명나라로 하여금 더욱 우리나라를 정직하지 못 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여 드디어 사자를 거절하며 공납을 받지 않는 데 이르렀습니다.
지금에 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이 사사로이 가지고 가는 물건은 등급에 따라 일정한 수량으로 차등 있게 하고 그 수량 이외에는 한 필의 피륙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며, 청백하고 엄격한 관원을 서경(서경)ㆍ안주(안주) 등지에 파견하여 도순문사와 함께 검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사로이 금ㆍ은ㆍ말 및 정한 수량 이외의 피륙을 가져가는 자는 극형에 처하여 그의 처자와 재산을 몰수함과 동시에 사정을 알고도 금지하지 않은 관리는 파직시켜야할 것입니다. 또 일행 중에 범죄자가 있을 때에는 정사(정사)와 부사(부사)를 모두 법에 의하여 처벌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다시 순흥군(순흥군)에 봉해졌고 순성익대 보리공신(순성익대보리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다시 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최영(최영)이 권신과 탐관오리를 처치하고 안종원을 청백하고 성실하다 하여 문하찬성사(문하찬성사) 제조전선사(제조전선사)에 발탁하였으나 안종원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공양왕 때에 판삼사사(판삼사사)가 되고 흥녕부원군(흥녕부원군)에 봉해졌다. 본조에 들어와서 판문하부사(판문하부사)를 지내고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0세였다. 시호는 ‘문간(문간)’이다.
안종원은 성품이 소박ㆍ진중하고 풍채가 청명하였으며, 근면하고 신중하고 차분하였다. 일찍이 정자를 짓고 이름을 ‘쌍청(쌍청)’이라 하였다. 손님이 오면 술자리를 베풀었으나 성찬과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오직 예로써 흐뭇한 자리가 되게 할 뿐이었다. 아들은 안중온(안중온)ㆍ안경량(안경량)ㆍ안경공(안경공)ㆍ안경검(안경검)이다.

안보(안보)는 자가 원지(원지)이다. 나이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경주사록(경주사록)으로 임명되었다가 춘추수찬(춘추수찬)이 되고 이어 편수관(편수관)이 되었다. 충목왕 원년에 원나라 제과(제과)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요양행중서성조마)로 임명되어 승발가각고(승발가각고)를 겸임하였다. 이때 안보가 말하기를,
“이미 벼슬을 받은 이상 직무를 보지 않는 것은 공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조마 벼슬은 다만 문서를 관리할 뿐이고 다른 사무는 없으니 나는 성(성)으로 가 부임하겠다.”
하고 부임하였다. 성의 관리들이 그 재능을 중히 여기고 모두 예절 있게 대우하였다. 이윽고 안보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책임을 다한 셈이다. 어머니가 늙었는데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 것은 불효이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뒤에 우대언(우대언)으로 임명되어 집의(집의)를 겸임하였다. 충정왕 때에 전법판서(전법판서)를 지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안보의 현명함을 알고 밀직제학(밀직제학)으로 임명하고 감찰대부(감찰대부) 제조전선사(제조전선사)를 겸임시켰다. 어느 날 밤이 깊어서 왕이 안보를 불러 벼슬 제수를 시행하려다가,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 역서를 보고는 다시 말하기를,
“불길한 날이니 그만 두어야겠다.”
하였다. 안보가 평소 음양설에 구애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왕은 천시(천시)를 받들어 행하는 것이며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고 싶으시면 하시면 됩니다. 창귀(창귀)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의 안색이 변하였다. 4년에 정당문학(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안보는 내심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아는 것을 숨김없이 왕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내는 중에 왕이 안보를 사정에 어두운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안보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원하였으므로 동경유수(동경유수)로 나가게 되었으니, 경주가 흥녕(흥녕)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6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56세였다. 시호가 ‘문경(문경)’이다.
안보는 성질이 강직하고 결백하였다. 《사기(사기)》와 《한서(한서)》를 즐겨 읽었으며 문장은 허식이 없고 실질을 중하게 여겨 의사가 충분히 표현되면 그만이었다. 사무 처리에서는 대체를 주로 하고 일을 어물어물하거나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또 재산을 모으는 것을 일삼지 않아, 죽을 때에 집에는 한 섬의 양식도 쌓아둔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

상주목사로 부임하는 근재 안대부 전송 서문[송근재안대부부상주목서] 이색(이색)

동남의 고을 중에서 경주(경주)가 제일 크고 상주(상주)가 그 다음이니, 그 도 이름을 ‘경상도(경상도)’라 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을 받든 자는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쳐서 경주로 가게 되므로 풍화(풍화)의 유행이 상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가고 경주로 말미암아 북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지정(지정) 3년(1343) 봄에 근재(근재) 안후(안후)가 감찰대부(감찰대부) 우문관제학(우문관제학)으로서 상주목사로 나가게 되니, 진신(진신)의 어진 이와 종유하는 훌륭한 인사들이 모두 서로 경축하여 말하기를,
“후(후)는 안으로는 강직하고 밖으로는 온화하며, 말은 간략하고 행동은 민첩하다. 강직하고 간략하면 사람이 꺼려서 범하지 못하고 온화하고 민첩하면 사람이 즐거워하며 따른다. 사명을 받드는 자들이 전에는 그 이름을 사모하다가 지금 그 덕을 보게 되면, 비록 범 같은 영성(녕성)과 새매 같은 질도(질도)라도 그 혹독한 행동을 누그러뜨릴 만하며, 상양(상양)처럼 관각(관각)을 꾀하던 자도 그 까다로운 행위를 자제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주 백성이 거의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또 풍화가 상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간다 하였으니, 곧 상주 한 고을만이 그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또한 경상 일도의 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제군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대개 부귀와 영달은 사람이 다같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임금의 깊은 지우(지우)를 입고 사람들의 중한 기대를 지고서 능히 겸손하여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칠 줄을 아는 자는 고금(고금)에서 찾더라도 천에 열이나 백에 하나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백발의 양친이 가정에 있는데도 유약한 아우와 누이에게 맡겨 그 공양을 받들게 하고서 천리 먼 길을 분주하게 다니면서 하루아침의 영광인 조정의 벼슬을 구하여도 세상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후(후)는 중국에서 대과(대과)를 하였고 높은 문장은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이며, 중요한 관직을 내리 지내고 과장(과장)에서 시관의 직무를 맡았다. 지난해에 가족을 데리고 돌아가서 대부인(대부인)을 모시려 하였는데, 절반도 못 가서 사자를 보내 소환해서 풍헌(풍헌)의 중임을 맡겼으니, 임금의 지우가 깊지 않은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기대가 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외임을 구하여 노모를 보살피는 데 편리하게 하였고 지금 그 형제들은 중외에서 벼슬하고 있다. 그의 청렴한 점과 때맞추어 물러나는 아름다움과 독실한 효성은 온 세상을 격려하고 후세에 전할 만하다. 어찌 한 고을을 복되게 하고 한 도를 풍화(풍화)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임금의 지우(지우)가 장차 더욱 깊고 사람의 기대가 장차 더욱 중하리니, 영각(령각)을 거쳐서 황각(황각)에 올라 김정숙(금정숙)의 자취를 계승하게 될 것을 발돋움을 하고서 기다릴 만하다.”
하였다. 제군들이 그 말이 맞다 하여 이에 쓰는 바이다.

안수찬 전송 서문[송안수찬서] 이곡(이곡)

지순(지순) 3년(1332) 겨울 10월 어느 날에 춘추관 수찬 안원지(안원지)가 사명을 받들고 남쪽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그 길에 아울러 모친을 뵙게 된다고 하기에, 동료들이 마읍(마읍)에서 전송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곡(리곡)이 술잔을 들고 권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다 했는데, 그대가 그와 거의 같지 않은가. 그대가 한산(한산)을 거쳐서 죽계(죽계)를 들러 떠나게 되는데 한산은 그 전에 그대가 장서(장서)한 곳이니 유애(유애)가 있을 것이고, 죽계는 그대의 고향으로서 자친(자친)이 계시는 곳이다. 지금 다녀온 지 10년 만에 사명을 띠고 돌아가니, 영광스러운 일이므로 감히 술잔을 받들어 축하하는 것이다.”
하였다. 안군이 웃고 사양하며 천천히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대개 벼슬하여 장상(장상)에 이르러 부귀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이른바 ‘금의환향(금의환향)’이고, 깃대를 들고 풍속을 관찰하며 병부를 갖고 한 성을 도맡아 다스리면서 그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향리를 빛내는 것이 그 다음이다. 지금 나는 품직이 매우 낮고 하는 일도 전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사서(사서)에 볕을 쪼이기 위하여 단기(단기)로 달려가는 처지이니, 백성들에게 상관된 일도 없고 국정에 유익할 바도 없다. 오히려 한스러운 일인데 어찌 치하할 것이 있겠는가. 또 내가 들으니 한 그릇의 밥을 먹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개 그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은 또한 그 백성을 잊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관리를 하늘로 삼는 것인데, 요새 와서는 나라의 은택을 받들어 풍화를 선양하는 자가 모두 그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낮은 지방관들이 따로 펴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세금을 도피하고 세력가에게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집단을 이루어 관리를 업신여겨도 감히 조치하지 못한다. 또 세력에 편승하여 사리사욕을 일삼는 자가 역말을 타고 성화처럼 달려 독촉하여 황폐한 고을 허물어진 역에는 사람이 사는 자취가 끊어졌으며 곳곳마다 모두 그런 정도이다. 비록 강산이 수려하여 올라가 구경할 만하지만, 누가 다시 수레를 멈추어 깃대를 놓고 한 번이나마 그 사이에 눈을 돌리겠는가. 요즈음은 외방에 봉사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약관 시절부터 연전연승하여 학력은 풍부하고 재주는 민첩하며, 마음은 바르고 행실은 방정하였네. 남쪽 고을 좌막(좌막)이 되자 백성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으며, 이윽고 운대(운대)에 들어가서는 으뜸으로 옥당에 추천되었네. 바야흐로 때를 만나고 임금을 만났으니, 장차 임금을 잊지 않는 마음으로 백성을 잊지 않는 정사를 행한다면, 다음날 성취하는 바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네. 이번 걸음이 비록 옛 사람의 남비(람비)의 뜻은 아니라 하더라도 족히 당신 어머님께서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는 뜻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 감히 술잔을 받들어 축하하는 바이네.”
하니, 군이 웃으며 받았다. 때마침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이 ‘행(행)’과 ‘처(처)’로 나뉘어 운을 달아 시를 지어주며 말하기를,
“군의 말이 시속을 깨우치고 사명(사명)을 받드는 자의 훈계가 될 만하다.”
하였다. 이로써 아울러 시편의 머리에 쓰는 바이다.

죽계안씨 세 아들의 등과 축하시 서문[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 이색(이색)

죽계(죽계) 근재(근재)선생의 아들인 지금 밀직 첨서(밀직첨서)는 이색(리색)과 동년(동년) 진사이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선친 삼 형제가 과거를 하고 현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또 내 자식 삼 형제가 모두 요행히 과거에 들어갔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 족조(족조) 문성공(문성공)의 손자 정당공(정당공)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하늘이 우리 안씨만을 후하게 한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는가. 문성공은 충렬왕을 섬겨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였고 근고에 없는 훌륭한 문장을 지니셨는데도 오히려 3대를 지나서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 그 갚음을 받은 것이 늦어졌다 하겠다. 그러나 내 선친이 비록 덕을 쌓고 의(의)를 행했다고 하지만 내가 계승한 것이 없는데, 내 자식이 과거에 오른 것이 이와 같이 빠르니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착한 자를 복되게 하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법이니, 그 실상이 없고서 그 이름을 얻는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 조고의 덕행이 위로 천심(천심)을 감동시켜 자손에게 혜택을 내린 것이니, 어찌 시문(시문)으로 전파하여 후학의 권장이 되게 할 만하지 않은가.”
하였는데, 그러나 그 뒤로 나에게 글을 청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하루는 그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기 때문에 나라에서 우리 모친에게 녹을 주고 또 택주(댁주)로 봉하여 영광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시로 노래하지 아니하면 이는 태만한 일입니다. 또 자식의 도리는 오직 부모를 현양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선생의 글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광종(광종)이 과거를 창설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파한 적이 없었으니, 부자 형제가 내리 과거에 오른 자가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병이 들어서 넓게 상고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고로(고로)에게 물어보고 역사서에서 찾아 기록해 오기를 바라네. 내가 장차 그대를 위하여 서문을 짓겠네.”
하였다. 그후 며칠이 안 되어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저희들이 감히 멀리 옛일까지는 상고하지 못하고 우선 충렬왕으로부터 상당(상당) 한중찬공(한중찬공) 이하 열여섯 집을 찾았습니다. 많은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선생께서 가르쳐주십시오.”
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재상 김근(금근)의 아들 삼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부일(부일)ㆍ부식(부식)ㆍ부의(부의)이고, 평장(평장) 민규(민규)공의 아들 오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강균(강균)ㆍ적균(적균)ㆍ광균(광균)ㆍ인균(인균)ㆍ양균(량균)이고, 평장(평장) 임유(임유)의 아들 삼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경숙(경숙)ㆍ경겸(경겸)ㆍ경순(경순)이고, 증복야(증복사) 이격(리핵)의 아들 삼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진(진)ㆍ▨ㆍ▨이고, 검교정승(검교정승) 김태현(금태현)의 아들 삼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광철(광철)ㆍ광재(광재)ㆍ광뢰(광로)이네. 그 나머지는 다 상고할 수 없네.
내가 아는 바로는, 청주한씨 사기(사기)ㆍ사겸(사겸)ㆍ보(보) 삼형제, 함양박씨(함양박씨) 장(장)ㆍ리(리)ㆍ계원(계원) 삼형제, 진양박씨(진양박씨) 인간(인간)ㆍ인지(인지)ㆍ인우(인우) 삼형제, 죽주박씨(죽주박씨) 문화(문화)ㆍ효수(효수)ㆍ송생(송생) 삼 형제와 화평노씨(화평로씨) 승관(승관)ㆍ승조(승조)ㆍ승신(승신) 삼형제이네. 지금 세상에서 모두 아는 이로는 김해김씨(김해김씨) 동양(동양)ㆍ광윤(광윤)ㆍ광원(광원) 삼형제, 밀성박씨(밀성박씨) 밀양(밀양)ㆍ대양(대양)ㆍ삼양(삼양)ㆍ계양(계양) 사형제, 곡성염씨(곡성렴씨) 국보(국보)ㆍ흥방(흥방)ㆍ정수(정수) 삼형제, 창녕성씨(창녕성씨) 석린(석린)ㆍ석용(석용)ㆍ석인(석연) 삼형제, 흥안배씨(흥안배씨) 중보(중보)ㆍ중성(중성)ㆍ중유(중유)ㆍ중륜(중륜) 사형제와, 전주유씨(전주류씨) 극강(극강)ㆍ극서(극서)ㆍ극제(극제) 삼형제, 단산우씨(단산우씨) 홍수(홍수)ㆍ홍강(홍강)ㆍ홍득(홍득) 삼형제가 있네. 또 특이한 어머니로서 월성이씨(월성이씨)ㆍ양천허씨(양천허씨)ㆍ회골설씨(회골설씨)가 있네.”
하였다.
아, 이로써 국가가 아름다운 풍속을 배양하였음을 엿볼 수 있으며, 삼한(삼한) 인물의 번성함이 과거에 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가 번성함으로 말미암아 한 나라 정치의 기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이 우하(우하) 시대에 있었다고 하나 역사가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고, 주 나라가 은 태사(은태사) 기자(기자)를 봉하게 되고서 중국과 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록 봉했지만 신하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우범(우범)을 받은 것을 중히 여긴 때문이며, 또 그곳에 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태사의 사당이 평양부에 있어 국가에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고 있으니, 태사가 우리나라 사람을 감화시킨 것이 매우 깊었다. 어찌 쌍기(쌍기)ㆍ왕융(왕융)의 천박한 무리가 우리 문풍(문풍)의 시작이 된 것에 비하랴. 그러나 쌍씨ㆍ왕씨가 후생을 계도한 공도 지극하다 하겠다. 그 영예가 한 시대의 선망이 되어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모두 과거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게 하여 그 자제들에게 기필코 얻도록 힘쓰게 하였으니, 이는 사실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로써 훈도되고 감화되어 집집마다 글을 읽어서 과거를 얻었고, 삼형제 오형제가 함께 오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쌍씨ㆍ왕씨의 공이 크다 하겠다. 지금 장차 안씨 가문의 영예를 노래하면서 쌍씨ㆍ왕씨에 미치는 것은 대개 음식을 할 때에 반드시 처음 만든 자에게 제사하는 법과 같은 것이다. 아, 사람이 뜻을 얻고 나면 그 본을 잊는다 하는데 그 마음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근재(근재) 선생의 이름은 축(축), 자는 당지(당지)이다. 정당(정당)공의 이름은 보(보), 자는 원지(원지)이다. 밀직(밀직)공의 이름은 집(집), 자는 목지(목지)이다. 첨서(첨서)공의 아들로서 장자 중온(중온)은 군부 판서(군부판서)이고, 둘째 경량(경량)은 좌헌납(좌헌납)이고, 셋째 경공(경공)은 전리 좌랑이고, 넷째 경검(경검)은 과거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창룡(창룡) 무오년(1378) 4월 일.

양광도안렴사 안시어 전송시 서문[송양광도안렴사안시어시서] 이색(이색)

순흥 안씨는 대대로 죽계(죽계) 가에서 살았다. 죽계는 그 근원이 태백산(태백산)에서 나왔으므로, 산도 크고 물줄기도 멀리 흐르니 안씨의 흥왕(흥왕)은 아마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근재(근재)선생이 태정(대정)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천자의 조정에서 응시(응시)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고, 돌아와 본국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봉군(봉군)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한 시대에 걸출하였다. 그 벼슬에 재임하면서 일을 맡아 곳곳에서 공을 이루었고, 충의와 대절(대절)은 무너진 풍속을 격려하고 쇠퇴한 세상을 진작하며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할 만한 것이 많아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선생의 막내아들 사청(사청) 또한 문학으로 진출하였으니 나와 동년(동년)이다.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과 우뚝 선 봉황과 같고,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면 나라를 지키는 장성(장성)과 같아서 그 아버지의 풍모를 가졌다. 하지만 온자한 기품은 오히려 더 나았다.
나의 선친 문효공(문효공 이곡(리곡))이 근재선생을 스승으로 섬겼고, 또 그 아우 정당공(정당공)과 함께 동년이었다. 또 내가 사청(사청)과 더불어 신사년에 진사가 되어 안씨와 이씨는 세교(세교)를 맺게 되었다. 이런 처지에 전송하는 글을 지어주면서 어찌 정(정)으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청(사청)이 시어사(시어사)로서 외직으로 나가 양광도(양광도)를 안찰하게 되어 동년 진사들이 전송하게 되었다. 술잔이 돌쯤에 내가 말하기를,
“이미 세교(세교)를 맺었고 공이 또 글을 청하는데 어찌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청은 학업이 높고 절조가 있어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맡은 바의 직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성명(성명)이 매우 높으니 경계하면 망령이요, 칭찬하면 아첨이다. 그러나 안회(안회)와 자로(자로)가 어떠한 인물인가. 그들은 친히 성인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훈계를 들었으니 조존(조존)ㆍ성찰(성찰)의 공부에 있어서는 실로 따질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차근차근 좋은 말을 해주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겠는가. 사청이 내외 관직을 계속 역임하여 이미 현달하였지만, 조상의 음덕과 자신의 근면한 행실로 공명과 사업이 날로 진보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잘난 점을 끼고서 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다. 그러나 도덕이 몸에 배이고 정사가 효과를 거두는 것이 또 오늘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아직도 진보할 여지가 많으니, 사청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뜻을 견지하여 처음과 같이 변함없으면 될 것이다.”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맞다 하므로 드디어 써서 서문으로 삼게 되었다.

순흥 봉서루 중건 기문[순흥봉서루중영기] 안축(안축)

나라의 동남쪽에 본래 산은 하나이면서 고개가 셋이 있으니 바로 태백(태백)ㆍ소백(소백)ㆍ죽령(죽령)이 그것이다. 그 고개 남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을이 하나 있으니 바로 흥주(흥주)이다. 고을에서 동쪽으로 가면 궁벽한 취락이 있고, 고을에서 곧장 북쪽으로 가면 태백산이고,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산인데 통하는 큰길이 없다. 고을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니 바로 서울로 가는 길이다. 고을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나누어져 동남의 여러 고을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의 출입이 동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남쪽뿐이다. 옛날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남쪽에만 후정(후정)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서정(서정)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남정)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곳을 통하여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로 가는 이도 이곳으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고을에서 나라의 명을 가지고 일을 독려하는 사신들은 모두 이곳을 경유하고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무를 보는 사신과 사사로이 여행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을 가벼이 보고 남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또한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고을 남쪽 5~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숲을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넓은 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 고을에는 역대로 내려오는 이름 있는 누대(누대)가 많은데, 모두 산 가까이 깊고 외딴 곳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까닭은 대개 산이 높고 물이 맑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이 산 가까이 깊고 외딴 곳에 있는 정자는 비록 시원하고 그윽한 멋이 있기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 두 봉우리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 두 굽이에 지나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하나의 골짜기를 넘지 않는다. 이는 한 줌의 산과 한 움큼의 물을 보는 것일 뿐이다.
남쪽으로 와서 이 누정에 오를 것 같으면, 높은 것으로는 만 층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 겹 봉우리를 다 바라볼 수 있다. 우뚝우뚝 선 기암들과 수많은 골짜기,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가 흩어지는 등의 천태만상이 이 정자의 안계에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백 갈래로 흐르는 냇물이 소용돌이치고 폭포로 떨어져서 산 아래에 모이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가 조용해지고,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는다. 이곳에서 다시 물줄기가 십여 리나 흐르는데, 여울의 잔잔한 물소리는 들을 만하고 자잘한 모래와 돌은 접할 만하니, 산수(산수)의 큰 경관이 이곳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로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들은 누정 밖에 줄을 잇는다. 냇물을 트면 빗물이 소용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으니,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들 풍경을 보며 농사를 독려하는 즐거움도 가졌다. 나는 이 고을 사람이어서 소년시절부터 이곳에서 놀았기에,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언제나 고을 남쪽 들을 바라보는 것이 그립다고 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사한)에서 파직되어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는데, 기울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는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산수)에서 큰 이름을 얻었는데도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고, 저 깊고 깊은 외딴 곳에 있는 작은 정자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이상할 일입니다.”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도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마음이 큰 사람은 큰 것을 보면서 작은 것도 알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작은 것에 얽매여 큰 것을 잊습니다. 옛날에 공자(공자)는 동산(동산)에 올라가서 노(노)나라가 작다고 하였고 태산(태산)에 올라가서 천하(천하)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 길 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가산(가산)의 기이한 돌은 귀하게 여기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않고 작은 연못을 사랑합니다. 이로써 보면 사람들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누각에서는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 보이고 머리를 숙여 내려다보면 작은 언덕이 보입니다. 이 누각이 버림받은 것은 누각의 죄가 아니고 이를 보는 사람의 안목이 작고 비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역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더욱이 사물의 이치는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다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직랑) 채상(채상)공이 우리 고을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 채(채) 공이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서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하고 퇴락한 것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목수에게 명하여 다시 세우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선명하였다. 이로써 영남에 있는 누대(누대) 가운데서 이와 아름다움을 견줄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호구(호구)를 정하여 세금과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이곳을 수호하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엉성하고 소략하게 지어 금방 만들었다가 금방 무너지는 것과 같은 등급에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자가 완공된 뒤에 손님이 오면 공은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지방 손님으로서 탁한 안개에 시달린 사람은 이 정자에 올라 산을 바라보게 되면 노을이 걷히고 구름이 흘러가는 신선경을 상상하게 되고, 물가에 서면 무우(무우)에서 바람 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일찍 관청의 사무를 파하고 이 정자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이 늦거나 나태한 것을 독려하여 상벌(상벌)을 내렸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관아에는 예법을 질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며, 아전은 이로써 편안하게 되고 농사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의 덕택이고 정자의 공덕이다. 나는 이 정자가 다시 새롭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을의 산수(산수)가 알아주는 사람을 얻게 된 것을 치하하고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면서 이 기문을 지어 부치게 되었다.

양양의 새 향교 기문[양양신학기] 안축(안축)

관동(관동)은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하고 양양(양양)은 그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신령스럽고 맑은 정기가 응축되어 헛됨이 없을 터인데도, 백여 년 동안에 기이한 재주나 덕을 품은 선비가 이 고을에 나와서 인륜(인륜)을 상서롭게 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산수의 기운이 징험되지 못한 것이지 고을 사람의 성품이 착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또 이 고을이 옛날부터 변경에 접해 있어 변란이 여러 번 일어나 학교의 도(도)를 닦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국토가 하나가 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하게 되어, 성학(성학)이 거듭 진흥되어 공부하는 자제들이 날마다 번성하니, 마땅히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육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고을에 부임한 자가 오직 문서 처리를 급무로 삼고 여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산수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자제들의 성품은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고을 사람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고을에 와서 늙은이들에게 들으니, 고을 북쪽에 ‘문선왕동(문선왕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폐지된 옛날 학교 터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즉시 고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곳에 학교를 짓게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의 뜻도 그와 같다.”
하고, 기뻐하면서 고생스러움도 잊었다. 이에 과거 동년인 통주(통주) 수령 정랑 박군(박군)이 부임해 왔는데 박군 또한 글하는 선비 상문(상문)의 아들이다. 실상은 그의 힘으로 내 뜻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고을 사람들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대개 땅 기운이란 쇠한 것이 오래 되면 왕성하게 되는 것도 빠르고, 축적된 것이 오래되면 발현하는 것도 성대한 법이다. 이제부터 가가호호 재주와 학문이 있는 손자가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 있을 터이다. 그렇게 되면 산수의 수치를 씻을 수 있고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엉성하고 소략하여 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부디 뒤에 오는 군자가 한 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안찰사가 동한(동한) 지방에 온 것은 막중한 명이다. 처음 경계에 이르면 고을 선생이 생도를 이끌고 가서 헌시계(헌시계)를 지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그러나 전날에 지은 글을 보니 모두 진부한 말을 답습한 것이고 새로운 뜻을 표출하지 못하여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근자에 기거주(기거주) 이공(이공)이 중국에서 급제하고 돌아옴에 사대부들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각각 삼한의 기이한 유적으로 제목을 삼았다. 그 내용이 독특하여 실로 진기한 작품이었다. 우리도 삼가 그 체를 본받아 각각 동남팔경을 제목으로 하여 절구 한 수씩을 지었다 안축(안축)


상산(상산) 낙동강(락동강)

비 갠 뒤 강은 쪽빛처럼 푸르고 / 우여강색염람청
십리 기암은 수묵화 병풍 / 십이기암수묵병
자사는 새 안렴사를 기쁘게 맞아 / 자사환영신안부
목란배 위에 띠 정자를 엮었네 / 목란주상구모정

영가(영가) 문화산(문화산)

신라 때 김생(김생)의 새로운 필법 / 나대금생필법신
산속 석실에 글씨 쓰던 때 이미 천년 / 학서산실이천춘
그 당시 연지(연지)의 물은 아직 남아 있는데 / 연지여적금유재
훌륭한 부사가 그 후신(후신)임을 누가 알꼬 / 수식현후시후신

월성(월성) 첨성대(첨성대)

전대의 흥망 세월도 많이 지났는데 / 전대흥망세월경
천 길 높은 석대 하늘 위에 솟았네 / 석대천척용청명
누가 지금에 하늘의 형상을 살펴보고 / 하인금일관천상
문성(문성) 하나가 사성(사성)임을 알꼬 / 일점문성작사성

영해(영해) 관어대(관어대)

바위 아래 떼를 지어 노는 물고기 / 암하유어작대행
낚시 그물 피해 온전하게 살아가네 / 피구도망득전생
지금에 나라 은혜 동해물처럼 흡족하여 / 여금은흡동명수
여유롭게 살면서 꼬리 붉지 않네 / 어어양양미부정

동래(동래) 적취헌(적취헌)

푸른 옥 천만 가지 빽빽이 둘러치고 / 벽옥천간밀작위
하늘 가득한 푸른 빛 적취헌 앞에 쌓이네 / 만공창취적헌지
비 올 때 누가 고수 왕방(왕방)을 불러 / 우천수환왕봉호
관가 일 한가할 때 바둑 한번 즐길꼬 / 관가래요일국기

김해(금해) 칠점산(칠점산)

해변 천리 바닷물 허공에 뜨고 / 해문천리수부공
칠점산 푸른 봉우리 아스라이 솟아 있네 / 칠점청봉묘애중
이곳은 거문고 타는 신선이 살던 곳이니, / 차시금선서식처
배 타고 훌쩍 지나가지 말게나 / 승주차막과총총

주포(주포) 월영대(월영대)

바닷가 층대는 경치 가장 기이한 곳 / 해상층대경최기
물결에 비치는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 조파명월기영휴
꼭 최고운의 시 다시 읊을 것이 없으니 / 부수경영고운구
고금 훌륭한 인재 각기 한 때인 것을 / 금고현재각일시

진양(진양) 촉석루(촉석루)

진양 남강은 심양강(심양강)을 닮았고 / 진양강수사심양
푸른 누각 우뚝 서서 물속에 비쳐 환하네 / 금벽루고영수명
가을바람 속에 길손 보낼 날이 있으니 / 송객추풍지유일
배에 기대어 〈비파행(비파행)〉을 지으리라 / 의선수부비파행

제생이 나에게 《안부가요(안부가요)》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 그 뜻이 새로운 것이 좋아 두세 번 읽어보았다. 그러나 흥주(흥주)의 영구산 숙수루도 그 경치가 팔경에 뒤지지 않는데도 빠트리고 읊지 않았기에 내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나의 사위 정생(정생)으로 하여금 절구 한 수를 짓게 하여 책 뒤에 붙여 내 고향 산수의 수치를 씻게 하였다 안축(안축)

신령스러운 거북이 산머리에 쭈그리고 있는 모양 / 영구형세축산두
그 아래 깊은 시냇가엔 백 척의 누각 우뚝하네 / 하유심계백척루
분명 시원한 정자에서 아침 햇빛 들이마시고 / 수득량헌연조일
진기(진기)를 양성한 지 천년 세월이리라 / 양성진기이천추

죽계별곡(죽계별곡) 안축(안축)

죽령 남쪽 영가(영가 안동(안동)) 북쪽 소백산 앞에
천 년 흥망성쇠 속에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순정성) 안
다른 데 없는 취화봉(취화봉)에 왕의 태를 묻었으니
아, 이 고을 중흥 광경 어떠한고

청백한 기풍 지닌 높은 가문
두 나라의 관함을 지녔으니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어떠한고

숙수루(숙수루)ㆍ복전대(복전대)ㆍ승림정자(승림정자)
초암동(초암동)ㆍ욱금계(욱금계)ㆍ취원루(취원루) 위에서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 속 비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어떠한고

고양(고양)의 술꾼들처럼
구슬 신발 신은 3천 식객(식객)처럼,
아, 손잡고 어울리는 광경 어떠한고

채봉(채봉)이 날고 옥룡(옥룡)이 서린 언덕
지필봉(지필봉)ㆍ연묵지(연묵지)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마음은 육경(육경)을 공부하고 뜻은 천고를 궁구하는 공자의 무리들
아, 봄에는 글을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 타는 광경 어떠한고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에
아, 갈도(갈도) 외치며 신임자를 맞이하는 광경 어떠한고

초산효ㆍ소운영과 아름다운 계절 동산에서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꼬리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 구름처럼 늘어지는데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복사꽃 붉을 때
아, 천리에서 그리워하니 어찌할꼬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푸른 나무 우거지고 단청 고운 누각은 그윽한데
거문고 가락 위로 불어오는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어떠한고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태평을 즐기니
아, 사시사철 즐겁게 놀아보세

행록후        

백운동 문성공묘 터를 닦을 때 후토신에게 올린 제문[백운동문성공묘개기제후토문] 주세붕(주세붕)

가정(가정) 21년 임인년(1542) 8월 무인삭(무인삭)15일 임진일에, 조산대부 행풍기군수 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 겸 춘추관편수관 주세붕(주세붕)이 삼가 전 훈도(훈도) 안철보(안철보)를 보내 후토신(후토신)에게 제사를 올리나이다.
사특한 터를 털어내고 바른 터를 열어 새 사당을 세워 선사(선사)를 높여 받들려고 하오니, 밝은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삼가 올리오니 흠향하소서.

첨부 주서(주서) 안정(안정) 편지[부안주서 정 서] 안정(안정)

삼가 여쭙니다. 요즘 어떠신지요? 저는 약속에 따라서 문성공(문성공)의 영정을 받들고 지금 단양(단양)에 도착하였는데, 성주께서 교서를 맞이하러 멀리 나갔다고 하여 실망스러움이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며칠을 머물면서 고을 어른들의 영접을 받아 잠시 공관(공관) 깨끗한 곳에 영정을 봉안하고, 곧바로 예안(예안)을 거쳐 경주(경주)로 갔다가 밀양(밀양)을 지나 진주(진주)로 갈 계획입니다.
영정을 받들고 도성을 나설 때 조정에 있는 40여명의 내외 자손들이 도성 문 밖에 장막을 치고 노제(노제)를 베풀고 전송하니 한때의 성대한 일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었습니다. 이 또한 우리 성주의 지극한 뜻을 한 층 더 빛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고향에 이르러 때마침 성주가 없어 예가 미흡하니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번에 사당에 모신 일에 대하여는 조정에서 모두 성주의 성대한 뜻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만일 중도에서 만나게 된다면 안부를 묻고 회포를 푸는 일 뿐이겠습니까. 아울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동헌(동헌)에 매화가 핀 것을 보았지만, 시를 읊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떠나니 가장 유감스럽습니다. 이번 행차에서 기대에 미흡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계묘년 2월 그믐날에 정(정) 삼가 올림.

목사(목사) 안위(안위)에게 보낸 편지[여안목사 위 서] 주세붕(주세붕)

날씨가 무더운데 당신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중원(중원)에서 잠시 뵙고 3년이 지났으니, 늙은 몸으로 보고 싶은 갈망 강물로도 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근자에 안 주서(안주서)께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제공(제공)들이 영정을 봉송하면서 모두들 도성 문 밖까지 나와 전송을 하였다.”
하였기에, 너무나 감격스럽게 여겼습니다. 회헌공은 우리나라 도학(도학)의 조종으로서 공의 가르침에 의하여 삼한(삼한)의 비루한 풍습이 일신되었고, 그로부터 247년이 지난 오늘 천리(천리)가 다시 밝아지고 문풍이 크게 진흥되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공로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였습니다.
제가 외람되게 이 고을에 부임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나, 부임한 지 3일이 못 되어 죽계(죽계)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옛날 순흥 고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숙수사(숙수사) 폐허로서 안문정공(안문정공)의 시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 산머리에 쭈그리고 있는 모양 / 영구형세축산두
그 아래 깊은 시냇가엔 백 척의 누각 우뚝하네 / 하유심계백척루

라고 읊은 것과, 노여(노여)의 시에서,
싸늘한 산 빛을 밀치며 스님은 지게문을 닫고 / 한퇴악색승경호
찬 시냇물 소리 밟으며 객은 누각에 오르네 / 랭답계성객상루
라고 읊은 곳입니다. 이곳의 산수(산수)는 실로 중국의 여산(여산)에 못하지 않습니다. 항상 골짜기에 흰 구름이 가득하기에 감히 ‘백운동(백운동)’이라 명명하였고, 배회하며 감회에 젖다가 비로소 사당 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터를 닦기 위하여 토지신(토지신)에게,
“거친 곳을 닦아 바른 터를 마련하고 새 사당을 세워 선사(선사)를 높이 받들려 하오니, 밝은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라는 축문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땅을 판 지 한 자도 못 되어 놋쇠 120근이 나왔습니다. 이를 가지고 제기를 마련하여 사당지기에게 보관하려 했으나, 또한 도난의 염려가 있어 포(포) 10동(십동)에 준하는 값을 정하여 서울로 보내, 사서삼경(사서삼경)과 《이정전서(이정전서)》ㆍ《주자대전(주자대전)》ㆍ《대학연의(대학연의)》ㆍ《통감강목(통감강목)》 및 유도(유도)를 밝히는 데 필요한 기타 서적을 구입하게 하여 이를 서원에 비치하여 후일 유학생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도록 할 계획입니다. 당신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사당을 세우고 사당 앞에 서원을 세우는 두 가지 일은 이미 마쳤고, 부족한 것은 서책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고려사(고려사)》를 읽고서 문성공(문성공) 본전(본전)과 문정공(문정공)ㆍ문경공(문경공) 두 분의 전기를 찾아내고, 또 《동문선(동문선)》의 비명(비명)과 묘지(묘지) 및 서로 전송할 때 준 서문을 참고하여, 순흥의 역대 연원을 매우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다만 문성공 묘지가 그 책 속에 선입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문ㆍ비명ㆍ묘지명에서 여러 안씨들에 대하여 반드시 문성공을 거론하였고, 문정공에 대하여는 또 ‘족손(족손)’이라 하였으니, 계파는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이러한 글을 한 권으로 가려 뽑았습니다.
그리고 개인 소유가 된 사당 곁의 공전(공전)을 다시 환수해서 위전(위전)을 만들고, 또 별도로 보미(보미) 40석을 비치하여 유생의 수업에 이바지할 음식비용으로 삼도록 하였고, 솥ㆍ반ㆍ그릇 등 집기도 모두 부족함이 없게 비치하였습니다. 또 경서와 《이학통기(이학통기)》 몇 질을 간행하여 비치하였고, 사문(사문)을 좋아하는 유림이 좋은 글을 서로 보낸 것을 아울러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해서(해서)로 써서 몇 질 만들어, 한 부는 여기에 비치하고 한 부는 귀 가문에 부쳐드리려고 합니다. 다만 제가 노쇠함과 질병으로 지탱하기 어려워,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려고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앞길을 헤쳐 나갈 가망이 없어 한스러운 마음만 더할 뿐입니다. 부디 당신께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감회를 말하는 데에 급급하여 쓸데없는 말이 길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월일 모는 삼가 올립니다.

첨부 승지(승지) 안현(안현) 답서[부안승지 현 답서] 안현(안현)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접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후한 배려를 입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며 저의 형님께서도 이미 파주(파주) 원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성주(성주)를 만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고 사문(사문)으로서도 성주를 만남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사도)의 유행이 간단(간단)이 없다고 하지만 반드시 부지하는 이가 있고 나서 크게 세상에 천명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께서 비록 사도에 공을 끼쳐 오늘날까지 그 덕을 입고 있습니다만, 지극히 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도를 위하여 이처럼 경복(경복)하고 흥기하겠습니까? 자세히 조치해주신 것을 보고 가슴속에 비감이 이는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비록 타인이 듣더라도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고향 산천 아늑한 곳에는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 한두 군데 아니지만, 기필코 그곳에 터를 정하였고 서책을 구입 할 수 있는 자금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 또한 천지신명이 공의 지성에 감동되어 도와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비롭고 이상한 일이란 선비로서 말할 바 못되지만, 신비한 효험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룬 것이겠습니까.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서 그 누가 이런 일에 낄 수 있겠습니까.
공이 모름지기 이를 기록하여 천지가 감응한 이치를 드러내어 후인에게 보여준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이 몹시 좋으니 아울러 강당 이름까지 일러주시면 중국에서 큰 글씨를 받아 편액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서적은 정연(정연 안정(안정))이 힘써 사 보내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 가문에서 감사하는 마음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잘 헤아려 주시고 내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가정) 22년(1543, 중종38) 월 일, 안현(안현) 올림.

안정연에게 보낸 편지[여안정연서] 주세붕(주세붕)

연이어 편지를 받아보고 당신의 뜻을 잘 알았으며, 간절하게 일러주신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전히 비루한 몸으로 잘 지내고 있으니 모두 당신의 배려 덕분입니다. 다만 대관(대관)에 의망된 것이야 어찌 걸맞은 것이겠습니까. 등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이조에서 비록 저를 애처롭게 여긴 것이라 하더라도 물의에 대하여 어찌하겠습니까. 백발에 병든 몸은 다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직 늘 마음이 선영 아래에 있어 가을바람 속에 향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나약한 몸이 쉽게 거취를 하기 어렵고 제 나름대로 지성을 가지고서 스스로 가련하게 여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북쪽으로 가서 한가한 자리를 얻게 되어 공들과 함께 더욱 갈고닦는다면 이 삶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여깁니다. 이밖에 달리 무슨 바람이 있겠습니까.
문성공의 사당 일은 모두 끝내 이달 11일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그때 온 고을 부로(부로)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며, 봉안 의식은 선비의 자제와 서민의 준수한 이로 10세 이상 된 젊은이들에게 앞서 가게 하였는데, 의관을 갖추고 경건히 맞이하면서 구경한 이들이 담장처럼 줄을 이었습니다. 이어서 정결한 희생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먼저 아동에게 〈죽계사(죽계사)〉 3장을 낭송케 하고 이어서 폐백과 제물을 바쳤으며, 다음으로 〈도동곡(도동곡)〉 9장을 3장씩 나누어 초헌ㆍ아헌ㆍ종헌 때에 노래하게 하였습니다. 제물을 차린 것이 바르고 모든 절차가 흠결이 없어, 미천한 저의 정성에 대하여 영령이 흠향하셨으리라 여깁니다.
마침 대보(대보 안공신(안공신)의 자) 원외랑(원외낭)이 아헌에 참예하였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전번에 도착한 사서삼경(사서삼경)과 《소미통감(소미통감)》 등 서적은 천리 길 빗속에서도 전혀 젖지 않았으니, 신명(신명)의 도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성들여 상자에 싸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와 같이 완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만 평소 회헌공이 숭상하던 스승이 주자인데, 《주자전서(주자전서)》와 《주자어류(주자어류)》를 아직까지 사오지 못하여 자나 깨나 갈망하고 있습니다. 《주자강목(주자강목)》 또한 갖추기를 바라지만 값이 폭등하여 다른 책에는 미치기 어렵겠습니다. 오직 당신께서 더욱 힘써 조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자가 스승 삼은 이는 두 분 정자(정자)입니다. 제가 남쪽으로 내려올 당시에 당신이 소장한 《이정전서(이정전서)》 좋은 판본을 빌려 방백(방백)에게 고하여 간행하려고 두세 번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어진 사람도 사물에 작게나마 인색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행위가 어진 이를 감동시키지 못해서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방백(방백) 이언적(이언적) 공이다. 또한 회헌선생을 숭상하는 분이니,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보급하는 데에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됩니다. 공께서 여전히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이고 운명일 뿐입니다.
저는 평소 서적 구입을 좋아하여 듣고서 구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며 책을 구하고서 읽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백발이 되도록 그 책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해 당신이 소장한 책을 한 번 빌려 보고 돌려주고 나서 마치 꿈에서 깨어나 꿈 내용이 가물가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아, 오늘날 나와 같은 이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또한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공처럼 어진이로서 끝내 이 책을 기탁하여 후학들에게 널리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는 진실로 하늘이 뜻이 그러함이며 운명일 뿐입니다. 때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감히 구구한 심정을 토로했으니, 오직 당신께서 이 일을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앉아서 당신의 저택을 상상해보건대 화훼와 수석이 심히 아름다울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신선과 같은 사람입니다. 창고의 먼지가 눈을 가려 길을 떠날 기약이 없으니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세정(세정)의 일은 고을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였는데, 이 아전은 살림이 풍족하고 든든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이후 관원에게 추고당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여론을 모아보고 처치하겠습니다. 아울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승차(승차)가 안동[영가]에 이르기에 급하게 두서없이 써서 올립니다.
월 일. 주세붕 삼가 올림.

안문성공 유상 봉안 발문[봉안문성공유상발] 주세붕(주세붕)

공의 유상(유상)이 옛날에 순흥부(순흥부) 향교에 있었는데, 정축년(1457, 세조3)의 변란에 고을이 없어지면서 한양(한양)의 대종가(대종가)에 이안(이안)되었다. 내가 공의 종손(종손) 전 주서(주서) 안정(안정)의 집에서 한 번 배알한 적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서 대하면 온화하여 정말 대인군자의 모습이었고, 마치 친히 기침소리를 듣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늘 잊을 수 없었다. 계묘년(1543, 중종38) 3월에 주서가, 내가 묘(묘)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영정을 모시고 남쪽으로 와서 고을 서쪽 정자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8월 계미일에 비로소 새 사당에 봉안하였다. 공의 옛집은 폐부(폐부) 순흥 성 남쪽에 있었는데,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담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새 사당은 성 북쪽에 있으니 곧 숙수사(숙수사) 옛터이다.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겨우 소가 울면 들리는 곳이다. 공이 소년 시절에 이곳에서 독서하였으니, 더욱이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죽계(죽계)가 그 왼쪽으로 돌아 흐르고 소백산(소백산)이 오른쪽에 솟아 있으니, 구름ㆍ산ㆍ언덕ㆍ물이 정말 여산(여산)에 뒤지지 않는 곳이다. 아, 공이 별세하신지 237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사당을 세웠고, 영정이 북쪽으로 갔다가 87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울의 도성 문을 나올 때에 조정에 있는 내외 자손 40여 명이 장막을 치고 문밖까지 전송하였고, 사당에 봉안할 때는 온 고을 부로(부로)와 자제 1백여 명이 목욕재계하고 경건히 맞았으며, 온 성 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하였으니, 실로 사문의 성대한 행사였다.
훗날 나를 이어 고을을 다스리는 이가 어리석고 비루한 자가 세운 것이라 하여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공의 사당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을 다하고, 훌륭한 선비들이 즐거이 서원에 모여 공부하게 된다면, 반드시 회헌(회헌)의 마음과 깊이 교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없지 않으리라.

안문성공 봉안 제문[봉안문성공제문] 주세붕(주세붕)

가정(가정) 22년 계묘년(1543, 중종38) 8월 계유삭(계유삭) 11일 계미일에, 구위(구위) 모가 청결한 술과 희생을 갖추어 삼가 선사(선사) 문성공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 오직 공께서는 회옹(회옹)을 사모하여 도(도)가 동쪽으로 왔습니다. 아, 아름다운 경학(경학), 백세의 조종이십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죽계사 3장(죽계사삼장) 주세붕(주세붕)

동쪽에 죽계수 서쪽에 소백산
그 사이에 공을 모신 사당
백운(백운)이 가득한 골짜기 앞길이 희미하네
시냇물엔 고기 놀고 산엔 잣나무
여기는 공이 노시던 옛터인데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으시나
돌아오소서. 우리 슬프지 않게

서쪽에 소백산 동편에 죽계수
산위엔 구름 강물엔 달빛 고금에 변함없네
공이 오실 적에 옥규(옥규)와 난조(난조) 타시리라
저의 술잔을 들어 저의 정성에 흠향하시고 기쁨을 다하소서

공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사문(사문)이 어두웠고
윤리가 땅에 떨어져 캄캄한 구름 속과 같았네
공이 태어나시어 삼한을 일신하니
푸른 하늘 태양처럼 우리의 도 높아졌네
근엄한 사당에 공의 영정 봉안되니
죽계수는 더욱 맑고 소백산은 더욱 높네

문성공묘에 문정공을 배향할 때 고유제문[제고문성묘종사문정문경문] 주세붕(주세붕)

가정(가정) 23년 갑진년(1544, 중종39) 9월 정유삭(정유삭) 7일 정미일에 구관(구관) 주세붕이 삼가 생원(생원) 황빈(황빈)을 보내 석채례(석채예)로 선사(선사) 문성공께 고하나이다.
문정공(문정공) 안축(안축)은 충숙왕(충숙왕)이 억류된 것에 대하여 원나라에 송사하여 이미 큰 절개가 드러났고 상주목사(상주목사)로 부임하여서는 효성이 더욱 돈독하였으며, 학문은 연원(연원)이 있습니다.
문경공(문경공) 안보(안보)는 모든 사람이 사욕에 급급할 때 유독 사정에 오활하여 창귀(창귀)를 배척하여 바른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였고 청빈한 생활로 맑은 기풍이 우주에 진동하였으니, 사숙(사숙)한 공이 없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이에 감히 두 분을 배향하면서 삼가 고하옵니다.

안문정공 봉안문[봉안문정공제문] 주세붕(주세붕)

진실로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시고, 덕이 있고 아름다운 말씀 남기셨습니다. 실로 군자이시기에 회헌(회헌)선생의 사당에 배향하옵니다.

안문경공 봉안문[봉안문경공제문] 주세붕(주세붕)

백이(백이)의 청렴과 맹자(맹자)의 호연지기를 가지시고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충성하셨습니다. 살아계신 듯이 늠름한 기상 만고에 청풍(청풍)을 드날리셨습니다.

도동곡(도동곡) 9장(구장) 주세붕(주세붕)

복희(복희)ㆍ신농(신농)ㆍ황제(황제)ㆍ요순(요순)이 재창(재창) 하늘을 이어 법을 세우니, 그 광경 어떠한고.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만 실로 중(중)을 잡을 수 있다는 말. 아, 주고받는 성인의 심법(심법)이란 이것일 뿐이로다.
우(우)ㆍ탕(탕)ㆍ문왕(문왕)ㆍ무왕(무왕)과 고요(고도)ㆍ이윤(이윤)ㆍ주공(주공)ㆍ소공(소공). 재창 군신이 서로 만났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하토(하토)가 아득하니 상제께서 이를 걱정하사 우정대인(우정대인)을 수사(수사) 위에 내리시니 만고 연원이 그치지 아니하도다.
안연(안연)의 사물(사물)과 증자의 삼성(삼성)이여. 우러러 봄에 더욱 높고 뚫으려 함에 더욱 견고하며 앞에 보이는 듯하다가 문득 뒤에 있도다. 성인을 배우며 수고로움을 잊으셨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따라야 할 것은 하늘이 명한 성(성)이며 함양해야 할 것은 호연(호연)한 기운. 재창 지성무식(지성무식)이 근본이니라.
광풍제월(광풍제월) 서일상운(서일상운). 재창 도통이 끊어진 기나긴 날에 어떻게 아셨을까?
사람 욕심 걷잡을 수 없어 하늘까지 뒤엎었도다. 1천 500년 만에 주자께서 태어나시어 경(경)으로 근본 세워 큰 언덕 만드시고 옛 성인 이으시고 후학을 열어 주셨도다. 아! 공자와 다를 바 있으랴.
삼한 천만 년에 진유(진유)를 내리시니, 소백산이 여산(여산)이요 죽계수(죽계수)가 염수(렴수)로다. 학교를 일으키고 도를 보호함은 작은 일이겠지만 주자를 높여 모신 그 공이 크시어 우리나라에도 도(도)가 전하여졌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죽계는 소백산에서 나오고 염계(렴계)는 여산(여산)에서 나온다.

육현가(륙현가) 주세붕(주세붕)

규(규)ㆍ원(원)ㆍ구(구)ㆍ방(방)ㆍ승(승)ㆍ직(직)ㆍ준(준)ㆍ평(평). 재창 아, 정이천(정이천 정이(정이))이 진실로 크게 이루었으니 귀한 줄을 뉘 알겠는고.
일찍 손빈(손빈)ㆍ오기(오기)를 즐겼으며 만년(만년)에는 불노(불로)에서 뛰쳐나왔어라. 재창 아, 장횡거(장횡거)가 한 번 변하여 도(도)에 이르러 실천하였으니, 그 광경 어떠한고.
손으로 월굴(월굴)을 캐고 발로 천근(천근)을 밟도다, 재창 아, 소요부(소요부 소옹(소옹))가 바람을 타고 뇌정을 채찍질하고 우주를 역람(력람)하니 그 광경 어떠한고.
독학(독학)ㆍ역행(력행)ㆍ청수(청수)ㆍ고절(고절). 재창 아, 사마온공(사마온공)이 신을 섬기어 속이지 않고 혼자 즐긴 광경 어떠한고.
안정(안정)ㆍ상밀(상밀)ㆍ옹용(옹용)ㆍ화락[화예] 재창 아, 한위공(한위공 한기(한기))의 단엄(단엄)ㆍ근중(근중)이 언제 바쁘셨던고. 주문공(주문공)이 말하기를, “한위공은 잠시라도 바쁜 때가 없었고, 또 털끝만치도 바쁜 뜻이 없었다.” 하였다.
묘당에 있으면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살면 군주를 걱정하도다. 재창 아, 범문정(범문정 범중엄(범중엄))이 나아가나 물러가나 걱정하였으니 언제 즐거웠겠는가.

엄연곡(엄연곡) 7장(칠장) 주세붕(주세붕)

엄연(엄연)히 단좌(단좌)하여 성현(성현)을 대한 듯이 하도다. 재창 아, 한 점 사념(일점사념)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중니(중니)ㆍ안자(안자)가 무슨 일을 즐겼던가. 재창 아, 찾고야 말리라.
온온안안(온온안안) 어려우니 미미익익(미미익익) 잊지 마오. 재창 아, 경(경)으로 자리 삼고 딴 데 앉지 말게나.
높고 높은 하늘에 두텁고 두터운 땅 밝고 밝은 일월(일월)에, 춘하추동은 누구로 하여 흘러가는고. 아, 일원(일원)이 유구히 순환하니 그 광경 어떠한고.
움직이되 하늘을 보고 고요하되 땅을 보오. 재창 아, 부앙(부앙)에 부끄럽지 아니하니 그 광경 어떠한고.
겸손으로 수양하고 화경(화경)으로 남 대하도다. 재창 아, 만복이 무강(무강)하니 그 광경 어떠한고.
북창(북창)에 청풍(청풍)이요, 남헌(남헌)에 제월(제월)이라. 재창 아, 희황(희황) 때 사람과 어찌 다르리오.

군자가(군자가) 주세붕(주세붕)

사람 사람마다 군자를 원하나니
믿지 못하는 것은 못 보는 탓이니라
실로 원하시거든 이를 먼저 삼가소서

학이가(학이가) 주세붕(주세붕)

배우고 잊지 마세 먼 곳의 벗 즐겨 오니
내가 옳으면 남이야 아나 마나
부귀(부귀)를 부운(부운)같이 보고 팔 굽혀 베개하오

문진가(문진가) 주세붕(주세붕)

밭가는 저 할아비 문진(문진)을 비웃지 말게나
사람이 되어서 조수(조수)를 벗할 것인가
마음에 잊지 못하여 오락가락 하노라

욕기가(욕기가) 주세붕(주세붕)

문수(문수)에 아니 가도 누항(루항)이 없을까
여곽(려곽) 좋은 맛을 사마(사마) 탄 사람 알 수 있나
춘풍(춘풍) 속에 기수(기수)에서 멱 감고 날마다 세 가지로 반성하리

춘풍가(춘풍가) 주세붕(주세붕)

바라보면 흙 사람 같더니 다가가면 것은 일단화기(일단화기).
삼십 년 모시고서 분려(분려)를 보았으랴.
춘풍(춘풍) 불어오면 이 분인가 여기네.

지선가(지선가) 주세붕(주세붕)

지선(지선)에 계신 곳을 진실로 아소서. 인심(인심)과 천명(천명)의 본연을 살펴서,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 망령 없게 하소서.

효제가(효제가) 주세붕(주세붕)

지덕 요도(지덕요도)를 선왕이 들으시더니 백성은 그것으로 화목하여 위아래 원한 없나이다. 진실로 말씀하오니 효제뿐입니다.

정양음(정양음) 주세붕(주세붕)

기르고 기르소서. 고요할 때 기르소서. 제(제)나라 벌거숭이 산 애처롭고 송(송)나라 사람 싹 뽑아 올리니 우습도다. 깨우쳐 내 본래 가진 본성을 보존할지니 잠시라도 떠나면 적이 오네. 고요히 감응하여 중화(중화)를 이루리니 성손(성손)이 이어 받아 전하였네.

동찰음(동찰음) 주세붕(주세붕)

살피고 또 살피소서. 움직일 때 더욱 살피소서. 깊은 방안에서 하는 일과 사람들 속에서 하는 생각, 조금만 어긋나도 네 스스로 알 것이라. 부디 삼가 나쁜 마음 싹 틔우지 마소. 노래 지어 스스로 경계하니, 가슴에 새겨두고 어기지 마소서.

태평곡(태평곡) 5장(오장) 《공자가어(공자가어)》에서 번안해 냄 [번출가어] 주세붕(주세붕)

몸가짐 진실로 공손하시고 남에게 겸양하셨도다. 재창 아, 요순의 성덕(성덕)은 하늘과 같으셨도다.
우(우)임금은 왼쪽에 있고 고요(고도)는 오른쪽에 있었도다. 재창 아, 순임금의 무위(무위)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안으로 칠교(칠교)를 닦고 밖으로 삼지(삼지)를 행하였으니, 재창 아, 태평한 그 광경 어떠한고.
제(제)나라 포숙(포숙) 정(정)나라 자피(자피). 재창 아, 현인(현인)을 천거한 그 광경 어떠한고.
차면 기우나니 보태려거든 겸양하소. 재창 아, 강하(강하)는 아래로 내려가고 모든 개천 바다로 모여드니 그 광경 어떠한고.

【소지(소지)】 주세붕(주세붕)

삼가 살피건대, 문정공(문정공)의 〈죽계별곡(죽계별곡)〉 9장은 시내에서 목욕하고 시를 외우며 돌아가는 즈음에 지어진 것으로서 그 풍류와 도량이 씻어내고 융해하여 사특한 찌꺼기가 거의 없게 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에 〈행록(행록)〉에 아울러 수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천자(천자)’라는 말은 흠이 됨을 면치 못하고, 또 ‘주도(주도)’ㆍ‘주리(주리)’ 등의 단어는 호객들에게 쓰는 방탕한 말로서 모두 다 순수하게 바른 데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난잡한 데로 흐르게 될까 두렵다. 이에 드디어 〈도동곡(도동곡)〉 9장을 노래하여 사문(사문)의 유래를 차례로 나열하여 사당에 제사를 올릴 때 쓰는 글로 삼는다. 또 성현의 격언에서 발췌 각색하여 장단가(장단가)를 만들어 그 뒤에 첨부하니, 서원의 선비들이 산보하며 시를 외우는 데에 보탬이 되어 모두 바른 곳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노라.

당우가(당우가) 주세붕(주세붕)

백성이 산 이래로 가장 정치를 잘 한 이로서 요순[당우]보다 성대한 이는 없었다. 그러므로 속으로 비유하는 이는 반드시 직설(직계)이고 그 임금은 모두 요순같이 만들기를 원한다. 이에 또 〈당우가(당우가)〉를 노래하여, 말세에 요순같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검소와 사치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까지 미쳤다. 이를 감히 임금에게 바치지는 못하고 삼가 여러 가곡 말미에 첨부하여, 선비들이 서책을 다루는 하인에게 한 번 읊어보게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내 그대 위해 요순[당우]을 노래하니 / 아욕위군가당우
초가집에 흙 섬돌도 봄날처럼 화기롭네 / 모자토계춘희희
신하의 말을 들어줌은 천지사방에 빛나고 / 도유우불광사표
뜰에 지영초(지녕초) 있으니 누가 감히 속이랴 / 정유지녕수감기
내 그대 위해 말세를 노래하네 / 아욕위군가숙계
요대(요태) 상저(상저)로 주지(주지)에 임하고 / 요대상저림주지
비렴(비렴)은 날로 부자 되고 기자(기자)는 종이 되었네 / 비렴일부기자노
칠묘(칠묘)에 보리 우거지고 은나라 신하 옮겨가니 / 맥점칠묘부민이
검소하면 후손을 풍요롭게 하지만 / 일검자족유후곤
사치하면 집과 나라 위태롭게 하네 / 일사능령가국위
흥망(흥망)에 대한 경계 만고 역사에 밝으니 / 흥망만고게명감
그대 날 위하여 이 노래 불러주오 / 청군위아가차시

첨부 학정(학정) 황준량(황준량) 편지[부황학정 준량 서] 황준량(황준량)

전날 선생의 뒤를 따라 백운동(백운동)에 가 목욕재계한 뒤 분향(분향)하고 회헌(회헌)의 유상(유상)을 알현하니, 온화하고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이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이 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곳 산천의 수려(수려)함과 사우(사우)의 존엄함을 보고서 사도(사도)가 의지할 곳이 있음을 보고 내내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연일 고명하신 가르침을 듬뿍 받으니 시원하기가 마치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듯하였고, 제가 삶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면하게 되어 너무나 다행스러웠습니다.
우리 동방은 은나라 태사[기자]가 봉해지고부터 홍범(홍범)의 가르침을 처음 듣게 되어 남자는 겸양하고 여자는 정숙할 줄 알아 현인(현인)의 교화가 성대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구이(구이)에 살고 싶다고 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두고 예의가 있는 곳이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오도(오도)가 동방에 전파된 것은 이때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부(이부)와 사군(사군)을 지나 삼국 시대로 내려와 전쟁의 도탄에 빠져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설홍유(설홍유 설총(설총))와 최문창(최문창 최치원(최치원))이 신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설씨는 오경(오경) 을 번역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말단적인 장구(장구)에 그쳤고, 최씨는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역시 경세(경세)의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왕씨(왕씨)가 일어나서도 또한 문교(문교)는 알지 못했습니다. 문종(문종) 때에 최문헌(최문헌 최충(최충))이 구재(구재)를 설치하고 후생을 교도하여 세상에서 그를 ‘해동부자(해동부자)’라 일컬었지만, 세상에 적용하여 도(도)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부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들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오직 회헌(회헌)선생이 공자(공자)의 학문을 배우고 회암(회암)을 흠모하였는데, 만년에는 체득한 바가 더욱 진보하여 회암의 상(상)을 모셔두고 예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회암을 높이는 것이 바로 도를 높이는 것으로서 그가 지향한 바의 올바름은 여타 유자(유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공은 이미 도에 대하여 대의(대의)를 보았습니다. 충효에 관한 논설은 무인(무인)의 마음을 항복시켰고, 학교 진흥에 힘쓴 것은 풍화(풍화)의 근본을 세워 한 번에 삼한(삼한)의 풍속을 새롭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 유학에 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말과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됨을 대략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봉황새 터럭 하나만 보아도 구포(구포)의 덕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려사(고려사)》에서는 다만 “학교의 재원(재원)을 풍족하게 한 공으로 문묘(문묘) 에 종사(종사) 되었다.”라고만 하였고, 후인들도 그의 보이지 않는 빛을 발현시키지 못하여 지금까지 그의 공적이 민멸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 전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회암의 도(도)가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 사람이 책 속에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선(선)한 행실을 보고서도 천년 뒤에 칭찬하고 흠모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고을 안에 회헌과 같이 어질고 훌륭한 분의 풍성(풍성) 높은 고가(고가)가 초목 속에 매몰되어 있고 사당 한 칸이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선생처럼 옛것을 좋아하고 선(선)을 취하는 마음을 가진 분으로 볼 때, 어찌 급히 존숭하여 우리 도(도)를 높이는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농사의 흉년과 풍년도 물을 겨를이 없고 사람들의 비웃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행하였는데, 선생의 유지(유지)를 가지고 스승을 높이는 터전으로 삼고 밭을 공부하는 장소로 삼은 뒤에야 놀라던 자는 의아히 여기고 의아히 여기던 자는 본뜻을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전지(전지)를 마련하여 선비를 기르는 재원으로 삼았고, 서적을 간수하며 교육을 세우는 기틀로 삼았으며, 회헌의 유상(유상)을 봉안하고 문정공(문정공)과 문경공(문경공)을 배향(배향)하셨습니다. 봄가을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가곡(가곡)을 노래하며 영령을 맞이하고 보냈으니, 그 제도가 이미 더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추어졌습니다.
아, 이 마음이 바로 회암이 선사(선사)를 모신 마음입니다. 대개 사묘(사묘)가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없던 것으로서 금세에 처음 생긴 것입니다. 사당에 모시고 높이고, 또한 예배할 뿐만이 아니라 존숭하고 드러내어, 전해지지 않은 회옹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니, 참으로 성대합니다.
지난번에 또 《죽계지(죽계지)》의 편목을 보았는데, 행록(행록)은 여러 안씨(안씨)들의 사적이고 여타 편(편)은 주자의 글로서 역시 모두 볼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선생의 근면한 마음과 어진 이를 높이는 지성이 어쩌면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만 편차(편차) 사이에 약간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어찌 선생께서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암을 통하여 회헌을 탐구하여 회헌의 학문이 연원(연원)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죽계)는 안씨의 세거지입니다. 여러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회암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의 글을 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회헌의 마음을 탐구해 보려는 자는 마땅히 별도로 회암의 글을 취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전승(전승)의 계통이 있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꼭 《죽계지》에다 회암의 글을 넣어 억지로 일관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죽계지》에서는 여러 안씨(안씨)들의 사적(사적)을 주로 넣고, 학전록(학전록)ㆍ장서록(장서록)ㆍ가곡(가곡)ㆍ속상기(속상기) 같은 것과 서원(서원)에 관련된 기사는 잡록(잡록)으로 정리하여 그 뒤에 붙이고, 다시 《주자대전(주자대전)》 중의 명언(명언)을 뽑아내어 ‘주서(주서)’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곧고 조리가 분명할 것입니다. 책은 무리하게 합편(합편)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고, 도(도)는 폐단 없이 전승되어, 전술(전술)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도(도)에 아마도 가깝게 되리라 여깁니다.
만약 “옛것에서 증빙하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하여, 반드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려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이 할 것은 단지 옛사람에게서 법을 취할 뿐이며 옳고 그름의 분별은 자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문정공(문정공)의 주리곡(주리곡)과 고양곡(고양곡)은 한 때 희학(희학)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세에 영송(영송)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는 선생께서도 이미 평(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현(성현)의 격언을 번안(번안)하여 시가(시가)를 지었는데, 유유히 기수(기수)에서 목욕하고 시가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이 있으며, 호연(호연)히 천리가 유행하는 묘미가 있으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옛것을 번안했다 하나 자신이 지은 사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역시 이 《죽계지》에 함께 편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계곡(죽계곡)〉을 삭제하여, 별록(별록) 및 〈엄연가(엄연가)〉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대저 자신에게 조금의 착오도 없으면 한때의 비난이 있더라도 마침내 후세에 그 시비가 정(정)해지겠지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미진)함이 있으면 비난의 구실이 되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전)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도)가 밝아질 수 없으니, 군자가 가르침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일에서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죽계의 사당은 오랫동안 가려졌던 회헌선생의 도(도)를 빛내기에 충분한 것이고, 또한 선생의 뜻이 회암의 도(도)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의 도가 이를 통하여 더욱 밝아지고 또한 후세에 끝없이 성인이 나올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지》는 모두 온당하게 편집되지만은 않은 듯하며, 이것이 제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서 보면 소견이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외부의 논란이 있더라도 기필코 선입견으로 주장하고 허심탄회하게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고명하신 선생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생께서 홀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저 같은 아랫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점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울리면서도 같아지지 않는 것[화이불동]은 군자의 논의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을 털어 아뢰었으니 재단(재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가를 보아 계당(계당)에서 뵙고 다시 질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준량(준량)이 황공한 마음으로 삼가 올립니다.

황중거에게 답한 편지[답황중거서] 주세붕(주세붕)

계당(계당)에서 한 차례 나눈 담화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인(인)을 도우는 의리는 다만 바른 말로 충고해 주는 데 있을 뿐이며, 아첨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 이른바 ‘적(적)’이요, 학문으로 사귀는 의리가 아닙니다. 붕우의 도리가 결여되고 끊어진 지 오래여서 후세에 제대로 벗을 경계하여 바로잡아 주는 이가 천만 사람 중에 한 사람일 뿐이니, 나는 중거(중거)에 대해 더욱 경복(경복)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논평한《죽계지(죽계지)》는 의도한 뜻이 달리 있었기에 감히 숨김없이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 책의 성격이 원래 증자(증자)의《대학(대학)》, 자사(자사)의《중용(중용)》, 《맹자(맹자)》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실로 회옹(회옹)이 평생토록 우리 도(도)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은 매우 대단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세에서 질투하는 자들이 오히려 위학(위학)이라 지목하여, 기필코 전멸시킨 뒤에야 마음에 시원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헌(회헌)이 이에 백세(백세) 후에 그를 존숭하고 공경하여 부모처럼 애모하고 떠받들었습니다. 아, 이 마음이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앞으로 올 학자를 개도(개도)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생민을 위하여 최고의 준칙을 세우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만세를 위하여 태평(태평)을 열기에 충분합니다.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주자(주자)의 도(도)가 동방으로 계승되었다.’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계(죽계)에 묘원(묘원)을 세우고 전지와 서적을 마련하면서 세속의 비웃음과 모욕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안씨(안씨)의 행록(행록)을 만들고 나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주자(주자)가 쓴 전현(전현)의 묘정(묘정)ㆍ당실(당실)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존현록(존현록)〉이라 제목을 붙이고, 학전(학전)과 장서(장서)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또 잡록(잡록)을 만들어 주자의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 고사와, 평생의 시가(시가) 및 좋은 말 가운데서 쇠퇴한 풍속을 두텁게 할 만한 것을 잡다하게 발췌하여 기록하였는데, 이는 지금에 내가 죽계(죽계)에다 묘원(묘원)을 세우고 학전(학전)을 마련하고 장서(장서)를 한 목적이 모두 주자가 숭상하던 것에서 나왔고 주자의 말씀 또한 모두 만세에 걸쳐 학자들의 대법(대법)이 된다는 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회옹의 학문을 현양(현양)하고 회헌의 뜻을 발현한 것은 실로 회옹을 높이는 것이지 회옹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며, 실로 사특한 말을 멀리 하기 위함이지 비난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별록(별록)을 만들어 위로 공자ㆍ안자(안자)ㆍ증자ㆍ자사(자사)ㆍ맹자로부터 두 정자(정자)와 주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했으니, 그 논설은 모두 사욕(사욕)을 몰아내고 정리(정리)를 보존하며, 사도(사도)를 붙들고 이단(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편(편)을 종합하여 《죽계지(죽계지)》라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정자ㆍ주자를 회헌에게 굴복시키기 위함이겠습니까. 세상의 도의가 날로 낮아지고 있기에 내가 회헌에 대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계지》를 만들면서 오로지 회옹(회옹)을 주로 했습니다. 이는 바르게 한 것이지 왜곡한 것이 아니며, 신장하기 위함이었지 굽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자(부자)가 노나라 역사[춘추]에 가탁(가탁)해서 천하를 포폄하였는데, 그 때에는 이미 참람함이라는 것은 잊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계지》에서 회옹의 요긴한 종지(종지)를 현양하여 여러 벗들을 위해 기치(기치)를 세운 것은 회헌이 흠모한 바가 여기에 있었음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죽계지》를 가지고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도 천명이고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또한 천명입니다. 실로 부득이한 점이 있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귀하(귀하)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쓴 여러 편의 시가는 내 스스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옛 성현들의 격언을 번안한 것입니다. 또 문정공(문정공)의 이른바 〈별곡(별곡〉의 문제점을 약간 보완하여 서원의 여러분들에게 주어 바람을 쏘이며 시를 읊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로 한 마디라도 나의 사사로운 뜻으로 억지로 맞춘 것이 있다면 비록 비난을 받아도 좋지만, 성현의 격언을 번안했으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정녕 허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곧 성현을 허물하는 것이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의 가악(가악)이라는 것은 흔히 음란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며, 쌍화점(쌍화점)ㆍ청가(청가) 등속은 모두 사람을 악한 곳으로 유도합니다. 이것들이 어떠한 말들입니까? 풍속이 날로 저급한 데로 나아가게 하며, 그 음란하고 도리에 어긋나 차마 듣지 못할 내용입니다. 부자(부자)가 다시 살아나신다면 이런 가악들이 추방 대상에 들지 않겠습니까. 실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주)나라 시대에는 이남(이남)과 정아(정아)를 나라 행사에 사용하였고, 삼송(삼송)을 종묘(종묘)에 사용하였으며, 비록 변아(변아)라 하더라도 역시 빈객을 대접하는 자리에 쓴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정(정)ㆍ위(위)의 음란한 음악을 연주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회옹이 강력히 주장하고 극진하게 논(론)한 것으로, 내가 안타깝게 여기고 다급하게 여겨 그 사특함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부자(부자)는 큰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춘추)》에서 전술(전술)과 창작(창작)을 겸했습니다. 저의 시가 같은 것은 모두 전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자신이 지은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지극히 선(선)하고 지극히 축약된 성현의 요지에서 나왔습니다. 몸을 닦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 무슨 혐오스러운 점이 있어서 느닷없이 삭제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거(중거)가 논한 것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여깁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남이 나를 보는 것만 못할 것이며, 익숙히 따져 보면 반드시 그 중정(중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달 밝은 날 한 번 와서 다시 토론하여 바른 데로 귀결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안문성공 춘추 향사 진설도[안문성공춘추대향도] 배위도 같다. [배위동]

[번역문 없음]

진설도에 따라 여러 가지 제물 쓰는 법식[의도제용잡물식]

서(서)ㆍ직(직)ㆍ도(도)ㆍ양(량)의 밥은 매 위마다 각 3되. 네 종을 합하여 쌀 각 1두.
연밀과(연밀과)는 매 위마다 각 4되. 모두 찹쌀가루 1말 5되. 조청 3되, 기름 3되.
건포(건포)ㆍ건치(건치)ㆍ건수(건숙) 중에서 알맞은 것으로 갖춘다.
잣ㆍ개암ㆍ밤ㆍ대추 중에서 알맞은 것으로 갖춘다.
부추ㆍ포ㆍ무ㆍ미나리 중에서 알맞은 것으로 갖춘다.
어해(어해)ㆍ토해(토해) 중에서 알맞은 것으로 갖춘다.
축문은 봉안문(봉안문)을 쓴다. 특별한 제사가 아니면 폐백은 쓰지 않는다.
무릇 제사에서 제기는 청결하게 하고 희생은 살찐 것을 갖추고 술은 향기로운 것을 마련하기를 원한다. 포ㆍ과ㆍ저(저)ㆍ해(해)도 모두 극도로 정결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소략하게 한다. 신이 흠향하는 것은 사람의 정성이니, 신이 밝게 임하는 것에 대하여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사 법식[제식]

○ 재배례(재배예)만 행한다.
○ 향을 올리는 예를 행한다.
○ 초헌관을 인도하여 손을 씻는다.
○ 인도하여 문성공 신위 앞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린다. 아동이 〈죽계사(죽계사)〉 3장을 노래한다.
○ 다음에 배위(배위) 앞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린다.
○ 인도하여 내려와 위차로 돌아간다.
○ 초헌례를 행한다.
○ 초헌관을 인도하여 준소(존소)에 나아가 서향하여 선다.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는다.
○ 술잔을 올린다.
○ 축문을 읽는다.
○ 다음에 배위 앞에 나아간다.
○ 술잔을 올린다.
○ 축문을 읽는다.
○ 인도하여 내려와 위차로 돌아간다. 아동이 〈도동곡(도동곡)〉 수장(수장) 3장을 노래한다.
○ 아헌례를 행한다.
○ 초헌례와 같이 하고서 인도하여 내려와 위차로 돌아온다. 아동이 〈도동곡〉 중장 3장을 노래한다.
○ 종헌례를 거행한다.
○ 아헌례와 같이 하고서 인도하여 내려와 위차로 돌아온다. 아동이 〈도동곡〉 종장 3장을 노래한다.
○ 음복하고 제육을 받는다.
○ 나머지는 모두 향교(향교)의 제례와 같다.

감사 심공(침공)에게 올린 편지[상감사침공서] 이황(이황)

풍기군수 이황(이황)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관찰사 상국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저는 병들고 노둔하여 수령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문득 어리석은 자도 한 번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저의 소견을 아뢰는 바입니다.
본군의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은 전 군수 주세붕(주세붕)이 창건한 것입니다. 죽계수가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옛날 순흥부 중앙을 거쳐 흐르는데, 이곳이 바로 사문(사문)의 선정(선정) 문성공(문성공) 안유(안유)의 고향으로서, 골이 깊고 으슥하며 구름과 골짜기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주세붕이 부임하여 군을 다스리면서 더욱 학문 진흥과 인재의 양성을 우선으로 하여 향교에 정성을 다하였고, 또 죽계가 대현(대현)의 유적이 있는 곳이라 하고서 터를 잡아 30여 칸의 서원을 건립하고 사당을 만들어 문성공과 문정공(문정공) 안축(안축)ㆍ문경공(문경공) 안보(안보)를 배향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강당ㆍ서재ㆍ정자를 지어 유생이 모여 학문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터를 다듬다가 얻은 약간의 놋쇠를 팔아 천 권에 달하는 경사자집(경사자집)을 구입하여 비치하고 식미(식미)와 학전(학전)을 설치하여 고을의 선비에게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내의 선비 김중문(김중문)에게 사무를 주관케 하여 사방에서 학도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이들을 권장하고 훈도하였습니다. 이윽고 주세붕이 이임하여 떠났고, 그 후 문성공의 후예인 지금의 병조판서 안현(안현) 공이 때마침 관찰사로 부임하여 사당을 참배하고 선비를 예우하였으며, 선비를 기를 수 있는 제도와 방도를 더욱 강구하고 염려하여, 노비를 보충하고 어염(어염)을 공급하는 등, 제반 조치를 하여 길이 그 덕택을 입게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사가 부임할 때마다 모두 이곳에 마음을 기울여 권장하였고 함부로 하거나 소홀히 함이 없었습니다.
대개 서원이라는 이름은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남당(남당) 시대에 와서 옛날에 이발(리발)이 은거하였던 여산(여산)의 백록동(백록동)에 학궁(학궁)을 창건하고 스승과 제자를 두어 교육하면서 이를 ‘국상(국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서원의 시초입니다. 그 후 송나라에서도 이를 따라서 시행하였으나 중엽까지도 성행하지 못하여 중국에 네 곳의 서원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이후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민(민)ㆍ절(절)ㆍ호(호)ㆍ상(상) 지방에서 유학이 진흥하여 선비들의 학문이 융성하였는데, 이때 서로 사모하고 본받게 되어 곳곳에 서원이 증설되었고 폐지되었던 서원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주자(주자)가 백록동서원(백녹동서원)을 중수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중국을 점령한 원(원)나라마저도 먼저 태극서원(태극서원)을 세워 천하의 선비를 진작시켰고, 그 후 명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문화가 크게 천명되고 학교의 정책이 더욱 진흥되었습니다. 오늘날 《일통지(일통지)》에 기재된 바로는 천하의 서원이 총 3백여 개소라고 하며, 그곳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친다면 더욱 더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왕궁(왕궁)과 국도(국도)에서부터 지방의 모든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서원을 찾으며 중국에서 그처럼 숭상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은거하면서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고 학문을 닦는 무리가 대부분 세상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경서를 안고 한적한 들이나 물가에 숨어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히 천하의 의리를 살펴보면서 덕을 쌓고 인(인)을 성숙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기 때문에 기꺼이 서원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국학과 향교는 저자와 성 안에 있는 데다, 앞으로는 학령(학영)에 구애받고 뒤로는 외물에 영향을 받게 되니, 그 효과를 어찌 같은 등급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말하면, 선비의 학문이 서원에서 힘을 얻게 될 뿐 아니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어진 인재 또한 서원에서 더 많이 배출된다고 하겠습니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이 이와 같은 점을 알았기 때문에 송태종(송태종)은 강주수(강주수) 주술(주술)의 건의에 따라 구경(구경)을 보내주고, 또 그 동주(동주) 명기(명기)를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며, 그 후 직사관(직사관) 손면(손면)이 병으로 사직하면서 백록동(백록동)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종(리종) 또한 유학을 숭상하여 고정서원(고정서원) 등에 모두 편액(편액)을 하사하여 영예롭게 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사풍(사풍)의 아름다움인데, 선비들이 스스로 아름답게 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역시 임금이 양성한 바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안으로 성균관과 사학(사학)이 있고 밖으로 향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또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서원의 설치는 옛날부터 있었던 적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하나의 큰 결점입니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을 건립할 때에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주씨의 뜻이 더욱 견고하여 세인(세인)의 비웃음과 비방을 무릅쓰고 시행하여 이처럼 전고(전고)에 없었던 성대한 일을 이룩했습니다. 아, 하늘이 혹 이로 말미암아 동방에 서원 교육을 일으켜 중국과 같이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육이란 반드시 위에서 말미암아 아래로 파급된 뒤라야 근본이 있게 되어 길이 전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가득 찼다가도 저녁엔 말라버리는 근원 없는 물과 같을 것이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인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따르게 되고 임금이 숭상하면 온 국민이 사모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날 주씨가 창건한 바가 비록 기이하고 위대하고 안공이 이룬 바가 매우 완전하고 정밀하다 하더라도, 이는 한 명의 군수와 한 명의 방백(방백)의 일일 뿐입니다. 일이 왕명에 의하지 않고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면, 사방에서 보고 들어 흥기하게 하고 사람들의 의아심을 진정시켜 온 나라가 본받고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한 이후 서원의 모든 일에 항상 마음을 다하려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둔하고 무능한 데다 질병까지 더하여, 선비를 격려하고 권장하지 못하여 기풍이 날로 없어지고 유생들이 점차 흩어지니, 옛날 현인의 향기가 서린 곳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아름다운 서원이 마침내 실추될까 크게 두렵습니다. 이에 분수에 넘치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조정에 아뢰어 만에 하나라도 다행한 조치를 입고 싶으나, 거리는 멀고 글은 미약하여 두려워하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 한 도의 책임을 맡아 교화의 근본을 숭상하시니, 일면의 작은 이해에 관계된 바도 의당 조정에 아뢸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스런 세상의 큰일에 관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합하께서 저의 두서없는 의견에 대하여 취할 것이 못된다고 여겨 내치지 마시고 바로잡아서 조정에 고해 주십시오. 저는 송나라 고사에 의거하여 서적과 편액(편액)을 내려주고 토지와 노비를 정해 주어 서원의 형편이 풍족하게 하고, 또한 감사와 군수에게는 선비의 양성 방안과 경비의 지원 등에 관해서만 살피게 하고 번거로운 명령과 사소한 조목에 얽매이지 말게 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군수로서 저처럼 병약하고 무능한 사람은 의당 파면시키시고, 조정에 청하여 덕망과 경술(경술), 행실과 기풍을 갖춘 유신(유신)으로서 사림의 모범이 될 만한 이를 간택하여 군수로 임명하여 이 책임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한 고을 한 도의 학교에 그치지 않고 온 나라의 학교가 될 것이며, 이와 같이 하면 교육이 임금의 명으로 시작되어 선비들이 기꺼이 찾아와 공부하여, 영원히 전해지면서 실추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하면 사방에서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아서 선현의 유적지로서 최충(최충)ㆍ우탁(우탁)ㆍ정몽주(정몽주)ㆍ길재(길재)ㆍ이색(이색)ㆍ김종직(김종직)ㆍ김굉필(김굉필)이 살던 곳에도 서원을 세우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혹은 나라의 명에 의하여 세우고 혹은 사사로이 세워 유생들이 학문하는 장소로 삼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조정에서 교화를 중시하고 인재를 양육하는 성대한 정사를 빛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에 장차 우리나라의 문교(문교)가 크게 밝아져서 추로(추로)ㆍ민월(민월)과 나란히 칭송될 것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지금의 국학은 실로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현의 향교에 이르러서는 제도만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 교육은 크게 무너진 상태입니다. 선비들이 도리어 향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미 심각하게 퇴폐한 상태에 대하여 구제할 방도가 없으니 참으로 한심한 실정입니다. 오직 서원 교육이 지금에 진흥된다면 무너진 학교 정사에 도움이 될 것이니, 학도들이 의귀할 곳이 있게 되고 선비들의 기풍이 크게 변모하여 습속이 날로 아름다워져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성스런 왕조의 정치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성으로 올리는 저의 건의가 조정에 올려진다면, 저는 초야로 물러가 죽더라도 아무런 여한 없을 것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가정(가정) 28년 기유년(1549, 명종4) 12월 일.

후(후)

제가 삼가 고사를 살펴보니, 모든 서원에는 반드시 동주(동주) 또는 산장(산장)을 두어 이들로 스승을 삼아 교육을 맡겼습니다.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또한 마땅히 거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서원의 동주나 산장은 유일(유일) 선비나 관직에서 나와 있는 사람 중에서 가려야 하는데, 재주와 덕망이 출중하여 일세의 사표(사표)가 될 만한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에 그와 같은 사람을 얻지 못하고 단지 그 이름만 차지하게 하면 오늘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교수(교수)ㆍ훈도(훈도)와 다름이 없게 되어 뜻있는 선비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서원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서원에 손해를 끼치게 될까 두려워 이번에 아울러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합하께서 재량하여 올리고 조정에서 참작하여 가부를 정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황(황)은 또 재배하고 올립니다.

백운동 소수서원 기문[백운동소수서원기] 신광한(신광한)

죽령(죽령) 동쪽에 순흥군이 있고 순흥군 동쪽에 소백산이 있으며, 소백산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그윽하고 아늑한 곳에 백운동이 있다. 그리고 죽계수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거쳐 흐른다. 죽계수가 경유하여 흐르는 이곳은 옛적 순흥부의 땅으로서 고려 문성공(문성공) 안유(안유)가 살면서 독서하던 곳이다.
문성공(문성공)이 학문을 돈독히 하고 뜻을 밝혀 벼슬에 올라 현달(현달)하게 되자 노비와 토지를 국학(국학)에 바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의 은택을 입고 있으니, 사문(사문)에 끼친 그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자손이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세대마다 저명한 인물이 나와 《여지승람(여지승람)》에 기재된 바와 같이 고가(고가)의 유교(유교)가 아직 남아 있어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오래 되어도 쇠퇴하지 않았다. 전 군수 주세붕(주세붕)이 평소 유술(유술)을 좋아하여 수년 간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서원을 창건했으며, 또한 문성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공부하는 자들의 마음에 순응하면서 흥기시켰다.
처음 서원의 터를 다듬다가 얼마간의 놋쇠를 얻었는데, 서원이 완성되자 이것을 가지고 서사(서사)를 구입하여 비치하였으며 아울러 식미(식미)와 학전(학전)을 설치하여 군내의 유식한 선비에게 주관케 하였다. 이에 학도들이 많이 모였는데, 생원(생원) 진사(진사)와 준수한 선비가 아니면 참여시키지 않으니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일이 날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 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안현)은 공의 후손이었는데, 또한 주 군수(주군수)를 이어 서원을 경영할 어염(어고) 등을 더해 주고 노비를 공급하여 서원을 영구히 보존되어 황폐됨이 없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다만 미흡한 것은 일찍이 군수는 조정에 청하지 않았고 관찰사 또한 아뢰지 않아 성상의 아름다운 뜻이 백성에게 전해지지 못하여 나타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이 조정에 의하지 못하고 일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여 또한 영구히 보존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 뒤 군수 이황이 이 점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원 창건의 전말을 갖추어 기록하여 관찰사 심통원(침통원)에게 올려, 백록동(백록동) 고사에 따라서 편액(편액)과 서책을 하사하여 조정의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을 중히 여기는 성대한 뜻을 밝혀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이황의 글을 올리니 임금께서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윤허하고 사안 처리를 하도록 예조에 내렸다. 이에 판서 윤개(윤개)가 나에게 서원의 명칭과 명명(명명)한 의의(의의)를 쓰게 하여 교서관(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반포케 하고, 서책을 보내줄 것을 주청하니, 임금께서 모두 윤허하셨다. 내가 명을 듣고 황송하여 절을 올리고 그 이름을 ‘백운동 소수서원’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학문의 도가 쇠퇴하여 강구되지 못한 지 오래이다. 배우고서 그 이치를 강명(강명)하지 않으면 몸을 닦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경(경)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 하물며 의(의)로써 밖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서원 이름을 ‘소수(소수)’라고 하게 된 까닭이다.
아, 삼대 말엽에 성인이 나오지 않아 상서(상서) 학교가 있었으나 몸소 위에서 실천하여 인도한 이가 없었기에, 천하 학자가 혼미하여 숭상할 바를 알지 못함으로써 인의가 상실되고 밟은 덕이 어두워졌었다.
공자는 큰 성인이었으나 군사(군사)의 자리를 얻지 못하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하는 도를 강명(강명)하여,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수신(수신)으로 근본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고, 그가 가르친 바나 학문한 바는 내외를 닦는 도였다. 이 때문에 천하후세에 모두 공자를 종사(종사)로 삼았다. 공자의 도가 쇠퇴할 때에 맹자가 나오니, 맹자는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전한 자이다. 그의 설은 마음을 수렴하고 호연지기를 함양하는 것으로 모두가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공부이니, 그 도는 비록 크지만 그 요점은 자신을 닦아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추로(추로) 지방이 지금에 수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든 사람이 사모하여 문헌을 구할 때에는 으레 추로를 일컬어 왔다. 후세 현인으로서 비록 공자ㆍ맹자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실로 수기(수기)의 공부가 있었던 이에 대하여는 그가 살았던 곳을 빌려 학자들의 마음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하물며 직접 군사(군사)가 되어 국학에서부터 교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이 마음먹는 바는 기미가 미미하더라도 교화를 이루는 효과는 크다. 그 사실을 나는 송 태종(송태종)의 일에서 본 바 있다.
한(한)ㆍ당(당)ㆍ위(위)ㆍ진(진) 이후 학교를 숭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모두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직접 인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스림의 효과는 거의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태종(태종)에 있어서도 몸소 실천하여 인도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들은 바 없지만, 임금이 뜻을 가져 이룬 효과를 서원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태종이 천하의 군주로서 작은 지방 은사(은사)의 서원에 편액과 서책을 하사하여 학문을 진작시킴으로써 송나라가 다할 때까지 진유(진유)가 배출되고 도학이 크게 천명되어 그동안 단절되었던 공맹의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를 본다면 송조에서 이룬 공효는 서원에서 나왔지 국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천하의 국학이 오히려 이발(리발)이 몸소 수신하였던 장소보다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고 문운(문운)이 형통하여 주세붕이 서원을 창건하고 이황이 조정에 청하여 권장토록 한 것은 비록 인위(인위)에 의함이나 실로 하늘이 열어준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성심으로 도학을 숭상하고 교화의 근원에 독실하시어 의로운 일을 들으면 과감히 실천하고 선을 보면 즐거이 따르셨다. 성상께서 몸소 솔선하여 위에서 진작시키시니 학자들이 아래에서 감격하여 흥기하였다. 이는 상하가 모두 수신으로 근본을 삼고 내외(내외)를 함께 닦는 학문을 이어 나간 결과이다. 교화가 행해지는 것이 임금의 솔선수범에 기인하여 국학의 근원이 되고 국학에서 서원으로 서원에서 사방에 이르니, 그 힘은 실로 송조(송조)에 비할 바 아니다. 장차 바른 학문을 하는 서원이 우리나라에 많이 설립되어 많은 인재가 등용됨으로써, 백성들이 지극한 다스림의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어찌 송나라 유생처럼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고 집에서 은거하며 수신만 하는 데 그치겠는가.
가정 29년(1550, 명종5) 4월 하순에 추성정란위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영성군(영성군) 신 신광한(신광한)이 삼가 절하고 쓰다.

[주C-001]백운동 소수서원 기문 : ‘수’는 ‘수’의 오기임. 《기재문집》 권1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은 〈소수서원기 응제》이다.
[주D-001]신광한(신광한 1484~155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고령). 자는 한지(한지) 또는 시회(시회), 호는 낙봉(낙봉)ㆍ기재(기재)ㆍ석선재(석선재)ㆍ청성동주(청성동주).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숙주)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내자사정) 형(형)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호당)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승문원박사)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ㆍ교리ㆍ정언ㆍ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홍문관전한)으로 경연의 시강관(시강관)을 겸임하였다. 이때에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조광조)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시무)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되어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윤인경)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ㆍ한성부우윤ㆍ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기(관기)를 엄히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의 우부빈객(우부빈객)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부사(지중추부사)를 거쳐, 15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어 윤원형(윤원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소윤)에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정헌대부)에 올라 영성군(령성군)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지의금부사)ㆍ대제학ㆍ지성균관사(지성균관사)ㆍ경연동지사(경연동지사)ㆍ춘추관동지사(춘추관동지사)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령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ㆍ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명종 3) 판돈녕부사(판돈녕부사)가 되고, 이듬해에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기노소)에 들어가고 궤장(궤장)을 하사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유일)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한유)를 기준으로 하였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두보)를 본받았다. 저서로는 《기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문간)이다.

 권2 존현록        

휘주 무원현 학교 삼선생(삼선생) 사당[휘주무원현학삼선생사] 주희(주희)

순희(순희) 8년(1181) 3월 무원(무원)의 대부 주후(주후)가 고을 학교에 주ㆍ정(주정) 세 선생의 사당 건립을 시작하고서 나에게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과거 우리 고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선생의 학문을 배워 이미 남강(남강)에 사당을 모셨고, 또 염계선생의 고택과 예장(예장) 의춘(의춘)의 사당에 당신이 기문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를 위해 말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선생의 도는 높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 무원은 그의 고향이 아니고 살았던 곳도 아니며, 일찍이 벼슬살이를 했던 곳도 아니다. 또 나라의 기전(기전)에 서차(서차)된 것도 아니다. 그 분들을 향사(향사)하는 것이 어떤 예법에 의거한 것이며 어떤 의리에 합당한 것인가?”
하여, 그 뜻을 말하고 감히 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몇 달 뒤 주후가 또 고을 처사 이증(이증) 군 및 학관(학관) 제자 수십 명과 더불어 글을 보내 말하기를,
“염계선생의 학문의 요체는 ‘성(성)은 하늘이 명하고 성(성)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라는 것으로서 옛날 성현들이 수수한 정통에 부합하고, 또 하남(하남) 이정선생(이정선생)에게 전하여 드디어 천하에 전파되었습니다. 벼슬과 상으로 권면하거나 형벌로 위협하지 않는데도 천하의 선비들이 쏠리듯 흠모하여, 수십 년 사이에 그의 고향이 아니고 살았던 곳도 아니고, 벼슬하였던 곳도 아니고, 나라에서 제향하라는 명이 있지도 않았으나, 학교가 있는 곳마다 다투어 사당을 지어 존경하여 받드는 뜻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개 이로써 나라에서 명하는 향사에 끼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엿볼 수 있는 유상을 모셔놓고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우러러보고 흥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우리 고장 사람들이 세 분 선생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데에는 당신 선군자(선군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당이 완성되었으니, 당신이 어찌 한 말씀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는 그 시종(시종)과 본말(본말)의 의취(의취)에 대하여 당신이 해설하여야 어느 정도 발현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정색을 하고 편지를 쓰기를,
“밝은 원님과 제군들이 저에게 기문을 쓰라고 명하시니, 감히 다시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는 어리석고 두려워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유독 염계의 태극도(태극도)와 그 글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비록 간략하고 예스럽고 심오하여 쉽게 탐구하여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요지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배운 것을 강마하고 골똘히 생각하여 천치와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겨 예로 돌아갈 것을 말한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시행은 가정에서 시작하여 천하에 파급시키는 것이고, 그 제도는 옛날 예법을 회복하고 지금의 음악을 바꾸어, 정사로 백성을 기르고 형벌로 기강을 엄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윤(이윤)의 뜻이고 안자(안자)의 학문이고, 정씨(정씨)가 전하여 사람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또한 어찌 제군들의 일상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살피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다행히 어진 대부들의 힘으로 매일 선생의 초상을 뵙고 우러러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 글을 모두 읽고 그 요지를 구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힘써 행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하였다. 이윽고 그 사실과 그 말을 이와 같이 써서 기문(기문)으로 삼게 되었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를 말미암아 힘쓴다면, 두 선생의 마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나의 선친과 어진 대부의 뜻도 저버림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사당은 강당 북쪽 벽 아래에 있다. 염계선생이 남쪽을 향하여 앉아 계시고 명도선생과 이천선생이 동쪽과 서쪽을 향하여 있다. 주후(주후)의 이름은 사청(사청)이고 옥산(옥산) 사람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나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이 고을을 다스림에 너그러움으로 백성들을 무마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며, 가르침이 또한 이와 같았다. 지금 세상에서 관리 된 자가 쉽게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가을 8월 계축일에 고을 사람 주희(주희)가 쓰다.

소주 주학 염계선생(렴계선생) 사당 기문[소주주학렴계선생사기] 주희(주희)

진한(진한) 이래로 도가 천하에 밝지 못하고 선비들은 학문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하늘을 말하는 자는 사람 문제를 빠트려 쓰임이 없게 되었고, 사람을 말하는 자는 하늘에 미치지 못하여 근본이 없게 되었다. 오로지 하학(하학)을 하는 자는 위로 통달할 줄을 알지 못하여 형기(형기)에 정체되었고, 기필코 상달(상달)을 추구하는 자는 하학에 힘쓰지 않아 공허한 데에 빠졌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넉넉한 자는 간혹 남에게 파급시키는 데에 부족하고, 세상을 따라 공명을 추구하는 자는 또한 꼭 그 근본에서 시작하여 미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개 이와 같았기 때문에 천리(천리)가 밝지 못하여 사람의 욕심이 맹렬히 일어났고, 도학이 전해지지 못하여 이단(이단)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를 가지고 한 세상을 치달리며 늙어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못하였고, 끝내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였다.
송(송)나라가 일어나자, 구의산(구의산) 아래 용릉(용릉)에 ‘염계선생(렴계선생)’이라는 분이 나온 뒤에 하늘의 이치가 밝아지고 도학의 전수가 다시 이어졌다. 이는 대개 태극(태극)과 음양오행(음양오행)의 깊은 이치를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중정(중정)과 인의(인의)를 행하는 자는 그 근원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성학(성학)의 요지를 말하며 하학(하학)을 하는 자는 사심을 이기고 예로 회복하는 것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상달(상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천하가 근본이 있음을 밝혀 다스림을 말하는 자는 마음을 성실하게 하고 몸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쓸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로 수사(수사)의 천년의 도통(도통)에 접하고 아래로 하락(하락)의 백세의 전통을 열었으니, 그 맥락이 분명하고 규모가 크고 멀다. 이로써 인욕(인욕)은 억제되어 방자할 수 없게 되고, 이단(이단)은 피하고서 제멋대로 치달릴 수 없게 되었다. 대개 맹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여러 유가가 주고받은 차서를 두루 뽑아 그 흥복(흥복)ㆍ개창(개창)ㆍ신소(신소)ㆍ평일(평일)의 공을 논한다면, 실로 이보다 높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희녕(희령) 중에 일찍이 광남(광남) 원이 되어 형옥(형옥)과 공사(공사)를 맡아 처리하였고, 소주(소주)를 다스릴 때는 원한을 씻어주고 만물에 은택을 베풀었으니, 그 충분히 행할 조짐이 있었으나 질병으로 떠났다.
건도(건도) 경인년(1170)에 주지사(주지사) 주순원(주순원)이 선생께서 남긴 공적을 사모하고 오랫동안 한스럽게 여기더니, 비로소 고을 향교 강당 동쪽에 사당을 짓고 하남 정(정)선생 형제분을 배향하였다. 그 후 13년에 교수 요덕명(료덕명)이 옛 사당이 허물어지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 흐지부지된 것을 보고, 이에 넓혀서 새롭게 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듬해에 옛날 장소에 세 칸 집을 지었고 유상을 차례로 근엄하게 모셨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유생들을 인솔하여 배알하고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석전)을 드리고 그 다음날 삼헌(삼헌)의 예로써 예를 올렸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겨 매일 세 선생의 글을 취하여 여러 유생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익숙히 읽고 정하게 생각하여 힘써 행한다면 나아가 이 마루에 오르는 것이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다음해에 편지를 보내어 고하기를,
“소주(소주)는 옛날부터 이름난 고을이었습니다. 선비들은 대다수 착하고 순수하고 부화(부화)한 이가 적었으며, 함께 선에 나아갈 자들이 대개 장문헌(장문헌)과 여양공(여양공)의 유풍(유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현의 시대가 이미 멀고 선생과 군자들이 가르쳐서 그 뒤를 열어준 적이 없었으므로, 비록 세상에 이름난 큰 선비가 와서 벼슬살이를 하더라도 공손히 학업을 청하여 그 학문을 전수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주후가 염려하고 힘썼던 바이고, 제가 뒤에 계승하여 감히 게을리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일을 마쳤고, 저도 장차 자리가 바뀌어 떠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선생께서 한 말씀 해주시면 마침내 주후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이고 유생들에게 다행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요(료)군은 나에게서 학문을 한 사람이다. 그가 얻은 바를 가지고 가서 문득 선생이 도학을 창명한 공에 대하여 저술하여 소주(소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이를 통하여 힘쓸 방도를 알게 하였다. 또 일을 일으킨 시말을 이와 같이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순희(순희) 10년 계묘년(1183) 5월 정유에 신안 주희가 쓰다.

덕안부 응성현 상채(상채) 사선생(사선생) 사당 기문[덕안부응성현상채사선생사기] 주희(주희)

응성현(응성현) 학교에 있는 상채(상채) 사공(사공) 선생의 사당은 지금 현령인 건안(건안) 유병(유병)이 지었다.
선생의 이름은 양좌(량좌), 자는 현도(현도)이다. 하남의 정부자(정부자) 형제의 문하에서 배웠다. 처음에 해박한 지식에 대하여 자부하여 강독하고 익히는 사이에 전(전)과 기(기)를 널리 인용하였는데, 어떤 것은 끝까지 다 외우기도 하였다. 이에 부자께서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를 일러 완물상지(완물상지)라 할 만하네.”
하니, 선생이 듣고 망연자실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진땀을 흘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이윽고 이전에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배웠다. 그러나 사람됨이 명석하고 대단한 노력으로 나태하지 않았으며, 극기복례(극기복례)에 대하여 매일 과제를 설정하여 행하였다. 이에 부자께서 그의 절문근사(절문근사)의 공부에 대하여 인정하신 적이 있다. 저술한 《논어설(논어설)》과 문인이 기록한 유어(유어)가 모두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생의(생의)로 인(인)을 논하고 실리(실리)로 성(성)을 논하고 상성(상성)으로 경(경)을 논하고 구시(구시)로 궁리(궁리)를 논하였으며, 그 명리(명리)가 모두 정밀하고 온당하였다. 그리고 궁리(궁리)와 거경(거경)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고 바로 지적한 것은 부자의 교육 법도에 있어 가장 그 강령(강령)을 얻은 것이 된다. 건중정국(건중정국) 연간에 조대(조대)가 부합하지 못하여 서국(서국)에 재직하였다. 뒤에 다시 주현(주현)을 전전하면서 낮은 자리에 침체되었고, 그대로 생애를 마치면서도 호연하게 대처하였고 조금도 졸렬하지 않았다. 중간에 이 고을 원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양(남양) 호문정공(호문정공)이 전학사자(전학사자)가 되어 고을에 가서 방문하면서 감히 직무를 가지고 문안하지 못하고 다만 소개인을 말미암아 제자의 예법으로 뵙기를 청하였다. 문에 들어갈 때 뜰에 이졸(이졸)들이 마치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 같이 꼿꼿이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이 일게 하였다. 드디어 학문을 여쭈었다. 같은 때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도 모두 그 언론이 느긋하고 분방하여 사람을 잘 계발해 주었다고 일컬었는데, 지금에 그 글을 읽어보면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유공(유공) 정부(정부)선생이 그 묘지명을 지었는데, 난리 중에 없어져 두 집안의 글을 다 볼 수 없게 되었고, 응성(응성)은 도적들이 더욱 포악하게 굴던 곳이어서 황량한 빈터로 변하고 말아, 가르치던 제도도 전해진 것이 없었다.
유(유)군이 와서 유적을 찾아 겨우 돌에 새긴 제영(제영) 수십 자를 얻었을 뿐이었다. 이에 길이 탄식하면서,
“선생이 남긴 공적이 이 고을에 밝혀져 있지 않는데, 이는 후세의 군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윽고 학교를 새롭게 단장하고 강당의 동쪽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천리 먼 곳까지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나름대로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선생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흥미를 유발하였다. 또 평소에 들은 바 선생의 행실과 일도 모두 고매탁절(고매탁절)하여 노쇠하고 병든 몸이 흥기하였고, 하루아침에 없어져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유군의 요청은 곧 내 마음에도 부합하는 것이기에,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기록하여 학문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바이다.
소희(소희) 신해년(1191) 겨울 10월 병자삭(병자삭) 초하루 아침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황주 주학 이정선생(이정선생) 사당 기문[황주주학이정선생사기] 주희(주희)

제안(제안)은 장강(장강)과 회수(회수) 사이에서 가장 궁벽한 곳에 있지만 국조 이래 이름난 관리와 어진 대부들이 다수 재임하였다. 예를 들면 왕한림(왕한림)ㆍ한충헌공(한충헌공)ㆍ소문충공(소문충공) 같은 이들은 지금도 고을 사람들이 일컫고 있으며, 소씨에 대하여는 더욱 상세하게 전한다. 하남의 두 정부자(정부자)에 이르러서는 역시 이 고을에서 태어났는데 일컫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왕공의 문장과 한공의 훈업은 모두 한 시대를 울려 빛났고, 그 의론(의론)과 기절(기절)이 우뚝하고 위대하여 더욱 세상의 이목(이목)을 놀라게 할 만하였다. 그러나 모두 소공의 성대함만 못하였다.
정부자(정부자) 같은 분은 사업이 미미하여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고 문장도 평이하고 담담하여 또한 후세에 족히 자랑할 것이 못되었다. 유독 그 도학(도학)이 오묘하여 속일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 또한 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였다. 이런 점이 바로 유적이 드러나고 숨겨지는 차별이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니, 또한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것이다.
대개 천성(천성) 연간에 낙양(낙양) 사람인 태중대부(태중대부) 정향(정향) 공이 처음 황피위(황피위)가 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도 떠나지 못하여 드디어 여기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명도(명도) 임신년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호(호), 자를 백순(백순)이라 하였다. 또 이듬해 계유년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이(이), 자를 정숙(정숙)이라 하였다. 그 후 십여 년 뒤인 경력(경력) 병술년ㆍ정해년 사이에 남안(남안)의 참모로 정사를 보게 되었는데, 이 때 옥리 용릉(용릉) 주돈이(주돈이) 공과 교류하였다. 이에 두 아들이 그에게 수학하게 되었는데, 비로소 개연히 구도(구도)의 뜻을 가졌고, 이윽고 유경(유경) 속에서 공맹(공맹) 이래 전통이 끊어진 실마리를 찾았다. 드디어 그 학문으로써 여러 유학자 앞에서 제창하였으니, 지금 일컫는바 명도(명도)선생과 이천(이천)선생이 이 분들이다.
선생의 학문은 《대학(대학)》ㆍ《논어(논어)》ㆍ《중용(중용)》ㆍ《맹자(맹자)》를 표준으로 삼아 육경까지 이르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독서ㆍ궁리하게 하되 그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 몸을 수양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 미치도록 하였다. 그 도는 평탄하고 밝으며 그 말은 간결하면서도 두루 통하고 그 행실은 단아하면서 진실하였다.
이는 대개 장차 백대에 침체되고 미혹된 것을 진작하여 성인의 지경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 한 때의 사업ㆍ문장ㆍ논의ㆍ절개와 비교할 때 관계되는 바가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우며 베푸는 바가 어느 것이 짧고 길겠는가? 마땅히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세상은 한갓 그것을 알아주지 못 하였을 뿐만이 아니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은 도학의 사기(사기)로 지목하여 기필코 멸시하였는데, 이러한 때야 실로 나무를 베어버리듯 흔적을 없애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이니, 어찌 그 나머지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의 태수 이후(이후)는 근본을 생각하고 선생이 남긴 공적을 추송(추송)하며, 학교에 두 부자(부자)의 사당을 세워 사람들을 면려하고 흥기시켰다. 스스로 믿음이 독실하여 세속의 이해관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서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후(이후)의 이름은 우(우)이고 자는 성지(성지)이다. 이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 부지런히 일하고 백성을 사랑한 사실에 대하여도 기록할 만한 것이 실로 많지만, 특히 이 일에 있어서는 이념과 조치가 범상하지 않아 보통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기문을 청한 것을 인하여 자세히 논하여 후세 사람들이 상고할 수 있게 하는 바이다.
소희(소희) 3년(1192) 가을 9월 무자일에, 후학(후학)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건녕부 학교 유어사(유어사) 사당 기문[건녕부학유어사사기] 주희(주희)

고 감찰어사 유공(유공) 선생은 휘가 초(초), 자가 정부(정부)이다. 이 고을 건양(건양) 사람으로 하남(하남) 정씨의 높은 제자이다. 휘종(휘종) 초기에 어사(어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떠나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고을을 다스렸고, 또 물러나서 한가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융흥(륭흥) 원년 계미년(1163)은 선생께서 돌아간 지 41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부문각대제(부문각대제) 연평(연평) 진실(진실) 공이 이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덕과 학문이 선생 같이 성대한 분에 대하여 고을 향교에 사당이 없다는 것은 고을 자제들의 허물일 뿐만이 아니라 백성을 기르는 자에게도 죄가 있다.”
하였다. 이에 고을 향교 동쪽 편에 사당을 만들어 유상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다. 그런 뒤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뜻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내가 여러 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고 돌려보내었으나 공이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물러나 옛날에 들은 것을 상고하고 구산(구산) 양문정공(양문정공)이 지은 선생의 묘지(묘지) 내용을 살펴보았다. 묘지에 이르기를,
“내가 원풍(원풍) 연간에 명도선생(명도선생) 문하에서 수학할 때 벗 두 사람이 있었는데 상채(상채) 사현도(사현도) 공이 그 중 하나이다. 당초 이천(이천)선생께서 어떤 일로 서울에 왔다가 한 번 공을 보고서 그가 함께 도에 나아갈 만한 자질을 가졌다고 평하였다. 당시에 명도선생은 부구현(부구현)에 재직하고 있었다. 선생의 형제가 바야흐로 도학을 주창하여 밝힐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학교를 설립하고 고을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이 때 공을 불러 가르치는 일을 맡기니 공이 기꺼이 가서 종사하다가 그 은미한 말씀을 듣고는 기왕에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그 문하에서 배웠다. 그 후 하청읍(하청읍)을 맡아 다스렸고, 그때 내가 가서 만나 보았다. 이천선생께서 나에게 말하기를, ‘유군(유군)은 덕기(덕기)가 순수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고, 정사도 남보다 빼어남이 참으로 멀다.’ 하였다. 스승의 문하에서 칭찬 받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의 진보한 정도를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책을 읽음에 한 번 보면 곧 외웠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날마다 힘과 마음을 다하였으며, 세상 선비들의 습성을 따라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진실함이 쌓여 겉으로 드러나고 용모와 언사가 찬란히 빛나, 멀리서 바라보아도 덕이 높은 군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고 벗과 사귐에 믿음이 있었고 관직 생활에서는 관리들에게 은혜롭게 대하였다. 이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극진히 하기를 즐겨하였고 감히 그 명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가 없었으며,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그리하여 떠나고 나면 사모하였고 세월이 오래 가도 잊지 못하였다. 그의 도학은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충분하고 정사는 천하에 은택을 베풀 수 있었지만, 태평한 시절을 만나 쓰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는 사론(사론)이 모두 애석해 한 것이지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저서로 《중용의(중용의)》ㆍ《역설(역설)》ㆍ《시이남의(시이남의)》ㆍ《맹논잡해(맹논잡해)》각 1권과 문집 10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하였다. 양공(양공)의 기록은 이와 같은데, 내 생각에는 선생을 깊이 알아 그 덕을 가장 잘 표현하여 후세에 증빙이 되는 데에는 양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선생의 도학과 덕행은 여기에서 그 상세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진공(진공)을 모시고 앉아서 그 말씀을 들어보니, 선현 충숙공(충숙공)이 선생과 더불어 교유할 때 담소ㆍ논의ㆍ서소(서소)ㆍ사장(사장)에 대하여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지금까지 외우는데, 그 온화한 모습으로 굽어보고 올려보는 사이에 또한 깊고 은미한 뜻을 아울러 얻게 되니, 듣는 자가 마치 그분을 다시 보는 듯하게 하였다. 이것이 선생의 도에 있어서 어떠한가? 따라서 공이 선생을 사당에 모시도록 한 까닭은 대개 자신에게 얻은 바를 미루어 이 고을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것이지, 한갓 흠모의 뜻을 바쳐 고사(고사)를 정립하는 일만이 아닌 것이다.
내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양공(양공)이 본래 한 말을 가지고 논술하고 감히 그 사이에 찬사를 덧붙이지 못하였다. 또 진공이 지적한 뜻에서 나온 것을 아울러 써서 공의 명을 받들었다. 이로써 어느 정도 벌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긴다.
아,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배우는 자들이 이 당(당)에 올라 그 유상에 배례(배례)할 것이고, 또 이 기문(기문)을 통하여 사우(사우)의 연원(연원)을 상고하고 물러가 그 책을 찾아서 읽고서 선생께서 배운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 결과 다행히 스스로 체득함이 있다면 직접 문하에서 배운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경(시경)》에서 이르기를,
“나를 좋아하는 분, 나에게 큰 길 보여 주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높은 산 우러르고 큰 길을 가도다.
하였다. 내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학문을 이어나갈 선비들과 함께 힘써서 진공(진공)의 은덕을 잊지 않고자 한다.
8월 갑자일에 구위(구위) 주희(주희)가 쓰다.

건녕부 숭안현 이공(이공) 사당 기문[건녕부숭안현이공사기] 주희(주희)

숭안(숭안)은 건녕(건녕)의 험준한 산촌 고을이다. 고(고) 궁사(궁사) 조청헌공(조청헌공)이 일찍이 읍재(읍재)로 있었고 고(고) 시독(시독) 호문정공(호문정공)이 또 그 고을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덕은 후학들이 우러러 본 지 오래다. 그러나 수십 년 사이에 이 고을을 다스린 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두 분의 사적을 드러내어 고을을 교화한 자가 없었다.
건도(건도) 3년(1167년)에 지금의 현지사(현지사) 온릉(온릉) 제갈후(제갈후)가 처음 와서 새로이 학교를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였는데, 두 분의 사당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깊이 자신의 잘못으로 여겼다. 이에 유상(유상)을 구하고 향교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인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5월 갑자일에 공사가 끝나자 여러 유생들에게 명하여 모두 향교에 들어가게 하고 몸소 대소 관료들을 거느리고 함께 선성(선성)ㆍ선사(선사)의 영전에 석채(석채)를 올리고, 또 두 분의 사당에 제수(제수)를 올리고 삼헌(삼헌)으로 예를 이루었다. 이어 제생들에게 읍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향교는 본래부터 공맹(공맹)을 숭상한다. 그러나 이 고을에 살면서 그 풍성(풍성)과 기속(기속)의 가까움으로 말하면 향대부(향대부)ㆍ향선생(향선생) 중에서 훌륭한 분이 누구인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조공(조공)은 효제(효제)와 자상(자상)한 마음을 가지고 법도에 맞는 행실을 하였으며,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순량(순량)의 자취를 남겼고 조정에서는 직언(직언)의 기풍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의 맑은 절조(절조)와 지극한 행실이 세상의 표준이 됨은 여러분들도 들은 바일 것입니다.
호공(호공)은 이락(이락)에서 도(도)를 들었고 《춘추(춘추)》에 뜻을 두었습니다. 저서와 입언(입언)은 임금을 바로잡고 후세에 전해졌는데, 천리(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고 삼강을 부지하고 구법(구법)을 펼치는 것에 대한 것이 깊고 절실하여 체(체)와 용(용)이 일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색을 바로 하고 과감한 어투로 법도에 의거하여 일을 논하면서 나타낸 강대정직(강대정직)한 기개는 옛날 사람에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군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 고을 원으로 부임하여 나의 과오를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항상 여러분들과 서로 성현의 일로 면려(면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다행히 백성들의 여력으로 학교가 중수되었으므로 장차 제군들과 더불어 날마다 조용히 그 사이에서 노닐려고 합니다. 돌아보건대, 옛날 성현은 너무 멀기에 제군들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통달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사당에 두 분의 초상을 모신 것이니,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그 모습을 우러러보고서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 언행을 상고하여 탐욕스럽고 나태한 뜻을 격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정밀하게 생각하고 익숙하게 밝히고, 마음에 돌이켜 지극한 이치의 소재(소재)를 구하고 그 중심을 잡는다면, 학문은 밝아지고 행실은 높아지고 덕은 오래가고 사업은 크게 되어, 과연 성현의 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두 분을 사숙(사숙)하는 뒷사람들의 본래의 뜻이요, 또한 내가 평소 제군들에게 바라던 바입니다. 제군들에게 어찌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제생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불민(불민)하나 감히 경건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생각하여 선생의 가르치심을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제생들이 물러나자, 제갈후(제갈후)가 이 사실을 가지고 사람을 보내 산간에 달려와 나에게 기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오늘날 위정자(위정자)는 실로 이미 학교 일을 살필 경황이 없고, 간혹 미치더라도 교육 방법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다만 이록(이록)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비루한 지경에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해치는 것이다. 가르침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지금 제갈후는 이 고을에서 향교를 새롭게 하고서 성현의 일을 가지고 말해주고, 또 능히 두 분 선생을 높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이로 말미암아 통달하게 하였으니, 그는 교육 방법을 알았다고 하겠다. 그의 뜻이 어찌 지금의 위정자들보다 나은 것일 뿐이겠는가?
사양하여도 들어주지 않아 그 본말을 갖추어 써서 동지(동지)들에게 보이고, 서로 면려하여 제갈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달 계미일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건강부 학교 명도선생(명도선생) 사당 기문[건강부학명도선생사기] 주희(주희)

자정전(자정전) 태학사(태학사) 건안(건안) 유공(유공) 모(모)가 건강(건강)의 원으로 재임한 이듬해 봄 모월(모월) 향교(향교)에 처음으로 명도(명도)선생의 사당을 세우고 편지를 써서 신안(신안)의 무원(무원)에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정씨의 책을 읽어 선생의 도학(도학)과 덕행(덕행)이 실로 전해지지 못한 공맹(공맹)의 도통(도통)을 계승하였음을 알았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배움은 비록 이를 수 없었다하더라도 마음만은 그를 사모하였습니다. 이 고을에 와서 보니 속읍(속읍)에 상원(상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선생께서 젊은 시절 벼슬살이를 하였던 곳입니다.
서책의 기록을 살펴보니 토지를 고루 분배하고 제방(제방)을 막아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친 정사(정사)가 많았고, 용을 잡아 포를 뜨고 절간(절간)하여 백성들을 가르친 뜻도 구비하였습니다. 고로(고로)에게 물어 그 사실을 상고해보니 전쟁과 변고(변고) 끝에 그 기풍이 없어져 전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 이르러 개연(개연)한 심정으로 사당을 모시고 나의 뜻을 이루어, 이 고을 선비들이 그 학문에 흥기하고 관리들은 그 다스림을 본받고 백성들은 그 은덕을 잊지 않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큰 흉년을 만나 기근 구제에 급급하다가 지금에야 그 뜻을 이루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분의 시를 외우고 그분의 글을 읽었으니, 당신의 글을 받아 기문을 삼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고을 향교 교수(교수) 손(손) 군 모(모)와 심(심) 군 모가 또 편지를 보내 공의 뜻을 거듭 전달하고, 또 공이 처음에 노심초사하면서 미치지 못하였던 사실과 지금에 여가를 내어 이루게 된 사실을 갖추어 말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에 내가 편지를 보내 우러러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였으니 공의 뜻이 아름답고, 이미 풍요롭게 하고 가르쳐 주었으니 공의 정사(정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으니 그 마음이 매우 지성스럽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학문으로서 그 큰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이른바 ‘옛날 성인에게서 상고하여도 오류가 없고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될 것이 없다.’라는 것으로 설명이 필요 없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작은 것으로부터 말하면 상원(상원)에서의 정사는 선생의 원대한 점에 비하여 그다지 칭송할 것이 못되지 않을까 여깁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삼가 생각해보니 선생의 학문은 실로 높고도 멀다. 그러나 사람을 가르친 법도는 차근차근 차례가 있었으며, 일찍이 세상의 학문하는 자들이 가까이 있는 것은 버리고 멀리 있는 것을 구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높은 곳을 엿보면서 경솔하게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면서 이룬 것이 없음을 병통으로 여겼다. 곧 세상에서 한갓 큰 것만을 좋아한 것은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상원(상원)에서의 정사는 실로 좁고 비근한 일이다. 그러나 그 말씀에,
“처음 벼슬하는 선비가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람들에게 은택을 베풀 수 있다.”
하였으니, 그 마음속의 뜻에 대하여 어찌 크다느니 작다느니 말할 수 있겠는가. 민첩하지 못한 내가 이것으로 공의 명을 받들어, 공의 뜻과 선생의 학문에 모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또 생각건대 공의 충성스런 말과 큰 사려(사려)는 이미 조정에서 나타났지만, 지금 비록 외직(외직)에 나와서도 재난을 구제하고 환란을 무마하는 데에 이토록 노력하였으니, 이는 필시 선생의 뜻에 깊이 감동하여 묵묵히 가슴속으로 계합(계합)한 바가 있는 것이다. 사당을 지어 모신 것이 어찌 꼭 현자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뜻을 다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한 것일 뿐이겠는가.
만약 공의 뜻을 미루어 선생이 가르쳤던 바로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닦고 남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종사하고 헛된 말과 분수에 넘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손군과 이군 두 사람의 임무일 것이니, 두 사람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대한다.
순희(순희) 3년 여름 4월 병신일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경행당 기문[경행당기] 주희(주희)

강산현(강산현) 향교에 옛날에 삼현당(삼현당)이 있었으니 정개(정개)선생 주군(주군) 영(영)과 증 선교랑(증선교랑) 서(서) 군 규(규)와 일평(일평)선생 서(서) 군 존(존)을 향사하였다. 지금의 현지사(현지사) 금화(금화) 소후(소후) 호(호)가 다시 고(고) 간의대부(간의대부) 모공(모공) 주(주)와 증 간의대부(증간의대부) 모공(모공) 율(㮚)를 더하여 향사하고 그 편액을 바꾸어 ‘경행당(경행당)’이라 하고, 그 사실을 써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기문)을 써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그 사실을 적은 글을 읽고서 다섯 군자(군자)의 학행(학행)과 기절(기절)이 실로 당세를 풍화(풍화)하고 후세를 흥기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편지를 읽고서 또 소후가 사람을 가르치는 방도를 잘 갖추었고 인물을 기다리는 것이 원대한 것에 감탄하였다.
대개 정개(정개)선생은 행실이 향리(향리)에서 신망을 얻어 조정에까지 소문이 났고 좋은 말과 가르침을 남긴 것과 선을 기리고 악을 배척한 점은 또한 모두 후세의 규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 사업이 당대에 드러나지 못하였지만 그가 수립한 바는 이미 한 고장의 일개 선사(선사)일 뿐만이 아니다.
간의대부(간의대부)는 좋은 시대와 임금을 만나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거간(거간)을 물리치고 정권을 빼앗기에, 그 당시에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뜻을 접고 세상을 떠났기에 뜻있는 선비들은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다만 공 입장에서 한스럽게 여길 뿐만이 아니다. 숙진(숙진)에 이르러 도적들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아 관리로서의 의리를 밝혔고, 택향(택향)에서는 오랑캐 군영에 몸을 던져 임금의 위기를 누그러뜨렸으니,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고 그 절개가 더욱 위대한 것이다.
일평(일평)선생은 정(정)씨의 문인에게서 수업하여 마음으로 터득하고 행실에서 이루었으며, 또 그 말씀을 미루어 사람들을 가르쳤으니, 그 모습과 음성은 지금에 그다지 멀지 않다.
대개 작은 백리의 고을에서 선현들의 학행(학행)과 기절(기절)이 당세를 풍화(풍화)하고 후세를 흥기 할 수 있음이 이와 같으니 성대하다고 이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그들을 사당에 모셔 제사를 드렸으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그 셋은 모시고 그 둘은 버려두었으니 이는 후인들이 다 살펴보고 그분들을 흠모하여 닮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 셈이다. 이에 식자들이 더러 병통으로 여겼는데, 소후(소후)가 이에 더하여 모시고 사당을 새로 짓고 이름을 바꾸어, 열심히 힘쓰게 하려는 뜻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제한을 거두어 후세 인물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 역시 사람을 가르치는 방도가 갖추어졌고 인재를 기다리는 바가 원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는 실로 기록할 만한 사실이다.
또 내가 일찍이 말한 것이 있다. 선비는 학문이 있고 덕(덕)이 있고난 뒤에 볼 만한 언행(언행)이 있고, 언행이 있고난 뒤에 귀하게 여길 만한 절의(절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사군자가 몸을 세우고 도(도)를 행하는 차례와 시종의 상도(상도)로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타고난 바가 같지 않고 또 상황을 만나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몸에 터득한 것을 더러 일에서 징험(징험)할 수 없기도 하고 마지막에 이룬 것을 더러 처음에서 상고할 수 없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논하며 벗을 삼는 자가 늘 온전한 덕을 가진 자를 만나기 어려움을 한탄하는 것이고, 스승을 택하려는 자가 여러 갈래의 길에서 의혹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당에 올라 다섯 군자를 섬기는 데에 뜻을 둔 자가 그 힘쓸 바의 선후를 알아 차례차례 구하는 방법을 모르면 되겠는가.
소후(소후)는 《대학(대학)》의 글을 읽고 ‘혈구(혈구)’ 한 구절에 느낀 바가 있었는데, 평소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불평스러움이 있어, 개연(개연)히 발분하여 손바닥을 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다섯 군자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하는 방법의 차례를 거의 터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일을 한 것이 어찌 우연일 뿐이겠는가. 이에 그 일의 본말과 함께 이러한 뜻을 기록하는 바이다.

강주 염계선생(렴계선생) 서당 중건 기문[강주중건렴계선생서당기] 주희(주희)

천하에 있는 도(도)가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지만 오직 사람에게 의탁하여 있던 것이 간혹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행해질 때에 밝게 드러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명이 하는 바이고 사람의 지혜와 힘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개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음양과 오행(오행)이 뒤섞여 그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왕래하여 삼라만상을 길렀으니 어떤 사물이라도 제각기 본래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인의예지(인의예지)의 성(성)과 군신(군신)ㆍ부자(부자)ㆍ장유(장유)ㆍ부부(부부)ㆍ붕우(붕우)의 윤리일 뿐이다. 이는 두루 유행하고 충만하여 이지러지거나 중단됨이 없으니 어찌 고금(고금)과 치란(치란)에 따라 있거나 없거나 하겠는가.
그러나 기(기)의 운행(운행)은 순수하고 잡되고 분리되고 합쳐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음이 있고 사람의 품성에는 맑고 탁하고 어두움과 밝음의 구분이 있다. 이 때문에 도가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행해지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어야 참여할 수 있지, 교묘한 지혜와 과감한 행동의 사사로운 능력으로 헤아리고 억지로 탐색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도(하도)가 나와 팔괘(팔괘)가 그어졌고 낙서(낙서)가 출현하여 구주(구주)가 서술되었으며, 공자가 사문(사문)의 흥기와 쇠퇴에 대하여 결국 하늘의 뜻으로 미루었다. 성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를 속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염계(렴계)선생 같은 분은 하늘이 도와주어서 이 도를 전한 분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끊어진 것이 그토록 오래 된 상황에서 쉽게 계승하고 그토록 심히 어두운 상황에서 빨리 밝힐 수 있었겠는가. 대개 주(주)나라가 쇠하고 맹자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이 도의 전통이 끊어졌다. 진(진)ㆍ한(한)으로 바뀌고 진(진)ㆍ수(수)ㆍ당(당)을 거쳐 우리 송조(송조)에 이르러 성조(성조)가 천명을 받아 오성(오성)의 빛이 규성(규성)에 모여 문명의 운세를 열었다. 그 뒤에 잡된 기(기)가 순수해지고 분리되었던 것이 합쳐졌으며 맑고 밝은 품성이 온전히 사람에게 부쳐짐으로써 선생이 태어나신 것이다.
선생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 없으면서 묵묵히 도의 본체에 계합(계합)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표현하여 근원을 탐색하고 요체를 잡았다. 당시에 그것을 보고서 안 사람으로 정씨(정씨)가 있었으니, 드디어 크게 넓히고 미루어 밝혀서 천리(천리)의 은미(은미)함과 인륜(인륜)의 밝게 드러남과 사물의 다양함과 귀신의 불가사의한 점에 대하여 훤하게 일관하였다. 이로써 주공(주공)ㆍ공자(공자)ㆍ맹씨(맹씨)로 이어진 바가 다시 세상에 밝게 드러나게 하여, 뜻있는 선비들이 탐구(탐구)하고 행하면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음이 마치 삼대(삼대) 이전에 나온 것과 같게 하였다. 아, 성대하도다. 하늘이 도와준 바가 아니라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성은 주(주), 휘는 돈이(돈이), 자는 무숙(무숙)이다. 대대로 용릉(용릉)에 살았고 만년에는 여산(여산) 아래에서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옛 마을 이름을 취하여 시내를 ‘염계(렴계)’라 하고 시냇가에 서당을 지었다. 그 유허가 구강군(구강군) 고을 남쪽 10리에 있는데 폐허가 되어 돌보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순희(순희) 병신년에 지금 태수(태수) 반자명(반자명)이 통수(통수) 여승기(여승기)와 더불어 비로소 그곳에 다시 서당을 짓고 옛날 이름을 걸고 선생의 제사를 받들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어리석어 이 일을 감당할 능력이 못 되지만, 다만 다행스럽게 일찍이 정씨의 학문을 전수한 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삼가 선생의 글을 읽고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근래에 와서 한가롭게 지내 일이 없었으므로 한 번 구강(구강)에서 배를 타고 여산(여산)으로 들어가 그 물가에서 갓끈을 씻고 존경하고 흠모하는 뜻을 표하려고 하였는데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뜻하지 않게도 행운을 얻어 글을 지어 그 사이에 이름을 의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삼가 선생의 도가 하늘에서 얻어 사람에게 전한 바를 탐구하여 이와 같이 그 사실을 전하여 후세의 군자들로 하여금 살펴보고 상고하여 흥기(흥기)하게 하는 바이다. 이것이 곧 두 분 후(후)의 뜻과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4년 정유년 봄 2월 병자일에 쓰다.

원주 주학 삼선생(삼선생) 사당 기문[원주주학삼선생사기] 주희(주희)

의춘(의춘) 태수(태수) 광한(광한) 장후(장후)가 그 고을의 향교를 수리하고 강당 동쪽 청사에 염계(렴계)ㆍ하남(하남) 세 분 선생의 사당을 세우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써주기를 부탁하였다.
대개 맹자가 세상을 떠나 성인(성인)의 도가 끊어지고부터 이른바 유자(유자)의 학문이란 안으로는 장구(장구)와 문사(문사)를 익히는 것에 국한되고 밖으로는 노자(노자)ㆍ석씨(석씨)의 말에 뒤섞였다. 이로써 수기치인(수기치인)의 학문이 드디어 하나같이 사사로운 지혜에서 나와 인위적인 천착으로 비루해지고 괴리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덕은 삼대(삼대)의 융성함에 비할 수 없게 하였고 백성의 풍속은 삼대의 융성함에 이르지 못하게 한 지가 이미 1천여 년이 되었다.
염계(렴계) 주공(주공) 선생이 백세 아래에서 우뚝하게 나와서 비로소 성현(성현)의 심오한 도를 탐구하고 조화(조화)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고, 홀로 체득하여 도상(도상)을 세우고 글을 지어 은미한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니, 말뜻은 요약되었지만 천인(천인)ㆍ성명(성명)의 은미함과 수기(수기)ㆍ치인(치인)의 요체가 모두 거론되지 않음이 없었다.
하남(하남) 두 정(정)선생이 친히 그것을 살펴보고 전한 것을 체득하니, 이에 그 학문이 세상에 행해지게 되었고 그 말씀을 강론하는 선비가 비로소 속학(속학)의 비루함과 이단(이단)의 미혹(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기치인(수기치인)하는 바의 뜻도 왕왕 세속 이해의 사사로움에 미혹되지 않고 개연히 요순(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을 만드는 데에 뜻을 둘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세 선생이 당세에 끼친 공은 이런 점에서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논하는 자들이 일찍이 그 학문을 상고하지 못하고 또 고금과 현회(현회)의 다름에 구애되어 본말과 원류(원류)가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서 경솔하게 논란하였다. 또 그 중에 대략 들은 자는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데서 구하고 낮은 곳에 처하여 높은 곳을 엿볼 뿐,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여 수기치인(수기치인)에 긴요한 실질을 구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아, 장후(장후)가 사당을 짓고 나에게 기문(기문)을 청한 의도가 어찌 어기에 있지 않겠는가. 한편 일찍이 들은 바가 있다. 소흥(소흥) 초에 고(고) 시독(시독) 남양(남양) 호문정공(호문정공)이 조정(조정)에 청하여 정씨에게 작위(작위)를 더하여 선성(선성)ㆍ선사(선사)의 사당에 배향(배향)하려고 하였고, 그 후 고인이 된 나의 친구 건안(건안) 위담지(위염지) 군이 태학관(태학관)이 되어서 또 그 일을 재상(재상)에게 아뢰고 형공(형공) 왕안석(왕안석) 부자(부자)의 배향을 폐지하고 제향하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당시에 모두 시행하지 못하여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근년에 와서 천자가 특별히 조서(조서)를 내려 임천(임천)과 백방(백방)의 사당을 파하기를 대략 염지(염지)가 말한 것과 같이 하였다. 그렇다면 이전에 조정 신료가 진달한 사안에 대하여 다 시행한 셈이니, 이것을 미루어 올라가서 염계(렴계)에까지 미친다면 그 또한 따르지 않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후(장후)의 이름은 표(표)이다. 승상(승상) 위충헌공(위충헌공)의 아들로서 문학과 정치에 모두 가법(가법)이 있었다. 이 사당 일 처리에서 보더라도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훗날 조용히 상소하여 그 실마리를 열어 세 선생의 사당이 온 천하에 두루 생겨나게 하여 성조(성조)에서 유학(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긴 뜻이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게 한다면, 글로 쓸 그의 아름다운 공적(공적)이 이 사당에 관한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이미 그 사실을 논하여 드러내고 또 그 설을 부기(부기)하여 훗날을 기다리는 바이다.
순희(순희) 5년(1178) 겨울 10월 신묘일에 쓰다.

장절정 기문[장절정기] 주희(주희)

순희(순희) 기해년(1179)에 내가 임시로 남강(남강)에 재직하였는데, 처음 부임하여 선현의 유적을 찾아보니 고(고) 상서(상서) 둔전외랑(둔전외랑) 유공(유공) 응지(응지)의 무덤이 성(성) 서문(서문) 밖 가시덤불 속에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유공(유공)의 청명(청명)과 고절(고절)은 당시에 드러나고 후세까지 소문이 나서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면 나태함을 물리치고 탐심을 억제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지금 불행히도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이 고을에 있는 묘소도 이와 같은 실정이니, 이는 백성을 기르는 자의 책임이다.”
하고, 즉시 그 앞에 작은 정자를 짓고 문과 담을 세우고 자물쇠를 채워서 나무를 하거나 소를 먹이는 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그 해 봄에 여러 유생과 관리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올렸다. 고을의 시인(시인) 사숙(사숙)이 구양공(구양공)의 구절에서 뽑아 ‘장절(장절)’로 명명하기를 청하였는데, 마침 나의 뜻과 통하는 점이 있었기에 친구 황수(황수)에게 부탁하여 큰 글씨로 써서 걸었다.
이로부터 동서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면서 경모하였고, 나 또한 이 언덕이 견고하고 편안하여 오래도록 허물어지지 않으리라 여겼다.
소희(소희) 2년 신해년은 내가 고을을 떠난 지 겨우 10년이 되는 해인데 지금의 태수 장공(장공)의 증후(증후)가 와서 지도를 살펴보고 옛날 장소를 찾았으나 문과 담장, 정자 편액이 하나도 보존된 것이 없었다. 이에 탄식하고 그날로 다시 문과 담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정자를 지었으며, 더욱 높고 두텁고 크고 넓게 하여 영구히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또 큰 돌을 다듬어서 두둑을 북돋우고 이름난 나무를 심어 경관을 넓혔으며, 옛날 현판을 구하여 다시 정자 위에 걸고 옛날 제도대로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또 공전 10무를 근처 능인사(능인사)에 주어 오로지 지키고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처음 이 일을 주관하였다고 하여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원컨대 한 말씀을 얻어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두 사람이 힘쓴 뜻을 알고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또한 세상 교화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증후(증후)는 이름이 집(집), 자가 치허(치허)이다. 학문한 것이 가법(가법)이 있었기에 정사를 행함에 선후를 안 것이 이와 같았다.
3년 여름 5월 계미일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빙옥당 기문[빙옥당기] 주희(주희)

남강(남강) 원 증치허(증치허)가 이미 둔전(둔전) 유공(유공)의 묘역을 수축하고, 이듬해에 고을 동쪽에서 그의 옛집 유지(유지)를 찾아내어 한가한 날 수레도 두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서 보았다. 북쪽으로 은은하게 높은 곳을 물어보니 곧 유공이 시를 읊었던 ‘동대(동대)’였고, 남쪽으로 움푹하게 낮은 곳을 돌아보니 시서(시서)에서 가리킨 ‘연지(연지)’였다. 대개 병란 이후로 황폐된 지가 오래되어 이것만 겨우 보존되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져 다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증후가 주저하며 사방을 돌아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버지로서의 응지(응지)와 아들로서의 도원(도원)이 가졌던 높은 뜻과 굳은 절개는 구양수(구양수)ㆍ사마광(사마광)ㆍ소식(소식)ㆍ황정견(황정견) 같은 분들이 언급한 바 있으니 일세의 호걸이라 할 만하다. 그가 평소 이곳에 거처한 것을 상상하니, 숲과 연못과 집이 그윽하고 시서도사(시서도사)를 성대하게 갖추어 이미 알맞은 장소에서 자적하였고, 한때 이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한 자도 방문하여 경건한 자세로 수학할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성대하였던가. 지금에 백 년이 지나 대는 넘어지고 연못은 평평해져 늪으로 변하여 나무를 하고 꼴을 베는 자들이 그 위에서 휘파람을 불며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또 얼마나 비통한가. 그러나 이는 내가 할 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소부(소부)의 여분의 물자를 민간에서 받아내어 담을 쌓고 도랑을 내어 군포(군포)에 합하고, 돌을 쌓아서 그 대(대)를 높이고 물을 끌어들여 그 못을 깊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 서북쪽에 빙옥당(빙옥당)을 짓고 유공(유공) 부자(부자)의 유상을 그려 그 위에 모셨다. 또 진충숙공(진충숙공 진관(진관))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들었기에 또 그의 유상을 그려서 배향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시시당(시시당)ㆍ만랑각(만랑각)이라는 것도 차례차례 복구하고서 사람을 시켜 그림과 편지를 나에게 보내어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전날 이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 이 일에 뜻이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그림을 통하여 살펴보니 그 당시 광경이 아련히 눈앞에 떠올라, 실로 증후가 민첩하게 일을 시행하여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한편 또 느낀 바가 있다. 근래에 인심이 바르지 못하여 행실을 닦는 자는 혼탁한 세속에 어울리는 것을 지극한 행실로 여기고 일을 맡은 자는 자신에게 편하고 이로운 것을 훌륭한 계책이라 여기고 있으니, 유씨(유씨) 부자(부자)의 풍도를 들으면 침을 뱉고 욕하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증후와 같이 한결같이 어진 이를 드러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기를 다짐하고 세속 풍습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사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또 마침 진령거(진령거)의 기우시(기우시) 그림을 보내준 이가 있어 아울러 증후에게 보내 당 위에 새겨두어 한 때의 고사로서 빠진 것을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소희(소희) 3년(1192) 가을 9월 초하루 경오일 아침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둔전(둔전) 유거사(유거사) 묘소 제문[제둔전유거사묘문] 주희(주희)

내가 전날 구양공(구양공)의 〈여산고(여산고)〉라는 시를 읽고 공의 이름을 우러러 보았는데 먼 벽지(벽지)에서 태어나 한 번 와서 높은 산을 올려다보고 공의 묘를 참배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지금에 외람되게 나라의 은총을 입고 이 고을 원이 되었는데, 부임하는 날 사방 교외를 바라보니 산은 여전히 천 길 우뚝 솟아 있지만 공의 집이 있던 언덕은 거의 사라져 찾아 볼 만한 자취가 없었습니다. 이에 고을의 원로와 선비들에게 물어 성(성) 서쪽 황폐한 동산 묵은 밭 사이에서 공(공)의 묘를 찾았으나, 경작이 미치지 않은 곳이 이미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문과 담장을 다시 짓고 정자를 지어서 표하였고, 또 그곳에 사는 훌륭한 선비에게 이름을 짓게 하여 편액(편액)을 걸어 공의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로써 앞으로 뒤를 이어 고을 원이 되는 자가 나무를 하고 소를 먹이는 자들이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금할 것이고 동서로 다니는 사람들은 공의 강의(강의)ㆍ염퇴(렴퇴)의 정신에 흥기(흥기)할 것입니다.
이는 대개 제가 전날부터 흠모하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성스러운 천자가 명을 받들어 지방을 교화하도록 한 뜻에도 걸맞는 것이라 여깁니다. 공사를 마치고 제사를 올려 정성을 바치오니 영령께서 부디 흠향하소서. 삼가 고합니다.

당실(당실) 이름을 붙일 때 기문[명당실기] 주희(주희)

자양산(자양산)은 휘주(휘주)에 있는데, 일찍이 은군자(은군자)들이 그곳에서 살았으며, 지금 그 위에 노자(노자)의 사당이 있다. 선군자(선군자)께서 옛날에 무원(무원)에 사셨기에 어려서 고을 향교에서 공부하면서 가서 놀며 즐기셨다. 민중(민중)으로 온 이후로도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셨고, 일찍이 ‘자양서당(자양서당)’이라는 인장(인장)을 새겨 쓰셨으니, 대개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루도 잊지 않으시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끝내 돌아가지 못하셨고, 임종하실 때에 비로소 아들인 나에게 담계(담계) 가에 가서 살라고 명하셨다. 그것이 지금에 30년이 흘렀다. 가난과 질병으로 구차하게 살아가느라 이미 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또 문호를 넓혀 선조를 받들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감히 선군자(선군자)의 뜻을 잊어버릴 수 없어 삼가 인장(인장)에 새겨진 내용으로 내가 거처하는 집 대청에 편액을 하니, 이른바 “악(락)은 소종래(소종래)를 즐기는 것이고 예(예)는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에 흡사하게 한 것이니, 후세에서 상고할 바이다.
선군자(선군자)께서는 또 늘 급박하게 변론하여 도를 해치는 것이 병통이라 여기시어, 우계위(우계위)에 재직하실 때에 옛날 사람이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닌 뜻을 취하여 청사(청사) 동편의 방을 ‘위제(위재)’라 하고 한가로이 지내며 독서하셨다. 연평(연평) 나중소(나중소) 선생이 기문(기문)을 지었고 사양(사양) 조영덕(조영덕) 군에게 또 명(명)을 짓게 하였는데, 중간에 관아가 도난과 화재를 입어 유적이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근세에 나의 친구 석자중(석자중) 군이 고을 원으로 부임하여 비로소 다시 현판을 걸고 기문과 명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였다. 나는 선군자(선군자)의 뜻을 가정에 전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나의 조급한 성품을 위하여도 더욱 선친의 경계(경계)를 잊을 수 없어, 그것을 취하여 정침(정침)에 걸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손에게 보여줄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대개 청사(청사)와 침당(침당)은 집의 중심이어서 지금 모두 선친께서 명명하신 것으로 이름 붙였다. 아, 내가 감히 조석으로 오르내리면서 혹시라도 경건하지 못하여 선조의 가르침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회당(회당)’은 평소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이다. 내가 태어난 지 14년에 선군자(선군자)께서 자식들을 버리고 돌아가실 때 유언하시면서 적계(적계) 호공(호공) 선생과 초당(초당)ㆍ병산(병산) 두 유(류) 선생 문하에 가서 수학(수학)하라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음식과 가르침을 모두 극진히 해주셨고, 병산(병산)선생께서는 특히 나의 자(자)를 지어주면서 송축하시기를,
“나무는 뿌리가 감추어져 있지만 봄날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우고, 사람 몸속이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신명(신명)이 안으로 살쪄야 한다.”
하셨다. 뒤에 연평(연평) 이(이)선생을 섬겼고, 선생께서 나에게 가르치신 바가 세 선생의 말씀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른바 ‘회(회)’라는 것은 바로 병산선생의 뜻이다. 나는 그 말씀을 잘 실천하지 못하여 실패를 하였다. 지금에 이로써 당(당) 이름을 정하여 여러 선생의 가르침을 감히 잊지 않는 뜻을 보이고 또 속마음을 기록하여 이제부터 다시 그 뜻을 실천하려고 한다.
당(당) 양쪽에 협실(협실)이 있어 여가(여가)마다 그곳에서 묵묵히 앉아 독서하였으니, 그 왼쪽이 ‘경재(경재)’이고 오른쪽이 ‘의재(의재)’이다. 대개 내가 일찍이 《주역(주역)》을 읽고서 두 구절을 얻었으니 바로 ‘경(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라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의 요체(요체)로서 이만한 경구가 없는데 아직 어떻게 힘써야 하는지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중용(중용)》을 읽고서 ‘수도지교(수도지교)’에 대하여 논하면서 반드시 계신(계신)ㆍ공구(공구)로 시작한 것을 보고서야 경(경)을 유지하는 근본을 알았고, 또 《대학(대학)》을 읽고서 명덕(명덕)의 차례를 논하면서 반드시 격물(격물)ㆍ치지(치지)로 시작을 삼은 것을 본 뒤에 의(의)를 밝히는 단서(단서)를 알았다.
이윽고 두 가지 공효(공효)로 일동일정(일동일정)이 서로 용(용)이 되고 또 주자(주자)의 태극도설(태극도설)에 부합되는 것을 본 뒤에야 또 천하 이치의 유명(유명)ㆍ거세(거세)ㆍ원근(원근)ㆍ심천(심천)이 하나로 관통되어 말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완미하고 즐기면 내 평생 하더라도 물리지 않기에 충분한데, 어느 겨를에 이 밖의 것을 흠모하겠는가. 이로써 ‘경의(경의)’로 나의 두 서재의 이름을 정하고, 또 당과 서재의 이름을 정한 뜻을 차례로 서술하여, 내가 아버지와 스승에게서 받은 명(명)과 강학하면서 들은 바가 이러하다는 것을 보이는 바이다. 이로써 집의 벽에 써 붙이고 드나들며 보고 반성하면서 자신을 경계할 것이다.

극재 기문[극재기] 주희(주희)

성정(성정)의 덕(덕)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한 마디 말로 그 오묘함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인)일 뿐이다. 인을 구하는 데에는 또한 방법이 많지만, 한 마디 말로 그 요체를 다 들 수 있는 것은 곧 극기복례(극기복례)일 뿐이다. 대개 인(인)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고 또 사람이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오직 천지의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았기 때문에 발현(발현)되기 전에는 사덕(사덕)이 구비되었으니, 곧 인(인)ㆍ의(의)ㆍ예(예)ㆍ지(지)이다. 그 중에서 인(인)은 전체를 통괄하지 않는 바가 없다. 이미 발현된 즈음에는 사단(사단)이 드러나니 곧 측은지심(측은지심)ㆍ수오지심(수오지심)ㆍ사양지심(사양지심)ㆍ시비지심(시비지심)이다. 그 중에서 측은지심(측은지심)은 통괄하지 않는 바가 없다. 이것이 인(인)의 체용(체용)이 만물을 흠 없이 함육하여 완전하게 하고 두루 유행하면서 하나로 꿰어, 한 마음의 묘체를 전일하게 하여 뭇 선(선)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몸이 있으므로 이목구비(이목구비)와 사지(사지)의 욕망이 발동하여 더러 그 인(인)을 해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이미 인(인)하지 못하면 그 천리(천리)를 없애버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군자(군자)의 학문은 인을 구하는 일을 급선무로 한다. 그러나 인을 구하는 요체는 인을 해치는 바를 제거하는 것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대개 예가 아닌데도 보게 되면 욕망이 인을 해치고, 예가 아닌데도 듣게 되면 욕망이 인을 해치고, 예가 아닌데도 말하고 움직이면 욕망이 인을 해치는 것이다. 욕망이 인을 해치는 것을 아는 자가 여기에 있어, 발본색원하여 욕망을 이기고 또 이겨 하루아침에 시원하게 다 없어지고 이치가 순수해지는 경지에 이르면, 가슴속에 간직된 것이 어찌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의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봄 햇살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묵묵히 이루어 한 이치도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한 사물도 포괄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감응하여 통하면 어떤 일이라도 이치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사물도 그 사랑을 입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아, 이것이 바로 인(인)의 덕(덕)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 성정(성정)의 묘체를 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하는 데 있어서 요체는 공자가 안연(안연)에게 말한 바가 또한 한 마디 말로 망라(망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현의 시대가 이미 멀고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정(정)씨 두 분 선생이 나오고서 후세 학자들이 비로소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도리어 여기에 뜻을 둔 자가 적었다.
나의 벗 회계(회계) 석자중(석자중) 군과 같은 이는 그 설을 듣고 뜻을 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극(극)’으로 서재(서재) 이름을 정하고 나에게 기문(기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극(극)과 복(복)이 비록 각각 하나의 일인 듯하지만, 사실은 천리와 인욕이 서로 소장(소장)이 되기 때문에 극기(극기)가 곧 복례(복례)이지 극기 이외에 별도의 복례 공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석자중이 이 말을 택하여 유독 ‘극(극)’자로 그 서재 이름을 정한 것은 그 인(인)을 구하는 방법에서 또한 요체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어찌 나의 말로 더 설명할 것이 있겠는가.
앞으로 이미 알고 있는 요체를 인하여 그 힘을 다하여 잠깐 사이나 위급한 때라도 쉼이 없게 된다면, 인이라는 것이 반드시 마음속에 채워져 스스로도 그만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지성스럽게 부탁한 것을 보고 끝내 한 마디 써주지 않을 수 없어 그 본말을 갖추어 논하여 써주니, 부디 아침저녁으로 벽 사이에서 보고 실천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인(인)을 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건도(건도) 임진년 월 일,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존현록후        

고정서원 상량문[고정서원상량문] 풍몽득(풍몽득)

삼가 생각건대, 궐리(궐리)에서 사문(사문)의 도통(도통)의 실마리를 연 것이 2천 년이고, 고정(고정)이 정학(정학)의 연원을 접한 지 꼭 60년이 되었는데, 다시 새로 단장하여 선비들에게 은택을 입히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태사(태사) 휘국문공(휘국문공) 회암(회암)선생은 체용(체용)이 크게 온전하고 명성(명성) 두 가지 모두 높이 나아갔다. 도(도)는 요(요)ㆍ순(순)ㆍ우(우) 세 성인의 도에 접하고 마음은 주렴계(주렴계)ㆍ정자(정자)ㆍ장횡거(장횡거)의 마음을 전하였다. 태극을 맨 앞으로 하여 시작하고 태극을 맨 뒤로 하여 마쳤으며, 모두 우리 몸에 구비되어 백세 아래에서 말미암아 백세 위로 거슬러 올라가도 이 말이 바뀌지 않도다. 실로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르고, 이른바 하도(하도)ㆍ낙서(낙서)가 여기에 있도다.
오직 창주(창주) 아름다운 곳에 만년에 터를 잡고 살아, 시내 머리에는 물이 그치지 않고 솟아나오고 문밖에는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도다. 목탁(목탁)이 적막하니 어찌 강한(강한)과 추양(추양)의 생각이 없겠는가. 죽림(죽림)이 쓸쓸하니 누가 바람 부는 밤중에 등잔불 밝히고 독서한 것을 계승하겠는가. 지금에 삼가 식재운판보장대감(식재운판보장대감)을 만나니 서촉(서촉)의 촉망을 받고 동가(동가)의 학파로다.
당 아래를 배회하니 금석사죽(금석사죽) 방불하고 눈앞에 우뚝 선 집 최각동량(최각동량) 수습하였도다. 영롱한 여덟 창을 열어젖히니 견고한 몇 길의 건물 우뚝하도다. 어찌 숭려수악(숭려수악)의 명승지를 짝할 뿐이랴. 장차 염락관하(렴락관하)에서 전한 학문을 더욱 넓히리라. 강론하는 것을 보는 듯하고 기침소리 들리는 듯하도다. 맑고 깊은 산수 속에서 천고의 기풍과 법도를 생각하고, 은하수 찬란하여 구중궁궐 임금의 교서가 더욱 빛났도다.
문득 아름다운 축송을 지어 함께 긴 들보를 들도다.

들보 동쪽에 던지세 / 포량동
높은 산처럼 우리 문공 우러르네 / 고산앙지아문공
창주(창주)의 한없는 뜻을 알아야 하니 / 회득창주무한의
모든 시냇물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도다 / 백천학해수조종

들보 서쪽에 던지세 / 포량서
고가의 교목(교목)이 구름과 같이 높도다 / 고가교목여운제
야인의 복장으로 담소하는 자리 / 야복순순소담지
그 중에 깨우친 사람 몇이나 될까 / 개중환성기인미

들보 남쪽에 던지세 / 포량남
한 줄기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 일말청연사벽람
묻노니, 개산(개산) 공안조(공안조)여 / 차문개산공안조
위재(위재)가 전에 여기에서 말을 머물렀는지 / 위재증향차정참

들보 북쪽에 던지세 / 포량북
모여든 별들 정자(정자)안으로 들어왔네 / 차거취성정罙입
은하수 떨어지지 않아 다시 오르니 / 명하미락▨복앙
사람 마음속의 태극(태극)을 알았도다 / 인취인심중태극

들보 위에 던지세 / 포량상
사성(사성) 크게 일어나 사문(사문)이 창명되도다 / 사성대작사문창
마루 가득한 선비들 패옥(패옥)소리 / 만당금패옥장장
마치 고정(고정)의 처음 기상(기상)과 같다네 / 완사고정초기상

들보 아래에 던지세 / 포량하
현자들은 마땅히 큰 것을 알아야 하네 / 제현당식기대자
다만 성경(성경)으로 입문(입문)을 삼을지니 / 단장성경위입문
이 역시 성인의 무리라네 / 시역성인지도야

삼가 바라건대, 상량(상량)한 뒤에 거문고 소리 끊이지 않고 오직 정밀하고 순일한 것을 전하게 하소서. 천년 전의 마음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사서(사서)의 은택(은택) 속에서 푹 젖게 하소서. 군자의 도는 연비어약(연비어약)이니 각기 진실한 본성을 다 이루게 되고 선생의 풍도는 산고수장(산고수장)이니 그 가르침 끝이 없으리라.

구선생사 상량문[구선생사상량문] 설우량(설우량)

도(도)가 천지 사이에 행해짐에 실로 소장(소장)이 있어, 성현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누가 주장을 하리오. 우리 후세 사람들 깨우침에 모름지기 선각자가 있어야 하는 법. 염계(렴계)선생이 태극도(태극도)를 세우니 학문은 성인의 공부와 계합(계합)하였도다. 사단(사단)이 모든 선(선)의 근원임을 밝히고 삼강오상(삼강오상)의 가르침을 부지하였도다. 다행히 명도(명도)선생에게 친히 전하고 다시 이천(이천)선생에게 주었도다. 더욱이 소강절(소강절)과 같은 시대였고, 장횡거(장횡거)와 같이 따르는 무리가 있었도다. 문정공(문정공) 속수(속수)에서 탄생하고 남헌(남헌)선생 한천(한천)에서 번갈아 일어났도다. 여태사(여태사)가 어찌 작은 인물이겠는가. 주회암(주회암)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구비되었도다.
천년을 지내오면서 오직 이 아홉 분이 있었도다. 한(한)ㆍ당(당) 훈고학(훈고학)의 무리도 배향되니 미미해진 공맹(공맹)의 학통 접한 분들 마땅히 두루 제향하여야 하리. 이에 주(주) 태학(태학)에서 존엄(존엄)하게 초상(초상)을 받들었도다.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을 기다리고 어진 이를 보고 닮기를 바라는 마음을 열어주도다. 비록 진나라를 피하여 떠나와 터전을 받아 살기를 원하였으나 이소국(이소국)이 변화되어 굳이 배운 바를 버리고 따랐도다. 함께 도와 긴 들보를 들어 올리고 삼가 아름다운 축문을 올리도다.

들보 동쪽에 던지세 / 포량동
사람들 광풍제월(광풍제월) 속에 있네 / 인재광풍제월중
와서 배우는 이에게 선원(선원)임을 알려주니 / 위보선원래학자
정(정)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는 자 호걸일세 / 정사력천시호웅

들보 서쪽에 던지세 / 포량서
선철(선철)들 종유(종유)한 땅 호(호)와 미(미) / 선철종유기호미
낙지(낙지)에서 선언(선언) 깨달음 있어 / 락지▨언량유오
다시 사석[고비]을 거두고 역경을 읽었네 / 경능독이철고비

들보 남쪽에 던지세 / 포량남
봄은 항강(항강) 일대(일대)를 쪽빛으로 물들였네 / 춘염항강일대람
때는 흘러가는 물처럼 다시 오지 않으니 / 시불재래여서수
빨리 이락(이락)의 학문 탐구하리라 / 극장이락학궁탐

들보 북쪽에 던지세 / 포량북
사문(사문) 다시 진흥하여 양묵(양묵)이 없네 / 사문부진무양묵
지금의 학설 집성한 것은 고정(고정)의 공이니 / 집성금설고정공
필경 이것은 노(노)나라에서 전해온 것이리라 / 필경시전래노국

들보 위에 던지세 / 포량상
하늘 가운데 달이 한가로이 오가네 / 천근월굴한래왕
묘한 이치(이치)를 깨달아 시(시)를 찾고자 / 욕장묘리향시심
고요히 공부에 집착하여 격양가(격양가)를 읽네 / 정착공부독격양

들보 아래에 던지세 / 포량하
조정이 지척에서 단아한 선비 구하네 / 조가지척구유아
요순(요순) 같은 임금 되게 하는 법도를 보니 / 치군요순간성규
통감(통감) 한 편 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네 / 통감일편무우자

삼가 원하건대, 상량(상량)한 뒤에 훌륭한 선비가 배출되고 이학(이학)이 크게 밝아져서 성명(성명)과 도덕(도덕)이 더욱 널리 전해지고 예악(예악)과 문명(문명)의 정치를 돕게 하소서. 그리하여 성대한 의전(의전)을 드높여 교화가 먼 곳까지 미치게 하소서.

동문서원 상량문[동문서원상량문] 퇴재(퇴재)

삼가 생각건대, 천지가 열리고 인문이 흥함에 하도(하도)와 낙서(낙서)가 나오게 되었고, 공맹(공맹)이 탄생하여 도(도)가 서니 추로(추노)가 예의(예의)의 나라가 되었도다. 누가 알았으랴. 천년 이래에 유독 한 고을에 그토록 성대한 것을. 우리 고정(고정)의 고향. 실로 높은 교화(교화)의 서림(서림)이네. 연원이 이어지고 문헌이 증빙(증빙)되도다. 이제(이제)ㆍ삼왕(삼왕) 이래의 도가 여기에 이르러 크게 밝아지고 사서(사서)ㆍ육경(육경) 이하의 글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도다.
모든 배와 수레가 닿는 곳마다 이목을 갖춘 이는 모두 알도다. 천자(천자)에서부터 서인(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인들 그 학문을 높이지 않으리오. 햇빛이 비치는 바다 끝까지 그 책이 없는 곳이 없다네.
아, 찬란하고 성대하니, 다 여기에 있도다. 실로 한결같이 정(정)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달하여 끝이 없도다. 더욱이 책은 글이 같고 행실은 윤서(윤서)가 같아 오늘날 밝고 아름다운 운세를 맞이하였고, 고을에 학교가 있으니 맑은 조정(조정)에서 인(인)을 배양하는 곳이로다. 계획하고 영위하여 완전하고도 아름답게 되었도다. 여기에 제물을 차려놓고 선비들이 모이는 것을 보게 되고 여기에서 금석사죽(금석사죽)의 음악이 들리게 되었도다. 하늘은 밝은 세상의 문명을 열고 땅은 천년의 신비함을 부지하도다. 삼가 산주(산주)를 만나니 부(부)에서 밝은 분을 추천하였고 중주(중주)의 문헌가(문헌가) 출신이고 정학(정학)의 원류(원류)로다. 지방관 출사하니 인간세상의 풍월(풍월) 해맑고. 서부(서부)에 복거(복거)하니 하늘 위의 규벽(규벽) 찬란하도다.
착한 무리는 동량이고, 사문(사문)은 주춧돌이라. 업후(업후)의 큰 뜻이여, 만 권의 서적을 구비하였도다. 두로(두노)의 고심이여, 천 칸의 넓은 집을 찾았도다. 뜻이 서로 호응하여 날아갈 듯한 집을 바라보게 되니, 잡초가 우거졌던 자리에서 어느새 채조(채조)ㆍ채빈(채빈)의 음악을 듣게 되었도다. 후세의 예악(예악)을 기다리니 어찌 분수(분수)의 유생들과 같을 뿐이리오. 천하의 스승과 선비들을 모으니 응당 연산(연산)의 의숙(의숙)에 그치지 않으리라. 이에 아름다운 축문을 올려 함께 긴 들보를 들도다.

들보 동쪽에 던지세 / 포량동
서적(서적)이 고려(고려)와 일본(일본)까지 통하네 / 서적고려일본통
한 방울 용호산(용호산) 아래의 물이 / 일적용호산하수
천만 줄기가 모두 바다로 흘러가네 / 천원만파시조종

들보 서쪽에 던지세 / 포량서
사문의 기둥 하늘 높이 우뚝하네 / 사문일주여천제
사서(사서)ㆍ육경(육경)을 사람마다 외우니 / 사서육적인인송
공자의 도(도) 어찌 쓰러질 날이 있겠는가 / 공도하증간발제

들보 남쪽에 던지세 / 포량남
밝게 성인(성인)의 문화 뻗어가네 / 욱욱문명성화담
태평성대 재상이 될 인재 배양하니 / 배취창시공보기
문앞 산색이 삼태성(삼태성)에 비추네 / 문전봉색영태삼

들보 북쪽에 던지세 / 포량북
만리(만리) 밖 수레와 책 상국(상국)으로 통하네 / 만리차서통상국
싣고서 남도와 결하(결하)로 가니 / 재장남도우결하
구주(구주) 황극(황극)이 펼쳐짐을 보겠네 / 회견구주서황극

들보 위에 던지세 / 포량상
규벽(규벽) 빛 속에 만상(만상)을 머금었네 / 규벽광중함만상
태평시대에는 글 읽은 선비 기다리니 / 태평직대독서인
백옥루 높은 담장 재상 올려다보네 / 백옥원고첨상상

들보 아래에 던지세 / 포량하
팔방에 나라의 교화 펼쳐지네 / 팔표황풍도야화
오방(오방)의 다른 풍속 하루아침에 같아지니 / 오방수속일조동
예악(예악)과 인물이 중국에 성대하도다 / 예악의관애화하

삼가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훌륭한 분들이 나와 온 세상에 문치(문치)가 이루어져 인륜(인륜)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왕자(왕자)의 스승을 삼고 일을 다스리는 학규(학규)로 천하의 법식(법식)을 삼게 하소서. 인심을 바로 세우고 사설(사설)을 잠재워 삼대(삼대)의 인재를 두텁게 배양하고 옛날 성인(성인)을 계승하고 태평성대를 열어 육경(육경)의 정치 법도가 다시 나타나게 하여, 그 공이 임금의 교화를 보필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서간서원 설신량문[서간서원설신량문] 설파(설파)

삼가 생각건대, 선성(선성)의 학문을 익혀 도장의 동량(동량)이 되고, 천하의 영재(영재)를 길러 명당(명당)의 초석이 되어야 하리라. 오직 전복과 위험을 부지할 날에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갈 인재를 알았도다. 평시 학교의 규모와 일시 묘당(묘당)의 역량으로, 새로운 기상을 진작하여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도다. 고을의 삼유(삼유)를 우러르니 백세에 그 기풍과 의표 늠름하도다.
부옹(부옹)의 ‘청영미(청영미)’ 구절을 읊으니 하늘이 절개를 온전히 준 것이고, 구양공(구양공)이 〈여산고(여산고)〉 시를 읽으니 땅이 사람 때문에 더욱 중해진 것이로다. 혹은 대면하여 개보(개보)를 탄핵하였고, 혹은 두루마기를 걷고 채경(채경)을 떠났도다. 한 고을의 종정(종정)이고 사해의 관면(관면)이었도다. 북산(북산)이라는 분이 서간서당(서간서당)을 세웠으니, 후학들이 좋은 스승을 얻어 옛날 훌륭한 분들의 학문을 접할 수 있게 하였도다. 이곳에서 일어나 더욱 사문(사문)을 진흥시켰도다. 도학은 몸을 세우는 중요한 단서이니 선비들이 모두 근본을 알았고, 과거공부는 출세를 위한 여사(여사)로서 해마다 인재가 부족하지 않았도다.
천부(천부)의 서각(서각)에 잇달아 오르고 태상(태상)의 과제(과제)를 연이어 빛내고, 현명한 준사(준사)가 제학(제학)의 명성을 빛내었도다.
전날 이미 채찍질하여 앞을 다투고 뒤에 땔나무를 쌓아 그 위에서 거처하였도다. 하물며 땅이 신령한 기운을 나타내고 하늘이 상서로움을 발함에랴.
봉소(봉소)의 물결 맑으니, 봄바람이 묵지(묵지)의 물을 흔들고, 안탑(안탑)이 구름 속에 서 있고 맑은 하늘에 문필봉 우뚝하도다. 중간에 가로질러 물이 흐르고 남북으로 온 산이 늘어 서 있도다. 기류(기류)가 새로이 감응하고 불러 호걸들이 학문하고 노래하는 데에 모두 모였도다. 시를 외우고 글을 읽는 소리 서로 접하고 덕(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음에 날뛰는 습관이 싹트지 않았도다. 학문(학문)ㆍ사변(사변)의 공부에 힘써 행실이 수제(수제)ㆍ치평(치평)의 일에 드러나니, 진실로 함양(함양)하여 반드시 발현되리라
더욱이 이곳에서 닦으니 반궁의 노후(노후)이고, 대대로 가르침 있으니 호주(호주)의 안정(안정)이로다. 유림(유림)의 기풍이 움직이고 학사가 날로 새로워지리라. 치하하는 이들 환성을 더하여 이에 우뚝한 집 들보를 바꾸노라. 목수에게 큰 나무를 구하게 하여 다행히 수십 아름의 나무를 얻었고 관하에 세우고 제생(제생)을 부르니 천만 칸 구름과 잇닿은 기개가 있도다.
전에 힘이 없어 유약하였던 것과는 다르고 이제는 짐을 질 사람이 있도다. 기둥과 서까래는 무너질 형세가 없고 송백(송백)은 후조(후조)의 절조(절조)가 우뚝하도다. 이와 같이 하여 인재를 육성하면 그 징험(징험) 응당 나오리라.
때가 새해를 맞이하여 선비들이 봄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도다. 전에는 비루하였지만 장하니, 이는 태평하고 형통하고 강건한 것과 부합되고,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니 변화되어 아름다워질 형상이로다. 반드시 인(인)을 감당한 중한 인물과 세상을 부지할 훌륭한 인재가 있어, 용이 머리를 들어 구천(구천)에 오르니 단비 쏟아지고 큰 거북 발을 잘라 사방 표준을 세워 천지를 지탱하도다. 고을 선생의 유풍(유풍)을 흠모하여 대장부의 기절(기절)을 더욱 권면(권면)하리니, 응답이 헛되지 않아 그러한 사람 보게 되리라.
장인이 일을 마쳤다기에 아랑위(아랑위) 송축을 하노라.

들보 동쪽에 던지세 / 포량동
동쪽으로 서울로 가는 길 열려 있네 / 동상천경로희통
전날 비선교(비선교)가 이미 세웠졌고 / 작일비선교이건
은하 연이어 채근(채근) 학궁 자리잡았네 / 연하식속채근궁

들보 서쪽에 던지세 / 포량서
서간서원 높은 봉우리와 가지런하네 / 서간고봉요여제
이록(이록)은 털끝처럼 가볍고 명절은 중하니 / 이록호경명절중
봉황이 어찌 벌레를 잡아먹는 닭이 되겠는가 / 봉황령작포충계

들보 남쪽에 던지세 / 포량남
남쪽 산하(산하)는 쪽빛처럼 푸르네 / 남유하산취발람
구름 낀 탑 옆으로 문필봉 우뚝하니 / 운제탑변문필용
과거에 급제하여 삼공 자리에 오르리라 / 극위풍폐점괴삼

들보 북쪽에 던지세 / 포량북
북두성 별자리 손으로 딸 수 있을 듯하네 / 북두괴전감수적
상서로운 사람은 조정을 빛내니 / 서양인요서조정
태사(태사)가 오색구름 미리 점쳤네 / 태사예점운오색

들보 위에 던지세 / 포량상
문장(문장)의 광채 만 길 위로 통하네 / 상철문장광만장
그중에 어떤 이 동량(동량)의 재목 / 개중인유동량재
서당(서당)에 참으로 숨은 재상 있다네 / 수신서당진은상

들보 아래에 던지세 / 포량하
아래로 생령(생령)들 위하고 종사(종사) 장하도다 / 하위생령장종사
도(도)는 작은 쓰임이 아니니 어찌 자신의 몸만 도모하랴 / 도비소용기모신
널리 만방(만방)과 더불어 큰 집이 되리라 / 보여만방위광하

삼가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학문은 안연(안연)을 본받고 뜻은 이윤(이윤)을 지향하고 가사는 후직(후직)의 뜻을 따르고 사람들은 고요(고도)의 법을 지키게 하소서. 행실을 다스리는 과목을 통하여 나라 진사과(진사과)의 으뜸이 되고 하늘이 내린 인의(인의)의 벼슬을 닦아 공경대부(공경대부)의 벼슬을 얻게 하소서. 선각자가 후인을 깨우치고 자신이 먼저 서서 남을 세워주고 훌륭한 선비와 좋은 벗들을 흥기시켜 모두 체(체)를 말미암아 용(용)에 통달하는 학문을 하게 하소서. 밝고 어진 임금을 얻어 보필하여 바른 임금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공을 이루어 종신토록 큰 절개를 가지고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게 하소서.

충절사당 중창 상량문[중창충절사당상량문] 주침(주침)

삼가 생각건대, 일월(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투니 충절(충절)이 옛날 현인들보다 추앙받았고, 강산(강산)이 빛을 윤택하게 하니 사당은 밝은 시대에 다시 지어졌도다. 우리의 도가 바야흐로 형통(형통)하고 인심(인심)이 실로 뜻을 같이 하였도다.
삼가 생각건대, 송나라 태사(태사) 초국공(초국공) 구양문충공(구양문충공)과 여러분 충절 높은 선현은 천지의 정기(정기)를 타고난 고금(고금)의 위인(위인)이로다.
그 학문은 한자(한자)ㆍ맹자(맹자)를 미루어서 성인에까지 나아갔고 그 위업(위업)은 주공(주공)ㆍ소공(소공)을 바라면서 이윤(이윤)에까지 이르렀도다. 어떤 이는 재상이 되고 어떤 이는 지방관이 되었으니 문무(문무)를 겸비하였고, 사관(사관)이 되고 간관(간관)이 되어 평탄하거나 험난하거나 힘을 다하였도다.
부화(부화)함을 몰아내고 고상함을 높이니 문장(문장)은 역대의 쇠퇴함에서 진흥하였고, 몸을 버려 인(인)을 이루니 용맹이 삼군(삼군)의 기개도 빼앗았도다. 신하의 절조는 유독 건업(건업)에서 완전하였고 유풍(유풍)은 비로소 여릉(여릉)에서 떨쳤도다. 상소문을 올려 여러 번 권간(권간)에게 배척되었고 이끌어 구원하여 반드시 사류(사류)로 돌아갔도다.
죽음에 임해서도 오히려 분개하여 한탁주(한탁주)가 권세를 멋대로 한 것을 알았고 유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미원(사미원)의 간계(간계)를 적발하였도다. 실로 사직(사직)을 가지고 기뻐하고 요순(요순)이 아니면 말하지 않을 줄을 알았도다.
통곡하여 심주(심주)를 구함은 강개(강개)와 격렬(격렬) 다하였고, 조용히 연시(연시)에서 죽은 것은 위대함이 빛나도다.
공덕(공덕)은 백성에게 있고 문장은 세상에 전하니, 삼강오상(삼강오상)이 그 덕택으로 실추하지 않아 사방(사방) 만국(만국)이 함께 흠모하도다. 경건하게 영령을 모셨으니 옛날에 고향 고을에 합사(합사)하였고, 터를 찾아보니 황폐한 언덕에서 퇴락(퇴락)하였도다. 이에 성대하게 계획하여 태평시대의 기상을 다시 보게 하였도다.
이에 삼가 호서도첨헌(호서도첨헌) 고상공(고상공) 합하(합하)를 만났으니, 뜻은 충직하고 너그럽기를 지향하고 학문은 근원이 있었다. 맑은 행실을 선양하고 혼탁함을 억지하여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폐지된 것을 다시 시행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도다.
삼가 생각건대, 본군 태수(태수)와 여러 공상(공상)은 아름답고 훌륭한 인재들로서, 임금에게 충간하여 옛날에 산악(산악)도 움직였고 수레 타고 지방관으로 나가 지금에 가련한 백성들 어루만졌도다.
하물며 별가(별가)는 방통(방통)같이 훌륭한 인물을 얻고 고을 원은 손하(손하)처럼 아름답도다. 함께 노력하여 공황(공황)의 정치를 돕고, 모든 관료들 직무를 다하여 탁로(탁노)의 능력을 발휘하리라.
모든 정사가 모두 조화로운 때를 당하였고 온갖 폐단이 다 제거되는 날을 만났도다. 관찰사가 앞에서 창도하고 목민관(목민관)이 뒤쫓아 완성하였도다. 의리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니 고가의 호걸(호걸)이 운집하고, 재능을 다 쏟고 좋은 기구를 사용하니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다 모였도다. 일을 계획하여 시행하여 완전하고 아름답게 이루었도다. 마치 그 위에 계신 듯하니 문득 우뚝한 사당 우러러보고 좋은 사람들 모여드니 문풍(문풍)이 흥기함을 보게 되도다.
청컨대 육위(육위)의 축사를 베풀어 큰 들보를 올리는 것을 돕도다.

들보 동쪽에 던지세 / 포량동
여러 산봉우리 옥부용(옥부용)처럼 솟았네 / 천산취용옥부용
동해에 해뜨니 드넓은 바다 펼쳐져 / 일상부상창해활
모든 강물 바다로 흘러들어가네 / 은강문수진조종

들보 서쪽에 던지세 / 포량서
온 집의 누각이 구름과 가지런하네 / 만가루합여운제
긴 언덕 밖에 오동나무 무성하여 / 오동봉봉장강외
상서로운 세상에 봉황이 깃들겠네 / 서세중간채봉서

들보 남쪽에 던지세 / 포량남
밝은 강 한줄기가 쪽빛처럼 푸르도다 / 장강일도사뇌람
큰 언덕 아래 옛적 나루엔 배들이 서있고 / 고도주횡대고구
넓은 동산 푸른 들 강남(강남)에 펼쳐있네 / 평원록야재강남

들보 북쪽에 던지세 / 포량북
학궁 우뚝하게 잣나무와 함께 치솟았네 / 횡궁취용삼천백
고을 대부 유풍 수백 년 전해와서 / 향곤유풍수백년
선비들 모여서 그 모범 우러르네 / 금패선선앙표격

들보 위에 던지세 / 포량상
대궐의 오색구름 드넓게 펼쳐졌네 / 창합오운광탕탕
큰 인물 기리는 조서 내려와 / 포숭중망제서래
한밤에 정기(정기) 두우성(두우성) 위에 빛나네 / 정기야충우두상

들보 아래에 던지세 / 포량하
등불 켜고 글 읽는 소리 맑은 밤에 들리네 / 등화서성철청야
무궁히 봄가을로 제사를 받드니 / 춘추제사영무궁
정사(정사)와 문장(문장)으로 명성 드높도다. / 정사문장족성가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해와 달 빛나고 비와 햇살 순조로워 공고한 나라가 우주와 더불어 길이 새롭고 사당(사당) 근엄하게 서 있어 해마다 함께 제사를 올리게 하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산하 같이 후인들에게 듬뿍 향기를 내리고 사직(사직)에 공을 베풀고 백성들에게 덕을 입혀 길이 후세에 명성과 영광이 이어져, 강산은 우뚝한 자태를 자랑하고 종고(종고)소리 맑은 시대에 울려 퍼지게 하소서.

 권3 학전록        

건영부 숭안현 학전 기문[건영부숭안현학전기] 주희(주희)

숭안현(숭안현)에 옛날 학교가 있었으나 학전(학전)은 없었다. 교육에 뜻을 가진 훌륭한 대부를 만나면 다른 비용의 여분을 취하여 선비를 기르는 비용으로 사용하였고, 간혹 사고가 있어 계속할 수 없으면 유생들이 식사를 제공받을 데가 없어서 왕왕 흩어져 떠났다. 이 때문에 전당은 기울고 재사가 황폐해져서 늘 십 수 년에 한 번 정도 글 읽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두 해가 못 되어 문득 다시 그만두고 떠나갔다.
순희(순희) 7년에 지금의 현지사(현지사) 조후(조후)가 처음 부임하여 이 일에 뜻을 두었다. 무너진 건물을 수리하여 새롭게 하고 나서 또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장기적인 계획을 도모하였으나 경비를 염출할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경내(경내) 사찰(사찰)의 대장(대장)을 보니 끊어져 기록하지 않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었으니 바로 중산(중산)ㆍ백운(백운)ㆍ봉림(봉림)ㆍ성력(성력)ㆍ기력(기력)이고 경작하지 않은 토지 약간이 있었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대처할 방도를 알았다.”
하고, 모두 취하여 향교에 귀속시키니 대개 한 해에 들어오는 세금이 벼 220섬이었다. 이에 공부하는 선비들이 한 해 내내 넉넉하게 공부하면서 양식이 부족한 걱정이 없게 되었다. 이윽고 향교 유생 10여 명이 서로 내가 거처하는 산속으로 와서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훗날 군자들이 시작한 사실을 알지 못하여 폐지되고 허물어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삼대(삼대)의 융성했던 때에 한 고을에서 천자ㆍ제후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어 천자의 태자로부터 사(사)와 서인(서인)의 자제(자제)에 이르기까지 들어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따라서 학궁(학궁)에서 숙식하는 선비들이 지금의 수십 배였을 터이지만 예전(예전)을 상고해 보아도 그 비용이 나온 곳에 대하여는 언급된 곳이 없었다. 이는 당시의 선비 가정에서 제각기 토지를 받았고 입학하는 데 일정한 때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간 양식으로 먹고 관청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한)나라 원제(원제)ㆍ성제(성제) 연간에 이르러 공자는 포의(포의)의 선비로서 제자 3천 명을 길렀다고 하면서 학궁의 생도들을 늘려 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 뒤로 드디어 경비가 부족하여 공급할 수가 없게 되면서 학교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3천 명 제자들이 공자의 집에 모여서 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를 양육하는 비용이 천하의 힘으로 받들어도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어찌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주(주)나라가 쇠하면서 토지(토지)를 정전(정전) 제도로 나누어주지 않아 사람들이 일정한 생산이 없어 선비들이 더욱 빈곤에 빠지게 되었고 도리어 농(농)ㆍ공(공)ㆍ상(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위에 있는 사람이 모아서 가르치려한들 저들이 또한 어떻게 1년 내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배울 수가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상비 외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는 형세 상 부득이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금 불가(불가)의 말은 군신간의 예법을 어지럽히고 부자간의 친함을 단절시키며 음란하고 저속한 속임수로 일세의 사람들을 유인하여 금수의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실로 선왕(선왕)의 법에서 심리할 것도 없이 처벌할 사안이다. 그런데 도리어 제멋대로 온 나라 안에 만연하여 거창한 집이 즐비하고 비옥한 토지가 들판에 연이어져 있어 편안하게 배불리 먹고 지내는데도 금지하는 일이 전혀 없다. 이는 그들을 다 몰아내고 점거한 것을 빼앗아 향교에 귀속시켜 충효를 배우는 우리 선비들이 밖에서 다른 것을 꾀할 것 없이 더욱 학문에 매진할 수 있게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설(사설)을 이기기에 부족하다.
그런데 하물며 황폐하고 다 끊어진 상황에 우연히 지금에 와서 그것을 북돋우고 세워 영구히 보존하려고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조후(조후)가 그것을 취한 것은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그 본말과 함께 그러한 의도가 나온 연유를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들에게 보이고, 또 향교 제생들에게는 내가 말한 바 충효에 더욱 힘쓰고 직무를 담당한 이들은 장부 밖에서 출납하는 것을 신중히 하여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게 하도록 경계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면 거의 조후(조후)의 가르침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이다.
조후(조후)의 이름은 모(모)이다. 재능이 매우 높아 송사(송사)를 심리하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모두 넉넉하게 잘 처리하고 여력을 가지고 이 일을 하였다. 어사가 바야흐로 그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11년 봄 정월(정월) 경술일에 구위(구위) 주희(주희)가 쓰다.

형주 석고서원 기문[형주석고서원기] 주희(주희)

형주(형주)의 석고산(석고산)은 증상(증상)이 모이는 곳에 있어 강물이 휘감아 돌아 고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서원이 있었으니 당나라 원화(원화) 연간에 이곳 사람 이관(이관)이 지은 것이었다. 국초(국초)에 사액(사액)되고 그 후 다시 약간 동쪽으로 옮겨 고을 향교로 삼았으므로 드디어 서원 자취가 없어져버렸고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순희(순희) 12년 부사(부사) 동양(동양)의 시덕(시덕) 반부(반부)가 비로소 옛터에다 건물 몇 채를 세우고 예전의 편액(편액)을 내걸고 장차 주위 사방에서 학문에 뜻이 있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들을 맞이하여 거처하며 공부하게 하려고 했다가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고, 지금의 사자(사자) 성도(성도)의 약수(약수) 송자연(송자연)이 그 전 사업을 인하여 더욱 넓혀 별도로 겹집을 지어서 선성(선성)ㆍ선사(선사)의 유상(유상)을 모시고 또 국자감(국자감)과 본도(본도) 여러 고을에서 간행한 책 약간 종 약간 권을 비치(비치)하고, 군현(군현)에서 뛰어난 선비를 가려 보내게 하여 채워 넣었다. 이는 대개 연수(연수) 임율(임율)과 여러 사자로서 소후(소후)ㆍ관감(관감)과 형수(형수) 설백선(설백선) 등이 금전을 바치고 공전(공전)을 떼어 도와서 해를 넘겨 낙성(낙성)하였다. 이에 송후(송후)가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또 그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침이 되는 글을 지어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옛날에는 학교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선비들이 배울 곳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왕왕 서로 더불어 명승지를 택하여 정사(정사)를 세워 여러 사람이 거처하며 강습하는 장소로 삼았고 위정자들도 더러 그 일에 대하여 표창하였다. 이 산은 바로 악록(악록)이나 백록동(백록동)과 같은 곳이다.
본조(본조) 경력(경력)ㆍ희녕(희녕) 연간에 이르러 학교가 천하에 두루 설치되어 전날 선비들이 거처(거처)했던 집들은 소용이 없어 옛 자취가 황폐해지고 말았으니 그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옛날을 좋아하고 옛날 전통을 회복하려는 훌륭한 사람이 없다면 누가 잘 보존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군현의 학궁(학궁)에 박사(박사)와 제자(제자)를 두고 있는데 모두 평소 쌓은 덕행과 재능을 따져보지 않아 그들이 공부하는 것이 모두 세속의 책이고 과거 준비일 뿐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이)를 보고 의(의)를 보지 못하도록 하니 위기(위기)의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대개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 이 때문에 항상 조용한 곳을 찾아 배운 바를 함께 강습(강습)하고 싶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두 공(공)이 이 일에 개연히 뜻을 두고 번거로움도 꺼리지 않았던 까닭이며, 단지 옛날 유적이 황폐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여 한 것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 일의 본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두 분이 뜻을 가졌던 이유를 알고 오늘날 학교에서 과거(과거)의 뜻으로 어지럽히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다. 또 관직에 있는 자들을 넌지시 깨우쳐서 오늘날 학교에서 과거 교육에 치우친 폐해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인데, 이를 적당히 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만약 제생들이 배우고서 지금 사람들이 말한 것과 같지 않은 것은 옛날 나의 친구 장경부(장경부)가 지은 악록(악록)의 기문에 상세히 나와 있다.
도리어 하학(하학) 공부를 궁구(궁구)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에 말을 외우는 자가 종사할 바의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 실질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에 어찌 다른 것에서 구하겠는가. 역시 아직 발현(발현)되기 전에 그 온전함을 기르고 장차 발하려는 즈음에 그 기미를 살려서 선하면 넓혀서 채우고 악하면 이겨 제거하는 것이 이와 같을 따름이라고 하겠다. 또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40년 정미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안(신안) 주희(주희)는 쓰다.

옥산유씨 의학 기문[옥산유씨의학기] 주희(주희)

처음 내가 남강(남강)에 부임하였을 때 이웃 고을 덕안(덕안)에 어떤 읍재(읍재)가 있었는데 정사(정사)가 한결같이 유술(유술)을 바탕으로 하였고 은혜와 사랑으로 많은 민심을 얻었다. 흉년이 들어 조세(조세)를 감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주가(주가)에서 들어주지 않으니, 백성들이 사나운 눈으로 돌아보면서 서로 놀라고 도망하여 떠나는 자가 있으니, 급히 사람을 시켜서 쫒아가서 멈추게 하고 말하기를,
“그대들을 위하여 주(주)에 힘껏 청하여 반드시 열에 일곱은 감해 주도록 하겠다. 차라리 인끈을 버리고 떠날지언정 차마 그대들이 타향의 귀신이 되게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백성들이 이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감읍(감읍)하여 다시 서로 부여잡고 무리 속으로 돌아왔다. 이에 정상을 갖추어 주(주)와 부(부) 자사(자사)에게 아뢰어 마침내 약속대로 얻어내고야 말았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 고을과 성명(성명)을 물으니 바로 옥산(옥산) 유후(유후)라고 하였다.
남강 속읍(속읍)으로서 덕안(덕안) 너머에 있는 어떤 지역에 현(현)의 이속(이속)을 보내 순행하게 하면서 반드시 경계하여 유후(유후)를 알현하고 그가 황정(황정)에서 시행한 바를 보고 본받게 하였다. 이에 유후의 혜택이 그 고을 안에서 행해지는 데에 그쳤을 뿐 아니라 남강(남강) 고을까지 파급되어 백성들을 모두 먹여주어서 유리걸식하다가 길에서 굶어 죽은 자가 없었다. 내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후(유후)의 관사(관사)를 찾아가 만나보고 배사(배사)하였는데 그 외모(외모)를 바라보고 그 말을 듣고서 그가 실로 군자임을 믿을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내가 어떤 일로 옥산(옥산)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유후(유후)는 발령을 기다리느라 집에 거처하고 있었고 다시 서로 만나 기쁨을 나누었다. 하루는 그가 개연히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은 본래 매우 빈곤하였고 벼슬길에 나선 것도 매우 늦어 친인척에게 혜택을 베풀 길이 없었습니다. 중간에 일찍이 전지(전지)를 떼어서 집을 짓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를 초빙하여 자제들을 가르쳤고 고을 사람들로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도 올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형제간에 기꺼이 재물을 가지고 와서 돕는 이도 있었으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계속되지 못할까 걱정하여 또 신안(신안)의 봉급 여분을 저축해 두었다가 그 비용에 보태었습니다. 또 산소를 보수하고 인척을 구제하는 비용도 그것에서 취하여 썼습니다. 이윽고 고을에 말하니 자사 오후(오후)가 기꺼이 듣고서 가르침을 주고 신표(신표)를 새겨 나의 자손에게 타일러서 나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하였습니다. 당신도 평소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하여 그 기문을 지어 이곳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에게 고하여 힘쓸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사대부들 가운데 더러 맨발로 삼공에 이른 이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뜻을 얻고 나면 대(대)를 높이 쌓고 못을 깊이 파고 종(종)을 울리고 기녀를 불러 춤을 추게 하여 날이 짧을까 걱정하며 그 자신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비록 곳간에 곡식과 돈이 남아돌아도 고을과 마을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 족할 뿐, 남에게 은혜를 끼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유후(유후)와 같은 사람은 자신이 비록 총애를 입었지만 벼슬은 6품에 오르지 못하였고 형편이 윤택하였지만 재산이 천금이 된 것도 아닌데, 그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으니 이것은 현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전날 덕안(덕안)의 정사(정사)가 근본 없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만한 것이다. 어찌 한갓 음성(음성)과 미소와 용모로 한 것일 뿐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일의 근본을 미루어 이와 같이 기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른바 학문이란 것이 어찌 책을 읽고 글을 지어 이록(이록)을 구하여 따뜻하고 배부르기를 추구한 것이겠는가. 역시 이치를 밝히고 몸을 수양하여 그것을 미루어 천하와 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곳에 거처하는 사람들은 시험삼아 육경과 공맹(공맹)의 말씀에서 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것을 행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거의 유후(유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유후의 이름은 윤적(윤적)이고 자는 덕화(덕화)니, 지금 조봉랑참의(조봉랑참의) 연해제치사군사(연해제치사군사)로 있다.
순희(순희) 15년 가을 9월 기미일에 신안(신안) 주희(주희) 쓰다.

【죽계지 학전록 발문[죽계지학전록발]】 주세붕(주세붕)

학전(학전)을 설치함은 예로부터 있었다. 실로 배우는 자의 가정이 넉넉하다면 밥을 싸가지고 와서 배우더라도 좋겠지만 만일 가난에 시달린다면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형세상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아, 밥을 싸 올 만한 자는 밥이 있어도 취학하지 않고, 취학할 만 한 자는 뜻은 있어도 밥이 없으니, 우리의 학문이 어찌 될 것인가. 이것이 실로 서원(서원)에 학전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이 고을을 맡아서 이미 문성공(문성공)의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셨다. 생각하건대, 사당을 세우고 나니 서원이 없을 수 없어서 서원을 세웠고, 또 서원이 있고 나니 전지가 없을 수 없어 전지(전지)와 보미(보미)를 세워 학도들의 학업에 이바지할 수 있는 약간의 재원을 마련하여, 해마다 약간의 벼와 쌀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을에 사는 진사 황빈(황빈)이 벼 75섬을 내어 보조하여, 봄과 가을의 제향을 지낸 나머지로 선비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주자(주자)의 〈건녕부 숭안현 학전 기문[건녕부숭안현학전기]〉 및 〈옥산유씨 의학 기문[옥산류씨의학기]〉을 읽고 감동한 바 있었다. 저 숭안(숭안)의 조씨(조씨)가 폐허가 된 다섯 군데의 사찰 밭을 취하여 학전으로 귀속시켰는데, 주자는 그 일거양득을 기뻐한 것이다. 그렇다면 숙수사(숙수사)의 황폐한 터에다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세운 것 또한 우매한 이들의 의혹을 일소할 수 있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유학을 중하게 여기는 성스러운 조정에 있어서도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날 학전을 세우는 것은 바로 옛날 조후(조후)의 마음과 같다. 옥산(옥산)의 유씨(류씨)는 자기의 전답을 떼어내어 건물을 세우고 스승을 초빙하여 그의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지방 사람으로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도 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황씨(황씨)가 오늘날 벼를 내어놓은 것이 바로 옛날 유씨가 행한 것과 같은 의거(의거)이다. 그러므로 두 사실을 아울러 기록하여 훗날의 군자에게 고하는 바이다.
아,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모두 오늘날 나의 마음을 생각하고, 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오늘날 황씨의 의로운 뜻을 생각한다면, 이 학전은 백세(백세)를 지나도록 호족들에게 빼앗길 우려 없이 오늘날과 같이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서원에 처한 자는 다짐하고 살피면서 충효의 본성을 다하여, 출납할 때에 한 홉에도 사심을 부리지 않은 뒤라야 주자(주자)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그 역시 힘써야 할 것이다.

【백운동서원 학전(학전)】

갑진년 월 일 백운동서원
대평원(대평원) 86. 논 15부(부) 6속(속). 벼 8말 파종.
신토원(신토원) 45. 논 17부 3속. 벼 5말 파종.
묘곡원(묘곡원) 51 내, 논 17부 9속. 벼 5말 파종.
○ 사창원(사창원) 19. 논 26부 7속.
추전(추전) 10부 3속 내, 번답 (반답) 8부 3속. 이상 두 곳 합하여 벼 13말 파종. 나머지 밭 2부 피맥1말 파종.
관전원(관전원) 5. 답 11부 7속. 벼 3말 파종.
하식송원(하식송원) 41. 답 37부 9속. 벼 13말 파종.
성소원(성소원) 264. 밭 2부. 사당 뒤에 사들인 것이다. 묵었다.
379. 밭 11부. 피맥 10말 파종.
○ 384. 밭 2부.
385. 밭 7부 3속.
388. 밭 8속.
389. 밭 5속.
38▨. ▨▨▨9속.
382. 밭 2부 3속.
380. 밭 7속. 이상은 묘원과 고직의 집 터.
381. 밭 17부 7속. 피맥 13말 파종.
산북원(산북원) - 1자 원문 빠짐 - 61. 논 16부. 벼 9말 파종.
신소법원(신소법원) 45. 속전(속전) 6부 9속. 피맥 5두 파종.
성소원(성소원) 130내. 논 12부 3속. 파종 벼 5두 파종.
265. 답 3부 4속 파종 벼 3말.
소야원(소야원) 74 내. 논 16부 5속. 벼 7말 파종.
85 내. 논 7부 4속. 벼 5말 파종.
신소법원(신소법원) 47. 논 2부 3속. 벼 2말 파종.
제말원(제말원) 3. 답번전(답번전) 11부 2속. 보리 7말 파종.
가정(가정) 갑진년 학전을 합한 기록. 밭 72부 4속, 논 1결(결) 94부 3속.

권4 장서록        

휘주 무원현 학교 장서각 기문[휘주무원현학장서각기] 주희(주희)

도가 천하에 있는 것은 사실 하늘이 명해준 성(성)에 근원하여 군신ㆍ부자ㆍ형제ㆍ부부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그 글은 성인의 손에서 나와서 《역경(역경)》ㆍ《서경(서경)》ㆍ《예기(예기)》ㆍ《악기(춘추)》ㆍ《논어(논어)》ㆍ《맹자(맹자)》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본말이 상호 보완하고 사람의 말이 서로 발명하여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대개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자연의 산물로서 큰 윤리와 법이 존재하여 실로 문자에 의하지 않고도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성인이 이 도리를 천하에 밝혀 만세에 전하려고 하였을 때 그 정미하고 복잡한 부분에 대하여는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복희씨(복희씨) 이래로 여러 성현이 이어 나왔고, 공자에 이른 뒤에 교육 방법의 표준이 찬란하게 갖추어졌다. 천하 후세 사람으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의리를 안 성인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이것을 말미암아 그 이치를 궁구한 뒤에 앎이 지극해지고 힘써 행해서 이룰 수 있었지, 실로 배부르게 먹고 편안히 앉아서 아무 것도 영위한 것이 없이 갑자기 알고 체득한 자는 없었다.
그래서 부열(부열)이 고종(고종)에게 고하기를,
“옛날 가르침을 배우면 곧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공자(공자)는 사람을 가르치면서,
“옛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그것을 구한다.”
하였다.
이를 보면 군자가 학문을 하여 도에 이르는 방도가 무엇인지를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한(진한) 이래로 선비가 책에서 구하는 것이 암기하고 표절하는 것을 잘 하는 것으로 여기고 궁리와 수신의 긴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미치지 못하였다. 또 지나치게 앞서간 자는 드디어 학문과 책을 버리고 서로 허탄한 곳을 치달리게 되었다. 대개 두 가지 폐단이 서로 다르지만, 옛사람의 뜻에 대하여는 모두 잃어버렸다. 아, 도가 밝아지지 않고 행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점 때문이 아니겠는가.
무원현(무원현) 학교 강당 위에 이층 방이 있고 현판을 ‘장서(장서)’라고 하였으나 소장된 책이 없었다. 보전(보전) 임복(임복)이 지현사(지현사)가 되어 비로소 소중히 간직하던 《대제석경(대제석경)》과 《금상신필석경(금상신필석경)》으로 채우고 또 더욱 널리 책을 사들여 모두 1천 4백여 권이 되었다. 그 위에 진열해 놓고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치고 외우고 익힐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옛날 이 고을 사람인데, 민(민)에 우거하다가 일이 있어 돌아와서 그 학관을 찾아보니 임후(임후)는 이미 떠나서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학자들은 여전히 그 책을 가리키며 감탄하였다. 오래 지나서 하루는 서로 이끌고 나의 집에 와서 그 사실을 기록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근래에 와서 고을 자제들로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많아졌지만, 배우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신은 선대에서 살던 고을을 잊지 않을 것이니, 이런 상황에 한 말씀으로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어진 대부의 사적을 기록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고 후세에 모범을 전해주려고 하는 일에는 고을의 선생과 군자가 있을 것이니 외람스럽게 제가 명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형과 자제의 말씀을 들어볼 때, 또 제가 차마 거절하지 못할 점이 있기에 감히 삼가 허락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삼가 들은 바를 가지고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이로써 배우기를 원하는 고을 사람에게 독서하고 도를 구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되니 마음을 다하여 몸을 선하게 하고 집안을 잘 다스려 고을에 미치게 하여 나아가 천하에 통달하여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하고, 또 임후의 덕이 무궁함을 믿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기문을 삼는다.
순희(순희) 3년 병신년(1176년) 6월 초하루 갑술일 아침, 고을 사람 주희(주희)가 쓰다.

건녕부 건양현 학교 장서 기문[건녕부건양현학장서기] 주희(주희)

옛날 성인이 육경(육경)을 만들어 후세를 가르쳤으니, 역경(역경)》으로 유명(유명)의 연유를 통하게 하였고,《서경(서경)》으로 정치의 사실을 기록하였고,《시경(시경)》으로 성정(성정)의 바름을 인도하였고,《춘추(춘추)》로 법의 엄정함을 보이고,《예기(예기)》로 행실을 바로잡고,《악기(악기)》로 마음을 평화롭게 하였다. 그 의리의 정미함과 고금의 득실에 대하여 모두 관통하고 발휘하여 그 궁극을 탐구하였으니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책을 총괄하여도 수십 권에 불과하니 간략하고 정미함이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한(한)나라 이래로 유학자들이 받들어 지키고 외우고 익혀 서로 전수하면서 제각각의 법이 있었으니, 그런 뒤에 비로소 주석과 해설을 한 책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라에서 해마다 정치 사실에 대하여 각각 사관(사관)을 두어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이에 서적이 전해진 것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세상의 현인군자가 경서를 공부하여 성인의 마음을 탐구하고 역사서를 고찰하여 시대 사실의 변화를 징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의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밖에서 접하여 마음을 움직이게 되면 그것을 글로 저술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었다. 이로써 책에 실리거나 상자에 소장된 것들이 비로소 더없이 많아졌다.
그러나 학자가 도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진실로 도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세 이후로 소위 과거공부라는 것이 그 뜻을 빼앗았는데, 선비들이 서로 학교와 서당에 모여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음이 없지만, 그 읽는 바를 물어보면 모두 전에 말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 성현의 말을 읽고서 마음으로 통하지 못하고 그 몸으로 행하지 못하면 한갓 책방이 되고 마는 것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읽는 책이 또한 성현의 말씀이 아닌 경우에 있어서랴.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건양(건양) 판본(판본) 서책들이 사방에 전해져 아무리 멀어도 없는 곳이 없는데, 고을에서 배우는 자들이 읽을 책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의 지현사(지현사)인 회계(회계)의 요기인(요기인)이 비로소 여분의 자금으로 서적을 구입해 와, 위로는 육경으로부터 아래로는 훈전(훈전)과 사기(사기)와 자집(자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약간의 책으로 채워 넣었다. 그러나 세상의 선비들이 외우던 과거공부에 관련된 책은 하나도 끼이지 않았다. 이에 제생들이 성현의 책을 읽고 또 더불어 고을 원의 뜻에 대하여 강론하면서 흥기하게 되었다.
이윽고 나를 찾아와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내 생각에, 요후(요후)의 교육 방법에 대하여는 실로 기록할 만하고, 제군들이 요후의 뜻을 잘 계승한 사실 또한 응당 기록되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또 내가 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제군들이 요후가 마련해준 책을 읽고 반드시 마음으로 통하고 몸으로 행하여, 한갓 책방이 되게 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요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되고 또 이 나라의 풍속도 장차 전날보다 더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삼가 그 일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그 건물 앞에 세우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순희(순희) 기해년(1179) 1월 기유일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동안현 학교 경사각 상량문[동안현학경사각상량문] 주희(주희)

젊은이들.
대동(대동)의 옛 땅이고 낙오(낙오)의 이름난 고을, 그 사이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 공경(공경)의 자리에 늘어섰고, 또 어진 선비들이 많아 성대하게 고을의 스승이 되었네. 비록 산천의 정기가 아름답기 때문이겠지만 실로 흠 없이 교화를 입었기 때문이리라.
근래에 어려운 상황을 만나 더욱 각박하여졌다. 학교는 황량해져 옛날 기풍과 법도를 다루지 않고 서적은 흩어져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 잠잠해졌다. 조정의 명은 막혀서 선양되지 않아 부형들이 크게 걱정하였다.
생각건대,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제생들을 타일러 그들로 하여금 훈의(훈의)에 침잠하게 하고 여러 기록을 힘써 모아 견문을 넓히는 데에 힘쓰게 하였다. 다행히 대부(대부)에서 가련히 여겨 많은 서적을 내려주었다. 오직 위에 있는 현자가 교육에 독실한 뜻을 두어 고을의 자제들이 진작되어 완성하는 은혜를 입게 하였도다. 이에 학궁에다 우뚝한 집을 짓고 사방으로 봉하기를 신중하고 견고하게 하여 벌레와 쥐가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미 고을의 뜰에서 계획하여 성(성)에서 자금을 받았고, 서조(서조)의 힘을 빌리고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합쳤다. 관리들이 나태하여 돕지 않으니 거의 길가에서 집을 짓는 것과 같았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역에 피곤하여 장차 택문(택문)의 노래를 부르려 하였다. 이에 일정을 엄격하게 하고 비로소 재목을 골라서 이루게 되니, 힘을 쓴 효과가 나타나 낙성할 때가 되었도다. 선비들이 읽지 못한 책을 읽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면려할 줄을 알게 되었고, 책이 무궁한 이로움을 얻게 하고 길이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글을 지어 들보를 올리는 것을 도우니, 어린이나 노인이나 모두 환호하도다.

젊은이들 들보 동쪽에 던지세 / 아랑위포량동
아침 해 붉게 바다에서 떠오르네 / 효일동롱출해홍
그 빛 서원의 복층 집에 비추니 / 조견횡당통복각
층층의 용마루 그림처럼 창공에 솟았네 / 층맹여화삽청공

젊은이들 들보 서쪽에 던지세 / 아랑위포량서
봄풀과 가을 구름 멀리 보이네 / 춘초추운극망저
문포산(문포산) 높은 것을 부러워 말게나 / 문포산고군막선
성인의 문 높아 하늘과 가지런하다네 / 성문찰얼여천제

젊은이들 들보 남쪽에 던지세 / 아랑위포량남
푸른 바다는 끝없이 하늘과 잇닿아 있네 / 창명무제수천함
물결 속 물고기와 용 두려워하지 말게나 / 탕휼어룡군막외
도의 근원과 학문의 바다는 더욱 깊고 깊으니 / 연원학해경담담

젊은이들 들보 북쪽에 던지세 / 아랑위포량북
반짝이는 별들 북극성을 에워싸네 / 착락중성고공극
밝은 천지 운행 의심하지 말게나 / 소회운전군막의
찬란한 광명이 책 속에 있다네 / 찬란광명재방책

젊은이들 들보 위로 던지세 / 아랑위포량상
성조(성조)의 위대한 재상 소승상(소승상)이라네 / 성조석보소승상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는 것 참으로 헛된 말 / 노무군자정허언
이 제생들이 이제 장인(장인)의 대열에 있으니 / 유시제생장인행

젊은이들 들보 아래로 던지세 / 아랑위포양하
늙어 책을 남기는 일 동가(동가)를 따르네 / 인로유서추동고
제생들은 옛날 ▨▨를 이어 힘쓰라 / 제생면계구▨▨
태평시대엔 초야에서도 근심할 것이 없다네 / 시태부우신재야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선비들은 학업을 폐함이 없고 집에서는 서책을 전하게 되어 전술하고 창작하는 근원을 연구하여 드디어 옛날의 대체(대체)를 보게 되고 공명을 이룰 즈음을 당하여 당세의 큰 유학자가 나오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직 들은 바를 어그러뜨리지 않고 깊은 바람에 부합되게 하소서.

사경을 간행한 뒤 선성에게 올린 고유문[간사경성고선성문] 주희(주희)

육경(육경)의 큰 가르침은 해와 별과 같이 밝고, 세상에 전해져 법도가 되어 끝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전에 진(진)나라에서 분서(분서)의 재앙을 만났고 뒤에는 한(한)나라 유학자들의 천착(천착)의 오류를 만났습니다. 은미한 말과 깊은 이치가 전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편질의 차례도 난잡하게 되었는데, 천년 긴 세월 동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역경(역경)》하나만이 일찍이 편차(편차)가 바르게 정해졌으며, 불민한 저도 일찍이 《시경(시경)》과《서경(서경)》을 상고하여 소서(소서)의 잘못을 발견하였고 본말을 상고하니 모두 명백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을 끌어다가 본경(본경)의 성인 말씀 위에 얹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곧 바로잡아 간행하여 펴서 세상을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장인이 일을 다 갖추었다고 고하였으나 제가 마침 질병을 앓아누워 배알하지 못하고 삼가 종사자를 보내 그 책을 공손히 받들어 선성선사(선성선사)의 뜰에 고합니다. 영령이 계신다면 이 마음을 살펴 흠향하시고 그 일을 도와주시면 만세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삼가 고합니다.

백록동 소장 《한서》 발문[발백록동소장한서] 주희(주희)

내가 전에 유자화(유자화)를 위하여 전(전)을 지었는데, 그 아들 인계(인계)가 편지를 보내면서 그 아버지가 소장하였던 《한서(한서)》 44권으로 사례하였다. 당시에 백록동서원이 처음 이루어졌기에 그곳으로 보내 소장시켜 학자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자화의 5세조 마감부군(마감부군) 식(식)이 남당(남당) 때에 이 백록동에서 독서하였고 뒤에 본조에서 벼슬하여 명성이 있었다. 태조 때 그의 손자 창(창)ㆍ반(반)이 모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 자화의 동생 자징(자징)의 집안에 아직도 손수 초록한 《맹자(맹자)》ㆍ《관자(관자)》등 책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백록동에 있을 때 일과로 만든 것이다.
연월일. 주희(주희) 중회(중회) 쓰다.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 장서(장서)

《주역대전(주역대전)》 14권
《춘추부록대전(춘추부록대전)》 17권
《호전대전(호전대전)》 7권
《호전소전(호전소전)》 4권
《예기대전(예기대전)》 16권
《당판소전(당판소전)》 10권
《시대전(시대전)》 9권
《대문(대문)》 2권
《서대전(서대전)》 9권
《언토(언토)》 8권
《대문(대문)》 1권
《주례(주례)》 7권
《대학(대학)》 1부(부)
《중용(중용)》 1부
《혹문(혹문)》 1부
《논어대전(논어대전)》 2건 각 7권
《맹자대전(맹자대전)》 2건 각 7권
《대문(대문)》 2권
《근사록(근사록)》 2건 각 4권
《송감(송감)》 16권
《박물지(박물지)》 1권
《속박물지(속박물지)》 1권
《성리대전(성리대전)》 36권
《주자대전(주자대전)》 70권
《대학연의(대학연의)》 12권
《명신언행록(명신언행록)》 합 7권
《자경편(자경편)》 7권
《통감(통감)》 15권
《문선(문선)》 15권
《초사(초사)》 2권
《문장궤범(문장궤범)》 2권
《여어편록(려어편록)》 20권
《소학(소학)》 2건 각4권
《동국통감(동국통감)》 19권
《운부군옥(운부군옥)》 10권
《진서산심경(진서산심경)》 2권
《이락연원록(이락연원록)》 2권
《주자어류(주자어류)》 59권
《좌전대전(좌전대전)》 23권
《한창려집(한창려집)》 16권
《유자후집(유자후집)》 13권
《번천집(번천집)》 4권
《완릉집(완릉집)》 1권
가정(가정) 갑진년(1544) 장서 합 5백 권.

권5 잡록        

백록동첩(백록동첩) 주희(주희)

본 군(군)의 여산(여산)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에 대하여 《국조회요(국조회요)》와 본군의 도경(도경)과 기문(기문)ㆍ석각(석각)에서 살펴보니, 원래 당나라 빈객(빈객) 이발(이발)이 은거했던 곳으로 옛날에는 누대가 있고 물이 돌아 흐르고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어 한 때 명승지가 되었다. 남당 승원(승원) 연간에 학관(학관)을 세운 것으로 인하여 땅을 사들여 제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니 학자들이 크게 모여들었다. 이에 국자감 구경박사(구경박사) 이선도(이선도)를 동주로 삼아 교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본조 태평흥국(태평흥국) 2년에 이르러 지강주(지강주) 주술(주술)이 말하기를,
“ 여산 백록동에 일찍이 학도가 1백 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구경(구경)을 하사하여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 요청을 들어주라는 명을 내리고 국자감에 인본(인본)을 주어 전송하게 하였다. 7년에 또 동주 명기(명기)를 채주(채주) 포신현(포신현) 주부(주부)로 삼았다. 7년에 비로소 남강군을 둠으로써 드디어 군 경내에 소속되었다.
상부(상부) 초기에 직사관(직사관) 손면(손면)이 백록동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고, 세상을 떠나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장사지냈다. 그 아들 비부낭중(비부낭중) 침(침)이 다시 학관 열 칸을 마련하고 ‘백록동지서당(백록동지서당)’이란 여섯 글자를 써서 기둥 사이에 걸고 자제들과 사방의 선비를 가르쳤으며, 나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당도(당도) 곽상정(곽상정)이 기문을 썼다. 후에 전쟁을 겪어서 집들이 남아나지 못하였고 그 기문(기문)과 석각(석각)은 고을의 성에 있는 천경관(천경관)으로 옮겼다.
지난번 내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찾아가서는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연못을 찾아 직접 그곳에 가서 바라보니 사방 산수가 맑고 그윽하게 둘러쳐서 시정(시정)의 시끄러움이 없고 아름다운 천석(천석)이 있었다. 참으로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거나 은둔하여 저술을 할 장소였다. 이에 다시 여산 일대에 1백 개 가량의 노불(노불) 도장(도장)들은 파괴되었다가 다시 중수하지 않을 곳이 없는데 오직 선비들이 공부하던 학관은 이 한 곳뿐인 것을 개탄하였다.
이곳은 이미 전 왕조 명현의 고적이고 또 태종황제가 경전을 반사하여 한 고을 선비들을 교육시킨 큰 은덕을 입었다. 그런데 한 번 황폐해지고 나서 수년 동안 다시 진흥되지 못하였으니, 우리 도(도)의 쇠퇴함에 대하여 개탄하고 두려워할 만하다. 또한 황제께서 교화를 펴고 인재를 양성한 뜻이 이 고을에서 드러나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더욱이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산 백록동을 응당 다시 중수하여 세워야 할 것이다. 운운.

백록동서원 중수에 대하여 올린 장계[신수백록동서원장] 주희(주희)

구위(구위).
살펴보니, 여산(여산) 백록동(백록동)은 옛날에 강주(강주)에 소속되었다가 지금은 본군(본군)에 소속되었습니다. 성을 떠나서 십여 리를 가면 당나라 이발(이발)이 은거하던 곳이 있습니다. 남당(남당) 때에 그곳에 서원을 세우고 토지를 사서 생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선생을 세워서 교도를 담당하게 하고 ‘국학(국학)’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사방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수업을 하였고, 이들은 후에 세상에 기용되어 이름을 낸 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국초에 이르러서 학도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태종황제께서 들으시고 국자감의 경전을 하사하였으며, 또 동주(동주) 명기(명기)를 채주(채주) 포신현(포신현) 주부(주부)로 임명하여 높이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후에 군학(군학)이 생기자 서원이 드디어 폐지되었고, 지금에 여러 해가 지나면서 터가 매몰되어 버렸는데, 근자에 다시 찾아서 그 자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여산(여산)의 산수가 아름다운 것은 동남 지방에서 으뜸입니다. 노불(노불)이 사는 집은 1백여 곳이나 되고 중간에 허물어졌던 것이 지금 회복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오직 이 백록동은 옛날 현인이 은거하던 유학(유학)의 정사(정사)입니다. 또 성조에서 표창하고 드러내어 한 고을 선비들을 교육하여 그 은택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다 허물어지고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계획하여 알맞게 중수하여 세우는 것 외에, 제 생각에 서원을 세우는 공사는 일이 사소하지만 이름이 국전(국전)에 실려 있으니 일의 체모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밝게 보고하여 처분을 받아 시행하지 않으면 세월이 오래 가면 다시 매몰되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백록동서원이 이루어져 선성에게 올린 고유문[백록동성고선성문] 주희(주희)

순희(순희) 7년 경자년(1180) 3월 계축삭(계축삭) 18일 경오일에 구위(구위)는 감히 선성지성 문선왕(선성지성문선왕)께 고합니다. 제가 어제 국조(국조)의 고사와 고을의 도경(도경)을 살펴보고 성 동북쪽 15리 쯤에서 백록동 유지(유지)를 찾았습니다. 일찍이 당나라 이발(이발)이 강남에 은거하였는데, 이를 가지고 이씨가 국학을 만들었고, 우리 태종황제께서도 경전과 사서를 하사하여 학자를 교육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물어진 지 오래 되어 폐허가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다행히 제생들이 조칙을 받들었고 어리석은 제가 교화를 펴는 직책을 맡았기에, 이 일을 거행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게 될까 두려워 이에 다시 세우기로 의논하였습니다. 지금에 다행히 일을 마쳐, 장차 동지들을 이끌고 그 사이에서 강학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선성선사의 도를 전하고 그것으로 태종황제의 빛나는 가르침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빈객과 사생들을 이끌고 삼가 석채(석채)의 예를 올려 선성을 뵙고, 선사 연국공(연국공)과 추국공(추국공)을 배향합니다. 흠향하소서.

백록동서원이 이루어져 선사에게 올린 고유문[백록동성고선사문] 주희(주희)

공께서는 성현의 깊은 도를 발양하여 후세에 무궁히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감히 법도에 따라 선성의 신위에 밝게 고하고 배향하여 제사를 올립니다. 흠향(흠향)하소서.

금계 육주부가 백록서당에서 강의한 글 뒤 발문[발금계육주부백록동서당강의후] 주희(주희)

순희(순희) 신축년 봄 2월 육자정(육자정) 형이 금릉(금릉)에서 왔는데 그 제자 주극가(주극가)ㆍ육인지(육인지)ㆍ주청수(주청수)ㆍ웅감(웅감)ㆍ노겸형(노겸형)ㆍ서훈실(서훈실)이 따라왔다. 10일에 내가 동료ㆍ제생들을 데리고 함께 백록동서당에 가서 학자들에게 경계가 될 말을 해주기를 청하니, 자정(자정)이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고맙게 허락하였다. 그가 밝혀 편 강론이 간절하고 명백하여 학자들의 은미하고 깊은 병통을 알맞게 지적한 것이어서 들은 사람들이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도 오래되면 혹 잊을까 두려워 다시 자정에게 써주기를 청하여 받아서 갈무리하였다.
무릇 우리 동지들이 이에 대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깊이 살핀다면 아마도 덕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혼미하지 않을 것이다.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쓰다.

백록서당 책문[백록서당책문] 주희(주희)

공자와 70명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 양주(양주)와 묵적(묵적)의 무리가 나타나자 맹자가 공자의 도를 밝혀 바로잡았다. 그런 뒤에 그들의 말이 세상에 함부로 유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천여 년 동안 제생들이 모두 공자의 말을 외우고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순경(순경)ㆍ양웅(양웅)ㆍ왕통(왕통)ㆍ한유(한유)에 대해서만 도(도)로 세상에 이름났다고 하였고, 맹자에게는 혹은 비난하고 혹은 스스로 비하고 혹은 일컬음이 없고 혹은 그의 공적이 우(우)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하며 높였다. 그 평가가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그리고 그 몇몇 사람은 그 앞서 말하여, 혹은 대문은 같지만 방문이 다르다고 하고 혹은 일컬음이 없고 혹은 크게는 순수하지만 작은 흠이 있어 도의 전수에 낄 수 없다고 하였고, 양주와 묵적에 대해서는 혹은 은미하게 잘못을 말하고 혹은 일컬음이 없고 혹은 취하여 공자와 동등하게 여겼다. 그들이 서로 다르게 인정한 것이 또 이와 같다. 이 또한 반드시 사유가 있을 것이다.
본조는 유학이 가장 흥성하여 구양씨(구양씨)ㆍ왕씨(왕씨)ㆍ소씨(소씨) 등이 모두 자신의 학문을 가지고 조정에서 행하였으며, 호씨(호씨)와 정씨(정씨) 또한 자신의 학문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왕씨와 소씨는 본래 구양씨에서 나왔으나 그 끝에 가서는 크게 같지 않은 점이 있었고, 호씨와 손씨(손씨) 또한 당시에 서로 용납되지 않았으며, 정씨는 더욱 왕씨나 소씨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공자의 도에 있어서 누가 얻었으며 누가 잃었는지, 어찌 논할 바가 없겠는가?
양주와 묵적의 학설은 없어졌지만, 그러나 그 학설의 유파 중에서 어찌 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후세에 또 불가의 학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양주ㆍ묵적의 학설과 같은가? 다른가? 양웅(양웅) 이래로 이 두 파의 시비에 대한 논란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많은데, 또한 누가 바르게 말할 것인가?
그대들은 상세히 논하라.

백록동 임원에게 보낸 답서[답백록장이] 주희(주희)

서원이 비바람을 겪으면 퇴락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미 잘 보수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선성(선성)의 서적서적)과 건창(건창)의 장전(장전)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의 고을 원이 한 달에 한 번은 온다고 하니 이는 훗날 길이 고사로 삼을 만합니다. 3자 큰 글씨는 탁상에 쓴 것으로 모본을 만들고는 지워버려 지금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이미 새기는 것을 마치고 번거롭게 또 한 부를 보내주시니, 보수할 수 있으면 이 본을 가지고 보수하고, 그럴 수 없다면 갈아 없애도 되니, 이는 긴급하게 쓸 곳이 없습니다.
지금 제생들은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때때로 토론하여 더욱 두서가 있으리라 여깁니다. 산 속이 한가하고 시원하여 독서하고 덕을 닦는 데에 적합한 곳입니다. 만약 제현들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창도하고, 피차간의 사사로움이 가슴속에 개입하지 않게 한다면, 후생(후생)들이 법도를 보게 될 것이고, 또한 타락하여 따르지 않는 무리들도 마음 고쳐먹을 것입니다.

백록동부(백록동부) 주희(주희)

〈백록동부〉는 동주(동주) 회옹(회옹)이 지은 것이다. 회옹이 이미 동중에 서원을 짓고 그 일을 시로 지어서 학자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 사(사)에 말하기를,

임금님 은총을 입어 / 승후황지가혜
여산 남쪽에 살게 되었도다 / 댁려부지남강
농민들의 고통을 가련히 여기고 / 민원전지고병
토호의 어질지 못함을 걱정하였도다 / 척농호지비량
지난 10월 16일 아침 / 월동맹지기망
수레를 타고 그 산의 연못을 찾았도다 / 숙여가호산지당
북쪽 언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달려가서 / 경배원이동무
이씨의 산 언덕에 올랐도다 / 척리씨지숭강
지명이 이가산(리가산)이다.
그 이름 생긴 연유를 헤아려 / 규궐호지소요
가시덤불 속에서 황폐해진 자취를 찾았도다 / 득퇴지어진황
옛날 산인이 은거하던 곳으로 / 왈석산인지은처
지금까지 아름다운 전통 전해오도다 / 지금영구이류방
진순유(진순유)의 〈여산기(려산기)〉에서, “당(당)나라 때 이발(리발)의 자는 준지(준지)이다. 그 형 섭(섭)과 함께 백록동(백녹동)에 은거하였다. 뒤에 강주자사(강주자사)가 되어 이 골에 와서 집을 짓고 주위로 물이 흐르게 하고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한때의 명승지가 되었다.” 하였다.
승원(승원) 연간에 토지를 마련한 이후로 / 자승원지유토
비로소 서당이 변해서 학교가 되었네 / 시변숙이위상
근엄하게 의관을 갖춘 사람들 / 엄의관여현송
가득 모여 글을 읽었도다 / 분제제이양양
〈여산기(려산기)〉에서 또 이르기를, “남당(남당) 승원(승원) 연간에 백록동 서당을 인하여 학관(학관)을 세우고 토지를 주어 제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니 학자들이 크게 모여 들었다. 이에 국자감(국자감) 구경박사(구경박사) 이선도(리선도)가 동주(동주)가 되어 교수를 관장하였다.” 하였다. 강남(강남)의 야사에서도 “당시에 이를 백록국상(백녹국상)이라 하였다.” 하였다.
쇠퇴한 시대에도 그러하였는데 / 재숙계이차연
하물며 지금은 문명이 밝아오는 시대임에랴 / 신휴명지경운
훌륭한 천자가 자리에 앉아 / 황목목이당천
하나의 법도로 천하를 다스려 / 일궤문이내혼
교화의 근원을 돈독하게 하고 / 념돈독어화원
은둔하는 자를 다 찾아내어 / 내수척호유둔
역말로 경서를 보내주어 / 분황권이치우
학자들이 의문을 넓힐 수 있게 하여 / 광청금지의문
아름다운 선비들 교육을 즐기고 / 낙청아지장육
뛰어난 인재를 뽑아 올렸도다 / 발준모이등진
삼가 《국조회요(국조회요)》를 살펴보니, 태평흥국(태평흥국) 2년에 지강주(지강주) 주술(주술)이 백록동에 구경(구경)을 하사하기를 청하니, 그 요청에 따라 역을 통하여 보내주었다. 6년에는 동주 명기(명기)를 채주(채주) 포신현(포신현) 주부(주부)로 삼고, 유학을 높이고 향교를 빛내었다.
함평(함평) 시대까지 그 빛이 이어져 / 태계조어함평
또 열심히 증수하였도다 / 우증수이망권
〈여산기(여산기)〉에서 또 이르기를 “함평(함평) 5년에 중수를 명하고, 또 공자와 십철(십철)의 상을 만들어 세웠다.” 하였다.
손면(손면)에게 돌아가 여생을 보내게 하였고 / 선석면이화기귀
침(침)이 선친의 뜻을 이어 자손에게 물려주었도다 / 침역긍당이이손
곽상정(곽상정)의 〈서원기(서원기)〉에서 이르기를 “상부(상부) 초년에 직사관(직사관) 손면(손면)이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백록동 동주를 시켜주어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손면이 미처 돌아가기 전에 죽었다. 황우(황우) 5년에 그 아들 비부낭중(비부낭중) 침(침)이 학관 터에 집을 짓고 ‘서당(서당)’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제들이 살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사방에서 찾아오는 선비들에게도 모두 음식을 제공하였다.” 하였다.
희녕(희녕) 연간에 이미 황무지가 되었으니 / 창무초어희녕
지금에야 무엇을 논하랴 / 상자금기해논
〈여산기(려산기)〉는 희녕(희녕) 연간에 지어졌는데, 그때 이미 황무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건물 자리를 알려주고 / 천기계여이당단
친구가 또 책을 보내 바로잡아 주었도다 / 우우정여이책서
처음 심방했을 때에 나무하는 자가 그 자리를 일러주었고, 손님 자직(자직) 양방(양방)이 일을 시작할 계획을 도왔다. 이윽고 자징(자징) 유청지(유청지)가 또 그 고사에 대하여 수집하여 보내주었다.
이곳은 옛날 현인이 은둔하던 곳 / 위차전수지일적
다시 우리 임금의 큰 정사에 연관되어 / 복관아성지굉모
내 마음에 크게 느낀 바 있어 / 역기진우여충
이에 계획하고 자문하였도다 / 내모도이자추
고을 원은 마음을 다하여 강령을 마련하고 / 윤실심이강기
아전들은 분주히 실무를 수행하고 / 리갈궐이분추
선비도 책을 내려놓고 일을 돕고 / 사석경이돈사
장인은 기술을 다하여 집을 지어 / 공탄교이헌도
얼마 안 되는 세월에 / 증일월지기하
우뚝한 집이 서게 되었도다 / 흘하옥지거거
사실이 여조겸(려조겸) 백공(백공)이 지은 〈서원기(서원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산은 푸르게 건물 주위로 둘러서 있고 / 산총롱이요사
냇물은 콸콸 흘러가 / 수율괵이순제
옛날 사람이 이곳에서 즐긴 것이 믿어지니 / 량석인지낙차
세대는 다르지만 그 뜻은 한가지로다 / 강리세이동부
저 훌륭한 선비들 / 위장보지아아
경서를 안고 와서 모이도다 / 포유경이내집
어찌 경관을 즐기는 것이랴 / 개전조청지위오
실로 성현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로다 / 실기궁장지가입
내가 민첩하게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우니 / 괴여수지부민
어찌 그대들 흡족하기를 바라겠는가 / 하자망지능급
하물며 저 도의 본체 무궁하니 / 신도체지망궁
어찌 한 마디 말로 이르랴 / 우개일언이가집
우선 옛날에 들은 바를 외우고 / 청고송기석문
때때로 익히는 일을 시작하라 / 서유개어시습
명성(명성)이 둘 다 진보하고 / 왈명성기량진
경의(경의)가 모두 서니 / 억경의기해립
실로 신지(신지 이윤(이윤))가 생각한 바를 생각하고 / 윤신지지소회
안회(안회)가 견지한 뜻을 본받으라 / 근항안지유집
저 비단옷 걸친 고관대작 / 피청자지세영
어찌 애써 구할 것이 있겠는가 / 역하심호면습
마지막에 읊는다 / 난왈
시냇물 돌부리 치며 졸졸 흐르고 / 간수촉석장명구혜
산엔 나무들이 울창하여 이어졌네 / 산목분䔿지상규혜
학도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여 / 피장이수식차유혜
덕업(덕업) 높고 성대하여 성인의 은택 넘치네 / 덕숭업무성택류혜
옛날 분 미치지 못하여 내 마음 울적하지만 / 왕자불급여심우혜
후인 이어지니 내가 어디에서 찾겠는가 / 내자유계아장언구혜

강좌명(강좌명) 주희(주희)

소흥(소흥) 23년(1153)에 신안 주희 중회(중회)가 동안(동안)의 관리로 와서 겸하여 학교의 일도 맡았다. 다음해 5월에 새롭게 강좌를 만들고 제생들에게 임하였다. 그것을 만든 뜻을 생각할 때 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명을 한다.

스승의 도 끊어져 / 사도절새
그 자리 무너졌다니 / 이비기거
지금 그 말들에 대하여 / 금기언언
나는 감히 찬성할 수 없네 / 역막아감도
옛날 성인과 후대의 스승 이어져 / 전성후사
문(문)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 문부재자
마치 보는 듯하니 / 여혹견지
그 마음 근엄하네 / 유엄기사
강단에 세우니 / 립지당단
더없이 엄정하도다 / 유이유엄
밝게 임하여 / 궐림공소
바라보는 이들 교화되리로다 / 식와이첨

사재명(사재명) 주희(주희)


지도(지도)

추장하면서 읍을 하는 자 / 왈추이읍자
무엇이 행하고 가지게 하는가 / 숙이이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 / 왈기이한자
누가 먹여주고 입혀주는가 / 수식이의
그러므로 도란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 고도야자부가수유리
그대는 도에 뜻을 두지 않고 / 자부지어도
홀로 아둔하게 어디로 가려는가 / 독망망기하지

거덕(거덕)

도술(도술)을 말하면 어디서나 통하지 않음이 없고 / 어도술칙무왕이부통
성명(성명)을 말하면 미묘하여 궁구하기 어렵네 / 담성명칙의독이난궁
오직 외면을 두텁게 하고 내면을 박하게 하면 / 유기후어외이박어내
달리 높일 곳이 없다네 / 고무지이숭지

의인(의인)

들어도 감당하지 못하고 / 거지막능승
행하여도 이르지 못하네 / 행지막능지
의지하려고 한들 / 수욕의지
어떻게 의지할 수 있으랴 / 안득이의지
인을 하는 것은 자신을 말미암지 / 위인유기
남을 말미암겠는가 / 이유인호재
그것에서 떠나려 한들 / 수욕위지
어찌 떠날 수 있으랴 / 안득이위지

유예(유예)

예(예)와 악(악)과 / 례운락운
또 사어서수(사어서수)라네 / 어사수서
우러르고 굽어보고 스스로 터득해야 / 부앙자득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이 펴지리라 / 심안체서
이것을 일러 ‘유(유)’라 하니 / 시지위유
그 속에서 노닐고 의거하여야 하리 / 이유이거
아, 유라는 것이 / 명호유호
내면으로 체득하지 않고서 / 비유득어내
누가 이와 같이 차분하게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 숙능여차기종용이유여호

우 사재명[우사재명] 주희(주희)


숭덕(숭덕)

나의 덕성을 높여 / 존아덕성
성인의 학문을 바라니 / 희성학혜
신명에 마음을 노닐어 / 완심신명
더러움을 벗어버리리라 / 태오탁혜

광업(광업)

예악을 다루기를 즐기고 / 락절례락
중용을 행하여 / 도중용혜
작은 일에도 부지런하여 / 극근소물
큰 공을 바치리라 / 주부공혜

거인(거인)

사심을 이기고 / 승기지사
천리를 회복하고 / 복천리혜
이 인[광거]에 거하며 / 택차광거
순일하여 그치리 않으리라 / 순부이혜

유의(유의)

부끄러워하는 마음 가지고 / 수악이여
힘써 확충하여 / 면확충혜
저 큰 길을 따라가면 / 준피대로
그 길 무궁하리라 / 행무궁혜

학고재명(학고재명) 주희(주희)

포성(포성) 원 주사공(주사공)이 그 아버지 휘유공(휘유공)이 지은 학고재(학고재)를 수리하고 그곳에서 집안 자제들을 교육하였는데, 신안 주희가 그 편액을 썼다. 주사공이 또 와서 명을 청하기에 그 뜻을 미루어 명을 짓는다.

옛날 선각자들을 보면 / 상고선민
자신의 수행을 위하여 학문을 하였는데 / 학이위기
지금은 그렇지 않아 / 금야부연
남에게 알려지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 위인이이
자신의 수행을 위한 학문은 / 위기지학
먼저 그 몸을 성실하게 하니 / 선성기신
군신간의 의(의)나 / 군신지의
부자간의 인(인)에 있어서 / 부자지인
모으고 분변하고 거하고 행하는데 / 취변거행
조금도 게으르거나 소홀함이 없어서 / 무태무홀
지극히 흡족한 뒤에 / 지족지여
은택이 만물에 미치네 / 택급만물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은 / 위인지학
봄날 꽃처럼 아름답네 / 엽연춘화
외우고 헤아리는데 힘쓰고 / 송수시력
모으고 짜는 것을 자랑하며 / 찬조시과
벼슬하여 황금을 생각하니 / 결사회금
찬란하고 빛나는 / 황황위위
세속의 영화란 / 세속지영
군자가 비루하게 여기네 / 군자지비
오직 이 두 가지는 / 유시이자
그 단서 은미하니 / 기단칙미
가는 실처럼 보기 어려우니 / 묘면불찰
그 귀착점은 천양지차라네 / 호월기귀
우뚝한 주후(주후)는 / 탁재주후
선친의 뜻을 이어 / 극승선지
이 집을 날로 새롭게 하여 / 일신차재
후손에게 물려주었네 / 이적래예
이 집에는 무엇이 있는가 / 차재하유
그림과 책이라네 / 유도유서
그 후예들 이곳에서 / 궐예사하
의관을 갖추고 나아가 / 의관진추
밤낮으로 생각하고 행하고 / 야사주행
묻고 도모하도다 / 자순모도
지금에 끊어지고 하지 않던 일 / 절금부위
오직 옛 것을 배우는 것이네 / 유고시학
먼저 어려운 일을 하고 뒤에 소득을 생각하고 / 선난후획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 않아야 하리 / 비극비서
내가 그 명을 지어서 / 아기명지
처음처럼 잘 하기를 경계하노라 / 이경궐초

존덕성재명(존덕성재명) 주희(주희)

내제(내제) 정윤부(정윤부)가 서재 이름을 ‘도문학(도문학)’이라 하였는데, 내가 ‘존덕성(존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윤부(윤부)가 명을 청하기에 지었다.

오직 상제가 / 유황상제
이 세상에 백성을 내렸는데 / 항차하민
무엇을 주었는가 / 하이여지
의(의)와 인(인)이로다 / 왈의여인
오직 의와 인이 / 유의여인
상제의 법칙이니 / 유제지칙
공경하고 받들어 / 흠사승사
이기지 못할까 걱정해야 하리라 / 유구불극
누가 어리석고 누가 미쳐 / 숙혼차광
구차하고 천하고 더러운 행실로 / 구천오비
곁눈질하고 귀를 기울이며 / 음시경청
사지(사지)를 나태하게 하여 / 타기사지
하늘의 밝은 덕을 더럽히고 / 설천지명
사람의 기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 만인지기
하류(하류) 처하기를 달게 여기니 / 감차하류
모든 악이 모인 곳이로다 / 중악지위
내가 이것을 보고 / 아기감차
두려운 마음을 가졌으니 / 지율궐심
컴컴한 방안에도 / 유유기실
밝게 임하나니 / 유혁기림
옥을 잡고 가득한 물그릇 들 듯이 조심하여 / 집옥봉영
다급할 때나 잠깐 사이라도 떠나서는 안 되네 / 수유전패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머니 / 임중도원
어찌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 하랴 / 기감혹태

경서재명(경서재명) 주희(주희)

보양(보양) 진사중(진사중)이 독서하는 서재에 대하여 신안 주희가 ‘경서(경서)’라고 이름을 짓고 그 명을 지었다.

문을 나가서는 손님을 맞이하듯이 하고 / 출문여빈
일을 행할 때는 제사를 모시듯이 하라는 말 / 승사여제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 이시존지
감히 실패함이 있겠는가 / 감유실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 기소부욕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는 말 / 물시우인
이것을 가지고 행동하면 / 이시행지
사람들과 모두 화합하리라 / 여물개춘
어찌하여 세상 사람은 / 호세지인
제멋대로 하면서 남에게 요구하고 / 자기궁물
자신만 편리한 대로 하니 / 유아소편
어찌 그런 사람 가련하게 여기랴 / 위피해술
누가 이와 달리 하여 / 숙능반시
그 몸을 단속하였는가 / 감언궐궁
갱장(갱장)의 사모 / 우장우갱
이는 공자와 자궁(자궁)이네 / 중니자궁
안으로 집에서 순종하고 / 내순우가
밖으로 나라에서 화합하여 / 외동우방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 무소무대
원망하는 때가 없네 / 망시원통
인을 행한 공이란 / 위인지공
이와 같이 지극하니 / 왈차기극
스스로 경건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 / 경재서재
길이 싫어함이 없으리라 / 영영무두

구방심재명(구방심재명) 주희(주희)

번양(번양) 정정사(정정사)가 ‘구방심재(구방심재)’를 만들었는데 왕자경(왕자경)과 축여옥(축여옥)이 이미 그 명을 지었다. 내가 나머지 뜻을 수습하여 다시 이 명(명)을 지었다.

천지가 변하여도 / 천지변화
그 마음은 인자한데 / 기심공인
이루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으며 / 성지재아
몸에 주체를 두어야 한다 / 칙주우신
그 주체는 어떤 것인가 / 기주이하
신명(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네 / 신명부측
만 가지로 나타나 / 발휘만변
사람의 표준을 세웠네 / 립차인극
잠시라도 놓아버리면 / 귀각방지
천만리로 달아나니 / 천리기분
지성이 아니면 어떻게 소유하며 / 비성갈유
경건함이 아니면 어떻게 보존하겠는가 / 비경갈존
누가 내던졌고 누가 구하였으며 / 숙방숙구
누가 잃어버렸고 누가 가졌는가 / 숙망숙유
굴신하는 것은 팔이지만 / 굴신재비
반복하는 것은 손바닥이네 / 반복유수
은미한 데에서 막고 홀로 있을 때 삼가함이 / 방미근독
이것이 늘 지키는 방도이니 / 자수지상
절실한 것을 묻고 가까운 데에서 생각하여 / 절문근사
오직 그것을 도우라 하네 / 왈유이상지

유병산(유병산)의 복재ㆍ몽재 두 거문고 명[유병산복재몽재이금명] 주희(주희)

병산(병산)선생이 쓰던 거문고 둘을 그 아들 평(평)이 소장하고 있다. 문인인 주희(주희)가 삼가 명(명)을 짓는다.

복재(복재)

쇠도 아니고 돌도 아니면서 / 비금비석
옥의 참됨을 머금고 있도다 / 함옥진혜
뱃속에 우레가 잠복하여 / 뢰복우복
그 신묘함을 감추었도다 / 비기신혜
성대하게 한 번 울면 / 팽연일작
만물이 다 봄날이로다 / 만물개춘혜
나는 귀한 이 거문고를 보고 / 아적기보
사람처럼 품었도다 / 회약인혜
정(정)을 주로 하고 복(복)을 보며 / 주정관복
그 몸을 닦도다 / 수궐신혜
때에 따라 굽히나 / 여시해굴
펴는 것은 미치지 못하도다 / 이부급기신혜

몽재(몽재)

그윽하게 억지하는 것은 / 억지유연자
험한 것을 만나서 그치는 듯하고 / 약직기우험이지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은 / 사지령연자
산 아래에서 나오는 샘물을 이끄는 듯하도다 / 약도기출산지천
대개 선생의 말씀은 / 개선생지언
들을 수가 없었고 / 부가득이문의
그 형통하고 바른 뜻이 / 약기형정지의
이 거문고에 의탁하여 전하도다 / 칙탁자기이유전

황자후의 거문고 명[황자후금명] 주희(주희)

황자후의 거문고 이름이 순고(순고)이다. 주희(주희)가 명(명)을 짓는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 무명지박
그대가 거문고 만들어 / 자소금혜
두드려서 울리니 / 구지이명
그 마음 표현하였네 / 획아심혜
은은하지만 침묵하지 않고 / 묘이불묵
아름답지만 음란하지 않네 / 려불음혜
오직 내가 그대를 아니 / 유아지자
산은 높고 물은 깊네 / 산고이수심혜

자양 거문고 명[자양금명] 주희(주희)

그대 중화(중화)의 바른 성품을 길러서 / 양군중화지정성
그대 분노하고 탐욕스러운 사심(사심)을 막았네 / 금이분욕지사심
천지는 말이 없고 만물에는 법칙이 있으니 / 건곤무언물유칙
내 오직 그대와 심오한 것을 찾으리 / 아독여자구기심

창명(창명) 주희(주희)

말은 삼가야 할 것을 생각하고 / 언사비
행동은 넘어지는 것을 생각하고 / 동사지
허물은 버릴 것을 생각하라 / 과사기
네 몸을 단정히 하고 / 단이궁
네 용모를 바르게 하고 / 정이용
네 마음을 순일하게 가지라 / 일이충

사조명(사조명) 주희(주희)

건도(건도) 9년(1173)에 내 나이 마흔 넷이었는데, 이미 머리가 쇠고 얼굴이 초췌하였다. 그러나 내 몸을 닦아서 생애를 마칠 뿐이며 다른 생각은 없다. 복당(복당) ▨▨원(▨▨원)이 나를 위하여 초상(초상)을 그려 주었다. 그 위에 명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다.

네 몸을 단정히 하고 / 단이궁
네 얼굴을 엄숙하게 하라 / 숙이용
바깥에서 단속하여 / 검어외
마음속을 전일하게 하라 / 일기중
처음에 힘을 써서 / 력어시
마지막을 잘 이루고 / 수기종
요체를 잡고서 / 조유요
무궁히 보전하라 / 보무궁

장서각 서주 자호 명[장서각서주자호명] 주희(주희)

거룩한 성인께서 / 어목원성
하늘을 잇고 신령함을 헤아려 / 계천측령
법도를 내어 / 출차모훈
우리에게 빛을 주었도다 / 혜아광명
길이 보배로 삼지만 / 영언보지
상자 속 황금이 아니라네 / 비금궐영
그 요지를 습득하여 / 함영저실
백세토록 이어가리라 / 백세기승

경재잠(경재잠) 주희(주희)

장경부(장경부)의 〈주일잠(주일잠)〉을 읽고 그 남긴 뜻을 주워 〈경재잠〉을 지어 서재 벽에 써놓고 스스로 경계한다.

의관을 정제하고 / 정기의관
보고 듣는 것을 존엄하게 하고 / 존기첨시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며 생활하고 / 잠심이거
상제(상제)를 대하듯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 대월상제
발의 모습은 반드시 중후해야 하고 / 족용필중
손놀림의 모습은 반드시 공손해야 한다 / 수용필공
길을 갈 때는 땅을 가려서 밟고 / 택지이도
개미집이라도 돌아서 가야 한다 / 절선의봉
집 밖에 나가서는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 출문여빈
일을 맡아서 할 때는 제사를 모시는 듯이 한다 / 승사여제
조심하고 조심하여 / 전전긍긍
혹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 망감혹역
입을 다물기를 주둥이 막은 병같이 하고 / 수구여병
사특한 생각 막기를 성을 쌓아 막는 것 같이 한다 / 방의여성
성실하고 전일(전일)하게 하여 / 동동속속
혹시라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된다 / 망감혹경
동쪽으로 간다고 하고 서쪽으로 가지 말 것이며 / 부동이서
남쪽으로 간다고 하고 북쪽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 부남이북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 일에 정성을 다하고 / 당사이존
다른 일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 미타기적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이며 / 불이이이
세 가지 일을 가지고 세 가지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 불삼이삼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 유심유일
모든 만물의 변화를 감찰하여야 한다 / 만변시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 종사어사
‘공경을 지닌다[지경]’라고 한다 / 시왈지경
동정(동정)에서 어기지 않고 / 동정불위
표리(표리)가 서로 바르게 된다 / 표리교정
잠깐 사이라도 경을 놓치면 / 수유유간
사욕이 여러 가닥으로 일어난다 / 사욕만단
불을 붙이지 않아도 뜨거워지고 / 불화이열
얼리지 않아도 차가워진다 / 수빙이한
또한 털끝만큼이라도 경에 어긋남이 있으면 / 호리유차
천양지차로 변하여 / 천양역처
삼강의 윤리가 다 없어지고 / 삼강기륜
구법도 다 이지러지니 / 구법역두
아, 소자들이여 / 어호소자
생각하고 공경하라 / 념재경재
묵경(묵경)이 경계를 맡아 / 묵경사계
감히 영대(령대)에 고하노라 / 감고령대

조식잠(조식잠) 주희(주희)

코끝에 흰 기운 / 비단유백
나는 그것을 본다 / 아기관지
때와 처소에 따라서 / 수시수처
더불어 소요(소요)하나니 / 용여의이
고요함이 다하여 내쉬니 / 정극이허
봄 연못의 물고기와 같고 / 여춘소어
움직임이 다하여 들이쉬니 / 동극이흡
곤충이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도다 / 여백충칩
천지의 기운이 열리고 닫힘 / 인온개벽
그 묘함이 끝이 없도다 / 기묘무궁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 / 숙기시지
주재하지 않은 자[부재]의 공이다 / 부재지공
신선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 위에 다니는 것이야 / 운와천행
내가 감히 논의할 것이 아니고 / 비여감의
순일함을 지키고 온화함에 처하면 / 수일처화
1천 2백 세를 누리리라 / 천이백세

육선생 화상 찬[육선생화상찬] 주희(주희)


염계선생(렴계선생)

도가 없어진 지 천 년에 / 도상천재
성인이 멀어지고 그 말씀도 사라졌을 때 / 성원언인
선각자가 있지 않았다면 / 부유선각
누가 우리를 열어 주었겠는가 / 숙개아인
글로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 서부진언
그림도 그 뜻을 다 하지 못하였네 / 도부진의
맑은 바람 밝은 달 끝없는 경계 / 풍월무변
뜰의 풀은 서로 어울려 푸르도다 / 정초교취

명도선생(명도선생)

태양처럼 온화하고 산처럼 우뚝하며 / 양휴산립
옥 같은 얼굴에 금(금) 같은 목소리 / 옥색금성
원기가 응집하여 / 원기지회
온전함 타고났네 / 혼연천성
상서로운 해와 구름 같고 / 서일상운
온화한 바람과 단비 같았네 / 화풍감우
용덕(용덕)이 바른 자리에 있어 / 룡덕정중
그 혜택 널리 베풀어졌도다 / 궐시사보

이천선생(이천선생)

규구(규구)처럼 원만하고 방정하고 / 규원구방
먹줄처럼 곧고 준(준)처럼 공평하였네 / 승직준평
참으로 군자다운 분 / 윤의군자
실로 대성(대성)하셨도다 / 전야대성
포백(포백)과 같은 문장 / 포백지문
숙속(숙속)과 같은 맛이로다 / 숙속지미
덕을 아는 이 드무니 / 지덕자희
누가 그 귀함을 알겠는가 / 숙식기귀

강절선생(강절선생)

하늘이 인걸을 내놓아 / 천정인호
뛰어난 자질 세상을 뒤덮었네 / 영매개세
바람을 타고 우레를 채찍질하여 / 가풍편정
끝없이 두루 살폈네 / 력람무제
손으로 월굴(월굴)을 만지고 / 수심월굴
발로 천근(천근)을 밟았도다 / 족섭천근
고요함 속에 고금을 넘나들고 / 한중금고
취한 중에 건곤을 보았도다 / 취리건곤

횡거선생(횡거선생)

젊어서는 손자(손자)와 오기(오기)를 좋아하다가 / 조열손오
만년에는 노불(노불)에서 도망하였네 / 만도불로
과감히 사석을 거두고 / 용철고비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렀네 / 일변지도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 정사력천
오묘한 비결 글로 썼네 / 묘계질서
완고함을 바로잡은 가르침 / 정완지훈
나에게 광거(광거)를 보여주었네 / 시아광거

속수선생(속수선생)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천하여 / 독학력행
절개 맑고 높았네 / 청수고절
덕 있고 말씀도 남겼으며 / 유덕유언
공적이 있고 의열도 남아 있네 / 유공유렬
심의(심의)를 입고 큰 대를 차고 / 심의대대
공손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가네 / 장공서추
유상의 기풍 늠름하여 / 유상름연
경박한 사람 숙연하게 하네 / 가숙박부

장경부 화상 찬[장경부화상찬] 주희(주희)

죽은 친구 형주목사(형주목사) 장경부(장경부)의 화상에 신안(신안) 주희(주희)가 찬(찬)을 짓다.

인의(인의)의 단서를 넓혀 온 세상에 차게 하였고 / 확인의지단。지어가이미육합
선(선)과 이욕을 분별하여 추호라도 세밀하게 분석하였네 / 근선리지판。지어가이석추호
요순같은 임금을 만들기 위해 힘썼고 / 권권호기치주지절
선대의 전통을 잇기 위하여 급급하였네 / 급급호기간부지로
도를 맡은 용기가 드높았고 / 흘흘호기임도지용
마음을 높이 세워 우뚝하였네 / 탁탁호기립심지고
그를 아는 이는 그의 무우(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기수(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을 알았고 / 지지자식기춘풍기수지락
모르는 이도 한 세상의 호걸이었다고 여겼네 / 부지자이위호해일세지호
성대하고 우뚝한 자태 / 피기양휴산립지자
이미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었도다 / 기여기부가전자사의
이것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 관어차자
이윤(이윤)ㆍ여상(여상)을 보려고 하였다가 / 상유이복기견이려
소하(소하)ㆍ조참(조참)을 잃어버렸다고 할까 / 이실소조야야

여백공 화상 찬[여백공화상찬] 주희(주희)

괄창(괄창) 반숙도(반숙도) 군이 가암(가암) 퇴로당(퇴로당) 위에서 그의 사부 동래(동래) 여백공(여백공)의 화상을 그리고 말하기를, “서하(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부님에 대해서 나에게 의심이 없게 하고자 한다.” 하고, 그의 친구인 주희(주희)에게 찬(찬)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에 사(사)를 짓다.

한 몸으로 사기(사기)의 온화함을 갖추었고 / 이일신이비사기지화
한 마음으로 천고의 비결을 간직하고 있네 / 이일심이함천고지비
그 간직하고 있는 것을 미루면 / 추기유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도울 수 있고 / 족이존주이비민
남은 것을 내놓으면 / 출기여
풍속을 바로잡아 세상에 전할 수 있네 / 족이범속이수세
그러나 형상은 보통사람들 보다 뛰어나지 않고 / 연이상모부유어중인
의관도 세속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네 / 의관부궤어류속
맞이해도 그 오는 것을 볼 수 없고 / 영지이부견기래
따르려 해도 그 자취를 볼 수 없었네 / 수지이막도기촉
하물며 이는 채색으로 그리는 것이니 누가 마음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 신시단청 숙형심곡
오직 일찍이 그를 본 이가 여기에서 다시 보면 / 유상견지자어차이복견지언
남긴 것이 계승할 만한 글만이 아님을 알리라 / 칙부단유편지가속이이야

진명중 화상 찬[진명중화상찬] 주희(주희)

고 후관대부(후관대부) 진명중(진명중)의 화상에 친구인 신안 주희(주희)가 찬(찬)을 짓다.

개결하였지만 사람들이 꺼리지 않은 것은 / 개연이부사인기자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였기 때문이고 / 기자지지근
온화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대하지 못한 것은 / 온연이부사인압자
널리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기범애지화
벼슬살이는 가장 순량(순량)할 관리가 되기를 구하고 / 기사야。자궤이순량지최
학문은 덕행(덕행)에 뛰어나기를 기약하였네 / 기학야。자기이덕행지리
아, 누가 알았으랴 / 오호
그가 뜻을 품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 / 숙위기재차지이중도이몰
내 그 마을에서 늙으면서 저 동북쪽 언덕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할 줄을 / 사오로어기리이부득위동천북맥지경과야야

정정사 화상 찬[정정사화상찬] 주희(주희)

정정사(정정사) 군의 화상에 주희(주희)가 찬(찬)을 짓는다.

아, 정사여 / 명호정사
옷도 이기지 못할 듯한 몸으로 오획(오획)이 짐을 지듯이 하였고 / 퇴연여부승의。이자승유이거오획지임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한 말로 도(도)를 보위함은 곤연(곤연)의 칼날도 꺾을 듯이 하였네 / 언약부출제구。이위도유이최곤연지봉
매일 부지런히 힘쓰면서 / 면언일유자자자
한 번도 중지한 적을 보지 못했네 / 오방미견기지
하루아침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내일조이지차
하늘은 어찌하여 수명을 더 주어 완성하게 하지 않았는가 / 칙천갈위이부가지수。이성기종
아, 이 유상은 칠푼의 모습도 보기에 부족하지만 / 명호。차유미족이견기칠분지모
후인들이 또한 우선 이것을 통하여 유풍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 래자역고이시이상상기유풍
소희(소희) 임자년(1192) 9월 7일 쓰다. / 소희임자중양전이일서

화상에 써서 스스로 경계함[서화상자경] 주희(주희)

예법의 마당에 유유자적하고 / 종용호례법지장
인의의 집에 깊이 침잠하였도다 / 심잠호인의지부
내가 이에 뜻을 가졌지만 / 시여개장유의언
능력이 함께 할 수 없었네 / 이력막능여야
선현들의 격언을 가슴에 지니고 / 패선사지격언
선열들이 남긴 법도를 받드는 것 / 봉전렬지여구
오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로 닦아서 / 유암연이일수
이 말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노라 / 혹서기호사어

복괘 찬[복괘찬] 주희(주희)

삼라만상이 / 만물직직
그 삶이 끝이 없는데 / 기생부궁
누가 주관하는가 / 숙기시지
조물주의 일이로다 / 조화위공
음이 닫히면 양이 열리고 / 음합양개
한 번 고요하고 한 번 움직이네 / 일정일동
아름답게 끝이 없는 / 어목무강
온전한 본체의 오묘한 용(용)이여 / 전체묘용
어찌 유독 여기서만 / 해독어사
양이 잠기고 음이 성한가 / 잠양장음
밝게 빛난다고 말하니 / 이왈소재
이것이 천지의 마음이라 / 차천지심
닫아서 남음이 없는 것 / 개흡무여
이것이 개벽의 시작이고 / 사벽지시
생명의 뜻 왕성하니 / 생의옹연
온전한 아름다움을 갖추었도다 / 구차전미
사람에게 있는 것을 / 기재우인
본성(본성)의 인(인)이라고 하니 / 왈성지인
마음속에 간직되어 / 감장방촌
포괄함이 끝이 없네 / 포괄무은
그 싹이 터 나오니 / 유줄기맹
측은지심이라 / 유측기은
이것을 확충하면 / 우이충지
사해에 가득 차리 / 사해기준
오직 지금부터 / 왈유자금
미묘한 사이에도 / 묘면지간
이것으로 재계하고 / 시용재계
몸을 가리고 문을 닫아걸고 / 엄신폐관
복희씨의 하도를 우러러 보고 / 앙지희도
경을 연구하고 전을 찾으리라 / 계경협전
감히 찬을 지어 / 감찬일사
나태함이 없도록 이르노라 / 이조무권

백록동 옛터를 심방하고 그 경치가 그윽한 것을 아껴 다시 세울 것을 논의하고 감탄이 일어 읊다[심백녹동고지 애기유수 의복흥건 감탄유작] 주희(주희)

맑고 시원한 시냇물 / 청령한간수
고요하고 그윽한 푸른 언덕 / 요조청산아
선현들의 그윽한 정취가 남아 있으니 / 석현유유상
뒤돌아보면서 머뭇머뭇 거리네 / 권언차파사
옛날의 일 지금에 얼마나 되었는가 / 사왕금기시
찾아오는 이는 끊어졌도다 / 고헌절내과
학관은 폐허가 되어 비었고 / 학관공폐지
거문고 울리던 옛 가락 그쳤네 / 명현식유가
내가 와서 힘써 도와 / 아내권상여
지팡이 짚고 푸른 등라(등라) 걷었네 / 장책건녹나
들판에 얻음이 있어서 기쁘니 / 모야흔유획
그림 펼쳐보고 속이지 않음을 알았네 / 피도지비와
길이 당시의 성대함을 생각하니 / 영회당년성
공부하는 선비들 많았도다 / 신신금패다
글로 넓혀주고 예로 단속해준 은혜에 감사하고 / 박약감명은
흡족한 은택 태평성대 구가하였네 / 함유희태화
갑자기 황폐해진 것이 슬프고 / 처량홀황진
천지의 퇴폐한 풍속에 놀라네 / 부앙경퇴파
교육을 펴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 / 발교체강기
탄식하며 다짐하네 / 위연심미타
그늘진 언덕을 따라 나무를 베고 / 벌목순음강
양지바른 언덕에 집을 지었네 / 결옥의양파
하루아침에 혼탁한 세상 버리고 / 일조사진탁
은자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 귀재석인과
이때에 이미 상서에게 글을 올려 동주가 되기를 청하였다.

자징(자징)의 〈백록동〉 시에 화답함[화자징백녹지구] 주희(주희)

열흘이 지나도록 백록동에 이르지 못하니 / 경순부도녹장음
꿈속에 달려가는 마음 금할 길 없네 / 몽상비치부자금
다행히 높은 누대에서 함께 감상하니 / 행유고헌동승상
나막신 신고 함께 유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하방절극공유심
배회하며 시서(시서)를 즐기는 일 싫증나지 않고 / 배회미염시서낙
감개 어린 충효의 마음 잊을 수 없네 / 감개난망충효심
다시 큰 비석 대하여 〈벌목(벌목)〉 시 읊조리니 / 경대풍전아벌목
냇물과 구름 낀 골짜기 맑은 노래를 돕네 / 풍천운학조청음

복장서(복장서)의 〈백록서당 낙성〉 시에 차운함[차복장서낙성백녹가구] 주희(주희)

옛날 학궁 중수 이루어져 기쁘니 / 중영구관희초성
훌륭한 분들과 녹명(녹명)하리 / 요공군현청녹명
세 잔을 마신들 석전(석전)에 방해 될까만 / 삼작하방전빈조
한 편으로 어떻게 명성(명성)을 논할까 / 일편거감의명성
깊은 근원은 분명 조용함 속에서 얻게 되고 / 심원정자한중득
오묘함은 원래 즐기는 곳에서 나온다네 / 묘용원종낙처생
이집 밖의 무궁한 일 묻지도 말고 / 막문무궁암외사
이 마음 오로지 이 산과 함께 맹세하여야 하리라 / 차심료여차산맹

백록서당 강회에서 복장(복장)의 시에 차운함 [백녹강회차복장운] 주희(주희)

학궁 무너진 지 몇 해이던고 / 궁장무몰기경년
차가운 연기만 여울에 시내에 끼였네 / 지유한연쇄간천
집은 다행히 옛 모습 상상하지만 / 결옥행용추구관
제명은 옛글 잇는 것을 허락하지 않네 / 제명미허속유편
동주(동주)에 대하여 허락받지 못한 것을 이른 것이다.
푸른 구름 하얀 돌은 그 멋 같이 하지만 / 청운백석료동취
서간(서간) 유공(류공)을 이른 것이다.
제월광풍은 따로 전함이 있다네 / 제월광풍경별전
염계부자(렴계부자)를 이른 것이다.
그 속에 무한한 즐거움 진중하게 여기고 / 진중개중무한낙
제군들은 애써 출세의 길 부러워 말게나 / 제낭막고선등건

사십숙부(사십숙부)가 백록동에서 지은 시에 차운함[차운사십숙부백녹지작] 주희(주희)

초가집 지어놓고 선현을 상상하니 / 주모결옥상전현
천 년 전에 남긴 자취 완연하구나 / 천재유종상완연
창 내어 푸른 산 대하고 / 고작헌창읍창취
거문고 타고 글을 읽으며 냇물소리에 답하네 / 요장현송답잔원
젊은이들 뜻을 가지고 정밀하게 배워야 하리니 / 제낭유지수정학
늙은이는 무능하고 잠만 자려 하네 / 노자무능단욕면
그 속에 많은 명교(명교)의 즐거움 있으니 / 다소개중명교낙
공(공)을 말하거나 신선을 구하지 말게나 / 막담공체막구선

경부(경부)의 시에 차운하여 올림[봉수경부] 주희(주희)

옛날에는 내가 빙탄(빙탄)을 안고 있다가 / 석아포빙탄
그대 통하여 건곤(건곤)을 알았네 / 종군식건곤
비로소 태극의 오묘함을 알았으나 / 시지태극온
아득하여 논하기 어려웠네 / 요묘난명논
유(유)라고 어찌 자취가 있으며 / 위유녕유적
무(무)라고 무슨 실체 있겠는가 / 위무복하존
오직 수작하는 곳에서 / 유응수초처
덕을 갖춘 이만이 근본을 보리니 / 특달견본근
온갖 조화가 여기서 흘러나오고 / 만화자차류
모든 성인도 여기에 근원하네 / 천성동자원
아득히 멀어 막을 수 없고 / 광연원막어
두려워 처음에는 번뇌하지 않았네 / 척야초부번
어찌나 학문의 힘이 미약한지 / 운하학력미
아직 물욕의 혼미함을 이길 수 없네 / 미승물욕혼
처음 졸졸 흘러나오다가 / 연연시욕달
이윽고 황톳물에 섞이고 마는구나 / 이피황류탄
어찌 한 치의 아교가 / 개지일촌교
천 길 혼탁한 물을 구할 줄 알았으랴 / 구차천장혼
서로 잘못됨이 없도록 힘쓸지니 / 면재공무두
이 말 서로 행하도록 노력하세나 / 차어기상돈

서재에서 감회에 젖어 20수 [재거감흥 이십수] 주희(주희)

내가 진자앙(진자앙)의 〈감우(감우)〉 시를 읽어보니 말뜻이 깊고 음절이 호탕하여 당시 시인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점이 좋았다. 마치 단사(단사)ㆍ공청(공청)ㆍ금고(금고)ㆍ수벽(수벽)들이 비록 근세에 잘 쓰이지 않는 약재요 물건들이긴 해도 사실은 세상에 희귀하여 구하기도 어려운 자연이 주는 기이한 보물인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체를 본떠 보려고 십여 편의 시를 지어보았는데, 원래 생각하는 바가 평범하고 필력도 약해 끝내 그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 그가 이치에는 정밀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 선불(선불) 사이에서 노는 것을 고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점이 한스럽기도 하였다. 일 없이 서재에 있으면서 우연한 기회에 내키는 대로 써본 것이 시 20편이 되었다. 그 내용이 비록 미묘한 이치를 탐색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인이 한 말을 꼭 추적한 것도 아니지만 그 모두가 일상생활에 있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표현도 평이하고 이해하기도 쉬워 우선 이것으로 나 스스로를 깨우치고 또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도 주려 한다.

두루뭉술 한없이 크고 / 곤륜대무외
아득히 깊고도 넓은 것 / 방박하심광
음양은 쉴 사이가 없고 / 음양무정기
한서는 번갈아 오고 간다네 / 한서호내왕
옛 성인인 복희씨가 / 황희고신성
천지의 이치 마음으로 터득하고 / 묘계일부앙
용마(룡마)의 그림 보기도 전에 / 부대규마도
인간이 할 일 밝혀 놓았다네 / 인문이선낭
혼연히 일관된 그 이치는 / 혼연일리관
너무나도 분명하고 흐릿하지 아니하니 / 소절비상망
진중하게도 무극옹이 / 진중무극옹
우릴 위해 방향을 또 제시했지 / 위아중지장

음양의 조화를 내 보았더니 / 오관음양화
사방팔방 다 오르내리며 / 승강팔굉중
앞으로 보아도 시작이 없고 / 전첨기무시
뒤로 보아도 끝이 전혀 없네 / 후제나유종
그 속에 지극한 이치 존재하여 / 지리량사존
만세에 지금과 같으리라 / 만세여금동
누가 혼돈이 죽었다고 말했던가 / 수언혼돈사
귀머거리도 놀랄 허망한 소리지 / 환어경맹농

인심은 교묘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 / 인심묘부측
기회를 틈타 제멋대로 출입하여 / 출입승기기
얼음이 어는 듯 불에 타는 듯 / 응빙역초화
못에 빠진 듯 하늘을 나는 듯 / 연륜복천비
도덕이 높은 이는 그렇지가 않아 / 지인병원화
동정에 관계없이 마음 끄떡없다네 / 동정체무위
진주가 들어있기에 못 물은 스스로 아름답고 / 주장택자미
옥에 묻혀있기에 산 빛은 절로 눈부시다네 / 옥온산함휘
천지가 내 눈 앞에 훤하고 / 신광촉구해
오묘한 이치를 다 통하는 것인데 / 현사철만미
그 공부할 책이 당장 없으니 / 진편금요낙
어디로 가야만 한다는 말인가 / 탄식장안귀

신묘한 영대를 조용히 관찰하면 / 정관령대묘
모든 조화가 거기에서 나오는데 / 만화종차출
어찌하여 그를 다 묵혀 두고 / 운호자무예
육신의 부림을 받는단 말인가 / 반수상형역
맛있는 음식 보면 턱이 움직이고 / 후미분타이
아리따운 여인으로 나라까지 망치네 / 연자좌경국
일시에 무너질 것 깨닫지를 못하고 / 붕분부자오
계속해서 끝까지 달리기만 하다니 / 치무미종필
그대는 목천자를 보게나 / 군간목천자
온 세상을 두루 다녀보려 했다네 / 만도궁철적
만약에 〈기초(기초)〉 시가 없었더라면 / 부유기초시
서방이 천자 자리 차지했으리 / 서방어신극

경수의 배가 초택에 발이 묶이자 / 경주교초택
주 나라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 주강이능이
왕풍(왕풍)까지도 격이 떨어져 / 황복왕풍강
옛 궁터에 조만 우거져 있었다네 / 고궁서리리
성인이 춘추를 지으신 뜻도 / 현성작춘추
사실은 이를 슬퍼한 뜻이었으나 / 애상실재자
기린이 나타났다가 거꾸러지자 / 상린일이북
옷소매로 얼굴 가리고 눈물만 흘렸다네 / 반몌공련이
그로부터 또 삭막한 한백 년을 / 표륜우백년
참람한 제후들이 멋대로 놀아났으니 / 참후하작규
선왕의 법 없어진 지 오래인 것을 / 왕장구이상
슬퍼하고 한탄한들 그 무엇 하리 / 하복차탄위
사마광이 공자 업적 쓰면서도 / 마공술공업
애당초 너무 슬픈 일이었기에 / 탁시유여비
못 잊어 한 뜻이야 참 충후했지만 / 권권신충후
그리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어이하리 / 무내미선기

동경이 말고삐를 놓치자 / 동경실기어
환관들이 왕권을 농락하고 / 형신농천강
서원에는 간물들이 자리잡아 / 서원식간예
역대 충량들 기를 못 쓸 때 / 오족심충량
푸르른 천리초 / 청청천리초
제 때다 싶어 날뛰었고 / 승시기륙량
당로자들까지 흉물로 변해 / 당도전흉패
나라가 빛을 잃고 말았다네 / 염정수무광
의기양양한 좌장군 / 환환좌장군
서남 지방에서 기치를 들었고 / 장월서남강
복룡(복룡)도 힘을 내어 뛰었으며 / 복룡일분약
봉추(봉추) 역시 날개를 치면서 / 봉추역비상
한 나라 역사 다시 세우려고 / 사한배피천
동서남북에 출사를 했건만 / 출사경사방
하늘의 뜻 돌릴 길이 없었던지 / 천의경막회
한쪽에서나마 오래가지 못했다네 / 왕도부편창
위를 황제로 친 진 나라 역사를 / 진사자제위
후인들이 고쳤어야 했는데도 / 후현합갱장
세상에는 의기의 사나이가 없어 / 세무노련자
천년을 두고 슬플 뿐이라네 / 천재도비상

진양이 발판이 된 당 나라 / 진양계당조
왕명이 소봉(소봉)을 이은 것 / 왕명소소봉
내려온 전통이 이미 그렇기에 / 수통이여차
그 뒤 이은 왕이야 혼미할 수 밖에 / 계체의혼풍
티끌이 모여 천륜을 더럽히고 / 진취독천륜
암탉이 울어 흉화가 터졌지 / 빈신사화흉
국가 기강이 한 번 무너지자 / 건강일이추
하늘의 뜻도 멀어만 가서 / 천추수숭숭
음기와 독기가 왕의 자리 더럽히고 / 음독예신극
사나운 불꽃 하늘을 태웠는데 / 학염번창궁
그때 적장(적장) 같은 이들이 아니었으면 / 향비적장도
나라 중흥 누가 시켰을 것인가 / 수판취일공
그런데 어째서 구양자는 / 운하구양자
붓을 공정하게 잡지 못했던가 / 병필미지공
주의 난리 속 겪은 당 나란데 / 당경난주기
무슨 범례가 다 그랬을 것인가 / 범례숙차용
마음 강직한 범 태사가 / 간간범태사
이천에게서 그 말 들었다네 / 수설이천옹
춘추의 몇 마디 말이 / 춘추이삼책
만고의 어리석은 이 일깨워준다고 / 만고개군몽

붉은 빛이 하늘에 꽉 차 있으면 / 주광편염우
음기는 깊은 못 속으로 사라지고 / 미음묘중연
매서운 추위가 구야를 덮어도 / 한위폐구야
양기는 깊은 샘 속에서 밝아오네 / 양덕소궁천
문명한 자 근독(근독)에 어둡기도 하고 / 문명매근독
혼미해도 남보다 먼저 아는 것 있지 / 혼미유개선
소홀히 넘겨서 안 될 것 기미이고 / 기미량난홀
선의 싹은 원래가 면면한 것 / 선단본면면
몸 가리고 늘 재계하여 / 엄신사재계
모든 것 미연에 방지해야지 / 급차방미연
문 닫고 장사꾼 못 오게 하여 / 폐관식상려
저 유도에 끌리지는 말아야지 / 절피유도견

조각달이 서산에 지게 되면 / 미월타서령
뭇 별들 찬란히 빛을 내지 / 난연상성광
은하수 한쪽으로 기울고 / 명하사미낙
북두칠성 앵돌아져 있는데 / 두병저복앙
아! 저 남극과 북극이 / 감차남배극
하늘의 축이요 지도리라네 / 축추요상당
태일은 일정한 자리가 있어 / 태일유상거
바라보면 유난히도 찬란하게 / 앙첨독황황
중천에서 사방을 비추고 / 중천조사국
다른 별들은 모시듯 둘러 있네 / 삼신환시방
사람 마음도 되도록 저렇게 / 인심요여차
고요하고 치우침이 없었으면 / 적감무변방

요(요)임금은 처음부터 공경하고 통명하여 / 방훈시흠명
왕위에 앉아서도 공손하게 있기만 했다네 / 남면역공기
위대한 유정유일의 전통 / 대재정일전
만세 두고 인류 기강 확립했으며 / 만세립인기
날로 올랐음을 감탄했던 일 / 의여탄일제
목목한 경지를 노래했던 일 / 목목가경지
개를 경계한 무열이 빛난 일 / 계오광무렬
밤을 지새워 주례 만든 일 / 대단기주례
삼가 그 마음들을 생각해보면 / 공유천재심
차가운 물에 비친 가을달이지 / 추월조한수
공자는 무얼 스승 삼으셨던가 / 노수하상사
다 손질하여 성인 규범 전했다네 / 산술존성궤

내가 듣기에 복희씨가 / 오문포희씨
맨 처음에 건곤의 이치를 발명하여 / 원초벽건곤
건으로 하늘의 덕 상징하고 / 건항배천덕
곤으로는 땅을 상징했다네 / 곤포협지문
우러러 보면 둥그런 하늘은 / 앙관현혼주
단숨에라도 만리를 가고 / 일식만리분
내리 보면 네모꼴의 땅은 / 부찰방의정
천고를 그대로 버티고 있는데 / 퇴연천고존
저 상(상)을 세운 뜻을 깨달으면 / 오피립상의
이 덕에 들어가는 문과 부합하네 / 계차입덕문
쉬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 근항당부식
깊이 생각하고 지켜나가야지 / 경수사미돈

주역에는 도상이 안 보이고 / 대역도상은
시서는 틀린 곳이 많으며 / 시서간편와
예도 악도 거의 없어지고 / 례낙신교상
춘추도 잘못된 데가 많아 / 춘추어노다
보갑 속에 옥으로 장식한 거문고가 없고 / 요금공보갑
소리마저 끊겼으니 어찌할 일인가 / 절현장여하
여운을 찾아 다시 정리해야지 / 흥언리여운
용문에 아직 남아 있는 노래 있으니 / 룡문유유가
정자가 만년에 용문에 살았다.[정자만거용문지남]

안연은 사물을 실천했고 / 안생궁사물
증자는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살폈지 / 증자일삼생
중용에는 맨 먼저 근독을 말하고 / 중용수근독
비단옷 입으면 홑옷으로 덮으랬지 / 의금사상경
위대한 그 추 나라 맹씨 / 위재추맹씨
그 웅변 그칠 줄을 몰랐으나 / 웅변극치빙
마음을 잡아 보존하라는 그 한마디가 / 조존일언요
가장 강령이 되고 있지 / 위이설구령
단청처럼 그리 분명한 법이 / 단청저명법
고금을 통해 빛나고 있건만 / 금고수환병
무슨 일로 천 년이 넘도록 / 하사천재여
그 길을 가는 사람 없을까 / 무인천사경

원형이 모든 물건 생장시키는 것이라면 / 원형파군품
이정은 그 뿌리에 해당된다네 / 리정고령근
정성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것 / 비성량무유
오성을 다 가지고 있다네 / 오성실사존
세상 사람들 제 소견만 내세워 / 세인령사견
얕은 술수로 도는 더 어두워지는데 / 착지도미혼
그럴 바에야 숲속에 살면서 / 개야림거자
조화의 원리를 탐구함만 같으랴 / 유탐만화원

날고 서리고 신선이 되어보겠다고 / 표반학선려
세상 버리고 산에 가 있으면서 / 유세재운산
하늘의 비밀을 훔쳐보고 / 도계현명비
사생의 관문을 몰래 넘으려 하네 / 절당생사관
금 솥에는 용호가 서려 있고 / 금정반룡호
삼년을 신선 영약 만들어서 / 삼년양신단
그 약 입에 한 번 들어가면 / 도규일입구
대낮에 날개가 돋는다는데 / 백일생우한
나도 그 길을 가기로 들면 / 아욕왕종지
그리 어려운 일 아닌 줄 알지만 / 탈사량비난
두려운 것은 천도를 거역하면서 / 단공역천도
살기만 바라는 것이 편치 않은 것이네 / 투생거능안

서쪽에선 인연과 업보라는 말로 / 서방논연업
어리석은 중생들을 유혹하고 있는데 / 비비유군우
그 도가 전해온 지 오래되어서 / 류전세대구
하늘이 얕을세라 치솟고 있고 / 제접능공허
힐끔힐끔 심성까지 들먹이면서 / 고혜지심성
유무를 초월한다 말하고 있네 / 명언초유무
그 첩경이 한 번 열리자 / 첩경일이개
세상 사람들 너도 나도 휩쓸려 / 미연세쟁추
공만 외치면서 실천은 않고 / 호공부천실
저 가시밭길을 가고 있으니 / 지피진극도
그 누가 세 성인 뒤를 이어 / 수재계삼성
그놈의 책들을 불태워버릴까 / 위아분기서

성인이 백성들 교화 맡아 / 성인사교화
학교 세우고 인재 양육하면서 / 횡서육군재
마음에 관해 분명한 교훈이 있고 / 인심유명훈
선의 싹을 배양하도록 했으며 / 선단득심배
천서에 관하여도 소상히 말하였고 / 천서기소진
인문 역시 활짝 열어놓았는데 / 인문역건개
어찌하여 백 대 후에 와서는 / 운하백대하
학문도 끊기고 교양도 뒤틀리고 / 학절교양괴
모여 앉아 문장력이나 겨루고 / 군거경파조
너도나도 장원급제나 꿈꾸고 있어 / 쟁선관륜괴
순후한 풍속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 순풍반륜상
그렇게 해서 무얼 하자는 것인가 / 요요호위재

어린이는 바르게 길러야 하는데 / 동몽귀양정
공손이 바로 그것이라네 / 손제내기방
닭이 울면 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 계명함관즐
삼가 부모님 안부 묻고 나서 / 문신근훤량
물 길어다 땅 위에 뿌리고 / 봉수근파쇄
비 들고 온 집안 청소하지 / 옹수주실당
나아갈 땐 공순한 자세 취하고 / 진초극처공
물러와 쉴 때도 늘 단정해야지 / 퇴식상단장
맛있는 음식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고 / 구서극기자
악한 것 보기를 끓는 물을 만지는 듯이 하여 / 견악유탐탕
언제라도 거친 말투 삼가고 / 용언계추탄
행동은 반드시 차분해야 하느니 / 시항필안상
성인이 되는 길 아무리 멀다 해도 / 성도수운원
출발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 / 발인차물망
십오 세 때 학문에 뜻 두었어도 / 십오지우학
제때에 높이 날지 않았던가 / 급시기고상

아, 우산에 자란 나무를 / 애재우산목
도끼로 날마다 찍어대네 / 근부일상심
새로 돋는 싹이 왜 없을까만 / 개무맹얼생
우양이 그것마저 먹어치운다네 / 우양복내침
생각하면 저 옥황상제께서 / 공유황상제
우리에게 인의 마음 내려주셨건만 / 강차인의심
물욕이 이를 치고 빼앗고 하거니 / 물욕호공탈
외로운 뿌리 누가 과연 간직할까 / 고근숙능임
스스로 반성하고 본분을 지켜가며 / 반궁간기배
태도는 엄숙하게 의관도 단정하게 / 숙용정관금
그렇게 계속 가꾸어 가면 / 보양방자차
언젠가는 하늘 높이 우뚝하리라 / 하년수궁림

하늘은 아득하고 말이 없기에 / 현천유차묵
중니도 말없이 살고자 그랬네 / 중니욕무언
동식물도 제각기 자라는 것이며 / 동식각생수
자기 모습도 자기가 가꾸는 것인데 / 덕용자청온
남의 뜻만 따르는 저들은 / 피재과비자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면서 / 첩섭도추훤
남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으니 / 단령언사호
제 정신 나간 줄을 어찌 알겠나 / 개지신감혼
나도 전인들 교훈에 어두워 / 왈여매전훈
애꿎게 지엽만 다루어 왔네 / 좌차지엽번
이제는 용기 내어 다 잘라버리고 / 발분영간낙
뿌리 찾는 공부나 해야지 / 기공수일원

창문을 열고[영개창] 주희(주희)

어제 흙 담에 얼굴을 대하고 섰다가 / 작일토장당면립
오늘 아침 해를 향해 대나무 창문 열었네 / 금조죽유향양개
이 마음 도(도)와 같이 막힘이 없다면 / 차심야도무통새
밝고 어두움이 어찌하여 오고 가겠는가 / 명암여하유거내

극기(극기) 주희(주희)

보배스러운 거울 당년에 간담 비쳐 서늘하더니 / 보감당년조담한
근래에 까닭 없이 먼지 속에 매몰되었네 / 향래매몰태무단
이제 닦아 밝음 온전히 드러나니 / 지금구진명여견
당년의 밝은 거울 다시 보게 되었네 / 환득당년보감간

책을 보다가 감회가 일어[관서유감] 주희(주희)

반 이랑 모난 연못 거울처럼 열렸으니 / 반무방당일감개
하늘 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 천광운영공배회
어떻게 이처럼 맑게 됐느냐 물었더니 / 문거나득청여허
근원에서 활수가 나오기 때문이라네 / 위유원두활수래

봄날[춘일] 주희(주희)

좋은 날 사수(사수) 가를 찾으니 / 승일심방사수빈
끝없는 광경 일시에 새롭네 / 무변광경일시신
동풍(동풍)의 얼굴 등한히 여겼더니 / 등한식득동풍면
천만 꽃송이 온통 봄이라네 / 만자천홍총시춘

계몽(계몽) 주희(주희)

한밤중에 홀연히 들리는 한 줄기 우레 소리 / 홀연반야일성뇌
천만 문호(문호)가 차례로 열리네 / 만호천문차제개
무(무) 가운데 유(유)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알면 / 야식무중함유상
직접 복희씨를 보았다고 하리라 / 허군친견복희내

백록동서원 게시[백록동서원게시] 주희(주희)

부자 사이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 사이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 사이에는 분별이 있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위는 다섯 가지 가르침의 조목이다. 요순(요순)이 설(계)을 사도(사도)로 삼아 다섯 가지 가르침을 경건히 베풀게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이를 배우는 것일 뿐이며, 배우는 순서 또한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그 구별은 다음과 같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한다.
위는 배우는 순서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독실하게 행하는 것은 수신(수신)에서부터 처사접물(처사접물)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요목이 있으니 그 구별은 다음과 같다.

말은 충직하고 신실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경건해야 한다. 분노를 참고 욕심을 막고, 선한 데로 옮겨가고 허물을 고쳐야 한다.
위는 수신의 요체이다.

의를 바로잡고 사욕을 꾀하지 말아야 하고, 도를 밝히고 공로는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위는 처사의 요체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행하여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하라.
위는 남을 접할 때의 요체이다.

창주정사에서 학자들에게 유시함[창주정사유학자] 주희(주희)

노소(노소)가 말하기를,
“처음 학문을 하여 문장을 지을 때 《논어(논어)》ㆍ《맹자(맹자)》와 한유(한유) 및 기타 성현의 글을 가지고 하루 종일 단정하게 읽은 것이 7, 8년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당황스러워 의혹하고 밖에서 널리 보고서는 이상하여 놀랐는데, 오래 되어 읽은 것이 더욱 정밀해지니 흉중이 훤하게 밝아왔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실로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아직 스스로 그 말을 표현하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속에 쌓인 말이 날로 더욱 많아져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게 되어서 시험 삼아 꺼내어 글로 써보게 되었다. 그리고 두세 번 읽다보니 원만하여 그 온 것이 평이함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내 생각에, 소씨는 단지 옛사람의 설화의 영향을 배우려고만 하였으며 그것은 매우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도 노력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 성취한 것 또한 보통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퇴지(한퇴지)ㆍ유자후(유자후)와 같은 사람들도 이와 같았으니, 이익(이익)과 위중립(위중립)에게 답한 편지에서 보면 그가 힘쓴 곳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두 좋은 문장을 지어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 한 것일 뿐이다. 마침내 자기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었는가. 도리어 허다한 세월과 정신만 소비하였으니 매우 애석하다.
지금 사람들은 도를 배우도록 말하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전혀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개 한 달 정도의 공부와 한 권 정도의 책도 익숙하게 읽은 것이 없는 자가 남의 질문을 받고서 임시변통으로 답변을 하는데, 경전(경전)의 글을 한두 줄도 들지 못하고 한두 곳도 수미(수미)가 일관되게 증명하지 못한다. 그가 능한 말이란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로 부연하여 논지를 세우는 것에 불과하고, 성현의 본뜻과 의리의 실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찌 자신에 돌이켜 참되게 보고 참되게 행하기를 바라겠는가.
이와 같이 스승을 구하느라 다리 힘만 쓰는 것은,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걸고 노소(노소)의 방법에 따라 2~3년을 기약하고서 옷깃을 여미고 바르게 앉아서 《대학(대학)》ㆍ《논어(논어)》ㆍ《중용(중용)》ㆍ《맹자(맹자)》ㆍ《시경(시경)》ㆍ서경(서경)》ㆍ《예기(예기》와 정자(정자)ㆍ장재(장재) 등의 책을 가지고 분명하게 이해한 것을 반복하여 읽고 나서, 자신의 심신으로 향하여 존양하고 사색하고 착실하게 실천하여 요약하여 들어가는 곳이 있게 된 뒤에 스승을 구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체득한 바를 가지고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니, 이것이 이른바 “도가 있는 이에게 나아가 바르게 한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학문의 성취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옳다고 볼 수 없다. 이로써 글로 써서 후학들에게 일러주는 바이다.

또 학자들에게 유시함[우유학자] 주희(주희)

글이 잘 기억되지 않으면 익숙하게 읽으면 기억할 수 있고, 뜻이 정밀하지 못한 것도 자세하게 생각하면 정밀해 질 수 있다. 오직 뜻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힘을 쓸 곳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록(이록)은 탐하면서 도의(도의)는 탐하지 않고, 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니, 이는 모두 뜻이 서 있지 않은 병통이다. 곧 모름지기 반복하여 생각하고 헤아리면, 끝내 병통이 생겨나게 된 곳을 알 수 있으며, 용감하게 떨치고 나오면 그와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될 것이다.
한 번 뛰어나와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을 보게 되면 한 가지도 실질적인 말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이에 바야흐로 뜻을 세워서 여기에 나아가 공부를 쌓고 간단없이 위로 향해 간다면 크게 일이 있을 것이다. 제군(제군)들은 힘써야 할 것이니,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다.

《소학(소학)》 제사(제사) 주희(주희)

원형이정(원형리정)은 천도(천도)의 떳떳함이요, 인의예지(인의례지)는 인성(인성)의 벼리이다. 대개 사람의 성품은 애당초 선(선)하지 않음이 없어 네 가지 단서가 감응에 따라 나타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하는 것을 떳떳하게 간직한 천성이라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억지로 함이 없다. 제(제)는 순하다는 뜻이다.
성인(성인)은 본성대로 하는 분이라 넓음이 하늘과 같아 털끝만큼도 더 보탤 것 없이 모든 선(선)을 가졌다. 일반 대중은 어리석어 물욕이 마음을 가려 마침내 그 강상(강상)을 무너뜨리고 자포자기(자폭자기)를 편안하게 여긴다. 성인(성인)이 이것을 슬퍼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그 뿌리를 배양하여 가지가 뻗어나가게 하였다. 방심을 거두고 덕성을 함양하게 하는 소학의 가르침은 바로 나무의 뿌리를 배양하는 것과 같고, 총명을 계발하고 덕과 학업을 닦게 하는 대학의 가르침은 나무의 가지가 뻗어 나가게 하는 것과 같다.
소학(소학)의 교육방법은 청소하고 응대함과 집에 들어가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 공손하게 하여 행동거지가 혹시라도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고 여력(여력)이 있으면 《시경(시경)》을 외우고 《서경(서경)》을 읽으며, 읊고 노래하며 춤추고 뛰어, 생각이 혹시라도 법도에서 넘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치를 연구하고 몸을 닦음은 학문하는 일에서 큰 것이다. 하늘이 준 밝은 명이 환하여 내외가 없으니, 덕(덕)이 높고 업(업)이 넓어져야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옛날에 자포자기했을 때에도 본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에 덕(덕)이 높고 업(업)이 넓다고 해서 본성이 어찌 남음이 있겠는가. 전날 자포자기에 안주할 때에도 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고, 오늘에 덕이 높고 업이 넓어졌어도 본성이 달리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융성했던 시대가 멀어지고 성인(성인)이 다 없어져 경서(경서)가 이지러지고 교육이 해이되어, 어린이를 기르는 것이 바르지 못하고 장성하면 더욱 경박하고 사치하게 된다. 시골에는 좋은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훌륭한 인재가 없어 이욕(리욕)이 어지럽게 유인하고 이단(이단)의 말이 시끄럽게 서로 공격하고 있다. 다행히 떳떳한 본성은 하늘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기에, 이에 옛날 들은 바를 모아 후학들을 일깨우려 한다. 아, 소자(소자)들아 이 책을 경건히 받아 공부하라. 나의 말이 노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성인(성인)의 가르침이니라.

【주희(주희)가 채계통(채계통)에게 보낸 편지】 주희(주희)

계통(계통)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날 바위에 하락선천(하락선천)의 여러 그림을 새기는 일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는데, 마침 감군(감군)을 보니 각조산(각조산) 속 새로 정사(정사)를 지은 곳에 깎아지른 바위가 있어 글씨를 새길 만하다고 하였고, 또 한 본을 부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천도는 모름지기 괘인(괘인)으로 새겨 찍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전서나 예서로 쓴 비석의 글씨는 자획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지만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백모(백모)에게 전서로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경자(경자) 각석(각석)】 주세붕(주세붕)

문성공(문성공)의 사당 앞 깎아지른 석벽에 ‘경(경)’ 자를 새기려고 하니, 서원의 모든 벗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괴이하게 여김만 당할 뿐이라고 경계하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스스로 마음속으로 공경할 것이지 어찌 굳이 이것을 돌에 새겨야만 하겠는가?”
하기에, 나도 감히 강행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회옹(회옹)의 이 말을 찾게 되어 벗들 앞에 보이고서,
“선천(선천)의 모든 그림도 새겼는데 유독 경(경)자를 새기는 것만 안 된단 말인가? 일찍이 이르기를, ‘경은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곧 불경(불경)이다.’ 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회헌(회헌)이 회옹과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 없다. 묘원(묘원)은 비록 오래 보존되지 못하더라도 이 각석(각석)이 마멸되지 않아 1천 년 후에 이것을 일컬어 ‘경석(경석)’이라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니, 모두 좋다고 하여 드디어 새겼다.

【주자(주자) 어록(어록)】

○ 나의 안질(안질)이 이러한데, 지금도 종일토록 글씨를 쓰면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형세가 반드시 두 눈이 다 장님이 되고야 말 것이다.
이 말을 통하여 성현의 평생 노고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옷을 입고서 종신토록 편안하게 앉아 금수처럼 사는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 몇 날 서로 모여서 보니, 겸선(겸선)은 나태하고 잡스러운 병통이 있고 계통(계통)은 남에게 선을 요구함에 너무 급박한 결점이 있었다. 잡스럽게 조롱하고 농담하는 것은 문(문)으로 친구를 모으는 도리가 아니다. 제각기 치우친 부분을 바로잡아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을 보면 성현의 경계하는 도리를 볼 수 있다.

○ 스스로 차츰차츰 관대하고 화평해지는 기상을 느끼면 매우 좋다. 쉬지 않고 함영(함영)하면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 극기(극기) 과정에 항상 공책을 두고 언동(언동)의 득실을 기록한다.

○ 명성과 이욕의 바다가 사람을 빠지게 하는 것은 실로 두렵다.

○ 병중에는 잡다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존심양기(존심양기)를 힘쓴다. 다만 조용히 가부좌를 하여 눈은 코끝을 보고 마음은 배꼽 아래로 모은다. 오래 되어 절로 따뜻하게 되면 점차 효과를 보게 된다.

○ 공부를 함에는 비근(비근)을 싫어하지 않는다. 비근하면 할수록 공부가 더욱 튼실해져서 체득하는 바가 더욱 고원(고원)해진다. 고원하기만을 힘쓰는 자는 이와 반대이다.

○ 지금 사람들은 글을 읽고 문장을 지으면서 차츰 스스로 기뻐하는 데에 빠져 경박하게 되니, 도리어 시정배와 다른 것이 없다.

○ 근세 풍속이 남의 손을 빌려 과거 글을 지어 유사를 속인다. 어찌 사실이 없는 거짓 명예를 받아가지고 안으로 부형에게 자랑하고 동네에서 으쓱거릴 수 있겠는가.

○ 옛날의 군자는 아름다운 옥을 가지면 깊이 갈무리하고서 내다 팔지 않았고, 후세 사람들은 돌을 옥이라고 하고 또 자랑까지 한다.

○ 군자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장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함양하여 근본을 세운다. 입으로 외우는 일은 바른 학업이 있고 마음을 쓰는 일은 떳떳한 분수가 있다. 세상의 칭찬을 구하는 일은 부끄럽게 여겨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그보다 급한 일이 있어 여가가 없는 것이다.

○ 내가 열 예닐곱 살 때 병산(병산) 유선생(유선생)께서 나에게 자(자)를 지어주고 송축하시기를,
“나무는 뿌리가 감추어져 있지만 봄날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우고 사람 몸속이 보이지 않지만 신명(신명)이 안으로 살쪄야 한다.”
하셨다. 내가 그 말씀을 받아서 힘써 행하지 못하였는데, 세상을 살면서 우환을 범하고 실패하여 돌아온 뒤에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다.

○ 상채(상채)가 말하기를,
“근래 학자들은 앵무새처럼 말을 잘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두렵게 여길 만하다.

○ 위원리(위원리)에 대하여 어떤 이가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자, 위원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욕을 꾀하는 자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그에게 명예를 가까이한다고 비난하면 심각한 표정으로,
“사람마다 그것을 혐의하여 피한다면 선(선)을 행하는 길이 끊어질 것이다.”
하였다.

○ 장경부(장경부)가 늘 말하기를,
“학문에서 의리와 이욕을 분변하는 것보다 급선무가 없다. 의리란 본심의 당연한 것으로서 스스로도 막을 수 없고, 이욕이란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라도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면 모두 인간 욕망의 사심이고 하늘의 당연한 의리를 간직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는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 또한 옛날 성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넓혀 성선(성선)과 양기(양기)를 논한 것과 같은 공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내가 일찍이 진충숙공(진충숙공)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자신의 뜻을 기술하고 남의 선을 칭송하면서 모두 의리(의리)를 취하고 버리는 문제로 미루어 결단하였다. 이로써 공의 흉중이 항상 호연(호연)하고 미리 뜻이 정하여져 병통이 없는 것이 평소 체득한 것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맹자가 말하기를,
“요순(요순)과 도척(도척)의 차이를 알려고 하면 다른 기준이 없다. 이(이)와 선(선)에서 갈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리도 내가 원하는 바인데, 두 가지를 모두 얻지 못한다면 사는 것을 버리고 의를 취해야 한다.”
하였다. 진공의 학문은 대개 여기에서 얻은 것이고, 오직 살펴서 털끝같이 정밀하게 사색하였기 때문에 우주에 꽉 차도록 확충하였던 것이다.

○ 황언고(황언고)는 종일 꼿꼿하게 앉아 있으면서 조금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하인을 만나서도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늙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 옛날부터 남을 무고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자는 반드시 규방(규방)의 일을 끌어대는데, 그 이유는 실체를 규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사(진사)》에 보면 도사행(도사행)을 무함하려고 꿈속의 이야기를 끌어댄 일이 있는데, 이는 실체를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규방의 일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 임위(임위)는 매우 얻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깊이 교제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그가 위당(위당)에 들어가 누를 입을까 걱정스러워서이다. 다만 계통(계통)의 가정이 고을 사람들에게 갖은 방법으로 능욕을 당하여 거의 존립하지 못할 정도였을 때 그가 글을 보내 몰래 보호한 것은 잘 한 일이다.

○ 선비는 학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학문을 하여도 잘 가리는 것을 아는 것이 어렵다. 잘 가려서 과감하게 실천하여 안으로 사심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습속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 또 더욱 어렵다.

○ 앎이 지극해지면 뜻이 정성스럽게 되어 절로 사욕의 싹이 나오지 않으니, 단지 드러난 과실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만약 애써 유지하여 지키고 힘들여 억제하여 구차하게 드러난 과오를 면하려고 하면 은미한 중에 무슨 일인들 있지 않겠는가. 또한 어찌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겠는가. 뜻과 힘이 해이해지면 방자함이 사방에서 나올 것이다. 지금에 ‘학자는 모름지기 늘 흉중이 투명하고 쇄락(쇄락)해야 한다.’ 하였는데, 연평선생(연평선생)의 본의는 아닌 듯하지만 이 말이 매우 좋다. 대개 이런 경지는 견식이 분명하고 함양이 익숙하여 얻는 것이다. 반드시 진실하게 힘써 축적하여 얻어야지 하루아침에 억지로 끌어당겨 얻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 있게 되면 종신토록 의도적으로 조장하여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뿐이며, 영영 쇄락(쇄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 스스로 ‘쇄락(쇄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소략하고 방자함의 다른 명칭이다. 이런 두세 가지 병통을 함께 가지고서 어떻게 참으로 쇄락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쇄락’ 두 글자는 본래 황태사(황태사)가 한 말이다. 뒤에 연평선생(연평선생)이 끄집어내었으니, 이는 학자들에게 심조자득(심조자득)의 기상을 알아 스스로 체득한 바의 깊이를 따져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두 번 전해지고서 폐단이 이런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옛날 성현이 하학(하학)에서 힘쓸 것을 가르쳤던 것이며, 이런 것에 대하여는 말한 적이 없다. 안연(안연)ㆍ증자(증자) 이하로 이런 말을 한 이가 전혀 없다. 자사(자사)와 맹자(맹자)로 내려와서 자못 있게 되었으니, 이는 부득이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근자에 한 유파(유파)가 강서(강서)로 흘러들어가 동중서(동중서)를 짓밟고 관중(관중)ㆍ왕맹(왕맹)을 추존하였다.

○ 장식(장식)이 말하기를,
“ 이른바 ‘경솔하게 세상 선비들의 과오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화평하지 못하고 쉽게 말한 듯하다. 이치를 분석할 때는 마땅히 매우 정밀하게 하여 털끝만치도 대충 지나쳐서는 안 된다. 선배를 높이고 겸양하는 뜻도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 말이 나의 병통에 매우 절실하다.

○ 맹자가 말하기를,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려두는 자는 있지 않고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뒤로 여기는 자는 있지 않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인의(인의)가 궁극적으로 이롭다는 말이다. 그러나 동생(동생)은 말하기를,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이욕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을 계산하지 않는다.”
하였다. 인의가 꼭 다 이로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저것[이욕]을 버리고 이것[인의]를 취하는 것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개 맹자의 말이 이치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판단한 점에서 동생의 말이 힘이 있는 것만 못하다.

○ ‘홍대평수(홍대평수)’ 네 글자를 자리 옆에 써 두고 평생 생각하는 것으로 삼았다. 백공(백공)에게 답한 편지.

○ 군자의 마음은 광명정대(광명정대)하여 푸른 하늘의 태양과 같다.

회암의 여덟 자 큰 글씨[회암팔대자] 주세붕(주세붕)

학문하여 성인과 같이 되기를 구하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다.

나는 6세에 《소학(소학)》을 배워 이미 회암(회암)선생이 공자를 계승하여 후학을 계몽한 것을 알았고, 10세에는 사서(사서)의 주해를 외고 오경(오경)을 읽고서 선생께서 평생 고심한 것을 더 잘 알았다. 《강목(강목)》ㆍ《근사록(근사록)》ㆍ《초사(초사)》 등 여러 서적을 보게 된 뒤에도 《주자전서(주자전서)》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신축년에 비로소 친구로부터 《주자전서》를 빌려 보게 되었고, 금년에 또 다시 《어류(어류)》를 보게 되었다. 이에 늘 손을 씻고 정좌하여 책을 펼쳐 읽어 봄에 마치 선생을 옆에서 모시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하였다.
하루는 교수(교수) 진택(진택) 씨의 집에서 회암선생의 「학구성현 연비어약」 여덟 자 큰 글씨를 보게 되었다. 교수가 말하기를,
“나의 외숙 재상 변수(변수)가 연경(연경)에서 구해온 것이다.”
하므로, 곧 모각(모각)하여 찍어다가 잡록(잡록) 끝에 철해두고 경건하게 글씨를 감상하니 방안이 훤하였고,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되어 후인으로 태어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대개 앞의 네 글자는 학문하는 길은 모름지기 바르고 사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곧바로 가리켜 준 것이고, 뒤의 네 글자는 오묘한 이치가 숨겨져 있지 않고 항상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아, 지극하도다.
옛날에 소강절(소강절)이 ‘검속(검속)’ 두 큰 글자를 썼는데, 선생이 일찍이 그 글씨에 발문을 쓰기를,
“강절선생이 ‘큰 글씨는 뜻을 호쾌하게 한다.’ 하였으나, 그 필적의 근엄함이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지금 선생이 쓴 여덟 자 큰 글씨는 선생이 우리 유학에 마음을 쓴 것이 매우 성대한데도, 선생이 소강절의 글씨에 대하여 발양한 바와 같은 것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대저 학문이란 샛길이 많기 때문에 농포(농포)에 대한 질문이 이미 성인의 문하에서 드러났고, 권모술수와 백가중기(백가중기)가 한둘이 아니다. 교묘하게 문장을 짓는 자는 가시 끝에 원숭이를 새기는 것처럼 재주를 부리고 허무를 숭상하는 자는 적멸(적멸)을 주장하니, 노불(로불)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소황(소황)이 되고 말아, 애당초 털끝만큼의 착오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리의 오차로 멀어지고 만다.
앞의 네 글자는 학자들에게 다른 학문을 구하지 말고 반드시 성현의 학문을 구하라는 것이고, ‘연어(연어)’에 관한 말은 더욱 감동스러운 바가 있다. 이는 실로 자사(자사)가 인용하여 잘 비유한 것인데, 선생이 다시 네 글자로 가르침을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군자의 도는 부부(부부)에서 시작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가르침의 방법은 반드시 성현의 학문에서 시작하고, 그 요점은 사단(사단)을 확충하고 사물(사물)을 경계하여 삼강(삼강)이 거행되고 온갖 세목이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방대(직방대)’라고 하였고, 또 ‘경이직내 의이방외[경이직내 의이방외]’라고 하였다. 실로 곧고 바르면 나의 기(기)가 절로 커져서 천지간에 꽉 차게 된다. 그러므로 ‘그 기(기)란 의(의)와 도(도)를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기지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솔개와 물고기는 하늘과 깊은 물에 있어서, 그 하나는 날고 하나는 뛰지만 둘 다 천지의 쌓인 기운을 탄 것이다. 진실로 사람마다 호연지기(호연지기)를 쌓으면, 모두 각각 마음의 하늘과 연못에 날고뛰는 솔개와 물고기를 갖게 될 것이다. 한 이치가 활발하여 천지에 드러나니, 어찌 솔개와 물고기뿐이겠는가. 옛날부터 성현들이 즐긴 바가 여기에 있는데, 나만이 가지고서 알지 못한다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우선 이와 같이 써서 동지들과 같이 이 말대로 행하기를 청하는 바이다.

 잡록후        

【백운동치경설(백운동치경설)】 주세붕(주세붕)

내가 태백산ㆍ소백산의 여러 사찰을 보니 그 건물은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온 것이고, 그들이 신봉하는 것은 삼강(삼강)을 없애는 귀신이다. 그런데도 그 무리들이 믿고 지키는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성공(문성공)께서는 학교를 창도하고 삼강을 밝혀서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를 붙들어 세운 것이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고향 마을의 사당 하나를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면 문헌(문헌)이 있고 유서 깊은 고을의 부로(부로)ㆍ사문(사문)의 큰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실로 모든 부로와 사문들이 한 마음으로 여기에 존경하는 뜻을 다한다면 사당과 서원이 영구히 보존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중언부언하면서 마지 못하는 것은, 혹시라도 수호하는 자가 신중하지 못하여 태백산ㆍ소백산 승려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이다.

【원규(원규)】 주세붕(주세붕)

○ 첫째, 제사를 경건히 봉행할 것. 둘째, 어진 이를 예우할 것. 셋째, 사당을 잘 보수할 것. 넷째, 물자를 비축할 것. 다섯째, 서책을 점검할 것.
제사를 경건히 봉행하지 않으면 신이 흠향하지 않고, 예우하지 않으면 어진 이가 오지 않고, 사당을 잘 보수하지 않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고, 물자를 비축하지 않으면 반드시 곤궁한 상태를 맞게 되고, 서책을 점검하지 않으면 반드시 흩어져 없어지게 된다. 이 다섯 가지는 하나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

○ 사문(사문)은 총괄 점검하고 유사(유사)는 실무를 관장한다.
학전(학전)에서 생산된 것에 대하여 매년 11월에 원장(원장)이 세 권의 장부를 만들어 한 권은 관아(관아)에 보고하고 한 권은 사문(사문)에 보고하고 한 권은 서원(서원)에 유치한다. 매년 수입되는 보미(보미)는 정월마다 세 권의 장부에 기록하여 전과 같이 보고한다. 반드시 원금을 보존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이식(이식)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만일 원금을 비축하지 않고 먼저 그 이식(이식)을 사용한다면, 백성에게서 체납된 원금은 원금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이 없게 되므로, 반드시 먼저 들어온 것으로 원금에 충당한 후 그 이식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고을마다 사마소(사마소)에 많은 토지와 보미(보미)를 소유하고 있으나 더러는 손님의 접대며 혼례나 상례 등의 비용을 그 재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오래 존속시킨 곳이 적은 것이다. 서원은 반드시 선비의 양성만을 주로 하고 다른 곳에 소모하지 않아야만 어는 정도 오래 유지하면서 큰 흠결이 없을 것이다.

○ 특별히 학문에 종사하면서 신실한 이 한 명을 선택하여 원장을 삼고, 또 한 명을 선택하여 부원장으로 삼아 함께 서원의 일을 주관하게 한다.
서원의 일을 주관하는 이가 만일 먼 곳에 살면 아무리 지극한 정성이 있더라도 형편상 자주 돌보지 못하게 되어 반드시 황폐하게 되니, 반드시 대평(대평) 내외죽(내외죽)ㆍ내외동(내외동) 다섯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해야 할 것이다. 내 애당초 옛 순흥부에 사는 김중문(금중문)이라는 한 선비를 얻어 문성공 사당의 일을 관장하게 했었는데, 그의 집이 매우 가깝고 그의 마음씀씀이도 지극히 전일하여 가시넝쿨을 없애고 묘원(묘원) 창설함에 있어서 실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사의 주관과 선비의 접대에도 시종 한결같으니, 그가 오랫동안 서원을 주관한다면 반드시 중도에 폐지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젊었을 때에 산중에서 독서를 하면서 사찰을 창건한 스님을 보았는데, 그는 사찰을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그의 뜻을 보니 발이 잘리고 눈이 뽑힌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승려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유가의 선비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는 이로 말미암아 더욱 김(김) 생이 잘 수호하리라 믿으며, 실로 큰 허물이 없다면 그에게 평생 동안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선비 예우에 태만하여 교만한 빛이 천리 밖에서 먼 곳의 선비를 거절하게 된다면 단 하루라도 맡길 수 없다. 이는 진실로 유림의 선비들이 어떻게 살피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 춘추제향은 으레 마지막 달(3월ㆍ9월) 상정일(상정일)로 정하여 거행하되, 사고가 있으면 중정일(중정일)로 한다. 유고라는 것은 공사간의 기일(기일)과 같은 것이다.
대개 선성(선성)의 석전(석전)을 반드시 봄, 가을 중월(중월, 2월ㆍ8월)에 거행하는데, 여기에서 끝 달로 하는 것은 문성공은 이미 중월에 배향되었을 뿐 아니라, 공께서 상사(상이)의 청명한 날, 중양(중양)의 가절(가절)에 이곳에서 목욕하고 놀이를 즐겼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면 기꺼이 강림하여 흠향할 것이다. 제삿날에 온 고을의 부로(부노)ㆍ사문(사문)ㆍ수사(수사)가 시냇가에 모여 음복례(음복례)를 행하고 시를 읊은 후 돌아간다면, 이른바 ‘신과 사람이 서로 조화된다. ’라는 것을 반드시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삼헌관(삼헌관)과 육집사(육집사)를 갖춘다.
유사(유사)가 7일 전에 사문(사문)에게 고하고서 헌관과 모든 집사를 미리 정한다.

○ 재계하는 날 헌관이 장서(장서)를 점검하여 햇볕을 쪼이고, 담장과 집이 무너졌거나 새는지를 살펴보고, 미곡(미곡)과 기타 기물을 회계한다. 향사 당일에 여러 사문(사문)과 함께 이를 다시 살핀다.
사마소 유사(유사)는 반드시 계절마다 점검하고, 서원 유사는 달마다 점검한다.

○ 고을 수령의 자제가 이곳에 머물면서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수령의 자제가 이곳에 머물면 수행하는 하인들이 서원지기의 집안에 피해를 끼칠 뿐 아니라, 마을에까지도 폐단을 끼쳐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될 것이며,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묘정(묘정)에서 불경(불경)한 행동을 하고, 서원에서 경거망동을 하면서, 청정한 방을 보고 음탕한 생각을 하고, 깨끗한 벽을 보고 추잡한 생각을 하고, 기와와 담장을 훼손하는 일 등이 수령의 자제들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 세상에는 부형은 어질지만 자제는 어질지 못한 경우가 있고, 자제는 어질지만 부형이 어질지 못한 경우가 있으니, 나의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어찌 행실을 바꾸지 않겠는가. 그러나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진 집안이 있는가 하면, 또한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질지 못한 집안도 있으니, 나의 바람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는가.

○ 수령의 자제가 서적을 마음대로 다루게 해서는 안 된다.
서적을 제멋대로 다루게 하면 반드시 이로 인한 절취의 폐단이 생길 것이다. 자제의 마음을 부형이라도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서원 밖으로 가지고 나가 유실하게 되면 사람들이 반드시 절취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수치를 남겨 죽계수와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어찌 부형으로서 경계하지 않으며 자제로서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내가 수령 자제들을 여기에 머물지 못하게 함은 그 근원을 막고자 함이다. 그러나 큰 뜻을 가졌으나 공부할 책이 없어 지성으로 와서 공부하려는 군자라면 또한 일체 이 규례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 활쏘기와 유연(유연)을 금한다.
향음주례(향음주례)와 선비들의 문회(문회) 장소로는 이곳이 참으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나 글도 모르는 불량배들이 기생과 어울려 술에 취하여 서로 붙들고 노래를 부르며 음탕한 놀이를 하게 되면, 이는 이곳 산천(산천)의 수치가 될 뿐 아니라, 반드시 서원을 훼손할 것이니, 이들 또한 조용히 타일러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과격하게 금하여 도리어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되면 차라리 금지하지 않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게 되면 그들 스스로 이곳을 피할 것이며 금지시킬 일도 없을 것이다.

○ 서원을 지키는 네 집에 대하여는 세금과 부역을 면제시키고, 누구라도 일을 시킬 수 없고 관아에서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
오늘날 여러 고을에는 사사로이 수하(수하)를 거느리고 있는 자가 많다. 그곳에서 취하지 않고 여기에서 취한다면 이는 무인(무인) 고세(고세)에게 죄인이 될 것이다.

○ 무릇 서원에 들어오는 선비는 사마(사마)일 경우 대학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초시(초시) 입격자(입격자)로 한다. 그러나 초시 입격자가 아니더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에 뜻을 두고 조행(조행)이 있는 자로서 입학을 원하는 이는 유사(유사)가 사문(사문)에게 고하여 맞이한다.
서원을 개설한 뜻은 실로 훌륭한 인물을 맞이하려 함이다. 따라서 함부로 받아들이면 불초한 이가 끼게 되어 경비를 소모할 뿐 아니라 서책과 기물까지 훼손시킬 것이며, 어리석은 이가 옴으로써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서원의 황폐화를 초래하는 원인이니. 그 선택을 더욱이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별도로 《입원록(입원녹)》을 비치하여 서원에 들어오는 모든 선비들에게 반드시 직접 본인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고, 또한 그가 들어온 연월일을 기록한다.
대개 성명을 기록하는 것이 어찌 아무런 의미 없이 하는 것이겠는가. 뒤에 찾아온 이가 성명을 열람하면서 아무개는 수신(수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고, 아무개는 출세를 위한 학문을 하였고, 아무개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고, 아무개는 죽어서도 세상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말하게 될 것이다. 출세를 하고 못함이야 다르더라도 현우(현우)의 차이 또한 현격하다. 아,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백운동에서 주문공의 〈백록동부〉에 차운함[백운동차주문공백록동부] 주세붕(주세붕)

엄숙히 대궐에서 은총을 받들어 / 숙승은우옥계혜
흥주 옛고을 원이 되었네 / 재흥주지구강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할 것을 생각하니 / 념해애이장경혜
누구인들 타고난 성품이 선량하지 않으랴 / 숙운초부지무량
회헌이 살던 옛 마을을 찾아가니 / 자회헌지고리혜
연당(연당)이 논으로 변하여 안타까웠어라 / 민䆉稏어연당
연묵지(연묵지)가 없어지고 지금에 논이 되었다.
죽계(죽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고 / 소죽계이궁원혜
소백산의 드높은 봉우리를 우러러 보네 / 앙소백지외강
아, 그분의 순미(순미)함이여 / 의약인지순미혜
홍황(홍황)에 일월을 내걸었도다 / 게일월어홍황
주자를 예배하고 공자를 바라봄이여 / 건례주이망공혜
거친 음식 먹고 향기를 마셨도다 / 골식비이음방
노비를 바치고 도를 보호하여 / 납장획이위도혜
우리 학교에 마음을 쏟으셨도다 / 근일심어아상
나의 학문이야 한 잔의 고인 물과 같아 / 고여학지배료혜
일찍이 큰 바다를 바라볼 뜻을 가졌네 / 숙유지어망양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노력하여 / 척계명이자자혜
간단없는 하늘의 운행을 본받았도다 / 법건행어천운
웅덩이를 채운 뒤에 흘러가는 이치를 알고 / 량영과이후진혜
근원이 있는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네 / 부고원천지혼혼
진실로 중용(중용)에 의지하고 / 구득의호중용혜
또한 은둔도 달갑게 여기도다 / 역감심어행둔
옛날 현인들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 기전수이민면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하네 / 개무급어답문
더욱이 공자 사당에 배향함이여 / 신극배어선니혜
모든 제자들과 함께 나아가네 / 여군제이동진
오직 성스러운 조정에서 제향함이여 / 유성조지치향혜
모든 고을에서도 나태함이 없도다 / 체주현이무권
어찌하여 고향 마을에 제사드리는 일이 없는지 / 부하리사지궐사혜
후손들에게 부끄러울 일이네 / 비유뉵어래손
240년이 지난 지금에도 / 년이백우사십혜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하도다 / 황친승기서론
숙수사 옛 절터를 찾으니 / 방숙수지고사혜
바로 당시의 글을 읽으시던 곳이라네 / 인당년지독서
흰 구름은 어제인 듯 끼어 있는데 / 백운횡이여작혜
지극한 분 법도는 아득하도다 / 지인형기해모
폐허를 산보하다가 머뭇거리다가 / 보폐초이연저혜
마을 노인을 불러 물어보았네 / 초항로이시추
맑은 봉우리 우뚝 서서 자태를 뽐내고 / 청봉헌미이헌상혜
으슥한 시냇물 소리내며 흘러가네 / 유간함슬이쟁추
사당 세울 터를 얻어 기뻐하고 / 희립묘지득지혜
이어서 서원을 도모할 계획을 하였네 / 악서원지계도
유생들은 물결처럼 따르고 / 피장보지파종혜
큰 물 터놓듯이 거침없이 이루어졌네 / 패여수지결거
농사철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 사불탈호농시혜
세월이 쉽게 가버릴까 두려워하도다 / 구일월지기제
백록서원 경영함을 회상하니 / 상백록지경영혜
만 년 지나도 마음은 부합하도다 / 심만고지일부
골 이름을 백운동이라 고치고 / 개동호왈백운혜
이 일이 꼭 될 것을 맹세하도다 / 시아사지혹집
사당이 근엄한 모습 드러내고 / 엄묘모지환혁혜
선생의 영정도 맞이하였네 / 우유상지연입
냇가에는 나물 산에는 잣이 있어 / 계유모혜산유백혜
제물 거의 마련할 수 있게 되었네 / 서변두지가급
그윽한 난초를 맺고 경건히 대함이여 / 결유란이흠흠혜
아, 끊어진 전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 창절서지수집
학당과 강단을 열고 책을 소장하여 / 벽당단이장서혜
선비들의 강습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도다 / 기유보어강습
물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 수광광기불사혜
산봉우리 우뚝 솟아 있도다 / 산헌헌기탁립
어찌 본보기가 멀리 있겠는가 / 기가칙지재원혜
오직 덕을 굳게 잡는 것이라네 / 유일덕언윤집
비유하면 맑은 못에 비친 달과 같으니 / 비청담지인월혜
누가 손으로 잡을 것인고 / 우숙가이수습

난(란)에서 이르니,

회옹과 회헌은 / 회옹회헌
구슬을 할 줄에 꿴 듯하도다 / 관일구혜
백운동에 들어가서 / 동입백운
나뭇가지를 쳐내었네 / 척번규혜
사당은 제사드릴 만하고 / 묘가천려
강당은 학문 할 만하네 / 당가유혜
산은 높고 물줄기는 기니 / 산고수장
머물고 흘러감을 함께 하리 / 해지류혜
후대의 철인을 기다리니 / 이사래철
다시 무엇을 걱정하리오 / 부하우혜
오직 배부르고 편안함은 / 유포여안
우리가 구하는 바 아니라네 / 비소구혜

풍기속상기[풍기속상기] 주세붕(주세붕)

풍기군은 영남(령남)에서 가장 높은 등성마루에 있다.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소백산이고, 적시고 흐르는 것은 시내 셋이다. 순흥(순흥)이 이속되고부터 더욱 시서(시서)를 돈독히 하였으니, 교육에 안문성공(안문성공)ㆍ문정공(문정공)ㆍ문경공(문경공) 등 제공의 유풍(유풍)이 있다. 사람마다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효도와 공순으로 근본을 삼고 있고, 선비 된 자에 이르러서는 염치를 힘쓰고 곧고 바른 것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다. 그 풍속을 보니 매우 순박하였고, 사납고 불손하거나 의리를 망각하고 탐욕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다만 《여지지(여지지)》에 “풍속이 강퍅하다.” 하였는데, 어느 시대의 기록인지 모르겠다. 그 말이 이 고을의 풍속과 땅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수치가 되게 하고 있는데, 혹시 잘못된 말이 아닐까. 오늘날 풍속의 실상을 기록하여 훗날 이 고을의 풍속을 탐문하는 이로 하여금 취사할 바가 있음을 알게 하는 바이다.

충순위(충순위) 안공택(안공택)ㆍ안공유(안공유), 진사 안공필(안공필), 정랑(정랑) 안공신(안공신), 유학 안공건(안공건) 형제 5인은 문성공(문성공)의 후예이다. 대룡산(대룡산)에 살았다. 정랑이 우우정(우우정)을 지었다.

충순위 안배곤(안배곤)은 근후(근후)한 사람이다. 순흥 성하(성하)에 살았다. 문정공(문정공)의 아우 좨주공(제주공) 집(집)의 주손이다. 어눌하기가 마치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다. 진사 박승건(박승건)이 그의 사위이다.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일에 그가 많은 힘을 썼다.

처사 진공달(진공달)은 전적(전적) 진연(진연)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90세에 세상을 떠나자 예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그 뒤로 추모하고 제사를 올리는 일에 있어서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문학에 뛰어났는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40세가 되어서는 더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서 소요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별시위(별시위) 이윤정(이윤정)은 천성으로 효행을 타고났다. 나이 79세에도 조석으로 선영을 참배하였는데, 아무리 눈보라가 쳐도 그치지 않았다.

전 훈도(훈도) 황한필(황한필)은 남을 가르치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으며, 나이 90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 결과 온 고을 사람들로서 배운 바 깊고 얕음의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 그의 영향을 입었다. 바로 우수동주(우수동주) 황한충(황한충)의 형이며 성균학정(성균학정) 황준랑(황준량)의 외조부이다. 이전에 한충이 생원으로서 태백산 우수동(우수동)에 은거하며 스스로 ‘우수동주(우수동주)’라고 하였다. 그의 저술로 《화당시고취(화당시고취)》 2권이 있다.

전 훈도(훈도) 안철보(안철보)는 나이 80여 세이다. 기개가 헌걸차고 간사한 생각이 없었다.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대대로 죽계 가에서 살았다. 문성공의 후손은 아니지만 순흥에서 분파되었다. 내가 처음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 흥주의 고사에 대하여 모두 이 노인을 찾아가서 들었다.

전 부장(부장) 황윤(황윤)은 나이 70여 세에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어머니 나이 90세였는데, 한겨울이라도 직접 물고기를 잡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노래자(노래자)에 비하였다.

서생 안극심(안극심)은 부모를 모두 여의자 그의 형 극겸(극겸)과 더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장례와 제사를 올렸다. 집에 여종 하나가 있었는데 그 누이에게 주어 출가시켰다. 효성과 우애를 타고나서 고을 사람 중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감동하여 우는 이가 있었다.

농암(롱암) 상공(상공) 이현보(리현보)는 자가 비중(비중)이다. 벼슬을 내놓고 예안(례안)에 살았는데, 누차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별장이 고을 동쪽 마을에 있었다. 마루 앞에 일산처럼 타박한 소나무가 있었는데, 멀리 속세 밖에 있어 여름에 더위를 받지 않았으므로 공이 오면 반드시 그 밑에서 바둑을 두었다. 동안(동안)에 백발이어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 온 고을이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향선생(향선생)으로 이중량(이중량)은 자가 공간(공간)이고 농암(농암)의 아들이다. 호조 정랑을 지냈다. 안공신(안공신)은 자가 대보(대보)이고 병조 정랑을 지냈다. 진연(진연)은 자가 언묵(언묵)이고 전적(전적)을 지냈다. 황준량(황준량)은 자가 중거(중거)이고 학정(학정)을 지냈다. 지금 모두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다.

사마(사마)로는 한세림(한세림)ㆍ이극온(이극온)ㆍ황빈(황빈)ㆍ안공필(안공필)ㆍ이극검(이극검)ㆍ이계(이계)ㆍ권응삼(권응삼)ㆍ박승건(박승건)ㆍ황응규(황응규)가 있으니, 모두 고을의 선비이다.

고을 선비로는 전 만호(만호) 남희경(남희경), 전 직장(직장) 황사호(황사호) 현감 황사걸(황사걸), 전 교수 진택(진택), 전 참봉 권옥형(권옥형)ㆍ권중(권중)ㆍ허경행(허경행)ㆍ권극균(권극균)ㆍ손석기(손석기)ㆍ황찬(황찬)ㆍ이관(이관)ㆍ이린(이린)ㆍ이침(이침)ㆍ황치(황치)ㆍ금지(금지)ㆍ남정(남정)ㆍ권극평(권극평)ㆍ황사준(황사준)ㆍ황사공(황사공), 훈도 황우(황우)ㆍ신필손(신필손), 충순위 유응우(유응우)ㆍ정규(정규)ㆍ진사의(진사의)ㆍ진성(진성), 습독(습독) 이평(이평)ㆍ이연(이연), 직장 김순근(김순근)ㆍ서호(서호), 내금위(내금위) 진엽(진엽)ㆍ황해(황해), 유학 김응함(김응함)ㆍ권황(권황)ㆍ손임(손임)ㆍ김중문(김중문)ㆍ진준(진준)이 있으니, 모두 즐거이 인(인)을 행하고 불의를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이다. 이로써 고을 풍속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갔다. 부형의 이름이 올라갔으면 그 자제는 비록 수사(수사)라 하더라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풍기고적기[풍기고적기] 주세붕(주세붕)

풍기군(풍기군)은 본래 신라의 기목진(기목진)으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있는데 둘레가 매우 크다. 전하는 말에 성 서쪽 작은 냇물에 예전에 다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다락다리[루교]’라 일컬었다고 한다. 성 북쪽 큰 길은 곧 저자거리로서 욱금동(욱금동)을 횡단하여 점방산(점방산)으로 가로 걸쳐 있다. 그 위에 사장(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북청천(북청천)이라 일컫는 것이 아마도 그 당시 냇가에 활 쏘는 청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삼국) 초에 고구려가 가장 강하여 영남의 여러 군, 즉 급벌산(급벌산) 순흥(순흥)ㆍ내기(내기) 영천(영천)ㆍ옥마(옥마) 봉화(봉화)ㆍ매곡(매곡) 예안(례안)ㆍ임하진안(림하진안) 진보(진보)ㆍ청기(청기) 청송(청송)ㆍ안덕우시(안덕우시) 영해(녕해)ㆍ시홀(시홀) 영덕(영덕)ㆍ아혜(아혜) 청하(청하) 같은 곳이 모두 그에 속하였으나, 유독 기목(기목)만은 계림(계림)과 거리가 가장 멀면서도 우뚝한 진번(진번)이 되어서 적아(적아) 은풍(은풍) 서쪽을 끝내 털끝만치도 동요시키지 못하게 했으니, 그 웅장하고 강함은 천 년이 되어서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삼국사기)》를 상고해 보건대, 아달왕(아달왕) 3년인 병신년(156)에 계립령(계립령) 길을 열었고 5년인 무술년(158)에 죽령(죽령) 길을 만들었다고 하니, 곧 한(한)나라의 환제(환제) 12년이다. 상원봉(상원봉)에 옛 길의 흔적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상원사(상원사)는 곧 옛 원의 터전이다.’ 하였다. 죽령 길이 트이지 않았을 적에는 고구려가 반드시 이곳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죽령의 구부러져 나간 남쪽에 도솔봉(두솔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기도하면 곧 응험이 있다. 그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가다가 고을과 5리 정도 되는 관로(관로) 가에 우뚝 솟은 곳을 ‘등항성(등강성)’이라 하는데, 고려(고려) 태조(태조)가 이 산에 오른 지 7일 만에 백제(백제)의 항서(항서)가 왔기 때문이다. 태조의 초상이 지금도 용천사(룡천사)에 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며 온화한 모습이 바라보면 사랑스럽다. 참으로 천자의 모습이다. 한 번 노(노)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만세에 덕택을 입혔으니 왕씨(왕씨)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어육(어육)이 되었을 것이다. 사문(사문) 임제광(림제광)이라는 이가 고을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불이 났는데 초상은 완전했지만 사당은 복구하지 못하였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우리 문종(문종)의 태(태)가 명봉산(명봉산)에 안장되었고 소헌왕후(소헌왕후 세종비(세종비))의 태 및 고려(고려) 세 왕의 태가 모두 소백산(소백산)에 안장되었다. 하나의 산에 어태(어태)를 안장한 곳이 네 곳에 이르고, 한 고을에 어태를 안장한 곳이 다섯이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바이다.
내가 보니, 소백산은 북쪽에서 내려오다가 서쪽에서 솟구쳐서 그 응결된 것이 매우 웅대하여 검푸른 빛이 공중에 가로질러 있고, 그 속에 있는 봉우리들 또한 모두 수려하여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어 솟구치는 듯하다. 그 푸른 봉우리들을 한 번 바라보면 복을 응축한 것이 무궁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줄기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오면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는데, 높이는 아홉 길에 미치지 못하지만 마치 거북이 엎드린 듯한 형세를 하여 ‘영귀(령구)’라 부르니, 바로 문성묘(문성묘)의 진산(진산)이다. 사당에서 산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이는 죽주(죽주)의 옛 터이다.’ 하였다. 그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나 나라의 역사서에나 지지(지지)에서 모두 상고할 수 없다. 대저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는 것이 대다수 이런 것들이다.
순흥(순흥)은 급벌산(급벌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급산(급산)ㆍ순정(순정)ㆍ순안(순안)ㆍ흥녕(흥녕)ㆍ흥주(흥주)ㆍ순흥(순흥)으로 모두 일곱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가 마침내 이보흠(리보흠)의 사변으로 폐부되었고, 풍기(풍기)는 기목(기목)에서 시작하여 기주(기주)ㆍ기천(기천)ㆍ영정(영정)ㆍ안정(안정)으로 다섯 번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전후의 사실을 살펴볼 때 몇 번이나 흥폐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한 고을을 통하여 천하의 일을 알 만하다.
아, 세상에는 눈을 가로 뜨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영리만 생각하는 자가 있으니, 역시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아울러 기록하여 선(선)을 지향하는 자를 권면하는 바이다.

풍기 향교 이건 기문[풍기이건학교기] 주세붕(주세붕)

도가 크게 밝아진 것은 공자[중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상고시대에는 인문이 모두 미개하고 질박하였는데, 포희씨(포희씨)가 천지의 형상을 살펴 획을 그어 밝혔고 삼황오제(삼황오제)를 거치면서 그 밝음이 점점 드러났다. 주(주)나라에 이르러서 더욱 밝아졌으나 중국에서만 밝아졌고, 만국에 다 밝아지지는 못하였고, 일세에 밝아졌고 만세에 다 밝아지지는 못하였다.
대개 도를 만국과 만세에 크게 밝힌 자는 오직 공자일 뿐이다. 공자는 일월과 같아 내외가 없고 원근이 없고 고금도 없으니 도가 밝아지고 신이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필부로서 만세와 만국에 그 보답을 누리니, 비록 요(요)ㆍ순(순)ㆍ우(우)와 같은 큰 성인으로서도 그 사이에 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한 모퉁이에 있어 도를 들은 것이 가장 늦었다. 단군이 내려옴에 오히려 커졌고, 기자(기자)가 옴에 점점 밝아졌고, 이부(이부)와 사군(사군)과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에 와서 조금 밝아졌다. 문종에 이르러 문헌공(문헌공) 최충(최충)이 학교를 세울 줄을 알았으나 그 또한 중니의 틈으로 새어나온 빛을 훔친 것인데, 인륜이 위에 밝지 못하면 소민(소민)이 어찌 아래에서 본받겠는가.
그 후 회헌(회헌) 안향(안향)이 기치를 세워 크게 창도하였고 포은(포은)이 그것을 이으니 마침내 학교 설치가 우리나라에 크게 갖추어졌다. 안으로 국상(국상)에서부터 밖으로 팔도 삼백 고을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일으키고 사당을 세우지 않음이 없어 제사를 맡은 이들이 분주하게 주선하여 그 경건함이 천자를 제사하는 것 같았다 가르침이 크게 행해지고 도가 크게 밝아져 한 번에 만고 어두움을 씻음이 청천백일(청천백일)과 같아 조그마한 찌꺼기도 없으니 비록 삼대라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신축년 가을 7월에 내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먼저 성묘(성묘)를 배알하니 사당이 읍에서 7~8리의 거리에 있었는데, 기둥이 꺾여 장차 위패에 내리칠 지경이었다. 제생들은 거처할 집이 없고 가르치려 해도 강당이 없었으며, 물을 길으려 해도 우물이 없고 목욕하려 해도 냇물이 없어,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두려웠다.
8월 상정(상정)에 직접 참석하여 향사를 올리고 나서,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헌관들에게 이건(이건)할 것을 모의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으나, 한창 큰 가뭄에 고통을 받고 있는 때였으므로 바로 시행할 수 없었다. 그때 상사(상사) 황빈(황빈)씨가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청컨대 저희 집에서 쌀 50석을 낼 터이니 경비로 충당하십시오.”
하였다. 임인년 봄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도 황씨(황씨 황빈(황빈))의 쌀을 얻었기에 방백(방백) 한산(한산) 이청(이청) 공에게 보조를 청하였다. 비로소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굽기 시작하였고 고을 북쪽 3리에 터를 정하니, 소백산을 등지고 학가산(학가산)을 마주보고, 오른쪽에 도솔봉(두솔봉)이 있고 왼쪽에 금천(금천)이 있는 곳이었다. 땅이 청정하고 고을에서 가까우며 둘레가 넓고 깨끗하고 편리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그리고 선산(선산) 상공(상공) 임백령(임백령)이 한산(한산) 이공을 이어 방백(방백)이 되어 소금과 어물을 크게 이바지하여 토목공사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해 가을에 일을 시작하여 다음 해 계묘년 봄에 일을 끝마쳤다.
전우(전우)가 깊숙하고 근엄하였으며 뜰과 담장이 반듯하고 널찍하였다. 남쪽 곁으로 신문(신문)을 열었고 왼쪽에 문 하나를 내어 동쪽 뜰을 거쳐 들어가도록 하였다. 별도로 사당 동쪽에 명륜당을 세웠다. 남쪽으로 돌아 당 앞에 좌우의 서재를 세우고 중간에 정로를 열고 남쪽에 정문을 세워 빈객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좌우에 작은 문을 내어 양재(양재)의 생도가 마주 대하여 읍하고 나와 뜰에서 예를 갖출 수 있게 하였다. 창고와 사사(사사)도 일시에 모두 갖추어졌다.
8월 을해(을해)에 성신(성신)을 새로 지은 사당에 봉안하고, 3월 정축에 석채례(석채례)를 거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나서 내가 제생(제생)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사사로이 도운 이는 황씨이고, 마지막에 공적으로 은혜를 베푼 이는 임공(임공)이고, 일을 감독한 이는 선비 진준(진준)이고, 일을 한 자들은 관속(관속)입니다. 오직 태수만이 무능하여 구경만 하였는데 일이 다 이루어졌으니 유감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태수를 ‘태사(태사)’라 하지만 실로 글을 짓는 데에 졸렬하여 스스로 글을 짓지 못하였고 남에게 부탁하였으나 또한 얻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춘추로 일 한 것은 반드시 기록해야 하니, 관속의 수고로움과 진생(진생)의 부지런함과 황씨의 의로움과 임공의 어짊은 모두 기록할 만한 것입니다. 향교를 옮긴 연월일도 기록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우선 시말을 적어 제생(제생)들에게 주니, 그대들이 당대에 도가 있는 이에게 고하여 기록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개 저 사당에 들어가 밝게 제사를 올리고 강당에 올라가 인륜을 밝히고 나아가 우리 공자의 도를 크게 밝힌 철인이 후세에 무궁하게 나오기를 나는 기대합니다. 《대학》에서는 오지(오지)를 밝혔고, 《중용》에는 사미능(사미능)이 있고, 칠편(칠편 《맹자(맹자)》)에는 사단(사단)이 있고, 《논어》에는 사물(사물)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사심을 이기고 성인이 되는 묘결(묘결)입니다. 실로 학자들이 반드시 자기를 먼저 이루고 나서 남을 이루게 한다면 스승의 가르침과 제자의 배움이 거의 국가에서 학교를 세운 본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어 한두 번 변하면 또한 도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승은 창고의 곡식을 훔치고 제자는 함부로 건을 쓰게 되어 행실을 망친 걸(걸)과 이익을 좇은 척(척)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소와 말에 옷을 입힌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다 이런 것입니다.
아, 작게는 쇄소응대(쇄소응대)에서부터 크게는 수제치평(수제치평)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인들 우리 유자(유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으로서의 효도와 아우로서의 공손과 신하로서의 충성과 부인으로서의 순종 이 네 가지는 오륜에서 가장 큰 것이며, 경계하고 절차탁마하여 서로 이로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친구로부터 시작되니 그 중대함이 실로 앞의 네 가지와 대등합니다. 배움을 위하여 이 강당에 오른 자들이 서로 그 인(인)을 도울 때에 내 말을 잊지 말고, 또 도가 있는 자에게 질정 받는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가정(가정) 갑진년(1544) 가을 7월 기망(기망 16일)에 쓰다.

권6 별록        

위학(위학)

○ 공자(공자)가 말하였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하였는데 지금 학자는 남을 위하도다.” 《논어 ; 헌문》

○《예기(예기)》에서 일렀다.
“대학의 도는 명덕(명덕)을 밝히는데 있으며 백성을 친하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는데 있다. 그침을 안 이후에나 정함이 있으니 정함이 있은 이후에야 고요함이 있으며 고요함이 있은 이후에야 편안함이 있으며 편안함이 있은 이후에야 생각함이 있으며 생각함이 있은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자신의 몸을 닦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태갑(태갑)〉에 이르기를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하였고, 탕 임금의 〈반명(반명)〉에서는 ‘진실로 날로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게 하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하였다.” 《대학》

○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마음에 불평스러운 뜻이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 학이》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게 되고 학문도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충신(충신)을 주로 하고,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논어 ; 학이》

○ 맹자(맹자)가 말하였다.
“군자의 과실은 일식ㆍ월식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른다.” 《맹자 ; 공손축하》

○ 자사(자사)가 말하였다.
“군자의 미치지 못하는 바는 그 오직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구나! 숨은 것보다 더 드러남이 없고 작은 것보다 더 드러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 대저 은미함이 드러나고 지성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중용》

○ 《예기》에서 일렀다.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임이 없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고 예쁜 여색을 좋아하듯 하여야 하니, 이것을 일러 스스로 흡족함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대학》

○ 증자(증자)가 말하였다.
“열 사람의 눈이 바라보고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두렵도다.” 《대학》

○ 공자가 말하였다.
“시(시) 3백 편을 한마디로 대신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이다.” 《논어 ; 위정》

○ 공자가 말하였다.
“내 일찍이 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생각해 보았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였다.” 《논어 ; 위령공》

○ 공자가 말하였다.
“덕이 닦여지지 않은 것과 학문이 강명되지 않는 것과 의를 듣고 옮기지 못하는 것과 불선(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걱정이다.” 《논어 ; 술이》

○ 공자가 말하였다.
“작은 고을에 반드시 나만큼 충신(충신)한 사람이야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논어 ; 공야장》

○ 공자가 말하였다.
“발분하여 먹는 것조차 잊고 도를 즐겨 근심을 잊으며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한다.” 《논어 ; 술이》

○ 공자가 말하였다.
“음식은 포식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은 믿음이 있으며,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질정한다면, 그는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 학이》

○ 공자가 말하였다.
“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오히려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논어 ; 태백》

○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혼미하여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 《논어 ; 선진》

○ 공자가 말하였다.
“인(인)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어리석게 되고, 앎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방탕하게 되고, 신의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남을 해치게 되고, 올곧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절박한 것이 되고, 용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난동이 되고, 강함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경망한 것이 된다.” 《논어 ; 양화》

○ 공자가 말하였다.
“시를 통하여 흥기하고 예를 통하여 서고 음악을 통하여 완성한다.” 《논어 ; 선진》

○ 공자가 말하였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닌다.” 《논어 ; 술이》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경(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 경과 의가 서게 되면 덕이 외롭지 않게 된다.” 《주역 ; 문언전》

○ 자사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길을 갈 때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오를 때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중용》

○ 공자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의 흙을 올리지 못하고 말더라도 내 자신이 그만 두는 것이며, 비유하면 땅을 고를 때 한 삼태기의 흙을 부으러 나아가는 것도 내가 가는 것이다.” 《논어 ; 자한》

○ 공자가 말하였다.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단속한다면 또한 어김이 없을 것이다” 《논어 ; 안연》

○ 공자가 말하였다.
“싹이 자라고서도 이삭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삭을 피우고도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논어 ; 자한》

○ 맹자가 말하였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 할 수 없다. 예의를 비난하는 것을 두고 자신을 해친다고 이르고, 자신은 인(인)에 살고 의를 따르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라 이른다.” 《맹자 ; 이루상》

○ 번지(번지)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였다. 채마밭 가꾸는 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말하기를,
“나는 채마밭을 가꾸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였다. 번지가 나가니, 공자가 말하기를,
“소인이로다. 번수(번수)여!”
하였다. 《논어 ; 자로》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논어 ; 이인》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 《논어 ; 헌문》

○ 조교(조교)가 묻기를,
“사람들이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천천히 가면서 윗사람을 따르는 것을 공손하다 하고, 빨리 나아가 윗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을 불손하다 한다. 대저 천천히 가는 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없는 바이겠는가?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요순의 도는 효도와 공경일 뿐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요임금의 행실을 행하면 요임금이 되고 걸(걸)의 행실을 행하면 걸이 될 뿐이다.”
하였다. 《맹자 ; 고자하》

○ 《예기》에서 일렀다.
“〈진서(진서)〉에서 이르기를 ‘어떤 신하가 지성스럽고 전일하면서 다른 기예가 없으나, 그 마음씨가 아름답고 너그럽다. 남의 장점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남의 좋은 행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입에서 나온 것보다 더 잘 한다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어서 자손과 백성을 보존할 수 있으니, 실로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남의 장점을 시기하고 남의 좋은 행실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니, 또한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다.” 《대학》

○ 맹헌자(맹헌자)가 말하였다.
“ ‘말을 기르는 자는 닭과 돼지를 살피지 않고, 얼음을 쓰는 집안은 소와 양을 기르지 않고, 백승(백승)의 대부는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두지 않으니,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둘 바에야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리라.’ 하였으니, 이것을 일러 ‘나라는 재물을 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의(의)를 이로움으로 여긴다.’라는 것이다” 《대학》

○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는 왜 꼭 이익을 말하십니까? 역시 인의(인의)일 뿐입니다. 왕께서 ‘어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시면 대부(대부)는 ‘어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이고, 사(사)와 서인(서인)은 ‘어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입니다. 상하가 서로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내버려두는 자는 없고 의로우면서 임금을 뒤로 여기는 자는 없습니다. 왕께서는 역시 인의인의)를 말하면 될 뿐입니다. 어찌 꼭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맹자 ; 양혜왕상》

○ 맹자가 말하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 힘써 선을 행하는 자는 순(순)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 힘써 이득을 취하는 자는 도척(도척)의 무리이다. 순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려면 다른 것이 없다. 이(이)와 선(선)의 사이이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나의 호연지기(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곧음으로써 길러 해로움이 없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되며, 그 기는 의와 도를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는 의(의)가 쌓여서 생겨난 것이니 의가 갑자기 엄습(엄습)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 《맹자 ; 공손축상》

○ 맹자가 말하였다.
“천하의 넓은 자리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큰 도를 행하며,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가 음탕하게 만들지 못하고 빈천이 뜻을 바꾸게 하지 못하고 위력이 굴복시키지 못하니, 이와 같은 자를 대장부라고 이른다.” 《맹자 ; 공손축상》

○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에게 변고가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맹자 ; 진심상》

○ 공자가 말하였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괴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 《논어 ; 술이》

○ 공자가 말하였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궁벽한 곳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번민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다. 어질도다. 안회여!” 《논어 ; 옹야》

○ 공자가 말하였다.
“안씨(안씨)의 아들은 거의 완성된 인물이다. 불선(불선)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었고, 알고서 다시 행한 적이 없었다.” 《주역 ; 계사하전》

○ 공자가 말하였다.
“안회(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택하고, 한 가지 선(선)을 얻으면 가슴속에 꼭 간직하여 잃지 않는다.” 《중용》

○ 안연이 말하였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자만이 그와 같을 수 있다.” 《맹자 ; 등문공상》

○ 공자가 말하였다.
“회는 나를 도와주는 자가 아니다. 내가 하는 말에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니.” 《논어 ; 선진》

○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안회와 종일 이야기할 때에 거스르는 것이 없어 마치 어리석은 듯하였다. 그런데 물러나가서 생활하는 것을 살펴보니 역시 그 말을 밝혀 행하였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도다.” 《논어 ; 위정》

○ 공자가 말하였다.
“말해주면 행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은 자는 오직 안회이다.” 《논어 ; 자한》

○ 공자가 안연을 두고 말하였다.
“아깝도다!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만 보았고 그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논어 ; 자한》

○ 공자가 말하였다.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과실을 두 번 되풀이 하지 않았다.” 《논어 ; 옹야》

○ 증자가 말하였다.
“능하면서 무능한 이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 모르는 이에게 묻고, 가지고서도 없는 듯이 하고, 차있으면서도 빈 듯이 하며, 남이 범하여도 따지지 않는 것, 그 행실을 예전에 내 친구가 행하였었다.” 《논어 ; 태백》

○ 공자가 말하였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넘도록 인(인)을 어기지 않는다.” 《논어 ; 옹야》

○ 공자가 안연을 두고 말하였다.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려두면 은둔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 술이》

○ 안연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계시더니 홀연히 뒤에 계시도다. 부자께서는 차근차근 잘 이끌어 문(문)으로써 나를 넓혀주고 예(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셨기에,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 둘 수 없어 나의 재능을 다하게 되었다. 서 계신 곳이 우뚝하여 따라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 《논어 ; 자한》

○ 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하(하)나라의 책력을 행하고 은(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주)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소무)를 할 것이다. 정(정)나라의 음악을 추방하며 말 잘 하는 사람을 멀리할 것이니, 정나라의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다.” 《논어 ; 위령공》

○ 안연이 말하였다.
“선(선)을 과시하지 않고 공로를 과장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논어 ; 공야장》

○ 안연이 인(인)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사심을 이겨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을 허여할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안연이 말하기를,
“그 조목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안연이 말하기를,
“제가 민첩하지 못하오나 그 말씀을 행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논어 ; 안연》

○ 중궁(중궁)이 인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문을 나가면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해야 하며,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서 원망이 없고 가(가)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하니, 중궁이 말하기를,
“제가 민첩하지 못하오나 이 말씀을 행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논어 ; 안연》

○ 공자가 말하였다.
“증삼(증삼)은 노둔하다 ” 《논어 ; 선진》

○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충성을 다하였던가? 친구와의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던가? 전수하기만 하고 익히지 않았는가?” 《논어 ; 학이》

○ 공자가 말하기를,
“삼(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하느니라.”
하니, 증자가 ,
“예, 그렇지요.”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니, 증자가 답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충)과 서(서)일 뿐이다.”
하였다. 《논어 ; 이인》

○ 맹자가 말하였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몸에 돌이켜 성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없고, 서(서)로 힘써 행하면 인을 구함에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맹자 ; 진심상》

입교(립교)

○ 공자가 말하였다.
“가르침이 있으면 선인과 악인이 따로 없게 된다.” 《논어 ; 계씨》

○ 자사(자사)가 말하였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성)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교)라 한다.” 《중용》

○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에게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을 입어서 편안히 거처하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와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성인이 걱정하여 설(계)을 사도(사도)로 삼아 인륜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부자간에 친함이 있고 군신간에 의리가 있고 부부간에 분별이 있고 장유간에 차례가 있고 붕우간에 믿음이 있는 것이다.” 《맹자 ; 등문공상》

○《예기》에서 일렀다.
“남녀 간에 구별이 있고 나서 부자간에 친함이 있고, 부자간에 친함이 있고 나서 의가 생겨난다. 의가 생겨난 뒤에 예가 만들어지고, 예가 만들어 진 뒤에 만물이 편안할 수 있게 된다. 분별이 없고 의가 없는 것은 금수의 도이다” 《예기》

○ [《예기》에서 일렀다.]
. “앵무새가 말을 할 수 있으나 나는 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성성이가 말을 할 수 있으나 짐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에 사람으로서 예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금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오직 금수만이 예가 없다. 그러므로 아비와 새끼가 서로 암컷을 취한다. 이 때문에 성인이 예를 만들어 사람을 가르쳐서 사람들에게 예가 있게 하여 스스로 금수와의 분별을 알게 한 것이다.” 《예기》

○ [《대학》에서 일렀다.]
“《시경》에서 ‘저 황조 언덕 모퉁이에 머물렀도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기를 ‘그칠 곳에서 그칠 줄 안 것이다. 사람으로서 새만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깊고 깊은 문왕이여, 계속하여 빛나고 경(경)에 머물렀도다.’ 하였다. 임금은 인에 머무르고 신하는 경에 머무르고 자식은 효에 머무르고 아비는 인자함에 머무르고 백성들과 교제할 때에는 신의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대학》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의 도 네 가지 중에서 나는 한 가지도 잘 하지 못한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 형을 섬기지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친구에게 바라는 것으로 내가 먼저 베풀지 못한다. 떳떳한 덕을 행하고 떳떳한 말을 신중하게 하여, 부족한 바를 힘쓰고 말을 끝까지 다하지 않아야 한다.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은 말을 돌아보아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히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용 ; 십삼장》

○ 맹자가 말하였다.
“우산(우산)의 나무가 아름다웠었다. 그러나 큰 나라 읍 밖에 있어 도끼로 벌목하니 어찌 전과 같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나무가 밤낮으로 비와 이슬을 받아 새싹을 틔우지만 소와 양을 끌어다가 먹이기 때문에 저렇게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민둥산을 보고 일찍이 나무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본성)이겠는가. 사람의 본성에 어찌 인의(인의)가 없겠는가. 자기의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매일 도끼로 찍어 내는데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수목도 밤낮으로 자라고 아침 공기를 흡수하여 기운이 깨끗해질 때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그 본능이 사람과 서로 비슷하여 차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대낮의 행위가 구속하여 잃어버리게 하며, 이것이 반복되면 밤사이에 길러진 맑은 기운(야기)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밤사이에 길러졌던 맑은 기운을 보존할 수 없게 되면 짐승과 다름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 짐승과 같은 자를 보고서 그에게 본래부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사람이 가진 본래의 성정(성정)이겠는가. 공자가 ‘꼭 잡고 있으면 간직되고 놓아버리면 없어진다. 드나드는 데에 때가 없고 그 향방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맹자 ; 고자상》

○ 맹자가 말하였다.
“마음을 기르는 데에는 욕심은 적게 가지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한 아름 되는 오동나무나 가래나무는 사람들이 기르고 싶으면 모두 기르는 방법을 알지만, 몸에 이르러서는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찌 몸을 사랑하는 것이 오동나무나 가래나무만 못하기 때문이겠는가. 다만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기 때문이다.” 《맹자 ; 고자상》

○ 맹자가 말하였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고, 사양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인)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예)의 단서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지)의 단서이다. 마치 불이 타오르고 샘물이 솟아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해(사해)를 보존할 수 있지만,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공자가 말하였다.
“부모가 낳으시니 이음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임금과 어버이가 임하시니 두터운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를 두고 덕을 어겼다 이르고, 그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자를 예를 어겼다 한다.” 《소학 ; 명륜》

○ 공자가 말하였다.
“사랑을 세움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니 바로 백성들에게 화목을 가르치는 것이고, 공경을 세움에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니 바로 백성들에게 공손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기 ; 제의》

○ 공자가 말하였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거처할 때에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 할 때에는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다하고, 병들었을 때는 근심을 다하고, 장사지낼 때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를 모실 때에는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춘 뒤라야 어버이를 섬길 수 있다.” 《소학 ; 효행》

○ [공자가 말하였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잘 하지 않고서 화(화)가 미치지 않는 자는 있지 않다.” 《소학 ; 명륜》

○ 증자가 말하였다.
“부모가 기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으며, 가까운 자가 친하지 않으면 감히 먼 외인을 사귀지 않으며, 작은 것을 살피지 못하였으면 감히 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소학 ; 명륜》

○ [증자가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백 년 중에 질병이 있고 늙음과 젊음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다시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먼저 베푼다. 부모가 죽고 나면 효도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며, 나이 들어 늙고 나면 공경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효도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고 공경하려 해도 때가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소학 ; 명륜》

○ 맹자가 말하였다.
“큰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 《맹자 ; 만장상》

○ [맹자가 말하였다.]
“순임금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고수(고수)가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가 교화되었으며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의 아버지와 자식 된 자들이 안정되었으니, 이것을 큰 효도라고 하는 것이다.” 《맹자 ; 루진상》

○ [맹자가 말하였다.]
“인의 실질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고, 의의 실질은 형을 따르는 것이다.” 《맹자 ; 루진상》

○ [맹자가 말하였다.]
“어린 아이도 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으며, 자라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마다 그 부모를 친애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다. 《맹자 ; 이루상》

○ 《예기》에 이르기를,
“노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버이와 가깝기 때문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형과 가깝기 때문이다.”
하였다. 《예기 ; 문왕세자》

○ 우(우)ㆍ하(하)ㆍ은(은)ㆍ주(주)는 천하의 성스러운 왕조이다. 연로한 이를 버려둔 적이 없었으니, 연로한 이를 천하에서 귀하게 여긴 것이 오래 되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 다음 가는 것이다. 《예기 ; 제의》

○ 한 가지 일을 행하고 세 가지 선(선)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세자가 학교에 들어가 나이로 차례를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선이란, 임금이 될 사람으로서 나이로 사양하는 것은 아버지가 있을 때의 예가 그러한 것이고, 임금이 될 사람으로서 나이로 사양하는 것은 임금이 있을 때의 예가 그러한 것이고, 임금이 될 사람으로 나이로 사양하는 것은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이 부자ㆍ군신ㆍ장유의 도리를 알게 된다. 《예기 ; 문왕세자》

○ 맹자가 말하였다.
“선정(선정)은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선교(선교)는 백성들이 사랑한다. 선정은 백성들의 재물을 얻고 선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은 선으로 나아가지 않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이 없다.” 《맹자 ; 고자상》

○ [맹자가 말하였다.]
“귀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자신이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맹자 ; 고자상》

○ [맹자가 말하였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다.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맹자 ; 고자상》

○ 《예기》에서 일렀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 맹자가 말하였다.
“그 마음을 다하면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있다. 자기의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맹자 ; 진심상》

○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까닭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 때문이다. 군자는 인으로써 마음을 보존하고 예로써 마음을 보존한다. 인한 자는 남을 사랑하고 예가 있는 자는 남을 공경한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항상 그를 공경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느닷없이 해를 끼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여 ‘내가 틀림없이 인하지 못하였고 예가 없었는가 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자가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한다. 스스로 반성해 보아 인하고 예가 있었는데도 그의 행위가 여전하면 군자는 또 스스로 반성하여 ‘내가 반드시 진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다. 스스로 반성해 보아 진실하였는데도 그 행위가 여전하면 군자는 ‘이는 또한 망령된 사람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금수와 구별하겠는가. 금수에 대하여 무엇을 따지겠는가.’ 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종신토록 하는 근심은 있어도 하루아침의 걱정거리는 없다. 근심해야 할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순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임금은 천하에 모범이 되어 후세에 이름을 전하였는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향인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근심해야 할 일이다. 근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순임금처럼 할 따름이다. 군자는 걱정할 것이 없으니, 인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설사 하루아침의 걱정거리가 있더라도 군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맹자 ; 루진하》

○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법에 따라 행하고 천명을 기다린다.” 법이라는 것은 천리의 당연한 것이다. 《맹자 ; 진심하》

○ 《예기》에서 일렀다.
“이른바 몸을 닦음이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성내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학》

○ 공자가 말하였다.
“비루한 사람들과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하여 걱정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를 걱정한다. 실로 잃게 될 것만을 걱정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논어 ; 양화》

○ 공자가 말하였다.
“대신(대신)이란 도(도)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불가능하면 그만두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 ; 선진》

○ 맹자가 말하였다.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질책하는 것은 공(공)이라 하고, 착한 것을 진술하고 나쁜 것을 막는 것을 경(경)이라 하며, 우리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해치는 것[적]이라 한다.” 《맹자 ; 루진상》

○ [맹자가 말하였다.]
“관사의 책임을 맡은 자는 그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떠나가야 하고, 언관의 책임을 맡은 자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가야 한다.” 《맹자 ; 공손축하》

○ 자사가 말하였다.
“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를 행하고,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을 행하고, 이적(이적)에 처해서는 이적을 행하고,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을 행한다. 따라서 군자는 어디를 가나 자득(자득)하지 않음이 없다.” 《중용 ; 십사장》

○ 공자가 말하였다.
“거처할 때에 공손하고 일을 집행할 때에 경건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 충신(충신)하여야 하니, 이는 비록 오랑캐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논어 ; 자로》

○ [공자가 말하였다.]
“말이 충신하고 행실이 독실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해질 수 있거니와,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행실이 독실하고 경경하지 못하면 고을에서인들 행해지겠는가.” 《논어 ; 위령공》

○ [공자가 말하였다.]
“그 나라에서 살면 그 나라의 대부 중에서 훌륭한 이를 섬기고 선비 중에서 어진 자를 벗으로 삼아야 한다.” 《논어 ; 위령공》

○ 증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문(문)으로 친구를 모으고, 친구와의 교제로 인(인)을 돕는다.” 《논어 ; 안연》

○ 공자가 말하였다.
“친구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여야 하고, 형제간에는 화락하게 하여야 한다.” 《논어 ; 자로》

○ 맹자가 말하였다.
“선(선)으로 질책하는 것은 친구의 도리이다.” 《맹자 ; 이루상》

○ 자공이 벗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충심으로 말해주고 잘 인도하되,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두어 스스로 욕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논어 ; 안연》

○ 공자가 말하였다.
“안평중은 남과 더불어 사귀기를 잘 하였는데, 오래 되어도 공경하였다.” 《논어 ; 공야장》

○ [공자가 말하였다.]
“유익한 벗 셋이 있고 손해되는 벗 셋이 있다. 벗이 곧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고, 벗이 치우치고 외면의 거둥에 익숙하고 정직하지 않음이다. 유순하고 말만 잘하면 손해된다.” 《논어 ; 계씨》

○ 《예기》에서 일렀다.
“군자는 남의 즐거움을 다하지 않고 남의 충성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사귐을 온전하게 한다.” 《예기 ; 곡례》

○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기를 생각하고, 듣는 것은 분명하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모습은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은 충신하기를 생각하고, 일을 대하여는 경건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나는 일을 만나면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가 일면 나중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한다.” 《논어 ; 계씨》

○ 증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귀중히 여기는 도가 세 가지 있다.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사나움과 태만함을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꿀 때에는 성실함에 가깝게 하며, 말과 소리를 낼 때에는 비루함과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멀리하는 것이다.” 《논어 ; 태백》

○ 《예기》에서 일렀다.
“군자는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빛을 귀담아 두지 않고 눈여겨 두지 않고, 음란하고 사특한 예절이 마음에 접하지 않도록 하고, 게으르고 오만하고 사악한 기운을 몸에 두지 않아서, 귀ㆍ눈ㆍ코ㆍ입ㆍ마음과 온 몸이 순리와 정직을 말미암게 하여 의를 행한다.” 《예기》

○ “무릇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예의를 갖추는 일의 시작은 체모를 바르게 하고 안색을 엄숙하게 하고 사령을 순하게 하는 데에 있다. 체모가 바르고 안색이 엄숙하고 사령이 순한 뒤에 예의가 갖추어진다. 그것으로 군신 관계를 바르게 하고 부자간에 친하게 하며 장유가 화락하게 한다. 군신 관계가 바르게 되고 부자가 친하게 되고 장유가 화락한 뒤에 예의가 서게 된다.” 《미상》

○ “군자의 용모는 차분하고 윗사람을 보면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발 모습은 중후하게 하고, 손 모습은 공손하게 하고, 눈 모습은 또렷하게 하고, 입 모습은 꼭 다물고 있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하고, 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기풍은 엄숙하게 하고, 서있는 모습은 덕스럽게 하고, 얼굴 표정은 씩씩하게 가져야 한다.” 《소학 ; 경신》

○ “텅 빈 것을 잡을 때에도 가득 찬 것을 잡는 것처럼 하고, 빈집에 들어가더라도 사람이 있는 것 같이 하라.” 《미상》

○《논어》에서 일렀다.
“공자가 고향마을에 있을 때에는 신실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조리 있게 하면서도 조심하였다.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할 때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할 때에는 온화하게 하였다.” 《논어 ; 향당》

○ 자사가 말하였다.
“희로애락(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중(중)’이라 하고, 나타나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화)’라 한다. 중(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화)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도이다.” 《중용》

○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아주 적다. 보통사람은 그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전한다.” 《맹자 ; 이루하》

○ [맹자가 말하였다.]
“순임금은 사물의 이치를 밝게 살폈고 더욱이 인륜에 대하여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가진 인의(인의)를 통하여 행한 것이지 억지로 외면의 인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맹자 ; 이루하》

○ [맹자가 말하였다.]
“우(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선한 말을 좋아하였다. 탕(탕)은 중도를 잡고 어질면 등용하고 사람 차별을 하지 않았다. 문왕(문왕)은 백성들이 편안한데도 볼 때마다 아픈 사람을 보듯이 하였고, 도가 이르렀는데도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무왕(무왕)은 가까이 있는 자를 친압하지 않고 먼데 있는 자를 잊지 않았다. 주공(주공)은 세 왕의 법도를 겸하고 네 가지의 일을 행하였는데, 부합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밤낮으로 생각하였고 다행히 터득하면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맹자 ; 이루하》

○ [맹자가 말하였다.]
“왕도정치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시)가 없어졌고, 시가 없어진 뒤에 《춘추》가 지어졌다. 진(진)나라의 승(승)과 초(초)나라의 도올(도올)과 노나라의 춘추(춘추)는 한가지이다. 그 사실은 제환공(제환공)과 진문공(진문공)에 관한 것이며 그 글은 사관의 글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의리는 내가 나름대로 취한 것이다.” 《맹자 ; 이루하》

○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직접 공자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다른 이에게서 그 도를 배워 내 몸을 선하게 하였다.” 《맹자 ; 이루하》

○ 명도(명도)가 말하였다.
“확 트여 크게 공평하고, 외물이 오면 순조롭게 대응한다.” 《성리대전 권33》

○ 유안례(유안례)가 백성들에게 임하는 방법에 대하여 물으니 명도가 말하였다.
“백성들을 부림에 각기 그 뜻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정유서 ; 명도행상》

○ 명도가 말하였다.
“천지가 물건을 생성하는 기상을 살펴보아야 하니, 만물의 생의(생의)가 가장 살펴볼 만하다.” 《근사록 ; 도체》

○ 천지가 물건을 낳음에 각각 부족한 이치가 없으니, 항상 천하의 군신ㆍ부자ㆍ형제ㆍ부부 사이에 다소 직분을 다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근사록 ; 도체》

○ 인(인)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 바른 이치를 잃으면 질서가 없고 조화가 되지 못한다.” 《논어 ; 팔일 주》

○ 처음 벼슬하는 선비가 참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명심보감 ; 치정》

○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근사록 ; 도체》

○ 명도가 고을 관리가 되어서 앉아 있는 곳에 모두 ‘시민여상(시민여상 백성들을 볼 때 아픈 사람 보듯이 한다.)’ 네 글자를 써놓고, 늘 말하기를 “나는 항상 이 네 글자에 부끄럽다.” 하였다. 《근사록 ; 정사》

○ 명도가 말하였다.
“《시경》 관저(관저)ㆍ인지(린지) 시의 아름다운 뜻을 가진 뒤라야 주례(주례)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 《근사록 ; 치체》

○ 선왕의 세대에는 도(도)로 천하를 다스렸는데 후세에는 법으로 천하를 잡고 있다. 《근사록 ; 치체》

○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사람의 선한 마음은 잘 기르면 악이 저절로 사라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공경과 겸양으로 인도하면 다툼이 저절로 사라진다. 《근사록 ; 치체》

○ 천하를 다스림에는 풍속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인재를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근사록 ; 치법》

○ 의리와 객기(객기)는 항상 서로 이기려 한다. 이 둘의 소장(소장) 비율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된다. 장횡거(장횡거)가 말하였다. “희학(희학)은 일을 해칠 뿐 아니라 뜻이 기에 의해 휩쓸리게 된다. 희학을 하지 않는 것도 몸을 단속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고 드디어 〈동명(동명)〉을 지었다. 《근사록 ; 극기》

안이 중후하면 외부의 가벼운 것을 이길 수 있고, 체득함이 깊으면 작은 유혹도 볼 수 있다. 《근사록 ; 위학》

○ 사심을 이기면 노여움을 다스릴 수 있고, 이치에 밝으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 《근사록 ; 극기》

○ 게으른 마음이 한 번 생기면 그것이 곧 자포자기이다. 《근사록 ; 위학》

○ 사람이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색하기 때문이다. 인색하기 때문에 호연지기가 없다.” 《근사록 ; 극기》

○ 군자는 마땅히 하늘을 대하여야 한다. 《근사록 ; 도체》

○ 증점과 칠조개는 이미 큰 뜻을 보았다.” 《근사록 ; 위학》

○ 배우지 않으면 곧 늙고 쇠하게 된다. 《근사록 ; 위학》

○ 넓고 넓은 도에 대하여 어느 곳에서 시작할 것인가. 오직 지성(지성)이라야 자리잡게 할 곳이 있게 된다.” 《근사록 ; 위학》

○ [정호(정호)가 사량좌(사량좌)에게 말하기를,]
“학문함에 마음과 말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행하지 않는가?”
하여, 사량좌가,
“알려주십시오.”
하니, 정호가 답하기를,
“정좌(정좌)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천은 정좌한 사람을 볼 때마다 잘하는 공부라고 감탄하였다. 《근사록 ; 존양》

○ 모름지기 마음을 크게 가져 탁 트이게 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9층의 누대를 쌓을 때 반드시 기단을 크게 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과 같다. 《근사록 ; 위학》

○ 성품이 고요한 자만이 학문을 할 수 있다. 《근사록 ; 위학》

○ 날마다 나아가지 않는 자는 반드시 날마다 퇴보한다. 《근사록 ; 위학》

○ 학문을 논하려면 반드시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를 논하려면 반드시 본체를 알아야 한다.” 《근사록 ; 위학》

○ 명도(명도)는 기억하고 암송하여 박식한 것을 가지고 ‘완물상지(완물상지 외물을 좋아하여 뜻을 잃음)’라고 하였다. 《근사록 ; 위학》

○ 명도는 화락ㆍ평이하고 관대함이 많았다. 《근사록 ; 관성현》

○ 명도는 종일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사람을 대응할 때에는 온화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근사록 ; 관성현》

○ 명도는 안색을 보면 봄 햇살처럼 따뜻하였고 그 말을 들으면 마치 때맞추어 내리는 비와 같았다. 유안례(류안례)가 30년 동안 명도를 따라다녔는데 한 번도 성내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근사록 ; 관성현》

○ 이천이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는 데에 경(경)만한 것이 없다.” 《근사록 ; 존양》

○ 마음이 고요해져야 만물에 모두 생의(생의)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근사록 ; 존양》

○ 높이 쌓는 것은 반드시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근사록 ; 위학》

○ 의리에서 나오면 이욕으로 들어가고 이욕에서 나오면 의리로 들어간다. 《미상》

○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그 말이 중후하고 차분하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이 경박하고 빠르다. 《근사록 ; 존양》

○ 안온하고 중후하면 학문이 견고하다. 《근사록 ; 위학》

○ 충직하고 관대하면 공평할 수 있다. 《근사록 ; 위학》

○ 군자는 사물을 부리고 소인은 사물의 부림을 당한다. 성인의 마음은 고요하기가 물과 같다. 《근사록 ; 극기》

○ 덕과 선이 날로 쌓이면 복록이 나날이 깊어진다. 《근사록 ; 경계위학》

○ 그 나라에서 살면 그 나라의 대부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도리이다. 《근사록 ; 정사》

○ 작은 일을 부지런히 잘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근사록 ; 정사》

○ 사람에게 세 가지 불행이 있다. 소년 시절에 과거에 오르는 것이 첫째 불행이고, 부형의 세력에 힘입어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이 두 번째 불행이고, 뛰어난 재능으로 문장에 능한 것이 세 번째 불행이다. 《소학 ; 가언》

○ 승냥이와 수달도 모두 근본에 보답할 줄 안다. 부모 봉양은 후하게 하면서 조상을 모시는 일에 박하면 매우 옳지 않다. 《소학 ; 가언》

○ 부모의 견마(견마)를 대할 때에도 반드시 자기의 견마와 달리 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자식을 사랑함에 도리어 자기의 자식보다 가볍게 하고 심한 자는 원수와 같이 여기니 의혹됨이 심한 것이다. 《미상》

○ 오랜 친구라도 모름지기 공경해야 한다. 군신과 붕우 관계는 모두 경(경)을 위주로 삼아야 한다. 《미상》

○ 절개를 잃은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이면 자신이 절개를 잃는 것이 된다. 굶어죽는 것은 매우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근사록 ; 가도》

○ 자신을 질책하여 느낀 부분이 많아 남을 질책하는 것이 적다. 《근사록 ; 극기》

○ 깊은 방구석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펴진다. 《근사록 ; 존양》

○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활발한 것을 요한다. 마음이 항상 보존되면 항상 활발하고 정체하지 않는다. 《근사록 ; 존양》

○ 성인은 천지와 같은 도량을 가진 자이다. 《근사록 ; 정사》

○ 성인은 남을 질책함에 있어서 항상 늦춘다. 《근사록 ; 정사》

○ 사람들은 대다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이는 본래 기질이 화평하지 않은 것이지만 또한 도량이 좁은 것이다. 《근사록 ; 정사》

○ 경(경)은 모든 사악함을 이긴다. 《근사록 ; 존양》

○ 경(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상제를 대할 수 있다. 《근사록 ; 존양》

○ 함양하려면 반드시 경건함을 유지해야 한다. 학문에 나아가는 것은 앎을 이루는 것에 있다. 《근사록 ; 위학》

○ 성인의 도는 큰길과 같이 평탄한데, 학자들은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문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찾는다면 경전을 통하지 않겠는가. 지금 경전을 공부하는 자들이 많으나, 구슬 함은 사고 구슬은 돌려준 것과 같은 폐단이 있다. 사람마다 다 그러하다. 《근사록 ; 위학》

○ 주자가 말하였다.
“ ‘경(경)’ 한 글자가 모든 선(선)의 근본이다.”

○ 마음이 경건하지 않음이 없어야 몸이 자연히 수렴된다.

○ 군자는 날을 아껴 게으르게 하지 않는다.

○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만 가지 일의 근원이 된다.

○ 교만함은 인색함의 지엽이고, 인색함은 교만함의 근본이다.

○ 인색함이란 보이지 않는 병통 속에서 증명된다.

○ 《맹자》의 경춘장(경춘장)을 읽으면 마치 넓은 강물에 씻고 가을 햇볕을 쬐는 듯하다.

○ 공자가 증자에게 있어서는 마치 천길 높은 골짜기에서 고여 있는 물을 터놓은 것과 같아, 한번 들으면 곧 훤히 꿰뚫어 막히는 것이 없었다.

○ 천성을 극진하게 한 뒤에라야 형체를 실천할 수 있다. 사람의 형체를 가졌지만 마음이 금수와 같으면 곧 그 형체를 실천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 보는 곳이 통하여 막힘이 없고, 행하는 것이 익숙하여 어긋남이 없다.

○ 유지 존양하는 방법으로 ‘경(경)’ 한 글자 더 이상이 없다.

○ 경(경) 자의 공부는 성인의 문하에서 제일 가는 의리(의리)이니, 철두철미하여 조금이라도 중간에 끊어짐이 있으면 안 된다. 허노재(허로재)가 말하기를, “천하 고금에 선(선)은 모두 경(경) 자에서부터 일어났고, 천하 고금에 악(악)은 모두 불경(불경)에서 생겨났다.” 하였다.

○ 아직 알지 못하는 것도 경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이미 아는 것도 경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 인에 뜻을 두면 비록 과실과 어긋남이 있더라도 악이라 이르지 않는다.

○ 거울을 닦는 것에 비유하면 때가 다 없어져야 밝게 보이는 것과 같이, 사사로운 욕심이 다 사라져야 천리가 보존된다.

○ 사심을 이기는 데에는 특별히 교묘한 방법이 없다. 비유하면 외로운 군대가 갑자기 강한 적군을 만난 것과 같으니 다만 사력을 다하여 전진할 뿐이다. 무슨 물음이 필요하겠는가.

○ 상강(상강) 사람들이 과연 욕심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들불이 다 꺼지지 않아 봄바람이 불면 또 다시 타오르는 것과 같을까 두렵다.

○ 천하의 일은 반드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라야 시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말을 표방하고 행동을 다스림에 있어서 한 때의 비난과 칭찬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없고자 하는 것이다. 구양수(구양수)가 말하기를 “후세에 실로 공평하지 않다면 지금에 성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정(정)이란 성(성)이 바르고 지성이 회복된 것이다.

○ 경(경)이란 동정(동정)을 서로 통하여 일관하는 것이다.

벽사(벽사)

○ 공자가 말하였다.
“향원(향원)은 덕(덕)을 해치는 자이다.” 《논어 ; 양화》
주자가 말하였다. “향(향)이라는 것은 비루하고 속되다는 뜻이다. 유속(유속)에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하여 세상에 아첨한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나 그 끝없는 화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마치 오대(오대)의 풍도(풍도)같은 자가 참으로 이 향원(향원)이다. 덕스러운 듯하나 덕스럽지 않아서 도리어 덕을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그를 깊이 미워한 것이다.”

○ 만장이 묻기를,
“공자가 진(진)나라에 있을 때 말하기를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우리 선비들은 행실은 못 미치나 뜻이 커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으며 처음 뜻한 바를 잊지 않는다.’ 하셨는데, 공자께서는 진나라에 계시면서 어찌 노나라의 그런 선비를 생각하셨습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중용의 도를 행하는 사람을 만나서 함께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뜻이 크고 지조가 깐깐한 사람을[광견]을 택하겠다. 뜻이 큰 자는 꿈이 원대하고 지조가 깐깐한 자는 불의를 행하지 않는 점이 있다.’ 하셨으니, 공자께서 어찌 중용의 도를 행하는 자를 원하지 않았겠는가마는 반드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수준의 인물을 생각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어떠하면 광(광)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금장(금장)ㆍ증석(증석)ㆍ목피(목피)와 같은 자가 바로 공자의 이른바 광(광)에 해당하는 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무엇을 가지고 광(광)이라고 이릅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들은 뜻이 거창하여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지만, 평소에 그 행실을 살펴보면 말을 다 실천하지 못한다.”
하였다. 《맹자 ; 진심하》
정자가 말하였다. “증석(증석)이 뜻을 말하자 공자가 그것을 허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말이 곧 성인의 기상(기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행이 그 말에 부합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광자(광자)를 또 얻지 못하면 불결(불결)한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를 얻어서 함께 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견(견)이다. 이 또한 그 다음인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집 문앞을 지나가면서 내 방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는 오직 그 향원뿐이다. 향원은 덕을 해친다.’하였다.”
하니, 묻기를,
“어떤 이를 향원(향원)이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 ‘무엇 때문에 거창하게 말하는가. 말은 행실을 돌아보지 않고 행실은 말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외롭고 쓸쓸하게 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일을 하여 잘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면서 몰래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다.”
하였다. 주자(주자)가 말하였다.
“말이 향원의 본뜻을 얻었다.”

만장이 말하기를,
“한 고을이 모두 점잖은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어디 가더라도 점잖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 없는데, 공자께서 덕을 해친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비난하려 하여도 들추어낼 것이 없고, 찌르려 해도 찌를 것이 없으며, 세상 풍속과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과 영합하여, 거처하는 데에 충신(충신)한 듯하며 행하는 것이 청렴결백한 듯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 옳게 여기지만, 더불어 요순의 도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을 해친다고 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비슷하면서 아닌 것을 미워하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 이삭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말 잘하는 자를 미워함은 신(신)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정)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정악(정악)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함은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군자는 떳떳한 도를 회복할 뿐이니, 떳떳한 도가 바르게 되면 서민이 흥기하고, 서민이 흥기하면 사특한 것이 없어지게 된다.”
하였다. 《맹자 ; 진심하》
주자가 말하였다. “반(반)은 회복함이다. 경(경)은 떳떳함이니, 만세에 변하지 않는 상도이다. 흥(흥)은 선(선)에 흥기함이다. 사특(사특)은 향원(향원)과 같은 무리이다. 세상과 도의가 쇠퇴해져서 큰 경도(경도)가 바르게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이설(이설)을 내놓아 사욕을 이루려고 해서 사특함이 함께 일어나니, 이루 다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군자는 이에 대하여 또한 그 상도를 회복할 뿐이니, 상도가 회복되면 백성들이 선에 흥기하고 시비가 명백해져서 변명할 바가 없어진다. 비록 사특(사특)한 자가 있더라도 족히 의혹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공도자(공도자)가 묻기를,
“외인들이 모두 선생님이 변론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감히 묻겠습니다만,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변론을 좋아하는 것이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이다. 천하에 인간이 살아 온지가 오래 되었는데,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혼란하였다. 요(요)임금 때에는 물이 역류하여 중국에 범람하여 뱀과 용이 살아 사람들이 안정하게 살 곳이 없었다. 낮은 지역에 사는 자들은 둥지를 만들고 높은 지역에 사는 자들은 굴을 파고 살았다. 《서경(서경)》에 ‘홍수가 나를 경계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홍수(홍수)란 홍수(홍수)이다.”
하였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이는 한 번 혼란해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우(우)임금으로 하여금 물을 다스리게 하니, 우(우)임금이 땅을 파서 바다로 주입시키고 뱀과 용을 몰아내어 늪으로 쫓아 버리자, 물이 땅 중앙을 따라 흐르게 되었으니, 양자강(양자강)ㆍ회수(회수)ㆍ황하(황하)ㆍ한수(한수)가 이것이다. 험하고 막힌 것이 없어지고, 사람을 해치는 새와 짐승들이 사라진 뒤에야 사람들이 평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이는 한 번 다스려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요순(요순)이 세상을 떠나자 성인(성인)의 도가 쇠하여 폭군이 대대로 나와서 집을 파괴하여 웅덩이와 못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편안히 쉴 곳이 없었고, 밭을 버려 동산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옷을 입고 밥을 먹을 수 없게 하였으며, 사특한 말과 포학한 행동이 또 일어나 동산ㆍ웅덩이ㆍ못ㆍ늪 등이 많아짐에 금수가 이르렀는데, 주(주)의 몸에 미쳐 천하가 또 크게 어지러웠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폭군은 하(하)나라의 태강(태강)ㆍ공갑(공갑)ㆍ이규(이계)와 상(상)나라의 무을(무을)의 무리이다. 요순(요순)이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는 치란(치란)이 한 번이 아니었는데, 주(주)에 미쳐 또 한 번 크게 어지러워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주공(주공)이 무왕(무왕)을 도와 주(주)를 벌하고 엄(엄)나라를 정벌한지 3년 만에 그 군주를 토벌하고, 비렴(비렴)을 바다 모퉁이로 몰아내 죽이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0개 나라였고, 범ㆍ표범ㆍ코뿔소ㆍ코끼리를 몰아내어 멀리 쫓으니,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 《서경(서경)》에 이르기를 ‘크게 드러나셨도다. 문왕(문왕)의 계책이여! 크게 계승하셨도다. 무왕(무왕)의 공덕이여! 우리 후인들을 도와 계도하시되 모두 정도(정도)로써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하였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이는 한 번 다스려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세상이 쇠하고 도(도)가 미약해져서 사특한 말과 포악한 행동이 일어나,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이는 주(주)나라 왕실이 동쪽으로 옮긴 뒤이니, 또 한 번 혼란해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공자가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춘추)》를 지으시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이고 나를 죄줄 것도 오직 《춘추》이다.’ 하였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공자가 《춘추(춘추》를 지어 난신적자(난신적자)를 토벌하셨으니, 이는 다스림을 이루는 법이 만세에 드리워진 것이니, 이 또한 한 번 다스려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성왕(성왕)이 나오지 않아 제후가 방자하고 처사(처사)가 멋대로 의논하여 양주(양주)ㆍ묵적(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 양씨는 자신만을 위하니 임금을 무시한 것이고, 묵씨는 똑같이 사랑하니 아비를 무시한 것이다.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면 이는 금수이다. 공명의(공명의)가 말하기를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는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양주ㆍ묵적의 도가 종식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사특한 말이 백성들을 속여 인의의 정도를 꽉 막는 것이다. 인의가 꽉 막히면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 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양주는 몸을 아낄 줄만 알고 나아가 몸을 바치는 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을 무시한 것이다. 묵자는 사랑함에 차등이 없어 지친(지친)을 보기를 중인(중인)과 다름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아비를 무시한 것이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끊어져 없어진 것이니, 이 또한 금수일 뿐이다. 맹자가 공명의(공명의)의 말을 인용하여, 양묵(양묵)의 도가 행해지면 사람들이 모두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여 금수에 빠져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날 것이며 이 또한 짐승을 내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고, 사람이 또 서로 잡아먹게 됨을 밝힌 것이다. 이 또한 한 번 혼란해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내가 이를 두려워하여 선성(선성)의 도를 보호하고 양묵(양묵)을 막고 음탕한 말을 내치고 사특한 말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에 해를 끼치니, 성인이 다시 나오더라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맹자가 비록 당시에 뜻을 얻지 못하였으나, 양묵(양묵)의 폐가 이로부터 사라져 군신(군신)ㆍ부자(부자)의 도가 그 덕택에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한 번 다스려진 것이다.”

○ [맹자가 말하였다.]
“옛적에 우(우)임금이 홍수(홍수)를 막자 천하가 평온해졌고, 주공(주공)이 이적(이적)을 겸병하고 맹수(맹수)를 몰아내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공자가 《춘추(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시경(시경)》에서 이르기를, ‘이적(이적)을 정벌하니, 형서(형서)가 다스려져 감히 나를 대적할 자 없도다.’ 하였으니, 아비를 무시하고 군주를 무시하는 자는 주공(주공)도 응징한 바이다. 내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사설을 종식시키며 잘못된 행실을 막으며 음탕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찌 내가 변론을 좋아하는 것이겠는가. 마지못해서일 뿐이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삼성(삼성)은 우(우)ㆍ주공(주공)ㆍ공자(공자)이다. 사특한 설이 횡행하여 사람의 심술을 파괴함이 홍수와 맹수의 재앙보다 심하고 이적(이적)과 찬탈ㆍ시해의 재앙보다 참혹하다. 그러므로 맹자가 깊이 두려워하고 힘써 바로잡은 것이다. ‘내 어찌 변론을 좋아 하겠는가. 부득이해서이다’라고 두 번 말한 것은 깊이 뜻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도를 아는 군자가 아니라면 누가 참으로 그 부득이하였던 까닭을 알겠는가.”

○ [맹자가 말하였다.]
“말하여 양묵(양묵)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성인(성인)의 무리이다.” 《맹자 ; 등문공하》
주자가 말하였다. “말하여 양묵(양묵)의 말을 막을 수 있는 자라면 그 취향이 바르니, 반드시 도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또한 성인의 무리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가 이미 공도자(공도자)의 질문에 답하였으나 뜻이 미진하였으므로, 다시 이 말을 한 것이다. 사특한 말이 정도를 해치는 것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공격할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성현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춘추(춘추)》의 법에 난신적자(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것이고 굳이 사사(사사)만이 하는 것이 아님과 같다. 성인이 세상을 구제하고 법을 세운 뜻의 간절함이 이와 같으니, 만일 이 뜻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사특한 말을 토벌하지도 못하고 나아가 굳이 토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제창하는 자들은 그 사설(사설)ㆍ피행(피행)의 무리와 난신적자(난신적자)의 도당이 됨을 알 수 있다.”

○ 정자(정자)가 말하였다.
“양주(양주)ㆍ묵적(묵적)의 폐해는 신불해(신불해)ㆍ한비자(한비자)보다 심하고, 불씨(불씨)ㆍ노자(노자)의 폐해는 양주ㆍ묵적보다 심하다. 양주는 자신을 위하니 의(의)와 흡사하고, 묵적은 똑같이 사랑하니 인(인)과 흡사하다. 신불해와 한비자는 이론이 얕아 사람들이 문제점을 알아보기가 쉽다. 그러므로 맹자는 다만 양묵(양묵)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혹세(혹세)함이 심하기 때문이다. 불씨(불씨)의 말은 이치에 가까워 더욱이 양묵(양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폐해가 더욱 심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양씨(양씨)의 학문은 임금을 무시하는 곳으로 흘렀고, 묵씨(묵씨)의 학문은 부모를 무시하는 곳으로 흘렀다. 맹자가 그 폐단이 두려워 오히려 금수(금수)라 지칭하면서 엄정하게 내쳤다. 불씨(불씨)는 출가하여 아비를 무시하고 산에 들어가 임금을 무시하여 한 몸에 양묵(양묵)의 죄를 겸하였다. 게다가 비구는 남자이면서 부인이 없고 비구니는 여자이면서 지아비가 없으니, 이는 온 세상에 자식이 없게 한 것이다. 실로 세상에 지아비가 없고 지어미가 없어 자식이 없게 한다면 어찌 다시 인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장차 천하의 사람을 모두 먹은 뒤에라야 마음속으로 흔쾌하게 여길 것이니, 천하 만세에 재앙을 부르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맹자가 이른바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먹게 하다가 사람이 장차 서로 먹게 한다.’라는 것은 이 점에 대하여 예견한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은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이지만, 지혜로운 자 또한 멍청하게 그 속에 빠져 벗어날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실로 무슨 마음인가. 불씨(불씨)는 말하기를 ‘부처를 잘 섬기면 내생(내생)의 복을 닦을 수 있다. 화탕(화탕)을 면할 수 있고 천당(천당)에 오를 수 있다.’라고 한다. 그 말대로라면 저들 또한 천당(천당)은 좋은 곳이고 화탕(화탕)은 나쁜 곳임을 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종신토록 바위 속에서 괴롭게 지내니, 과연 그 좋은 천당(천당)이 달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죽음에 미쳐서는 그 뼈를 태우고 그 재를 날려 보내니 나쁜 화탕(화탕)이 달리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내세의 길함을 바라면서 현세의 흉함은 돌아보지 않고 있다. 아, 역시 미혹함이 심하도다. 하물며 반드시 내세의 보답이 없는 경우이겠는가.
일찍이 그 스스로 불태움을 민망히 여겼으니, 어찌도 그리 법이 참혹한가? 장차 삼강(삼강)을 끊어버린 죄를 토벌하여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형벌을 받는 줄도 모르게 해야 되겠는가. 아니면 스스로 죄악이 커서 천지 사이에 용납할 바가 없음을 알게 하여 차라리 스스로 벌주게 해야 되겠는가. 어찌 그리도 법이 참혹한가.
주자가 ‘그 죄가 난신적자(난신적자)와 같으니 사람마다 공격하면 되고 꼭 성현(성현)일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어찌 나를 속인 것이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정의를 내세워 토벌할 수는 없을 지라도, 토벌의 설(설)을 주장하는 자 또한 왕도(왕도)를 힘쓰는 무리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특한 말을 일삼는 무리와 난신적자의 무리에 빠질 것이다.”

○ 주자가 남강(남강)에 부임하여 〈여도환속방(여도환속방)〉을 내려 말하였다.
“재차 권유하는 바이다.
사람의 큰 윤리 가운데서 부부가 한 가지를 차지하면서 삼강의 으뜸이어서 이치상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왕 시대에 남자는 각각 분수가 있었고 여자는 제각기 귀의하는 곳이 있었으며, 중매자를 두어 배우자를 정하였다. 이로써 남자는 밖을 바르게 하고 여자는 안을 바르게 하여, 몸을 닦고 집을 다스려 풍속이 엄정하고 사속(사속)이 분명하였으며 인심이 화평하고 온갖 사물이 순조롭게 다스려졌다.
후세로 내려와 예교(예교)가 밝지 못하여 요망한 불법이 그 틈을 타 몰래 일어나 사설(사설)을 부르짖어 인심을 혼란케 하였다. 이에 장성한 남자는 커서 장가를 들지 않고 여자는 나이 차서 시집을 가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출가수도(출가수도)한다’ 하고, 망령되이 내세에 복을 받기를 바라고 있다.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설을 좇게 된다면 백년도 지나지 않아 인종이 없어져 천지 사이가 모두 금수의 땅이 될 것이며, 부자간의 친함과 군신간의 의로움은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기강을 유지하는 도구이나 모두 베풀 곳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그 설을 좇는 자들이 적어 인륜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들 또한 모두 용렬한 자들로서 그 말에 현혹되어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이름을 기뻐하여도 그 실상을 실천하지 못한다. 혈기가 왕성해지면서 사람의 정욕이 날로 열리게 되는데, 마음속으로는 출가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밖으로는 또한 환속을 부끄러워한다. 이에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남의 아내를 도둑질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시집 못간 처녀는 방자하게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관사(관사)가 내버려두고 잘못을 묻지 않는다면 풍속이 날로 퇴패(퇴패)해 질 것이고, 또 모두 법대로 처리한다면 범죄자가 너무 많아질 것이다. 이는 비록 그 사람이 스스로 도모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사설(사설)을 믿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또한 그 부모가 그 여자아이의 먼 장래를 생각하지 못한 죄이니, 본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실정이 애처롭다. 이것이 본직이 지난 방(방)에서 기탄없이 정녕하게 고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경계한 것이 행해지지 않은 것은 다만 처리한 범위가 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에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그들에게 여도(여도)의 이름을 가지고 그 부모형제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역시 온당하지 않으니, 마침내는 후회를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쇠하지 않는 자들은 각각 본가에 돌아가 어른들의 명을 듣게 하고, 공적인 중매를 통하여 편한 대로 혼인하게 하여 선왕의 예의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인도(인도)와 성정(성정)의 떳떳함을 따르게 하며, 불가의 요사스러운 말을 종식시키고 음란한 풍속을 일신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혼인을 시키는데 비용이 든다.’라고 한다면, 수도(수도)에도 암자와 의발(의발)의 비용이 드니, 부모로서 집안 살림 정도에 따라 그 비용을 혼인 비용으로 옮겨 쓰면 되지 않겠는가. 어찌 지나치게 사사로이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구차하게 목전의 이로움만 보고, 괴롭고 근심스러운 남녀들이 의탁할 곳이 없어 사특한 행실에 빠지고 형벌을 받게 내버려 두겠는가. 우리 장유(장유)들은 모두 이 말을 잘 듣고, 재차 깊이 생각하여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주자가 소씨(소씨 소식(소식))를 물리치는 내용으로 여백공(여백공)에게 답한 편지에서, 동래선생(동래선생) 여조겸(여조겸)으로 자(자)가 백공(백공)이다.
“보내주신 편지의 곡절(곡절)은 당신에게 깊이 바라던 바입니다. 다만 그 사이에 약간 뜻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있기에 세밀하게 토론하여 지당한 귀결점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아(피아)를 세우고 승부를 겨루는 점의 혐의는 제가 매우 비루(비루)하지만 어찌 그러한 것으로 당신에게 혐의하겠습니까. 잘 부지하여 수양하고 깊이 감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하여는 감히 마음속에 새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사악하고 편벽된 말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타 분분한 것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백공(백공)과 같은 어진 분이 익히고 보고 듣는 것에 안주하고, 사람들이 경전(경전)을 기만하고 성인을 모함하여 제멋대로 말하는데도 그다지 비난하지 않는다면, 저 같은 자가 무슨 마음으로 독선(독선)에 안주하면서 격렬하게 논하여 한 세상의 혼미함을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그 책무를 맡은 자가 있다면 저 또한 어찌 고생스럽게 이와 같이 이러쿵저러쿵 말하겠습니까. 안자(안자)의 시대에도 위에 공자가 없었다면, 그가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는 데에 반드시 방도가 있었을 것이고, 결단코 시골구석에 물러나 홀로 그 몸만 선하게 하고 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우(우)ㆍ후직(후직)ㆍ안자(안자)의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하였을 것이다’ 하였으니, 오직 맹자만이 이 이치를 보았던 것입니다. 양자운(양자운)의 무리라면 아마도 안자(안자)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을 지킨 호인(호인)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근세에는 더욱 심하여, 안자(안자)를 논한 것이 석노(석노)의 공적(공적)에 가깝습니다. 내 생각에는 실로 안자(안자)를 배우는 학자라면 그의 ‘극기복례(극기복례)’와 ‘불천노 불이과(불천노 불이과)’와 ‘불벌선 불시로(불벌선 불시로)’의 조목에 대하여 매우 다급한 때라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여깁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온당함을 살펴 체용(체용)을 겸비하여 배움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바가 없어야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용(용)이 일치하지 않는 바가 있으면 이른바 체(체)라는 것은 한 덩이 죽은 사물일 뿐이니, 어찌 참된 체(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천(이천)선생이 18세에 안자(안자)와 무후(무후)가 같지 않은 내용으로 글을 올린 것과 상채(상채)가 소무(소무)와 다른 점을 논한 것에서 보면, 곧 성인의 마음은 조그마한 사심도 없고, 다만 천명(천명)을 경외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근세에 ‘안을 닦고 밖을 물리친다.[내수외양]’라는 설과 또한 서로 관통합니다. 대개 스스로 다스리는 바가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 때문에 갑자기 토적(토적)의 마음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글에서 소씨(소씨)는 오도(오도)에 대하여 양묵(양묵)이 되지 못하며 곧 당경(당경)의 무리일 뿐이라고 하셨는데, 접때 왕장(왕장)도 이러한 견해를 말할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치를 살피지 못한 것이라 여깁니다. 대개 문(문)과 도(도)는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만약 도(도) 밖에 물(물)이 있다면 글을 짓는 자가 자기 뜻대로 쓰더라도 도(도)에 해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도) 밖에 물(물)이 없을 경우 말하여 한 가지라도 도(도)에 일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도(도)에 해(해)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 해(해)에 완급(완급)과 심천(심천)이 있을 뿐입니다.
굴송(굴송)ㆍ당경(당경)의 글을 저도 일찍이 좋아하였습니다. 얼마 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비록 거창하지만 실상은 비수(비수)와 방광(방광) 두 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날마다 그 글을 외어 그것과 더불어 변화한다면 어찌 마음에 해를 끼침이 크지 않겠습니까. 이에 물리치고 다시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에 당신의 말에 기인하고 또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한 때 형초(형초) 사이에서 지어진 것으로서 꼭 맹자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사방에 유전(유전)되어 모든 사람들이 외우기를 지금의 소씨(소씨)의 설과 같이 하였다면, 맹자를 추종하는 자들이 어찌 가만 두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소씨의 학문은 위로는 성명(성명)을 말하고 아래로는 정치의 이치를 논하니 그 말하는 바가 다만 굴송(굴송)과 당경(당경) 정도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학자들이 처음에는 그 문장 때문에 좋아하여 구차하게 하루아침의 이익에 빠지고, 오래 되면서 점점 골수(골수)에 빠져들어 다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람을 망치고 풍속을 퇴패시키는 점이 적지 않습니다. 백공(백공)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어찌 그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폄하하여 당경(당경)의 반열에 두는 것은 거의 겉으로는 배척하고 속으로는 허여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전에 정헌공(정헌공)의 집안에 전하는 글을 보니 소씨를 언급하면서 다만 ‘부박(부박)한 말’로 지목하였고, 사인장(사인장)이 지은 〈동몽훈(동몽훈)〉에서는 시문(시문)은 반드시 소황(소황)을 본받아야 한다고 극론(극론)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찍이 탄식하면서 ‘정헌(정헌)과 영양(영양) 같은 분은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분이나, 오직 사인장(사인장)의 은미한 뜻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습니다.
노형(노형)의 오늘날 논의에 대하여 기타는 논하지 않더라도 가학(가학)에 있어서는 가까운 데에서 가려져 먼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생각하여 지당한 귀결점을 찾아야 할 것이고 스스로 오류에 빠져 다시 남까지 잘못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전 편지에서 물은 바 사공(사공)의 설(설)은 정히 병통이 없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위로 성현에서부터 정씨(정씨)의 설(설)로서 하학(하학)을 논한 것까지 자세히 상고하니 의관을 바로하고 용모를 엄숙히 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한 뒤에 마음이 보존되고 사벽(사벽)함에 빠지지 않으니, 《주역》에서 이른바 ‘사특함을 막고 지성을 간직한다’라는 것과 정씨(정씨)가 이른바 ‘밖에서 제어하여 그 마음을 기른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한편으로 치우쳐 의장(의장)과 기수(기수)의 말단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바른 것과 조심하는 것이 바로 예(예)의 근본입니다. 석씨(석씨)의 견해는 아무런 까닭 없이 흉중에 있는 소이연을 물리치는데, 그 실상은 도리어 구체적으로 공부할 곳이 없습니다. 유자(유자)의 학문은 정히 이와 같지 않아야 하니, 다시 자세히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였다.
“오늘날 일반의 학문은 경(경)을 폐하고 사(사)를 다루고, 왕도(왕도)를 소홀히 하고 패술(패술)을 높이며, 고금의 흥망의 변화를 극론(극론)하면서 이 마음의 존망의 단서는 살피지 않는다. 만약 이런 식으로 책을 읽을 뿐이라면 책을 읽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 주자가 말하였다.
“소씨(소씨) 형제와 장의(장의)ㆍ소진(소진)과 노자(노자)ㆍ불씨(불씨)는 똑같은 사람이다.”

○ 소공(소공 소식(소식))이 공문중(공문중)을 사주하여 이천(이천)을 씹어 제거하였다.

○ 소씨(소씨)의 말로서 높은 것은 유무(유무)에 출입하고 의리(의리)를 원만하게 이루지만, 낮은 것은 이해(이해)를 진술하여 인정에 매우 가깝다. 그의 지식ㆍ재변(재변)ㆍ모위(모위)ㆍ기개(기개)는 족히 세상을 진동할 정도로 장황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하고 싫증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왕씨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러나 도학(도학)에서는 큰 근본에 어둡고, 사실을 논함에 있어서는 권모(권모)를 숭상한다. 부화(부화)함을 과시하며 근본과 실질을 잊고, 통달을 귀하게 여기며 명검(명검)을 천하게 여긴다. 이는 천리(천리)를 해치고 인심을 어지럽히며 도술을 방해하고 풍교(풍교)를 퇴패(퇴패)시키는 것이다. 어찌 모두 왕씨(왕씨)의 아래에서 나왔겠는가? 만약 당시에 행하여져 왕씨처럼 성대하였다면, 그 재앙이 왕씨 정도에 그쳤을 뿐만이 아니다.
명교(명교)를 주장하는 자는 또한 아무런 상관없이 여기고 말이 없을 수 없다. 대개 왕씨의 학문은 공허를 말하였으나 정채(정채)가 없었고, 공리(공리)에 급박하였으나 기변(기변)이 없었다. 극단적으로는 비루하기가 설앙(설앙)의 무리와 같았을 뿐이다. 채경(채경)이 명분으로는 왕씨를 추존하였으나 음탕하고 사치하고 방종하여 천하를 혼란시켰는데, 이것이 모두 금릉(금릉)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소씨(소씨)와 같은 이는 몸을 다스림에 이미 형공(형공)의 엄격함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그의 술책은 공리(공리)를 잊지 못하는 것이었고 속임수와 은밀함은 그보다 더 지나쳤다. 그의 무리 가운데 진관(진관)과 이천(이천) 같은 이들은 모두 경박하고 허황하여 사류들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그들 끼리 모여 온갖 변론을 만들어내어 자기들의 주장을 지킬 뿐이었고, 예의와 염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까마득히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들의 세리(세리)가 사람들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방종을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자들은 너도나도 그곳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뜻을 얻게 되면 채경(채경)이 한 바를 모두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기왕의 사실만 가지고 논하는데, 이 때문에 소씨(소씨)가 오히려 근세(근세)의 명경(명경) 반열에 올라 있고, 남의 선행을 이루어주기를 좋아하는 군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재앙을 역탐하여 비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학(도학)의 사정(사정)을 논할 즈음에는 털끝과 같이 미세한 데에서 분변되므로, 비록 봐주려고 하더라도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에 오로지 왕씨를 폄하하고 이소(이소)를 봐주려고 하는데, 도학(도학)이 밝아지지 않고 이단이 더욱 치성하는 원인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 생각에 왕씨가 다시 나오더라도 입을 다물고 마음속으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 소씨(소씨)의 학문이 왕씨(왕씨)와 다른 듯하지만, 도(도)를 알지 못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은 똑같다. 학문이 도를 알지 못하고 그 마음이 실로 취할 바가 없다면, 바르다고 여긴 것 또한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제멋대로 말한 것이다. 다만 왕씨처럼 되지 않은 것은 천하가 그 화를 입지 않은 것일 뿐이다. 탕무(탕무)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고 왕권을 찬탈하였다고 하고 순욱(순욱)을 성대하게 일컬어 성인의 무리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부류는 조금도 기탄없이 사특한 뜻을 채운 것이다. 어찌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주(양주)는 의(의)를 행하는 것을 배우고서 이기적인 쪽으로 치우쳤고, 묵적(묵적)은 인(인)을 행하는 것을 배우고서 겸애(겸애)에 빠졌으나, 어찌 그 본심이 사악한 것이겠는가? 다만 근본적인 문제에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맹자(맹자)가 그 재앙을 유추하여, 그들이 군부(군부)를 업신여겨 금수(금수)에 빠졌다고 하고서 조금도 가차 없이 물리쳤다. 맹자 또한 어찌 그 사실을 따져보지 않고 지나치게 각박한 논란을 한 것이겠는가? 실로 은미한 중에 천리(천리)와 인심을 해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에 빠지고서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니, 이는 형명가(형명가)의 조삼모사(조삼모사)의 사술(사술)에 의한 재앙은 얕으면서 절실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발본색원(발본색원)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힘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경(서경)》에 이르기를 “내가 상제(상제)를 경외하여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하늘을 따르지 않으면 그 죄(죄)가 똑같다.” 하였으니, 맹자의 마음이 이와 같았을 뿐이다. 이로써 논하건대, 오늘날의 일에서 왕씨는 겨우 신한의연(신한의연) 정도가 될 뿐이지만, 소씨(소씨)는 학문이 바르지 않으면서 성리(성리)를 말하였으니, 양묵(양묵)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맹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선후를 취사함에 반드시 다른 기준이 있으리라 여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단(이단)과 오도(오도)와의 관계는 음(음)과 양(양), 밤과 낮, 흑(흑)과 백(백), 가라지[랑유]와 벼[가화]의 관계와 같아서, 한쪽이 소멸되면 한쪽은 성장하고 한쪽이 차면 한쪽은 기울게 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심한 것은 양(양)이 쇠락하여 음(음)이 되고 낮이 변하여 밤이 되고 백(백)이 물들어 흑(흑)이 되고 벼가 변하여 가라지가 되고 오도(오도)가 변하여 이단이 되는 까닭에, 성인은 반드시 그 은미(은미)한 상태에서부터 조심한다.
소위 이단(이단)에 대하여 춘추시대에는 향원(향원)이라 하여 공자(공자)가 비로소 물리쳤고, 백여 년 뒤 전국시대에 이르러 또한 양묵(양묵)이 제멋대로 행동하자 맹자가 두려워하며 물리쳤다. 진한(진한)으로부터 당송(당송)에 이르기까지 노불(노불) 두 유파가 크게 성하였는데 1,400여 년 뒤 하남 정씨(하남정씨) 두 분이 나와 또 한 번 크게 물리쳐 활짝 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향원(향원)과 양묵(양묵)과 노불(노불)이 이단임은 알고, 소씨(소씨)가 그보다 더 큰 이단임은 알지 못한다.
저들은 속임수 학문으로 이치를 말하여 우주를 삼키며 뱉고 산하(산하)를 치고 거꾸러뜨리니, 다만 일세(일세)를 경동(경동)시켰을 뿐 아니라, 또한 백대를 농락하였다고 하기에 충분하다. 이에 거만하게 스스로 과시하면서 정사(정사)를 업신여기고도 조금도 기탄(기탄)함이 없어, 결국 이락(이락)의 은택이 세상에 젖어들게 하지 못하여 광란의 사조(사조)가 세상을 풍미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 뒤에 또 백여 년이 지나 주자(주자)가 큰 소리로 물리치면서,
“소씨(소씨) 형제와 장의(장의)ㆍ소진(소진)과 노자(노자)ㆍ불씨(불씨)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천하가 비로소 미혹에 빠진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부자(부자)가 《진서(진서)》로써 《주서(주서)》를 이은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겼는데, 《대학》을 읽고서 그 책이 요체를 얻고 있음을 알았다. 《대학》에서는 네 번 〈강고(강고)〉를 인용하면서 겨우 15자에 불과하였고, 오직 《진서(진서)》에 대해서는 한 번에 97자를 인용하였으니, 성현의 은미한 뜻을 또한 볼 수 있다.
아, 저 소씨(소씨)는 입으로 성현들의 말씀을 외우면서도 미워하고 비난하는 작태가 간책(간책)에 넘쳐 도리어 노불(노불)에게 죄인이 되고 있다. 아, 슬프다. 어찌 이른바 유주(유주)ㆍ기주(기주)를 가려고 하면서 남쪽으로 수레를 향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오랑캐로 갈 뿐이다. 이러한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후세에 소씨(소씨)를 본받으려는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은)나라 태사(태사)가 동방에 봉해져 홍범구주(홍범구주)의 가르침을 한반도에 두루 미치게 하여 그 풍교(풍교)가 만국(만국)의 으뜸이 되므로, 세상에서 ‘소중화(소중화)’라 일컫는다. 그리고 역사에 명유(명유)와 석사(석사)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이어져 마치 하늘에 벌려 있는 별처럼 우러르고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임사찬(임사찬)은 홀로 문장으로 이름났고, 그 다음으로 설홍유(설홍유)와 최문창(최문창)이 있는데 최문창은 문명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크게 이름난 자로는 김문열(김문렬)ㆍ이문순(이문순) 정도일 뿐이고, 사도(사도)를 가지고 자신의 임무로 삼은 자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그들의 말이 왕왕 달마(달마)에 빠져 흠이 많고 도타움이 적고, 근본과 실질은 망각하고 문장으로 꾸미는 것만을 자랑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심지어는 동자(동자)들을 인도하여 사조(사조)를 가르치면서 오직 일찍 통달함을 기뻐하고, 명성과 이익을 탐하고 총애와 영화를 취하게 하여, 점차로 교만하고 오만해져서 과장하고 방자하여 전복(전복)을 자초하게 하였고, 효제충신으로 길러 오래도록 복을 쌓는 기틀로 삼도록 하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결국 한 사람이 수염을 태움에 재앙이 집과 나라에까지 미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 사도(사도)의 불행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회헌공(회헌공)이 세상에 나와 회암(회암)의 유상(유상)을 모시고 경학(경학)을 창도하여 지향할 바를 가리켜준 뒤에, 선비들이 비로소 염락(렴락)이 수사(수사)의 종지(종지)를 얻었고 그 물줄기가 우리나라에 크게 전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가지고 본다면 회헌(회헌)의 공로는 회옹(회옹)에 짝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별록(별록)〉 3편을 만들어 위로 중니(중니)를 으뜸으로 하고 아래로 회옹(회옹)에까지 미쳤으니, 이는 모두 천리(천리)를 밝히고 사설(사설)을 억제하여 회헌(회헌)의 뜻을 천명하는 것이다.

[간기(간기)]
각수(각수) ▨▨(▨▨) 이눌손(이눌손)
교정(교정) 공생(공생) 안홍업(안홍업)
서사(서사) 기관(기관) 안충년(안충년)

죽계지 중간지        

죽계지 중간 발문[죽계지중간지] 안승규(안승규)

주자(주자)가 돌아가신 지 43년이 지난 고려 말에 회헌(회헌)선생께서 태어나셨다. 공자를 조종으로 삼고 주자(주자)를 종주로 삼아 도학을 창도하고 진흥시켜 우뚝하게 우리나라 도학의 조종이 되었다. 문의공(문의공)ㆍ문정공(문정공)ㆍ문경공(문경공) 같은 분은 충효(충효)ㆍ훈업(훈업)ㆍ문장이 모두 고려사에 빛나고 있다. 중종(중종) 신축년(1541) 가을에 문민공(문민공) 신재(신재) 주(주)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임인년(1542)에 사당을 세우고 또 그 이듬해 계묘년(1543)에 서원을 세웠다. 그 후 7년이 지난 명종(명종) 기유년(1549)에 퇴계(퇴계)선생이 조정에 계문(계문)하여 이듬해 경술년(1550)에 사액되니, 여산(여산)의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과 아름다움을 같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생긴 것이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재선생이 《죽계지(죽계지)》를 만들면서 첫머리에 행록(행록)을 실었고, 그 나머지 존현록ㆍ학전록ㆍ장서록ㆍ잡록ㆍ별록은 주자의 저술을 드러내어 회헌(회헌)이 회암(회암)을 사모한 뜻을 표하였다. 그 내용은 모두 위기지학(위기지학)에 관한 것인데, 실은 중니(중니)ㆍ안연(안연)ㆍ증자(증자)ㆍ자사(자사)ㆍ맹자(맹자)ㆍ두 정씨(정씨)ㆍ주자(주자)의 요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책으로 간행하여 서원에 소장한 지가 이미 400년이 되었다.
내가 후생으로서 분수에 넘치게 경영의 책임을 맡아 사당과 서원을 중수하고 유적(유적)을 정돈하던 중 비로소 《죽계지(죽계지)》의 판각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먼지 속에서 좀이 슬어 간간이 훼손된 것이 많았다. 또한 세상에 전해지는 원본을 대략 본 것이 적지 않은데, 만일 지금 인쇄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마모가 더욱 심해져 읽을 수 없게 될 지경이었다. 다만 일은 거창하고 힘을 미약해 뜻을 품었으나 겨를이 없던 중, 이해 3월 봄에 족제 동준(동준) 씨가 선조를 추모하는 일에 독실하여 혼자서 성력을 기울려 공인을 모아 일을 시작했다. 자획이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것과 결실된 판목은 옛날 글을 참조해서 새롭게 보충했다. 편찬과 인쇄 감독은 족숙 용호(용호)씨 및 족질 대근(대근)ㆍ병익(병익) 군이 맡아 힘썼다. 2개월 걸려 일을 마쳤다.
아,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서원의 고적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는데, 오직 《죽계지》만 벽 속의 경전처럼 보존되었으니, 이는 분명 하늘이 도운 것이다. 유학(유학) 일맥이 이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좋은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동준씨가 나에게 그 시말을 기록하라고 청하였으나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했다.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참람함을 무릅쓰고 두서없이 위와 같이 발문을 쓰는 바이다.
무신년(1968) 5월 상순에, 후학 죽계(죽계) 안승규(안승규) 삼가 쓰다.

 발문        

발문[발] 안동준(안동준)

지난 정릉(정릉 중종(중종)) 성대한 시절에 신재 주 문민공(주문민공)이 풍기에 부임하여 어진 이를 높이고 학문을 진흥시킴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에 회헌선생(회헌선생)이 소년 시절 공부하던 죽계(죽계)의 백운동(백운동) 옛터를 찾아보고 사당을 세워 회헌선생의 유상을 모시고 문정공(문정공)ㆍ문경공(문경공)을 배향하였으며, 서원을 세워 뛰어난 인재를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죽계지(죽계지)》를 편찬하였으니, 첫머리에 행록(행록)을 싣고 그 다음에 존현록ㆍ장서록ㆍ잡록ㆍ별록의 순으로 서술하여 6권 3책으로 만들고 목판으로 새겨 보관하였다. 이 책은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정자(정자)ㆍ주자(주자)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종지(종지)를 드러내었고, 회헌(회헌)이 회암(회암)을 존모한 뜻을 천명하여 후학을 계도하였으니, 실로 우리 유가의 귀감(귀감)이다.
이해 3월 상정일(상정일)에 내가 도유사로서 향사(향사)에 참석하였고, 이튿날 아침 서원의 유적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때 족형 승규(승규) 씨가 나에게 이르기를,
“이 《죽계지(죽계지)》가 빛을 감추고 모습을 숨긴 지 지금에 400년이 되었으니, 이를 다시 간행해서 세상에 펴게나.”
하였다. 나는 후생으로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지만, 몇 해 동안 추원재(추원재) 중건과 향려단(향려단) 이축, 학교 설립 등에 골몰하느라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기에,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지냈다. 나 또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 고충과 열성에 감동되어 마침내 스스로 부족한 힘을 보태어 약간의 책을 간행하여 경모하고 우러르는 정성을 표하게 되었다.
후학 죽계 안동준(안동준) 삼가 쓰다.

죽계지 서문        

죽계지 서문[죽계지서] 주세붕(주세붕)

가정(가정) 신축년(1541, 중종 36) 가을 7월 무자일(무자일)에 내가 풍기(풍기)에 도착하였는데, 이해에 큰 가뭄이 들었고 명년 임인년(1542, 중종 37)에도 큰 기근이 들었다. 이해에 백운동(백운동)에 회헌선생(회헌선생)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계묘년(1543, 중종 38)에 향교(향교)를 고을 북쪽으로 옮겼으며, 또 사당 앞에 따로 서원(서원)을 세웠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대의 세상물정에 어두움이여. 향교를 옮긴 것은 그렇다 해도 문성공의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는가? 문성공은 이미 국학(국학)에 종사(종사)되어 고을마다 사당이 있는데 어찌하여 굳이 사당을 세우며, 이미 학교가 있는데 어찌 꼭 따로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 흉년을 당하였으니 그럴 시기가 아니며, 낮은 지위에 있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사당과 서원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니 너무 지나친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글쎄. 내가 보건대 주자(주자)가 남강(남강)을 다스린 1년 사이에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을 중수하였고, 또한 선성(선성)과 선사(선사)의 사당과 다섯 분 선생의 사당, 그리고 세 분 선생의 사당을 세웠고, 또한 유둔전(유둔전)을 위하여 장절정(장절정)을 지었다. 그 당시엔 금(금)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지방은 계속된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당시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이 뭇 백성들을 낳음에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바로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교육이 없었다면,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아비답지 못하고 지어미는 지어미답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답지 못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답지 못하게 되어, 삼강(삼강)과 구법(구법)이 없어져서 인류가 멸망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그 말에 보면 ‘세속으로 말하면 긴요함이 없는 듯하나 지금 실정으로 보면 인심과 정사의 체모에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오늘날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는 바로 이 교육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아, 회옹(회옹)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죽계)는 바로 문성공의 궐리(궐리)이다. 교육을 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성공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태평한 세상을 만나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가 되었으니 고을을 위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의 고사에 따라 하고서, 무궁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옛날 사사분(사사분)이 평상 위에서 시신을 염하기를 청하자, 자유(자유)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현자(현자)는 이 말을 듣고 꾸짖기를 ‘지나치다. 숙씨(숙씨)가 남에게 마음대로 예를 허락함이여.’라고 하였으니, 자유가 예문에 근거하지 않고 독단으로 말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모두 회옹을 본받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반드시 살피고 어진 이는 반드시 이해할 것이니, 무슨 지나침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의 어짊은 맹자에 앞서고 공적은 공자와 짝할 만하여 분명 평범한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신묘한 교화의 힘이 있었지만, 주자가 남강을 떠난 지 10년이 채 못 되어 장절정의 문과 담장과 정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후임 증치허(증치허)가 다시 개축하여 옛 제도를 넓혔으니, 주자 또한 부족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대가 아무리 노력하여 사당과 서원을 세우더라도 10년간의 보존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증치허와 같은 후임이 없다면 오늘날의 조소와 멸시뿐 아니라 후일에 비난을 받을 것이다. 성현을 배움에 있어서는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하니, 만일 그와 같이 어질지 못하면서 한갓 그 행적을 답습한다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에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반드시 그 행적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그 행적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성현의 행적을 피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향원(향원)의 행적을 따르게 될 것이니, 어리석음을 면하려다 오히려 향원에 빠질까 두렵다. 《대명일통지(대명일통지)》에 기재된 사당은 1천 2백여 개소이고 서원은 3백여 개소이다. 또 기록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산봉우리마다 사찰이 있어 금빛 불상을 받들고 있는데도 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이 고을에 하나의 사당과 하나의 서원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주자가 여산(여산)의 서원을 보고 크게 탄식한 것이다. 이를 건립함은 나에게 있으나 이를 보존함은 저들에게 있다. 내가 한 일은 실로 내가 책임지겠지만 저들이 할 일을 어떻게 걱정하겠는가. 주자 같이 큰 현인을 만나 오래도록 전해짐도 천명이고, 증치허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여 오래 전해지지 못함도 천명이니, 그 천명을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는 백록동서원(백록동서원)을 중수할 때 반드시 조정에 아뢴 후에 하였는데, 그대가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조정에 아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백록동서원은 선대 제왕의 명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뢴 것이나, 기타 서원은 아뢴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가 또 다시 말하기를,
“문성공이 섬학전(섬학전)을 설치하고 노비를 바쳤으니 그 근실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하여 듣고 싶다.”
하기에, 답하기를,
“고려의 사관(사관)이 도학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의 공은 말할 수 있었으나 그의 학문을 천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늘 《고려사(고려사)》를 읽다가 〈문성공전(문성공전)〉에 이르러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이 삼별초(삼별초) 적중에서 탈출한 일, 요사스런 무당을 매질한 일, 원나라 황제에게 규방(규방)의 일에 대하여 변론한 일, 학교 진흥에 진력한 일, 당신의 몸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일, 인재를 알아본 안목 등은 그 높은 경지를 따져볼 때 큰 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는 장중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을 꾀함에 유능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를 논함에 있어서도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아우는 형에게 공손하는 것이 모두 누구의 가르침인가?’라고 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천명하여 만고에 전하였고, 무인(무인)을 감복시켜 섬학전을 내게 하였으니, 또한 사문에 기여한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은 또한 노년에 이르러 항상 주자의 영정을 걸어 놓고 사모하며 ‘회헌(회헌)’이라 자호(자호)하였는데, 주자를 사모함은 곧 공자를 사모함이다. 공의 어짊과 용기는 죽음에 이르도록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고, 지향할 바의 바름을 말한 것은 삼한(삼한)의 풍속을 일신하여 익재(익재)ㆍ포은(포은)과 같은 분이 그 영향을 입었다. 본조에 이르러 삼대처럼 예악의 교화가 융성하였고 이후 340여 년 동안 천리(천리)가 다시 밝고 문풍이 크게 진흥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공은 실로 우리나라 도학(도학)의 조종이다. 비록 설홍유(설홍유)ㆍ최문창(최문창)과 같은 훌륭한 유학자도 그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나머지야 어떻게 더 말하겠는가.
아, 공의 사적이 이러한데도 문묘에 종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사(고려사)》에서는 ‘안모(안모)가 섬학전을 마련한 공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사관의 식견이 비루함이 이와 같다. 공의 시에 ‘곳곳마다 향불 피워 부처에게 빌고 / 집집마다 피리 소리 신을 섬기네 / 유독 두어 칸 공자 사당엔 / 봄풀만 가득하고 찾는 이 없어라 [향등처처개기불 소관가가진사신 독유수간부자묘 만정춘초적무인]’라고 읊었으니, 사교(사교)를 배척하고 정도를 걱정한 뜻이 지극하다.
또한 공의 본전(본전)에서 ‘문장이 맑고 굳세어 볼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저서가 틀림없이 많았을 터인데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이 숨기고서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점필재(점필재)는 그의 청초한 시풍을 사모하여 《청구풍아(청구풍아)》에 한 구절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에 ‘아침 비에 싱그러운 들 위로 비둘기 한 마리 날고 / 봄바람에 꽃이 만발한 성을 필마로 돌아드네 [일구효우초연야 필마춘풍화만성]’ 하였다. 이 시의 기상은 마치 천지의 조화와 같으니 열네 글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공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의 학문이 비록 주자에는 미치지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 드디어 《죽계지(죽계지)》 몇 편을 편찬하면서 국사에 실린 행록(행록)을 책머리에 엮었고, 기타 존현록(존현록)ㆍ학전록(학전록)ㆍ장서록(장서록)ㆍ잡록(잡록) 등은 반드시 주자가 지은 것을 편 머리에 드러내어 주자를 경모한 공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모두가 중니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두 정자의 학문의 요지인 위기지학(위기지학)으로서 후세의 위인지학(위인지학)과는 그 의리(의리)ㆍ내외(내외)ㆍ정조(정조)ㆍ본말(본말)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참으로 공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먼저 공의 본전을 읽으면서 공이 주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마음이고 주자가 공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어떤 도였는가를 반드시 찾아서, 공이 주자를 존경했던 도리로 공을 존경하여 천만 번 마음을 씻은 뒤에 주자의 모든 저서를 숙독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가 반드시 눈앞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나타난 바로 인하여 그 전체를 궁구한다면 자신에게 돌이켜 지성을 유지함도 나의 일이고 힘써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도 나의 일이 될 것이다. 그 즐거움이 장차 저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되고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외물(외물)을 생각하겠는가. 안연(안연)ㆍ중궁(중궁) 두 사람이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의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 실로 어리석어 성인의 도를 듣지 못하고 이미 늙었으니 이제 와서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또한 마음에 새겨서 사모해야 할 바이기에, 우선 글로 써서 서원에 와서 공부하려는 동지ㆍ후학들에게 경건히 고하는 바이다.
갑진년(1544, 중종39) 겨울 10월 갑술일에, 상주(상주) 주세붕(주세붕)이 쓰다.

백운동 문성공 사당 기문[백운동문성공묘기] 성세창(성세창)

북쪽 변방에 웅장하게 서 있는 백두산의 남쪽 줄기가 동해안을 따라 달려오다가 강원도에 이르러 크게 응축되어 빼어난 곳이 금강산이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다가 삼척(삼척) 지경에 이르러 봉우리가 이루어져 하늘높이 솟아오르니 이는 태백산(태백산)이다. 다시 남쪽으로 뻗어 가다가 기운을 감싸 안고 솟아있는 산이 있으니 바로 소백산(소백산)이다. 그 산 아래로 줄기가 돌고 돌아 그윽하고 깊숙한 골짜기를 이루어 맑은 물이 휘감아 흐르니 이것이 죽계이다. 죽계 가에 옛날 순흥이란 큰 고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풍기군으로 통합되었다. 맑게 서린 그곳 산천의 정기로 보면, 의당 대인군자가 태어나 시운(시운)을 부지(부지)하고 교화를 일으켜 사도(사도)를 영원토록 계승시키고도 남음직한 곳이다.
우리 문성공 휘 향(향)은 실로 특이한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좋아하였고 항상 바른 도리로서 몸을 닦았다. 고려 원종조(원종조)에 급제하여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온 후 벼슬이 중찬(중찬)에 이르렀다. 공은 당시 학교가 퇴폐하여 유가(유가)의 도가 땅에 떨어지려 하자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사재(사재)로써 학사(학사)를 세우고 노비를 바쳐 학도에게 이바지하였다. 공께서 문교(문교)에 공을 끼친 것은 이토록 큰 것이었다.
만년엔 항상 회암선생(회암선생)의 영정을 걸어놓고 사모하면서 스스로 ‘회헌(회헌)’이라 호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문성(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는 칠관(칠관)ㆍ십이도(십이도)의 학생이 모두 소복을 하고 노제(노제)를 지냈다.
아, 우리 도의 흥폐는 실로 세교(세교)의 높고 낮음에 관계되니 이는 쇠퇴해진 고려의 왕업이 공의 힘을 입어 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조가 일어난 이후 학교의 흥성함도 또한 공의 도움이 없지 않았다. 이 어찌 어진 군자의 공이 아니겠는가.
현 군수 주세붕은 뜻을 가지고 옛 도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공의 영정을 그 후손 전주서(전주서) 안정(안정)의 집에서 배알한 바 있었다.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먼저 폐지된 순흥부 성 남쪽 몇 리쯤에 있는 공의 고택을 찾았는데 주춧돌이 다 파괴되고 잡초가 우거져 있으므로 깊은 감회에 젖고 한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다시 고적과 승경(승경)을 찾아 발길을 옮기다가 옛 순흥부 가까운 곳에서 숙수사 옛터를 찾아내었으니, 그 절은 바로 전현(전현) 노여(노여)의 시에서,
싸늘한 산 빛을 밀치며 스님은 지게문을 닫고 / 한퇴악색승경호
차가운 냇물 소리 밟으며 나그네 누각에 오르네 / 랭답계성객상루
라고 읊었고, 안문정공의 시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 산머리에 쭈그리고 있는 모양 / 영구형세축산두
그 아래 깊은 시냇가엔 백 척의 누각 우뚝하네 / 하유심계백척루
라고 읊었던 곳이다.
이곳이 바로 공이 어린 시절에 독서하던 곳이었으므로 주세붕은 더욱이 감개무량하였다. 이에 목수를 부르고 물자를 모아 사당을 세우고 주서(주서)의 집에 소장된 화상을 모셔와 봉안하고 때맞추어 경건하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사당 앞에 서원을 세워 인근 고을 선비들이 독서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처음에 터를 다듬기 위하여 한 자쯤 파다가 놋쇠 수백 근을 발굴하였는데 어느 시대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그것을 팔아 경사(경사)를 구입하여 학도의 학업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것을 통하여 주세붕이 선을 숭상하고 옛것을 좋아한 마음을 대략 엿볼 수 있다.
문성공은 나의 할머니 안씨의 6대조이다. 이번에 외손으로서 선조의 덕업이 오래 전해질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사실을 듣고 비감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본말을 기록한다.
가정(가정) 24년(1545, 인종1) 5월 일에, 8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성세창(성세창)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