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부의 성씨는 유씨 관적은 문화이며 부의휘는 도권이요 組의 휘는 한운이며 증조의 휘는 진화인데 벼슬은 통덕량이다. 영조대왕 정해년에 열부가 태어났다 열부는 어릴때 부터 효도와 우애를 익히고 복습하여 자라서는 선비인 동래정씨 휘준에게 시집갔다. 그때시부는 이미 돌아가시고 시모 곽씨만 계셨다. 열부가 시집 살이를 할때 부터 새벽에 일어나 침소의 따뜻함과 추위를 묻고 공손히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고 시어머니가 계실때 달고 맛잇는음식을 절기에 마추어 봉양하였으며 시모의 뜻에 언제나 맞았다 남편을 섬길때도 예로서 다하고 종친간에도 도리로서 화목을 다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갑인년에 하늘이 가옥하여 이어절이란 폭리가 (벼슬아치) 죄없는 사람을 몰래 행을주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열부가 차가운 우물에 물을길러 하늘에 빌면서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하게 빌었다. 그때가 음력 시월 모일이였다. 야반상경의 처음 달이 오를때 굴령에서사람이 오는데 열부의 마음이 먼저 놀라고 심장이 뛰어서 사연을 물어보니 과연 부고를 전하는 사람이였다. 원통하고 분하도다. 조상을 예로서 마치고 마음에는 칼을 지니고 관청에 뛰어들어 복수하고 싶었으나, 시어머니가 저지하여 결행하지 못하였다. 또 수차례 목을메어 남편을 따라 죽자고 하였으나, 시모가 먼저알고 구하여 주고 곁을 옅보며 지키니 잔명을 보존할수 밖에 없었다.
마침 서울로부터 위유사가 내려 온다 하니 간절이 바라는 원한을 풀수있을까 하여 처음으로 죽을 떠먹고 몸을 추수려서 걸어서 물을 건너고 하여 김해 웅천을 건너고 지나 본업 안민역참의 뜰에 들어가 슬피 울며 호소하였으나, 관에서는 궁휼의 뜻으로 여겼다. 관부가 온지도 몇일이 지나고 되풀이 호소하였으나, 그러나 혹시나 만에하나라도 희망을 가졌으나, 끝내 위유사의 답변이 없었다. 이에 드디어 서울로 올라갈것을 계획하였다 .집에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세살이였다. 여종 계심이가 안고 굴현을 따라 왔는데 열부가 젖을 먹이면서 딸을 달래며 말하기를 너가 나를 따라 다닐려고 하면 젖을 베어 던질테다 하며 칼을 빼어 젖가슴에 갖다대니 비록 세살짜리 유아이나 어미가 일을 도모함을 알고 울면서 무릎아래로 내려가 여종 계심이의 등에 업히자 보는자가 그 광경을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아가있는 진주로 가다가 고성에 이르렀는데 친정이 마암동이라 친정어머니 창녕성씨가 이런사실을 듣고 놀라 중도에서 서로만나 보기를 청하였으나, 열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남편의원한을 갚지 못하였는데, 어느 여가에 모녀간의 상견 하리오 하며 원컨데 어머님은 염려하지 말려시고 아련치 않고 곧 바로 떠나가니 친정 어머님이 그말을 듣고 통곡 하였다.
십이월 진양관아(경상우도)에 도착하여 소장을 올리고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절풍목우의 갖은고생을 하며 경도위유사를 만나고자 하니 아전들이 조심하여 말하기를, 문경은 겨울에 지날수 없다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되었다.
문경새재에 이르니 눈과 비바람이 옷을치고 날리어도 부군이 지켜주는것 같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진천에 있는 친족집에 도착하여 반거재에가니 많은 친족들이 돈을내어 열꾸러미를 노자에 써라고 도와주었다. 그해는 흉년이였고 해서 그돈으로 하루에 한끼먹고, 한상에 삼전짜리로 간난신고로 살아갔다. 양석땅에 이르러 친족 정중군가를 방문하였다 중군의 아버지가 수 년전에 창원에와서 질병으로 열부의 집에서 수개월 머물때 정성으로 간호하고 후하게 대접하고 노자도 넉넉히하여 전송 하였다. 이때는 이미 그분은 돌아가셨고 그의 아들 모씨는 서울에 있으면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여러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그댁에 노고를 많이 끼쳤습니다 하며 후하게 대하여 주었다. 수일 후에 그들의 형이 서울에서 집으로 와서 여러동생에게 말하기를 지금 유씨가 본관사또를 죽일려는 말이 있고 남부지방이 인심이 나빠 술렁이는 이때 저 부인이 우리집에 기거한다는 사실이 만약, 밖으로 누설되어 탈로난다면 우리집은 어떤지경에 이를지 알지못한즉,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말하니 ,그의 동생들은 웃으며 말하기를 천리나 떨어진 친척이 밖에서 연고를 찾아왔고,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집에 노고를 끼쳤으니 우리가 비록 죽을 지언정 감히 내보내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열부가 이 사실을 듣고, 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천리 밖에서 어지 하려온 사람을 이와 같이 괄시 하는가 또 친척의 정분을 버리고, 부모의 생각은 하지도 않는구나, 하면서 일어나 행장을 차린즉, 중근이 크게 부끄러 말하기를 만약 친척의 정분을 아신다면 어찌 나를 만나지 않았습니까(그때, 서울에 있었음) 열부가 답하여 말하기를 주인이 먼져 댁을 보는게 맞습니까 댁이 주인을 먼저 찾아보는게 올습니까 하니 중군이 다시는 다른말이 없었다. 다음날 서울로 들어가니 서울사람 임윤창이 와서 말하기를 비록 무부수령이라도 어찌 사람을 쉽게 죽일수 있는가, 형이 어릴쩍 익힌 기술과 기운이 있을터인데.... 하면서 그의(임윤창) 집으로 가니 열부에게 여종으로써 모든 수발을 들게 하는데 자리도 먹는것도 한결같이 일용으로 쓰는것도 오로지 맞게 하였는데 그 여종의 이름은 정매였다 .십이세에 서울로 왔는데 이때 나이가 사십이세였다.
윤창은 즉 정공만걸의 사위였다. 정매는 윤창의 부인 교전비 였다. 마침 어가가 수원으로 거동함에 있어 한강 위에서 격쟁을 하고져 하나 갑자기 나무가 없어서 소뼈를 주어서 격쟁을 치니 잘못쳐 왼손의 엄지 손톱이 빠져 피가 흘러 땅에 흥건히 하였으나 아픈줄도 알지 못했다. 또 마침 한 사람이 세자 능에서 격쟁을 울리는 일이 있어 임금이 얼굴이 진노하여 지금 부터 격쟁을 시핼치 말라 했다. 늘 소장을 안고 다니며 사대문에서 부르짓으며 하늘에 빌며 말하기를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원한을 품고 천리로 왔건만 세월은 지나고 복수하지 못하니 푸른 하늘아 나는 무었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외쳤다.
이와 같이 수개월을 지낼쯤 열남 유생을 뽑는 과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대장양에서 소를 올리면 된다고 해서 곧도포를 입고 새벽에 양촌으로 가니, 하루종일 먹지못해 땀이 등에 젓고 ,지나 가니 술집 주막 여자가 손뼉을치며 그의 모습을 보고, 희롱하여 웃었다.
관에서 명하여 대리로 시행하는 바람에 소장을 올리지도 못하고 돌아 오다가 설학재 정선생의 묘소가 양주송산에 있는 고로 열부는 술과 과일을 갗추어서 언문으로 제문을 만들어 고하여 말하기를, 십사대 손부가 감히 선조의 영전에 고합니다. 남편이 횡액을 입어 이여절의 가옥한 매질에 아무 연고없이 목숨을 잃은 고로 여절의 죄는 천직 귀신들이 모두 음밀히 주살해 주옵소서 ..업드려 원컨데 선조의 신령이 위로는 황천에 호소하시고 아래로는 사람들과 도모하여, 신과 사람들이 반드시 여절을 죽여 유명의 한을 씻어 주시길 빕니다. 하고는 축문을 마치고 업드려 잠이 들어 여종 정매가 곁에서 불러 깨어보니 초저녁이 되었다. 그 날은 묘소에서 함께자고 돌아왔다.
그 때 또 강화도에서 어가가 행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백성중에 억울한 자가 있으면 모두 와서 만리창에서 고하라 하니 열부가 격쟁하여 형조에 부속 되엇는데 다음날 남의 가마를 빌려 타고 행조관아문에 도착한즉 문지기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들어갈수 없다고 했다. 내일 개장한다고 하여 다음날 온즉,형조에서 또 그와 같이 말하기를 칠일간이 되었다. 칠일간 먹은것은 떡한덩어리에 불과하였다. 형조의 아전들이 열부의 시숙을 붙잡아와서 책망하여 말하기를 청상과부를 부추겨서 서울을 시끄럽게 하는 짓은 무었이냐? 시숙이 대답하기를 남편의 원수를 갚고져 이곳에 왔으나 원수를 갚지 못함이 형조의 처분함에 있으니 심이 간절합니다 하니 형조 판서 아전들이 맨발로 그가 묵고 있는 주인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아들을 잡아와 어미 매질하고 또 감옥에 가두었다 주인 할멈을 잡아와서 엄히 명하기를 격쟁하는 부인을 쫒아낸 이후에 너의 아들을 석방해 주겠다 하였다.
할멈이 형조 관아를 나오면서 울면서 지금 부인의 모든 사정을 보니 가련하고 불쌍하게 되었구나 그러나 엄명이 이와 같으니 우리집을 나가서 명이 풀리면 다시 들어 오시오. 아들이 형을 받아 이와같은 형편에 놓이게 되었으나 나는 이일로 감이 부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부득이 그집을 나서니 그때 동풍과 비바람이 일고 날이 저물어 어는곳으로 향할바를 알지 못했다.또한 돈도 무일푼 지니지 못햇는데, 눈물을 닦고 길을 내려보니 엽전다섯꾸러미가 있어서 시숙과 조카들이 서로 웃으며 이는 하늘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라 하고 양식과 땔감을 사서 강가 정자에서 밤을 지내니, 영남에서 올라온 번군 및 행상으로 온자들이 모두 몇 푼씩 도와주고 떠났다 다음날 형조 관아에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니 형조 좌우 아전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곳에 상이났나 ?곡은 무슨곡이냐 ?하면서 빈정대어 교자를 끌고 문을 나와 이에 칼을 뽑아 휘저으니 어떤이가 저 여인은 원한을 가슴에 품고있는 여자다 하니 열부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서울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죽지 않는다 하니 나 또한 사람을 죽일것이다. 큰소리로 형조 관청에 오르며 말하기를 나무꾼과 목동도 반드시 한 입에 두말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형조 판서야 그럴수 있겠는가?나같은 빌부를 칠일간이나 속이니 내가 죽어서 피로 연못을 만들고 원혼이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 다녔다면 일마다 회방할것이다 하며, 목을 맨즉 열부의 시숙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이러하여 죽으면 시신을 나는 거두지 못하오니 형조에서 열부의 시신을 관청문 아래에서 거두니, 모두 울고 시녀들 또한 모두 곡 하니 형조 판서가 일찍이 청상의열부의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저자거리가 온통 열부를 위하여 크게 곡하니, 형조 아전무리들이 청을빠져 나가면서 말하기를, 만약 깨어나 산다면 부인의 일을 설욕 될것이며 그렇치 못하고 이대로 죽으면 그 자취를 멀리 쓸어 버릴 것이다 하여 시신을 내 보내니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정성으로 치료하니, 천명이 길어 다시 혈맥이 따뜻하게 돌아왔다.
새벽 다섯시 종소리가 난후, 형조판서의 소장이 임금께 전달되어 임금이 측은히 여겨 몹시 가엽고 딱한 간절한 비답을 내려서 들을수 있었다. 임금이 경상감사는 잡아들이고 위유사는 삭탈관직하여 추방하라 하니 모든 대산이 대궐문밖에서 임금의 비답을 출송했다. 대궐밖이 모두 크게 놀라 임금이 내린 비답을 모두 초하여서 바깥수령에게 전하는데 지방수령들은 인명을 함부러 죽이는것을 엄히 경계하라고 하였다. 정승 채제공이 이 익운을 구해 주었는데 모두 이 일이 더디게 처리된 원인이 있는 대신들은 힐책당한 후에 뒤 입궐하는 대신들을 피하여 다른 문으로 들어가니 그때의 문지기가 한곳을 가르치며 채 정승이니 앞에서 호소해뵈면 이 일의 원통함을 풀수 있을것 같다하니 수건으로 목을 감아 메고 수레아래에서 말하기를 정승은 임금 한사람의 아래며 만인의 웃사람이고 또한 명망이 팔도에서 저명 하시니 이 원통한 사정을 살피시어 지아비의 원통한 원수를 갚아주시면 천만행심입니다. 하는 그 간절함에, 채 정승이 수레 위에서 힌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여종자를 불러 목맨것을 풀라하고 원통한 사정을 임금에게 알리겠다 하였다. 이로서 사건의 원인이된사정을 대궐이 들을수있었다. 그리고 듣건데 남산의 불을 지른즉 원통한 일을 호소 할수 있다 하니 햇불 한자루를 사서 여비정매와 함께 남산에 올라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날이 저물고 인정시간이 지난후 불을 지르니 한양 도성이 크게 놀라 군줄들이 남산을 포위하여 수색하니, 열부가 왼손에 횟불을 들고 오른손의 칼을 저으며, 말하기를 나는 영남의 선비의 부인으로 원통함을 호소 하고자 함으로 이런짓을 했다하니, 군줄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종자를 잡아가기를 원했다.
그 때 전공 암이 스스로 나타나 수인이 되었는데 암은 곧 정준의 종제 였다.금영의 유장이 말하기를 무슨일로 불을 질렀느냐고 심문하자 대답하기를 유씨성을 가진 부인이 남편의 원통함을 풀기위해서 그런짖을 했다하니 금영의 장군이 말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성함을 적어오라하니, 열부가 나이 열두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기에 어려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며 족보에 적혀 있다고 하며, 써 올리니 유씨장군이 말하기를 친족에 과연 이런여자가 있는지 모르겠다하며 일을 해결하여 풀어주니 예되로 벌을 관할도에 배속 되었다. 이 때 들으니 새로운 감사가 내려가며 별도로 안핵사가 파견되어 사실을 조사하여 감영으로 보냈다. 그 때는 유월 염천인데 칼을차고 감영문밖에서 잠복하여 여절을 기다려 공격하려 했는데, 여절이 알고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니, 쫒을수 없었다 .다음날 종씨숙과 선화당으로 가서 조사함을 듣고져 솜옷을 입고 종일 양쪽 문에 서 있으니 선화당 감사가 모자를 내어 씌어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조사사실을 알고서 다시 서울로 들어가니 한양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유씨부인이 다시 서울로 들어 왔다 하였다.
안혁사가 올라와 임금께 보고한후 이 여절을 잡아 들이고 삭탈 관직하여 남감 예빈시에 가두었다 이 옥에 들어간자들은 반드시 죽고 이곳에서 살아나오는사람은 한사람도 없다했다. 구월이십일이되니,여절이 참수 되었다는 말이 시끄럽게 비등 하였다. 전감사는 유배지가 나안으로 정해지고 삼사가 함께 소를 올려 모름지기 이런일을 들추어내어 일어나지 않게 했다. 열부가 하룻밤 꿈에 어느곳에 갔는데, 노인이 아이를 앉아 주었다 받아서 앉고 곡 하며 보니 한 귀여운 사내아이 였다. 문에 이르러니 노인이 다시 그 아이를 뺴앗아 들어가보니, 관(늘)하나있었는데, 말하기를 남편의 관이라 했다 그래서 곡하니 남편은 방 가운데 앉아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곳을 떠나 내려가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열부가 문을 나서니 노인이 다시 그 아이를 주면서 이 아이는 너의 아이이니 잘 길러라 해서 받아 또 곡 하였다 열부와 시숙이 주인 노파를 불러 말하기를 꿈이 이러하니 곡은 어찌된것이냐고 물었다 헛된 꿈이다 하니 시숙이 노하여 일을 도모하는데 아이를 받아 보는 것은 불리하다 하며, 차고있던 칼로 베게옆에 세우고 잠을 잣다 또 꿈이 그와 같아 심히 괴이 하여 그 날후에 가첩에기록해 두었는데 조카가 태어나서 열부의 자식으로 잊게 하는 징조 였다. 뒷날밤 꿈에 쥐를 잡아 붉은 실로 허리를 묶어 절구통에 넣는 꿈을 꾸었는데 절구 공이를 넣자 쥐가 절구통 밖으로 솔개 같이 날아 하늘에 이르자 절구통에는 오장이 빠져 즉사한것이 있었다는 꿈 이야기를 하자, 시숙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여절은 죽이지 못하겟구나 그러나, 감사 조진택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 했는데 다음날 과연 조진택이 나안으로부터 다시 잡혀오다 도중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들었음) 조진택이 아들또한 이 여절을 죽여, 아비가 억울하게 죄에 연류되어 죽은 원수를 갚고져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했는데 그 때 여절이 용서를 받아서 감영밖을 내 보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잇어 그가 문을 나설적에 총을 쏘아 죽이고져 했다.
포수 두명을 사서 감영밖에 매복하여 있다는 말이 누술 되어서 갑영의 서쪽 작은문을 열어 한밤중에 여절을 방면하여 보내었다. 여절의 죄는 왕법으로 죽일만 한데도 감옥에서 살아남고 죄를 용서하여 남해지방 수군으로 보내는데 그쳤다. 대궐이 있는 성문이 밤을 타서 여닫는데 스스로 연것은 나라가 서고 처음있는 일이였다.
이 날 밤 꿈에 열부의 남편이 나타나서 일러 말하기를 여절은 이미 도성문을 빠져 나갔는데 여기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고향으로 내려가는게 좋겠다하니. 아 !슬퍼지고 천리 밖에까지 영혼이 함께오고 함께가니 또렸이 눈에 있어 세상에 살아 있는것 같았다. 도모한 일이 이루지 못하여 다음날 행장을 차리니. 여비 정매가 울면서 따라나서, 함께 가려 하니 열부가 울면서 여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조선 들이 이미 허락하여 면하여 주었는데 내가 어찌 감히 함께 가려 하겠는가 ?하고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며 차마 이별하지 못해 한강나루에 이르럿는데 마음이 비통하기 그지없는 날이였다.
울면서 정매가 우둑허니 서서 떠나감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자는 울면서 명사 십리를 돌아보니 사람의 그림자만 쓸쓸하기만 하였다. 귀가하여 여절의 집에서 치옥을 씻는 쇄가금 사백냥을 빼았어 한양에서의 채무를 갚았다 오호라! 열이여 !열부가 친정에 의탁하여 조카를 양자 삼으며 어루만져 잘길렀다.
남편의회갑년(병술년)에 손자 재건이가 태어나서 애지중지 길러 나이가 장성 하였을때 늘 이일을 회상하며 울면서 말해주었다.
그 후 다시 이사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계축년 유월 십이일에 돌아가시니 팔십칠세를 누리셨다 묘소는 창원부에서 이십리쯤에 삼정동 뒷산 기슭에 묘자원에 있다. 어느날 열부의 족손 정기전씨가 유적한권을 가지고 와서 지현에게 형장으로 삼을것을 청하고는 졸두함을 잊고 삼가 본손 소은어른 재건씨의 오래된 가장과 서술에 의하여 대략을 적는다
-무신년 유화절 입추일 순흥 안지현 삼가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