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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우처사안공지묘

자라가슴 2021. 2. 7. 21:32

退愚墓碣銘

君諱祉鉉 字叔景 號退愚 姓安氏 貫順興 文成公晦軒先生 以 道學 從祀聖廟. 中世而茅軒諱慜 以 忠節祭於社曾祖諱斗喆 號退隱善施惠 祖諱貞錫 繕工監假監役 考諱敎佑 有孝行 妣密城孫氏 通德郞 諱益秀之女.貞淑有壼範以 高宗丁亥生(1887) 君姿貌豊 偉器局凝重 九世 授 十九 史 通 大義 過數年 課程日進 文辭有聲 進退語默 儼然 如老成 辛丑聘父人 延安金氏 副司果 諱鎭基之女 乙巳 母夫人 患疾 危谹 藥餌瀡滫 躬親行之及 丁大故 擗踊頓絶 紫毀過禮 克襄之後 逐 日省墳不以 風雨少懈後 丁大人 公憂易戚兩盡 亦如前喪 先時母夫人隧道 夜有凶盜之禍 君至誠求解 竟爲還厝 自是 漑世道之岋嶪 斷意 名利 社門欽跡以 壬戌 十月 二十日 卒 得年 三十六 葬于 加音丁山麓 巳座 原從先非也 生三男一女 長男 承達 次 承萬 承祚 盆城許南鉷基壻也 嗚呼 君 稟受旣異 而持養有道 事親 志體俱養 友于兄弟 先世遺蹟手自 謄草雖斷 爛必糊背而完之 性又愛酒而 戒不及亂 平居不喜聲色 不事華美 不近博 奕所著有 退愚雜稿 若于編日 基子承達 持家壯來 請顯刻 之文於余 玆乃不顧 昏憒按狀而敍次如右系以銘曰 維君之先代 有令德逮 君之生克紹家學 如其得年 厥施斯博 天胡薔壽 僅止三紀碩果之報 其在哲嗣刻辭貞珉永垂天穓

족조 칠십칠세옹 경석 찬               분성후인 김성학 근서                 천구백칠십삼년 계축육월이십팔일효자승달근립


【표제】

퇴우 안군 묘갈명
(퇴우 안 선생의 묘갈명)


【행장 부분】

공의 휘는 지현(祉鉉)이요, 자는 숙경(叔景), 호는 퇴우(退愚)이며, 성은 안씨(安氏)요, 본관은 순흥(順興)이라.

문성공 회헌 선생은 도학으로 성묘에 종사되었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모헌 휘 민(慜)은 충절로 사묘에 제향되었으니,

증조는 휘 두철(斗喆)이요, 호는 퇴은(退隱)으로, 남에게 잘 베풀고 은혜롭더라.

조부는 휘 정석(貞錫)으로, 선공감 가감역을 지냈으며,

부친은 휘 교우(敎佑)로,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밀성 손씨(密城孫氏)로, 통덕랑 익수(益秀)의 따님이니, 정숙하고 현모양처로서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있었다.


공은 고종 정해년(丁亥, 1887)에 태어났으며,

그 용모가 풍후하고 기상이 장대하였으며, 기국이 무거워 장성한 인물이었다.

아홉 살에 사서삼경을 익히기 시작하여 열아홉 살에는 통달하였고, 대의(大義)를 훤히 알았더라.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게 이름났다.

거동과 말, 침묵에 이르기까지 노성한 사람처럼 위엄이 있었다.


신축년(辛丑, 1901)에 연안 김씨 부사과 진기(鎭基)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을사년(乙巳, 1905)에 모친 부인께서 병환이 위중하였을 때,

탕약을 손수 데워드리며 정성을 다하였으며, 정사년(丁巳, 1917)에 돌아가셨을 때,

통곡하며 쓰러져 예절을 넘도록 상례를 행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로는 날마다 산소를 찾아 뵈며, 바람과 비라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뒤이어 정사년 아버지께서 별세하시니, 공은 마치 앞서 어머니를 잃었을 때와 같이 애통하였더라.

그 전 모친 산소 인근에 밤중에 도적이 드는 일이 있었으나, 공이 지극한 정성으로 벗어나기를 구하니,

끝내 다시 본래 자리에 안장하게 되었더라.


【은거와 사망】

이로부터 세상의 도가 기울고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명리(名利)를 끊고 사문(士門)의 자취를 우러러 따랐으며,

임술년(壬戌, 1922) 10월 20일에 졸하니,

향년 서른여섯이었고, 가음정산(加音丁山) 기슭의 사유지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에서 멀지 아니하였다.


【가족과 성품】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장남은 승달(承達), 차남은 승만(承萬), 셋째는 **승조(承祚)**요,

사위는 분성 허씨 남홍기(許南鉷基)라.


아, 공은 타고난 기질이 이미 달랐고, 스스로를 기르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부모를 섬김에 뜻과 몸을 함께 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선대의 유적을 손수 초서로 베껴 옮기며, 문서가 끊어지거나 해졌더라도 반드시 풀칠하여 완전하게 보전하였고,

성품 또한 술을 좋아했으나 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절제하였으며,

평소에 음란하거나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고,

사치한 장식도 하지 않았고,

도박이나 노름에도 가까이하지 않았더라.


저술한 것으로 《퇴우잡고(退愚雜稿)》가 있으니,

훗날 이를 엮어 편찬하려 하였고, 장남 승달이 가업을 이으면서 이를 드러내 보이기를 청하였기에,

이에 어리석고 혼미한 몸을 돌아보지 않고 행장을 따라 서술하고,

아래에 명(銘)을 붙이노라.


【명문】

명(銘)하여 이르되:

유군지선대 有令德 /逮군지생 克紹家學
如其得年 厥施斯博 /天胡薔壽 僅止三紀
碩果之報 其在哲嗣 /刻辭貞珉 永垂天穓

공의 선대에는 훌륭한 덕이 있었고,
공이 태어나서는 가학(家學)을 잘 이어받았네.

그 수명을 오래했더라면 그 공덕이 더욱 널리 미쳤으련만,
하늘은 어찌 수명을 아껴 겨우 삼십여 년으로 그쳤는가.

그러나 그 훌륭한 열매는, 지혜로운 자손들이 글을 새겨
단단한 비석에 기록하니, 영원히 하늘 아래에 드러나리라.


🔖 요약

  • 인물: 안지현(安祉鉉), 자는 숙경, 호는 퇴우.
  • 출생: 1887년 고종 정해년.
  • 사망: 1922년(36세), 가음정산에 장사.
  • 학문: 유학과 도학에 통달하고 문장에도 능했음.
  • 성품: 효성과 형제우애, 검소함, 자기 절제.
  • 저술: 《퇴우잡고(退愚雜稿)》
  • 자손: 3남 1녀 (장남 승달, 차남 승만, 삼남 승조)

 

 

 

 

 

다음은 「퇴우안군묘갈명(退愚安君墓碣銘)」의 전체 한문 원문에 대한 상세한 번역입니다. 원문은 조선 후기~대한제국기 인물 안지현(安祉鉉, 1887–1922)의 묘갈명으로, 그의 생애와 인품, 행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1. 서문 퇴우 안군 묘갈명 군의 이름은 지현(祉鉉)이요, 자는 숙경(叔景), 호는 퇴우(退愚)이며, 성은 안씨요 본관은 순흥이다. 문성공 회헌 선생(文成公 晦軒先生)은 도학(道學)으로 성묘에 종사되었으며, 중대(中世)에 이르러서는 모헌 민(茅軒 諱慜)께서 충절로 사묘에 제향되었다. 증조는 두철(斗喆)이니 호는 퇴은(退隱)으로, 자비롭고 베풀기를 잘하였다. 조부는 정석(貞錫)으로 선공감 가감역(繕工監 假監役)을 지냈고, 부친은 교우(敎佑)로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밀성 손씨(密城孫氏)로 통덕랑 익수(通德郞 益秀)의 따님이다. 정숙하여 부인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고종 정해년(1887)에 군이 태어났다. 2. 성장과 수양 군은 자질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그 기상과 품격은 엄중하였다. 아홉 살에 『사서(四書)』를 읽었고, 열아홉에 『십구사통대의(十九史通大義)』를 익혔다. 그로부터 수년간, 학문 진보가 날마다 나아갔고 문장과 글에는 명성이 있었다. 말하거나 잠잠히 있을 때에도 조용하고 무게 있어 마치 노성한 사람과 같았다. 3. 효성과 가정 신축년(1901)에 연안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친은 부사과 김진기(副司果 鎭基)이다. 을사년(1905), 어머니가 병을 얻어 위중해지자 약을 달이고 간호함을 손수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곡하고 뛰며 통곡함이 심하여 슬픔에 절도 잃었으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였다. 그 뒤로도 날마다 어머니 묘를 찾아 성묘하되 비바람 속에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후일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의 상(喪)을 지냄에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이전의 어머니 상과 다름없이 하였다. 전에 어머니 묘소 인근에 야간 도적 사건이 있었으나, 군이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고 해탈을 구한 끝에 무사히 다시 안장할 수 있었다. 4. 은거와 최후 이로부터는 세상의 도가 위태함을 느껴 명리(名利)에 대한 뜻을 끊고, 사문(士門)도 그를 우러러보았다. 임술년(1922)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6세였다. 가음정산(加音丁山) 기슭 사유지에 사좌(巳座) 방향으로 장사 지냈는데, 이는 조상들의 묘소와 같은 곳은 아니다. 5. 자녀와 성품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장남은 승달(承達), 차남은 승만(承萬), 삼남은 승조(承祚)이며, 사위는 분성 허남홍(盆城 許南鉷)이다. 아아! 군은 타고난 바 다르고, 기른 바 또한 도리에 맞았으며, 부모를 섬김에 뜻과 몸이 함께 공양되었다. 형제 간에 우애가 깊었고, 선조들의 유적(遺蹟)을 손수 옮겨 필사하였으며, 비록 찢기고 훼손된 것도 반드시 붙여 완성하였다. 6. 취미와 저술 성품은 또한 술을 좋아했으나, 방탕하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은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와 화려함을 꺼리고, 도박과 장기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지은 글이 『퇴우잡고(退愚雜稿)』에 있는데, 그 아들 승달이 집안을 이끈 후 장성하여 이를 새겨 출판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나는 정신이 어지러운 줄도 돌아보지 않고 사정을 따라 위와 같이 정리하였고, 이에 명(銘)을 붙여 말하노라. 7. 명(銘) [비문 끝맺음 시] 그대의 선대는 어진 덕이 있었고 그대 또한 태어나 집안을 계승하며 학문을 이어받았도다. 그러나 얻은 수명은 다하지 못하여 그 베푼 바가 널리 미치지 못하였네. 하늘이 어찌 그 수명을 아껴 세 번의 순환밖에 허락하지 않았는가. (36세) 그러나 훌륭한 열매에 대한 보답은 그 지혜로운 후손에게 있으니, 이 새긴 글이 바른 돌에 기록되어 영원히 하늘가에 길이 드리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