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가슴 2009. 5. 16. 15:00
동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11리이며, 남쪽으로 창원부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2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칠토현(漆吐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칠제(漆隄)라고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원(原)은 원(圓)으로 된 곳도 있다. 현종(顯宗)이 김해부(金海府)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귀산현(龜山縣) 현 남쪽 41리 지점에 있다.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인데 고려 때에 현으로 승격하여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웅신현(熊神縣)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금주(金州)에 이속시켰다. 공양왕 때에 내속(來屬)하였고, 일명 은산(銀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창원부 서촌(西村)과 경계가 넘나든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칠토(漆吐)ㆍ칠제(漆隄)ㆍ귀성(龜城)ㆍ무릉(武陵).
【성씨】 본현 김(金)ㆍ윤(尹)ㆍ정(丁) 귀산 제(諸) 부곡 남(南) 우질포(亏叱浦)와 같다.
【군명】 【풍속】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청룡산(靑龍山)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무릉산(武陵山)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성산(城山)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청량산(淸涼山) 귀산현(龜山縣)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예전 귀산현의 진산(鎭山)이다. 적현(赤峴) 귀산현 북쪽 9리 지점에 있으며 창원부(昌原府) 경계이다. 바다 귀산현 남쪽에 있다. 여화곶(汝火串) 귀산현 남쪽에 있다. 둘레가 45리이며 목장이 있다. 『신증』 가덕도(加德島)의 목장을 혁파하고 그곳 말을 여기에 옮겨왔다. 저도(猪島) 귀산현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15리이다. 대천(大川) 귀산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창원부 광산(匡山) 남쪽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 귀산포에 들어간다. 서천(西川)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창원부 광산에서 나오며, 북쪽으로 흘러 매포(買浦)에 들어간다. 마전포(麻田浦) 귀산현에 있다. 귀산포(龜山浦) 귀산현 동남쪽 3리 지점에 있다. 우질포(亏叱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곧 영산현(靈山縣) 기음강(岐音江) 하류이다. 여음포(餘音浦) 귀산현에 있다. 멸포(蔑浦) 일명 매포이며,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우질포 하류이다. 벼랑 위에 누각이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긴 강이 동쪽을 향해 졸졸 흐르는데, 들은 넓고 산은 열려 하늘 끝까지로다. 배와 상앗대는 몇 해나 사람을 건너 주었는가. 풍진(風塵) 만리 길에 객은 누(樓)에 올랐도다. 연기는 두자(杜子)가 진회(秦淮)에서 보낸 밤에 서렸을 때와 같고, 달은 동파(東坡)가 적벽(赤壁)에서 보낸 가을처럼 작네. 갈림길은 남쪽으로 큰 진(鎭)에 통하니, 나그네의 말은 매양 여기에 와서 머문다.” 하였다.
【토산】 벌꿀ㆍ청어ㆍ대구[大口魚]ㆍ인삼ㆍ감ㆍ옻[漆]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해삼ㆍ조기[石首魚]ㆍ붕어[鯽魚]ㆍ홍어ㆍ소금ㆍ대.
【성곽】 읍성(邑城)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1천 5배 95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봉수】 안곡산 봉수(安谷山烽燧)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창원부 성황산(城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산현 봉산(峯山)에 응한다.
【누정】 택승정(擇勝亭) 객관(客館) 남쪽에 있으니, 현감 이숙규(李淑珪)가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창인역(昌仁驛)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영포역(靈浦驛)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다. 혜민원(惠民院)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멸포원(蔑浦院) 멸포 벼랑에 있다.
【불우】 장춘사(長春寺)ㆍ 천계사(天溪寺) 모두 무릉산(武陵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경양대(景讓臺) 우질포(亏叱浦) 서쪽 벼랑에 우뚝한 바위가 있고 그 위는 평탄하여 손바닥 같은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고려 이인로(李仁老)가 일찍이 여기에서 놀이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강 위엔 가을빛이 맑고 그윽한데, 원융(元戎)이 한가한 날에 배를 띄웠네. 물은 쪽빛 같고 모래는 눈 같으며, 산은 병풍 같고 술은 기름 같아라. 석벽(石壁)은 아침저녁 물결에 깎이고, 피리 소리는 고금의 시름을 깨뜨리네. 이 중에 네 가지 일 모두 다 흠 없으니, 흠뻑 취하여 촛불 잡고 논들 어떠하리.” 하였다. 우질포향(亏叱浦鄕)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현 남쪽 7리 지점에 있다. 산성(山城) 현 북쪽 4리 지점에 있다. 석축(石築)이며 둘레가 1천 3백 42척이었는데 지금은 다 무너졌다.
【명환】 본조 남질(南軼) 고을 백성에게 은애(恩愛)를 끼쳤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가 심은 나무를 가리켜 남정자(南亭子)라 한다.
【인물】 고려 윤환(尹桓) 공민왕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칠원백(漆原伯)에 봉해졌다. 윤환은 본래 무인(武人)으로 다섯 조정을 내리 섬겨서 세 번이나 수상(首相)이 되었고, 집안이 대단한 부자로, 일찍이 칠원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유동리(柳洞里)에 살았다. 그 해에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을 형편이었는데, 윤환이 자기 재물을 흩어서 구제하고 가난한 백성이 꾸어간 재물에 대한 문서를 가져다가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때 한창 오랫동안 가물어 있었는데, 윤환의 밭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나 남의 밭에까지 젖어들어 큰 풍년이 드니, 경상도 백성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윤수상(尹守常) 벼슬이 도첨의평리 예문관 제학(都僉議評理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본조 윤자당(尹子當)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여하여 칠원 부원군(漆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효자】 고려 송한문(宋漢文) 어머니가 미친병에 걸리자, 오른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약으로 먹였더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정문(旌門)되었다. 『신증』 본조 강계흠(康季欽) 아버지를 정성껏 섬겼다. 일찍이 부역 때문에 서울에 갔는데, 멀리 떠나 있는 동안에 뜻밖의 연고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그의 첩이 아버지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 쫓아버렸다. 돌아오는 도중에 아버지가 편안하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고기를 먹었다. 아버지가 병중에 생선을 먹고 싶어하자, 계흠이 물가에서 울부짖다가 잉어가 노는 것을 보고 작살로 잡아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가 죽자 여묘(廬墓)하였고, 3년상을 마친 다음에도 묘 옆에 집을 짓고 또 3년을 살았다. 【열녀】 본조 연이(燕伊) 귀산현의 정경(丁敬)이라는 자가 욕보이고자 하니, 응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켜 죽었다. 정문(旌門)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4년에 창원(昌原)에 합쳤다. 왜란 후에 읍이 쇠잔하였기 때문이었다. 광해주 9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고읍】 귀산(龜山) 남으로 70리에 있는데 본래는 성법부곡(省法部曲)이었다. 고려 때 귀산현으로 승격 시켰다가 웅신현(熊神縣)에 예속시켰다. 후에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가 공양왕 때 내속(來屬)시키고 은산(銀山)이라 하였다.
【방면】 상리(上里) 남으로 끝이 25리이다. 서면(西面) 서로 10리, 서북쪽으로 30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25리이다. 귀산(龜山) 바로 귀산고현(龜山古縣)으로 창원부(昌原府)의 서쪽 경계까지 넘어가 있으며, 바로 여음포(餘音浦)의 북쪽이다. 동남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으며 처음은 40리, 끝은 80리이다. ○ 우포향(亏浦鄕)은 북으로 25리, 부곡부곡(釜谷部曲)은 남으로 7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북으로 4리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 칭하며, 둘레는 1천 3백 40척이다.
【진보】 귀산포진(龜山浦鎭) 귀산포에 있는데 광해주 6년에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현종 9년에 없앴다가 14년에 다시 두었다.
○ 수군 동조창 영운차사원(水軍同漕倉領運差使員)이 있다.

【진도】 매포진(買浦鎭) 영산(靈山)으로 통한다. 상포진(上浦鎭).
【목장】 여화곶(汝火串) 귀산현 남쪽에 있는데, 가덕(加德)목장을 이곳으로 옮긴 후에 없앴다.
【누정】 진귀루(鎭龜樓)ㆍ망궐루(望闕樓).
【사원】 덕연서원(德淵書院) 인조 신사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세붕(周世鵬) 순흥( 順興)편에 있다.

[주D-001]연기는……때와 같고 : 두자는 두목지(杜牧之)를 말하니, 당 나라 말의 시인이다. 남경회고시(南京懷古詩)에, “연기는 찬 나무에 서렸고, 달빛은 모래 위에 서렸다.[煙籠寒樹月籠沙]”라는 구절이 있다. 진회는 남경에 있는 운하(運河)의 이름이다.
[주D-002]달은……가을처럼 작네 : 송(宋) 나라의 소동파(蘇東坡)가 양자강 가의 황주로 귀양가 있을 적에, 황주 앞 양자강의 붉은 석벽이 있는 곳에서 두 번 놀이하고 부(賦)를 두 편 지으니, 전후 적벽부(前後赤壁賦)라 한다. 그 두 번째 놀이할 제 지은 후적벽부에, “산은 높고 달은 작다.[山高月小]”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3]네 가지 일 : 예전부터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유쾌한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의 네 가지를 4미(美)라 하여 다 갖추기가 어렵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