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최균 ;안신갑

자라가슴 2011. 11. 9. 19:40

형태/방법/업적 : 담(潭) 손자로 자는 여평(汝平)이며 시호는 의민(義敏)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중종 정유년에 곤계봉(昆季峯)아래 소대(蘇臺) 위에 있는 본가에서 태어나 자호를 소호라 불렀다. 풍채와 거동이 준수엄위하고 기국이 강활원대 하였으며 일찍이 산수간에 자취를 감추고 공명영달을 구름처럼 여기고 오직 수간정사에 형제분이 같이 기거하면서 언제나 서로 화락하였으며 빈곤을 잊고 분의를 지켜 매사를 궁리실천하고 늦게 주역을 즐겨 탐독하여 그 깊은 뜻을 체득하였다. 또한 천문도수에도 정통하였으나 돈세첨거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총명예지를 알 길이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업적:임진년에 왜적이 벌떼처럼 몰려오니 저정과 백성들이 혼비백산하여 적을 막을 대책을 강구치 못하고 있을 때 아우 강(堈)과 함께 칼을 짚고 의병을 일으키니 두 생질 이달과 안신갑이 달려와 적의 복수를 맹서하고 눈물을 씻고 몸과 마을을 합하였다. 균은 모주가 되어 전략의 수립과 병기의 조달 및 의병의 징모와 군량의 공급까지 도맡았다. 아우 강은 장수가 되어 정예군을 이끌고 급한 곳부터 먼저 싸워 무찌르고 균은 담티고개에 진을 치고 스스로 풍운장이라 부르며 많은 의병을 요로에 설치하여 왕래표략하는 왜적을 위협하여 물리치닌 마을 사람들이 안도하게 되었다. 한편,인근주민에게 농사를 권장하여 수확을 평소처럼 올리게 되니 사방에서 굶주리고 흩어졌던 장졸이 다투어 운집하여 힘을 합하자 그 명상과 군세가 날로 더욱 떨쳤다.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그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암으로 형제분이 함께 가서 초유사의 절제를 받고 현지에서 대소현 조종도,망우당,곽재우,모촌,이정,소와강칭,송암 이노 등과 같이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즉시 실천에 옮겨 권응수,정세아,조희익,신해 등 평소 친지들과 함께 강(江) 좌우에 각각 웅거하여 물샐틈없이 배치 잠복하고 정보를 서로 교환하면서 장병의 수시이동과 군량의 적시공급에 전력을 다하였다. 군막안에서 수립한 전략계획이 일선전투와 기동에 적중치 않음이 없었으며 그리고 목전의 위험험난을 무릅쓰고 언제나 홀로 출전하는 아우 강을 아쉬워하며 경계하고 하였지만 그러나 강은 분전분투하여 마침내 전공을 크게 세우니 이는 모두가 균의 주도면밀한 전략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산하군대가 사량,웅천 두 곳에서 적곡으로 전세가 위급함을 듣고 달려가 적을 참살하고 위급을 모면케 하였다. 그리고, 두 형제의 원전으로 일면을 막아 참두한 적은 무수하였다.특히 안민령에서 적의 포위를 당했을 때 균은 한편에서 돌을 던져 석전을 벌려 적을 요란케 하고,또 한편에서는 이틈을 이용하여 강이 돌격하여 적위 포위망을 뚫고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논공에는 언제나 사양하니 세론이 옛날 후한시대의 풍이(馮異)대수장군을 닮았다 하였다.
조정이 균의 장략풍도를 문지하고 수문장에 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을사년에는 강과 함께 화공책을 이용하여 제주대양에서 해적을 대파하니 이로 인하여 전라감사 호백이 품계하여 작열이 통정에 오르고 삼등공훈에 참열케 되었다. 균은 문명문달을 불구하던 분이라 벼슬을 사양, 광해군이 혼조를 당하여 정치의 무질서와 국가기강의 추락상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년에 품직되어 '가선대부중추부사'에 오르고 병자년 9월16일에 졸하시다 향년이 팔순이었다. '증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증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