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津 주물연진을 아시나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山川條)〗에는 『주물연진(主勿淵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府)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소공관(小公館)을 개설하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한다. 【在府北四十里漆原縣買浦下流岸上設小公館以待倭使之乘舩往來】고 기록했다.
창원시의 의창현은 본래 신라의 굴자군이었다. 경덕왕 때 의안군으로 고쳤고, 원래 골포였던 회원현이 경덕왕 때 합포로 이름이 고쳐 의안군의 영현으로 만들어졌고, 고려 현종 9년인 무오년에 이 두 현을 금주관하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각각 감무를 두었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8년인 임오년에 의안을 의창으로 고치고 합포를 회원으로 고친 다음, 모두 현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태종 8년인 무자년에 두 현을 합쳐 창원부로 만들었고, 을미년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가 되었다. 그런데 의창의 다른 이름은 회산이고 회원의 다른 이름은 환수였다. 향은 1개로 내포이고, 소가 1개가 되어 동천이 있고, 낙동강의 하류인 주물연진이 부의 북쪽에 위치했다. 그때의 호수는 1,094호에 인구는 4,955명이었다.
세종지리지 경상도
대천(大川)이 3이니, 첫째가 낙동강(洛東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奉化縣) 북쪽 태백산(太伯山)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聞慶縣)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順興)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선산(善山)에서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仁同)에서 칠진(漆津), 성주(星州)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加利縣)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草溪)에 이르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靈山)에 이르러 또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漆原)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昌原)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金海)에 이르고, 밀양(密陽)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되고, 양산(梁山)에서 가야진(伽倻津)이 되고,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둘째는 진주(晉州) 남강(南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宜寧)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강(岐音江)으로 들어간다. 세째는 초계(草溪) 황둔진(黃芚津)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라도 무주(茂朱) 초현(草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감음현(減陰縣) 황석산(黃石山)에서 나와서, 거창(居昌)에서 합류되어 합천(陜川)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물창진(甘勿滄津)으로 들어간다.
호수는 4만 2천 2백 27호, 인구가 17만 3천 7백 59명이다..
창원부【의창(義昌)은 별호(別號)가 회산(檜山)이고, 회원(會原)은 별호가 환수(還殊)이다.】 향(鄕)이 1이니, 내포(內浦)요, 소(所)가 1이니, 동천(銅泉)이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 북쪽에 있다.【낙동강 하류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해(金海)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김해(金海) 임내(任內) 웅신(熊神)에 이르기 32리, 북쪽으로 칠원(漆原)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는 1천 94호, 인구가 4천 9백 55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2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19명, 선군(船軍)이 6백 89명이다.
주물연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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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물연진에는 낙동강 뱃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근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큰 화물을 싣고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상경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운항되던 배가 갑자기 임해진 근처에서 암초에 부딪히면서 좌초되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근우는 화물을 다 잃고 자신의 삶을 비관해 자살하였다. 그 후로 낙동강 700리 길의 뱃사공을 하려면 근우바위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도 수면이 낮아지는 겨울철이나 갈수기에는 물속에 숨어 있는 근우바위가 떠오르고 비가 자주 오는 여름철에는 물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일명 창원부 소공간 일겯으며 일본 사신들이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과 진해 제포에서 여독을 푼 뒤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가곤 하였는데 주물연진을 거쳐 상경하였던 것이다. 일본 사신들이 주물연진에 도착할 무렵이면 창원도호부에서는 “도호부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마중을 나가 이들을 영접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곧 주물연진은 뱃길을 이용해서 부산으로 왔던 외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장거리 여행에 지친 피로를 풀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중간 휴식처이자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에서 대천(大川)이 3이니, 첫째가 낙동강(洛東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奉化縣) 북쪽 태백산(太伯山)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聞慶縣)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順興)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선산(善山)에서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仁同)에서 칠진(漆津), 성주(星州)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加利縣)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草溪)에 이르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靈山)에 이르러 또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漆原)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昌原)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金海)에 이르고, 밀양(密陽)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 되고, 양산(梁山)에서 가야진(伽倻津)이 되고,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둘째는 진주(晉州) 남강(南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宜寧)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강(岐音江)으로 들어간다. 세째는 초계(草溪) 황둔진(黃芚津)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라도 무주(茂朱) 초현(草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감음현(減陰縣) 황석산(黃石山)에서 나와서, 거창(居昌)에서 합류되어 합천(陜川)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물창진(甘勿滄津)으로 들어간다. 태종 8년 무자에 두 현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만들고, 을미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의창(義昌)은 별호(別號)가 회산(檜山)이고, 회원(會原)은 별호가 환수(還殊)이다. 】 향(鄕)이 1이니, 내포(內浦)요, 소(所)가 1이니, 동천(銅泉)이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 북쪽에 있다. 【낙동강 하류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해(金海)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김해(金海) 임내(任內) 웅신(熊神)에 이르기 32리, 북쪽으로 칠원(漆原)에 이르기 24리이다. 대변소(조선시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변란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던 기관).에는 가장 큰 규모의 전투선인 전선(戰船) 1척, 작은 전투선인 병선(兵船) 1척, 적을 정찰하는 사후선(伺候船) 2척 있었다. 그리고 창원부사를 대신하여 전선을 지휘하는 대장(代將) 1인, 병선을 지휘하는 병선장(兵船將) 1인, 전투선을 관리 감독하는 병선감관(兵船監官) 1인, 수군의 장비들을 관리 감독하는 수군기감관(水軍器監官) 1인, 수군에 속한 군관인 주사기패관(舟師旗牌官) 5인이었다. 군량미는 37섬 9말 6되였다. 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12㎞에 위치한 신촌진(新村津)과 북쪽으로 16㎞에 위치한 주물연진(主勿淵津)에는 나룻배가 각각 1척씩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변소 [待變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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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주물연진에서 바라본 영상땅 임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