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
1000년 전 진경대사 득도한 동굴을 찾다.
진경대사眞鏡大師(853~923)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853년(문성왕 15년) 12월 10일에 출생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이다. 862년(경문왕 2년)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玄昱)에게 출가하여 872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오랜 세월 동안 명산대찰의 순례를 마치고,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찾던 중 김해 진례에서 머물 때 대사의 도(道)를 사모하는 진례성제군사 김율희(進禮城諸軍事 金律熙)을 만나 후원을 받아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이름을 “봉림(鳳林)”으로 고치고 선방을 중건했다. 923년(경명왕 7년) 4월 24일 입적하자 왕이 조문하고 시호(진경대사 : 眞鏡大師)와 탑호(보월능공지탑 : 寶月凌空之塔)를 내렸다.
(行錄)』10권을 저술하였는데, 『삼국사기』김유신 전기는 이를 간단히 채록한 것이었습니다.
진경대사
가락국의 후예로서 신라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 진경대사(眞鏡大師)였습니다. 진경대사는 신라 말기에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전개되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창원 봉림산문(鳳林山門)를 창건한 큰스님이었습니다. 1919년 3월에 일제가 창원 봉림사 터에서 서울 경복궁 내로 이전한 진경대사비에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경대사는 신라 문성왕 17년(855) 12월 10일에 탄생하였는데, 이름은 심희(審希)였고, 속세의 성(姓)은 신 김씨(新 金氏), 임나왕족(任那王族)의 후예로 흥무대왕(興武大王)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김씨란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하면서 새로 편입된 김해김씨를 경주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명칭이며, 임나왕족의 후예란 가락국 왕족의 후예란 뜻이며, 흥무대왕은 김유신의 시호입니다. 진경대사는 9세에 원감대사(圓鑑大師)에게 사사하여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4년 간 명산을 돌면서 수도를 쌓아 존경받는 고승이 되었습니다. 888년에 진성여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의 초청으로 봉림사를 개창하였습니다. 918년에는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으로 들어가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호(號)를 받았습니다. 70세 되던 경명왕 7년(923) 4월 2일에 봉림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같은 해에 사리탑이 세워졌고, 이듬해에 비(碑)가 세워져 지금은 각각 보물 362호와 36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락인의 후예로서 신라불교의 진흥을 위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큰스님이 진경대사였습니다.
김인광(金仁匡)에 대하여
김인광(金仁匡)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 김해지방의 호족.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 의하면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호족으로서 김해읍에서 35리 가량 서쪽으로 창원의 경계지대에 진례성을 쌓고 그 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병(私兵)의 지휘자로서 인근지방을 지배하였다.
그는 상당히 교양이 높은 가문에서 성장하여 신라왕실에 충성을 다한 김해소경(金海小京)의 관리였거나, 아니면 신라 말기에 새로 대두한 구가야왕족의 후예 신김씨(新金氏)로서, 세력을 떨치다가 907년(효공왕 11)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가 등장하기 이전에 몰락하였다.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퇴촌동 정병산에는 옛날부터 진경대사가 머물며 득도를 한 동굴이 있는데, 어렸을 때 한번 가본 기억이 있지만 그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몰라 퇴촌동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런 동굴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그 동굴이 있던 곳은 소풀먹이러 다니던 곳으로 큰 바위아래에 돌을 다듬어 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병산 일대를 몇 번에 걸쳐 찾아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옛날 퇴촌동에 살았던 원주민 중에 이 동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을 우연히 만나 동굴을 탐방하기로 약속을 하여 방문해보니 어릴 때 보고 상상하던 것보다는 초라했지만 동굴의 실체를 확인했다. 옆에는 물이 흐르고 언제 부터인가는 사람이 살은 헌적이 완연하였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동굴이 있는 곳으로 올라보니 전번에 한번 동굴을 찾아서 와봤던 곳이었다. 그때에도 바위의 모습을 보고 사진으로 남겨 두었는데 반신반의 하면서 하산을 했던 것은 동굴의 바닥이 장방형의 큰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위 아래는 동굴이 있어 잠을 청할 수 있는 곳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는 굵은 아카시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는 동굴을 막아 둘 수 있는 돌들이 흩어져 있고 누군가가 여기에서 오래전에 맥주를 먹고 버려둔 캔맥주 통이 있다.
동굴 안의 바닥은 돌을 편편하게 깔아둔 흔적이 있고 한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이 동굴을 퇴촌마을 사람들은 도둑놈 굴로도 불렀으며 퇴촌마을에서 불울 지피면 여기서 연기가 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한다.
바위의 뒤쪽으로 가면 바위 위로 올라가기가 쉽게 되어 있어 바위에 올라 창원시 전경을 보니 서쪽으로는 삼신산으로 불리는 하늘을 떠 바치고 있다는 천주산이 보이고 그 앞에는 낙남정간을 이어가는 봉림산과 창원골프장이 눈 아래 들어오고, 그 우측으로 신풍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검산성과 구룡산성도 이곳에서는 보인다. 바위에 앉아 정면으로는 창원시와 안민고개, 봉암갯벌 등이 모두 보이는 확 트인 시야를 확보한 곳이라 군사적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정병산을 올려보면 부엉이 굴이 있다는 곳과 일직선상으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는 보월능공탑비의 비문과도 일치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주산의 모습은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라는 비문의 이야기와도 일치하는 곳이다.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墻根)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산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심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부엉이 집*
창원시 퇴촌동(退村洞) 뒤 봉림산(鳳林山)중앙의 돌출(突出) 암벽(岩壁)에 커다란 굴이 뚫어져 있는데 이곳을 부엉이 옛 집터라 한다.
진경대사(眞鏡大師)가 봉림사(鳳林寺)를 건립(建立)할 때 부엉이 옛 집터 아래에 초옥(草屋)을 지어 불도(佛道)를 닦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창원대학(昌原大學)뒷편에 돌출된 바위가 있고 굴이 뚫려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부엉이 집터라고 한다. 이곳 또한 득도의 굴이 부엉이 집터가 아닌가 싶다
통일신라시대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봉림산파의 중심사찰이다. 신라 말 효공왕대(897∼911)에 현욱(玄昱)이 창건하였으며, 현욱의 제자 심희(審希)와 심희의 제자 찬유(璨幽)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떨쳤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전소되었다하나 봉림사 폐사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조선시대에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밀양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봉림사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에 여주 이씨들은 선친이 별세하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유인하였고 고추가루를 뿌리며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운반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그 뒤 절은 폐허화되었고 여주이씨의 가문도 역시 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임진왜란때의 일이라 전하며, 봉림사를 개창할시 우물이없어 큰스님이 근심에 차 있었는데 꿈에 선몽하길 법당앞 섬돌 아래 우물을 파 보아라는 선몽이 있어 우물을 아주깊이파니 물을 얻었다 한다. 후에 임란중 왜인들이 쳐들어와 금불과 좋은 물건은 반출 하고 목불및 가치가 미묘한것은 우물에넣고 우물을 파괴 하였으니 현재 우물의 위치를 알기어렵다고 전한다. 봉림사지 인근에는 중사골(중을 불에 살으다)이라는 지명이 아직까지 전해오고 있다.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362호의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보물 제363호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창원시 지귀동에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의 봉림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은 중 기단 위에 건립한 것으로 초층 옥신에 장방형의 문비(門扉)를 조각한 신라 말·고려 초의 작품이다. 또, 절터에서 1㎞ 떨어진 지점의 부처고개에는 마애불이 선각(線刻)되어 있다. 전하여 듣기에는 돌북(석고)이 있었다고 전하나 흔적이 묘연하다.
바위에 걸터앉아 1000년의 세월을 꿈길처럼 넘나들며 상념에 빠져보니 “달마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 라 말한 진경대사의 법문이 바람이 되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