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송암집
『송암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이로(李魯 ; 1544∼1598)의 시문집이다. 이로의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이 책은 1852년(철종 3)에 후손 현준(賢俊)·현곤(賢坤)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詩는 오언고시·오언율시·칠언절구·칠언율시 등 형식이 다양한데 특히 칠언율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국운을 한탄하고 애국심을 읊은 것이 많다. 소의 「청신토을사충간소(請伸討乙巳忠奸疏)」는 1569년(선조 2)에 올린 글로 을사사화 때 사사(賜死)된 윤임(尹任) 등의 신원(伸寃)을 청한 내용이고,「신묘봉사(辛卯封事)」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에 올린 것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과 그 방책을 건의하고 있다. 격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거두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서는 김성일(金誠一)과 내왕한 것이 대부분으로 왜적을 토벌하는 일을 논의한 것들이다. 또한,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낸 「상오리이체상원익서(上梧里李體相元翼書)」는 당시 지배층이 사병을 가지고 개인적 원한을 갚는 데 급급하여 관군을 쇠약하게 만들고 적을 토벌하지 못하는 폐단을 지적, 시정하도록 종용한 내용이다. 권4의 유사는 김성일과 곽재우(郭再祐)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한 사실을 적어놓은 글이다.
이로는 의령출신으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효범(孝範)의 아들이며,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사화 때 피화(被禍)된 관원들을 신원하여 줄 것과 간신들을 토죄할 것을 소청 하였다.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으며, 그간에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1591년에는 상소하여 왜사(倭事)를 논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삼가·단성으로 나가 동생 지(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인근 여러 고을에 창의통문을 내어 민중의 의분심을 환기시켰다. 1593년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 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 사이에 형조좌랑 겸 기주관·비안현감·정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낙산서원(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의(貞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