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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기 묘지몀병서

자라가슴 2014. 7. 13. 17:38

공의 이름은 우기(于器), 자는 허중(虛仲), 흥주(興州 :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일대) 사람이다. 증조부 영유(永儒)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되었다. 조부 부(孚)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은퇴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봉되었다. 부친 향(珦)은 선수유학제거 도첨의중찬(宣授儒學提擧 都僉議中贊)으로 문성공(文成公)의 시호를 받았다. 어머니 김씨는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녹연(祿延)의 딸이다.
문성공은 유학을 중흥시킨 커다란 공으로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공은 부업(父業)을 이어 훌륭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지원(至元) 임오년(충렬왕 8, 1282)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비서한림원(秘書翰林院)에서 벼슬하였다.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고, 5년 동안에 여섯 번 벼슬을 옮겨 고공정랑(考功正郞)이 되었다가, 1년 뒤에 비서소윤 지제고(秘書少尹 知制誥)가 되었다. 이로부터 병조총랑 사림·보문의 대제 국학전주 판내영비서시사 겸 한림시강사학 지제고(兵曹總郞 詞林寶文二待制 國學典酒 判內盈秘書寺事 兼 翰林侍講司學 知制誥)를 역임하였다. 조산대부(朝散大夫)로부터 정승대부(正承大夫)까지 무릇 6단계의 대부를 거쳤다. 대덕(大德) 갑진년(충렬왕 30, 1304) 8월 정헌대부 우부승지(正獻大夫 右副承旨), 이해에 우승지(右承旨)까지 되었다. 이듬해 봉익대부 밀직부사 문한사학승지(奉翊大夫 密直副使 文翰司學承旨)로 승진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더하여 지밀직사사 대사헌 민부·총부 전서(知密直司事 大司憲 民部·總部 二典書)가 되었다. 뒤에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가 더해졌고, 다시 검교찬성사 겸 판전의시사사 상호군(檢校贊成事 兼 判典儀寺事 上護軍)이 더해졌다. 천력(天曆) 2년(충숙왕 16, 1329) 9월 12일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65세였다.
부인 최씨는 전첨(典籤) 충약(沖若)의 딸로, 공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이 둘이다. 장남 정음(頂音)은 조계종 헤감국사(惠鑑國師)의 문하에 출가하여 대선사가 되었다. 차남 목(牧)은 봉상대부 사헌장령(奉常大夫 司憲掌令)이다. 공은 다시 이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 신(愼)은 노부도감판관(鹵簿都監判官)이다. 차남은 나이가 어리다.
공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관대하고 온화하다. 모습은 장중하고 예법을 스스로 지켰다. 공은 정당(政堂)에 몇 년 동안 있으면서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담당했다. 관리를 임명하면서 사사로움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고 있다. 성균시를 담당할 때 정밀하고 밝게 살펴서 이름난 명사들을 많이 뽑았다. 일찍이 합포(合浦)에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을때 위엄과 신의로써 군대를 다스렸다. 민간에 피해를 끼치는 것을 없애고 금지하였다. 온 지역이 그에 의지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여, 명성이 안팎으로 알려졌다.
모두 공이 다시 조정에서 큰 임무를 맡기를 바랐으나,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았다. 아깝도다! 이해 10월 기유일 대덕산(大德山) 선친의 묘 오른쪽에 장사지내려 하면서, 장령(掌令 : 차남 牧)이 같은 마을 사람으로서 공의 덕행을 잘 안다 하여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
명(銘)에 이르기를,
덕을 쌓았으니 지극히 높은 벼슬에 오르겠고,
인을 실천했으니 긴 수명을 누리겠건만,
아! 공의 벼슬과 수명이 어찌 여기서 그쳤단 말인가.
하늘의 뜻은 장차 복과 경사를 후손에게 내리려 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