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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 굳세고 올곧은 마음 - 산청 시천 산천재

자라가슴 2008. 10. 31. 00:00

권력과 물욕에 초연한 선비의 기개


 

 남명 조식 선생이 말년을 보낸 산청군 시천면 산천제 전경.



◇산천재(山天齋), 남명 조식의 기상이 담겨 있는 곳 = 몇몇이 모여 여행을 함께 가면 꼭 필요한 것이 여행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곳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관계된 사람은 또한 얼마나 훌륭하며, 이러저러한 내력을 가진 끝에 지금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지리산 중산리로 가는 길 한편에 있는 산천재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작은 건물 한 동과 부속 별채가 전부인 이 공간의 내력과 남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남명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감히 말하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인데 그래도 여행이니까 남명과 산천재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벼슬길 끝내 거절한 조선 유학자 남명 조식이 말년을 보낸 곳

본채·별채 각 한 동 단출한 공간, 검소하고 강직한 삶 드러내



◇남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 남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여려 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한 번도 나아가지 않을 정도로 권력에 초연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처음 제수받은 벼슬은 헌릉 참봉이다. 요즘 세상에 비교해볼 때 선거에서 공을 세우고 나면 공공기관의 임원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명망 있는 학자에게 시험을 안 보게 해줄 테니까 가장 낮은 직급의 공무원을 하라고 한 것이다. 시대가 다르지만, 남명이 권력에 대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지 혼자 생각해본다.


남명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그의 용기와 기개이다.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면서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 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라고 말하는 용기인 것이다. 조선이라는 절대왕권을 가진 나라에서 섭정을 펼치는 왕후와 왕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만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남명이 이렇게 강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선비이면서 칼을 차고 다녔다. 그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으로 밝은 것이 경이요, 밖으로 엄격하게 끊음이 의라고 하여 경(敬)과 의(義)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성자(惺惺子)라는 작은 쇠방울을 달고 다니며 그 소리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평가하는 남명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세상에 대해 쓴소리를 할 줄 아는 용기를 가졌으며, 세속의 권력과 물욕에 초연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산천재의 글과 그림 - 산천재란 이름은 주역의 64괘 중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왔는데 하늘이 산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제 스스로를 빛나게 하고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산천재의 의미에 걸맞게 산천재의 주련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산천재의 주련(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


春山底處无芳草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 (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살겠나)

銀河十里喫猶餘 (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오래 전 내가 산천재에 갔을 때 안내문에 주(周) 장(張) 소(邵) 정(程)이런 글귀가 있었다. 이글이 중국에서 주희(朱熹)가 완성한 성리학의 토대를 제공한 주돈이, 장재, 소옹, 정이·정이천이라는 인물을 뜻하는 말임을 누가 알까. 좋은 설명이란 상대방의 수준도 배려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천재라는 현판 주위 벽면에는 벽화가 있다. 바둑을 두는 은자(隱者)가 있고, 선비가 밭을 가는 모습도 있다. 또 다른 그림은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라는 사람의 옛이야기라 한다. 허유라는 사람은 바르지 않은 자리에는 앉지도 않았고, 당치도 않은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의(義)를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중국의 요(堯)임금은 천하를 그에게 물려주려 하였으나 허유는 단번에 거절하고선 말없이 기산(箕山) 밑을 흐르는 영수(穎水) 근처로 가버렸다. 재차 요임금이 부탁하자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자신의 귀를 영수에다 씻는다. 이때 소부가 망아지를 끌고 오다 그 이야기를 듣고선 더러운 물을 자신의 망아지에게 먹일 수 없다며 위로 올라가 망아지 물을 먹인다. 옛이야기를 담아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덕천서원(德川書院) = 산천재를 지나 좀 더 지리산으로 들어가면 덕천서원이 나온다. 1576년(선조 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려고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에 '덕천(德川)'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뒤에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지방 유림이 복원하였다.

 

 

 산천재를 지나 중산리 쪽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덕천서원 전경 

 

올가을에는 산천재와 함께 덕천서원을 돌아보면서 남명의 엄격함과 용기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출처 : 전통의 향기를 찾아서
글쓴이 : 幽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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