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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가슴 2008. 5. 27. 17:37

故眞鏡大師’-전서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비명


門下僧幸期奉 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余’-서문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奉 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余製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고(故) 진경대사의 비

유당 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 및 서

문하승 행기가 교를 받들어 쓰고, 문인인 조청대부 전 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최인연이 전액을 쓰고, 내가 짓는다.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현상은 광활함을 차지하는 이름만이 아니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은 깊고 그윽함을 칭하는 이름만은 아니다. 저 선(禪)에 깃든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한 사람만이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즐거이 노닐며 경치를 구경하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거하며 달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호가호위하는 선백(禪伯)으로 하여금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법령을 좇는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돕게 하여, 자비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를 모두 물리쳐 하늘 끝까지 따르고 복종하며, 비밀스런 인(印)을 가지고서 심오한 뜻을 발휘하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서 진실한 종지를 널리 드러내게 할 수 있으니, 오직 우리 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요,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타고, 바다(鰈水)의 정기에 올라서,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진한(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배상(盃相)은 도(道)는 노장사상을 높였고 뜻은 송교(松喬)를 흠모하였으며, 물과 구름이 비록 그 한가로움을 내버려둔다 할지라도 조야(朝野)는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아쉬워 하였다. 어머니 박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다.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는 깜짝 놀라며 임신을 하였다. 곧 냄새나는 음식을 끊고 그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감응하여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7년(853) 12월 10일에 태어났다. 대사는 기이한 자태가 넉넉히 드러났으며 신비한 색이 원융하게 밝았다. 나이 어려서도 철부지같은 마음은 없었으며, 이를 가는 7,8세의 나이에도 불사(佛事)를 ▨▨하였다. 모래를 쌓아 탑을 이루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가서 원감대사(圓鑑大師)를 알현하니, 대사는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나이 비록 어렸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애쓰는 데는 고봉(高鳳)도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는 양오(揚烏)도 아름다움을 양보할 만 하였다. 좇아서 승▨(僧▨)를 밟고 법당을 떠났다. 함통(咸通) 9년(868)에 스승이 병에 걸려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인도)에서 동쪽으로 왔으며, 중국에서 꽃이 한번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다. 대대로 서로 전승하여 끊임이 없도록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중국에 가서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이었으니,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아들이며 숭령(嵩嶺)의 현손이다. 비록 전신가사(傳信架裟)는 전하지 않았으나 심인(心印)은 서로 주었다.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열었다. 그대는 마음의 등불을 전하라. 나는 법신(法信)을 부촉하노라”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스스로 열반(泥洹)에 들어갔다. 대사는 눈으로 이별함에 슬픔이 깊고 마음으로 사별함에 수심이 간절하였다.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실로 더하였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윽고 계율을 지킴에 마음이 들떠서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어찌 수고롭겠는가. 일따라 돌아다녔다. 명산을 찾아 고산을 우러러 보고, ▨▨을 더듬어 절경까지 찾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여 두루 현관(玄關)을 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모름지기 큰 선비를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하였다. 문덕(文德) 초년부터 건녕(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에 자리를 잡자, 학인들이 빗방울 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감추지 않았을 것이며 어찌 오직 그것 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이 급히 편지를 보내어 궁전(彤庭)으로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외람되이 받들기는 하였으나, 조사(祖師)의 업(業)을 어찌 중단하리오.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표를 올리고 굳이 사양하였으니, 가히 하늘 밖 학의 소리는 계림(鷄林)의 경계에 빨리 닿지만, 사람 가운데의 용덕(龍德)을 대궐 문(象闕) 옆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도다. 대사는 인하여 세속을 피하여 홀연히 운수처럼 떠나 명주(溟州)로 가서 머무르며, 산사에 의지하여 마음을 깃들였다. 천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방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되어 멀리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그 소문이 남쪽 경계에 미치고 (대사가)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란 자가 있어 (대사의)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고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대사를)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하여 절을 수리하고 법의 가르침을 자문하는 것이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며,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이 특별히 정법전의 대덕인 여환(如奐)을 보내어 멀리 조서를 내리고 법력을 빌었다. 붉은 인주(紫泥)를 사용하고 겸하여 향기로운 그릇(鉢)을 보냈으며, 특별한 사자(專介)를 보내어 신심(信心)을 열게 하였다. 그 임금이 귀의할 때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러하였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만이 멀리 성▨(聖▨)의 존중함을 입고, 청안율사(靑眼律師)만이 여러 어진이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으리오.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墻根)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산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이보다 앞서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 眞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가정(鯉庭)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삼보(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고 큰 기틀을 이어 다스림에, 도안과 혜원의 도를 힘입어 우탕(禹湯)의 운세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듣건대 대사는 당시 천하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신라)에서 독보적 존재요, 북악의 북쪽에 오래도록 거처하며 동산(東山)의 법을 가만히 전수했다고 한다. (이에)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이나 이 역시 임금의 땅이요, 하물며 (석가모니의) 부촉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산문을 나서서 ▨에 이르렀다. 가마가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정돈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예궁(蘂宮)으로 인도하고 난전(蘭殿)에서 공경히 만났으며,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표하고 공손히 숭앙하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대사는 법복을 높이 휘날리며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술수를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에 ▨▨할 방책을 말하였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쁨에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날 대사를 따라 궁궐에 오른 자가 80인이니, 무리 가운데 상족(上足)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있어 우러러 종과 같은 맑음을 두드리고 그윽히 거울과 같은 지혜를 품었다. 대사가 ▨▨를 치매 소리가 조용하였다. 새벽의 해는 온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에 온갖 만물의 소리가 화답하였다.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유(空有)의 극단을 오로지 초월하였고, 분연히 선을 얘기하매 세속의 바깥을 진실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끝을 알았으리오.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명하여 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 나란히 ▨(제자?)을 칭하게 하였다. 인하여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존호를 올려서 법응대사(法膺大師)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항상 덕을 숭앙하고 삼가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였다. 그후에 대사는 이미 예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와 향기로운 가르침을 거듭 열어서 죽은 도(道)에 빠진 여러 학인들을 깨우쳤으며,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자애로운 바람을 보시함은 필연적이다.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도 마치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듯하매, 대중들은 돌아가실까(兩楹之夢) 의아하여 미리 쌍수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온갖 인연은 함께 고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 의지한 셈이니 흐르는 구름과 꼭 같도다. 너희는 힘써 머무르되 삼가하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방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로는 70이요 승려 나이로는 50이었다. 이때에 하늘색이 왕성하게 오르고 햇빛이 참담하였으며,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며 풀이 초췌하고 나무가 말랐다. 산짐승이 이에 슬피 울고 들짐승이 슬피 울었다. 문인들은 시신을 받들어 절의 북쪽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인하여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어 먼저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21일째에 이르러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용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라 추증하고 탑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 하였다. 대사는 타고난 자질로 지혜로이 깨닫고 산악이 정령(精靈)을 내려서, 자비의 거울을 영대(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인식(認識)의 집에 걸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넓히고 지경마다 자비로움을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단단하여 잠시라도 번뇌가 일어남이 없었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하는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00여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매 각각 계주를 보존하였다. 함께 보탑 곁에 머무르며, 같이 선림(禪林)의 고요함을 지켰다. 멀리서 (대사의) 행장을 기록하여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해 왔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를 상대할 수 없으나, 유약한 붓으로 그 선덕(禪德)을 감히 드날리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을 널리 펴고자 하노라. 웅이(熊耳)의 명문을 선뜻 재단하는데 어찌 양무제(梁武帝)를 부끄러워 하리오. 천태(天台)의 게송을 추억하며 짓는데 수나라 황제도 부끄럽지 않다.

사(詞)에 이르기를,

석가가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되, 오래도록 떠돌다가 나중에 오리라.

마음은 멸한데 법 흐름 언제 끊고, 도(道) 있거늘 떠난 사람 언제 돌아오리.

위대하도다 철인은 미로(迷路)를 근심하여, 염부제(閻浮提) 성모(聖母)의 태내에 태어났도다.

바다의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가야산 험한 길 삼재(三材)로 돌고자 .

흔연히 자리 앉으매 은색 꽃 피고, 문득 열반을 탄식하매 보월(寶月)은 사라져.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계산(鷄山)의 짙은 안개 한번 걷히길 기다려.


용덕(龍德) 4년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우고 문하승 성림(性林)이 새기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有唐新羅國師子山▨▨▨▨▨敎諡澄曉大師寶印之塔碑銘幷序

朝請大夫守執事侍郎賜紫金魚袋臣崔彥撝奉 敎撰 崔潤奉 敎書兼篆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사자산(師子山) 흥▨▨▨(興▨▨▨) 교시(敎諡)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청대부(朝請大夫)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언휘(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은 교지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살펴 보건대 진종(眞宗)은 본시 적적하건만 억지로 교(敎)의 문을 설립하였고, (결락) 전심(傳心)의 취지를 제창하였으니, 그 추요는 현기(玄機)라야 알 수 있는 현경(玄境)인 것이며, 그 종지(宗旨)는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이므로 이름과 말로써 그 시종(始終)을 엿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으로도 규구(規矩)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때를 타고 원력(願力)으로 출세한 신인(神人)이 있으니, 그는 언진(言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걸어가 바로 성해(性海)로 돌아갔으니 어찌 의로(意路)를 따라 외로이 선산(禪山)에 들어갔다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이단(異端)을 천착하고 그 사견(邪見)을 믿어서 (결락) 마음이 마치 원숭이처럼 날뛰어 항상 삼독의 숲을 요란하게 하다가 홀연히 좋은 인연을 만나 선유(善誘)임을 알았다. 이와 같이 미혹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곧 징효대사(澄曉大師)이시다. 대사의 휘(諱)는 절중(折中)이요, 자(字)는 (결락) 속성은 (결락) 휴암(鵂嵒)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모성(牟城)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드디어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동(先憧)이니, 기예는 궁술과 기마에 뛰어났으며 명성은 화이(華夷)에 떨쳤다. 효자(孝慈)는 사관(史官)에 실렸고, 공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어 군성(郡城)의 귀감이며 여리(閭里)의 동량이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비몽사몽 중에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이르되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 하면서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전해 받고는 대사(大師)를 임신하였다. 그 후 보력(寶曆) 2년 4월 7일에 탄생하니,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일찍부터 아이들과 같이 장난하지 아니하였다. 일곱 살 때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 흠모하여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한 다음, 드디어 양친(兩親)을 하직하였다. 외롭게 오관선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니 법사가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식심(息心)의 뜻에 계합하여 곧 자실(慈室)에 있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 (결락) 위(謂) (결락) 모두들 말하기를 “후대(後代)의 칠도인(漆道人)이 여기에 다시 나타났다”면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구의사미(救蟻沙彌)와 더불어 어찌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곧바로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잡화경(雜華經)을 배워 방광(方廣)의 진전(眞銓)을 찾았으며, 십현(十玄)의 묘의를 연구하였다. 의학(義學)하는 사문들이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공융(孔融)이 응문(膺門)에 나아가서 마침내 망년(忘年)의 벗을 삼은 것과 같았으며, (결락) 수(守)하여 병일(幷日)의 교우(交友)가 되었다. 열아홉 살 때 백성군(白城郡)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였을 때,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행하려 상단(上壇)하는 날, 갑자기 자색 기운이 단중(壇中)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어떤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되, “이 사미(沙彌)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공이 아니니,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은 마땅히 이미 계주(戒珠)를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드시 후대(後代)의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큰 재목(材木)이므로 수계하기 전 먼저 이러한 상서를 나타낸 것이다”라 하였다. 돌이켜 태몽(胎夢)을 생각하니 참으로 합부(合符)하였다.

이로부터 정미롭게 부낭(浮囊)을 보호하며 멀리 절경(絶境)을 찾아다니다가 풍악산 장담사(長潭寺)에서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선비(禪扉)로 찾아가서 오체투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화상이 이르되 “영산에서 서로 이별한 후 몇 생(生)이나 되었는가. 우연히 서로 만남이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았고 스님의 자풍(慈風)에 깊은 감명을 느꼈으므로, 나의 원에 적합하다면서 화상(和尙)을 사사하였다. 화상은 지난 날 중국(中國)에 가서 먼저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친견하고 법을 이어 받았으니,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승사하였으므로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몽자(冡子)이니, 그 고매(高邁)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도윤을 모시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 때 “내 어찌 진단(震旦)에 유학하는 것을 늦추리요”하고는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사에게 나아가 (결락)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친견하고 예배를 드리니, 처음 뵙는 것 같지 않고 구면과 같음을 느꼈다. 도담선사가 말하되 “늦어서야 상봉(相逢)하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되었는가”하거늘, 이에 대사(大師)가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병이 곧 병이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대사(大師)가 또 답하되 “절중(折中)입니다”하였다. 선사(禪師)가 이르되 “절중(折中)이 아닐 때에는 누구인가” 대답하되 “절중(折中)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이름 밑에 허사(虛事)가 없으니, 이제 절중(折中)은 어찌할 수 없구나!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였다. 그러므로 16년 동안 선방에서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드디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았으며, 마침내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을 꼭두서니에서 뽑아냈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집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天下)를 두루 아는 자를 대사(大師)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구슬을 찾고, 산에 올라가 옥(玉)을 캐는데 있어 어찌 정(定)해 놓은 스승이 있으리요. 이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행장을 짊어지고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전 국통인 대법사(大法師) 국공(威公)이 대사(大師)가 주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과 같았다. 생각 끝에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곡산사(谷山寺)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으니, 애써 주선해준 단성(丹誠)에 못 이겨 잠깐 주석하였지만 경연(京輦)과 가까운 것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에 석운대선사(釋雲大禪師)가 있었는데,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덕은 화이(華夷)를 덮었는데도 정해진 거처(居處)가 없음을 알고 신족(神足)을 보내어 간절한 성의를 표하여 말하되, “노승(老僧)이 있는 이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大師)가 여기에 주석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만약 스님이 아니면 누가 이 도량(道場)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왕림(枉臨)하여 송문(松門)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청을 받은 대사(大師)는 그 성의를 거역할 수 없어 곧 선중(禪衆)을 데리고 그 곳에 주석하였다. 이 절의 경치는 천봉만학이 마치 병풍처럼 열려 있고, 층암 절벽의 절경이어서 참으로 해동(海東)의 가경(佳境)이며, 또한 천하(天下)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었다. 대사(大師)가 여기에서 려지(戾止)함으로부터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넷으로 끊임없이 모여들어, 마치 비처럼 모이고 바람과 같이 달려와서 도리무언(桃李無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하여 도마(稻麻)와 같이 열을 이루었다. 이 때 헌강대왕이 봉필(鳳筆)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고는 사자산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대사(大師)를 그 곳에 있게 하고는 나라의 중흥(中興)을 기꺼워하였으나, 갑자기 헌강대왕이 승하하여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즉위하여 선교를 존숭함이 전조(前朝)보다 못하지 아니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멀리서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뜻 밖에 정강왕(定康王)도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여 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고, 국조(國祚)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연진(煙塵)이 일고, 갑자기 요기(妖氣)가 가득하여 산중 연비(蓮扉)에까지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대순(大順) 2년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 가서 잠시 조령(鳥嶺)에서 서지(栖遲)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본산(本山)인 사자산이 병화(兵火)를 만나 보방(寶坊)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대사(大師)는 혜안으로 미리 길흉(吉凶)을 점쳐 건물과 함께 타 죽을 액난을 면하였다.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스님과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이 날 대사(大師)는 북지(北地)를 떠나 점차 남행(南行)하다가 공주(公州)를 향해 지하(城下)를 지나가는데, 장사(長史)인 김공휴(金公休)가 군리(郡吏)인 송암(宋嵒) 등과 함께 멀리서 듣고 자(慈) (결락) 에 이르러 군성(郡城)으로 영입하고 겸하여 간기(揀其) (결락) 명거(名居). 스님을 그 곳에 초빙하여 계시게 하였다. 대사(大師)가 장사(長史)에게 이르되 “빈도(貧道)는 늙어 죽음이 임박하였으므로 쌍봉사에 가서 동학(同學)들을 만나보고 선사(先師)의 탑에 참배하려 하니 만류하지 말아 달라”하시고, 드디어 몇 사람의 대중을 거느리고 떠나 진례군계(進禮郡界)에 들어서자마자 적도(賊徒)들이 길을 차단함을 당하여 대중들이 길을 잃게 되었다. 이 때 홀연히 운무가 몰려와 어두워지며 캄캄해지더니 공중(空中)에서 병마(兵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도적의 우두머리 등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뒤로 물러서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대사(大師)와 대중은 겁탈의 재앙을 면하였으니, 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 가호해 주신 덕택이라 하겠다. 한탄스러운 바는 전국 방방곡곡에 초적(草賊)이 출몰하여 조용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위험한 때에 밤을 새워가며 길을 재촉하여 무부(武府)에 도달하였으니, 융적(戎賊)들도 공경히 받들었고, 일군(一郡)은 조용하며 편안하게 되었다. 대왕께서 대사가 남방(南方)으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경(西境)을 보호하였으며 군흉(群凶)들이 예배하고 대대(大憝)가 귀의하였다. 임금은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며 겸하여 북당(北堂)을 위해서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인 두 절을 헌납하여 주석(住錫)하도록 하였다. 당주(當州)의 군사(郡吏) 김사윤(金思尹) 등이 찾아와서 선지(禪旨)를 듣고 법문(法門)에 깊이 감명을 받아 분령(芬嶺)에 계시도록 청하고, 군(郡)의 동림(桐林)을 선거(禪居)에 길이 예속시켜 열반(涅槃)할 종신처로 삼게 하였다. 혜원법사가 려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진(晋)나라 안제(安帝)가 숭앙하고, 승조(僧稠)가 효룡산(孝龍山)에 있을 때에 제(齊)나라 문선제(文宣帝)가 귀의하였으며, 허순(許詢)이 지둔(支遁)을 스승으로 모셨고, 주서(朱序)가 도안(道安)대사를 존숭한 것 등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진량(津梁)이 되며, 시대의 약석(藥石)이라고 할 만하였다. 군신이 의뢰하며 사서(士庶)들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되 “이곳은 반드시 재해(災害)가 일어나 구융(寇戎)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터이니, 미리 대처하여 재난이 다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하고 홀연히 북산을 향해 떠났다. 서해(西海)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였다. 대사(大師)가 해사(海師)에게 “주야 육시(六時)로 천리(千里)쯤 온 듯하니 여기가 어디며,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었다. 해사(海師)가 대답하되 “전도(前途)를 암산하니 아마 서국(西國)일 듯하다”고 하였다. 해사의 말을 들은 대사(大師)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전에 진(秦)으로 유학하려던 것을 생각하니

노승(老僧)이 이제야 유학승이 되었구나.

옛날 유학하려던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니

때가 너무 늦은 것을 다시 느끼네!

황홀하고 침음(沉吟)하면서 근심에 잠겼다. 그날 밤 꿈에 해신(海神)이 나타나 이르되 “대사(大師)께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포기하고 본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상심(傷心)하지 말라”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반일(半日) 쯤 가다가당성군(唐城郡)의 서계(西界)인 평진(平津)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수진(守珍)으로 가서 권모씨(權某氏)의 집에서 며칠을 묵은 다음 드디어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매우 훌륭한 도량이었다. 그 곳에서 십여 일 동안 임시로 주석하고 있었다. 대왕(大王)이 황양현(荒壤縣) 부수(副守)인 장연설(張連說) 편으로 명다(茗茶)와 명향(名香)을 담은 양함(琅函)을 보내면서 “항상 스님을 왕좌(王佐)의 재목(材木)으로 흠모하였으므로, 이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한다”고 전하였다. 대사(大師)는 연진(煙塵)의 핍박으로 세상이 혼란하다 하여 설린(薛藺)의 요청을 거절하고, 주풍(周豊)의 간청도 사양하면서 이르기를 “세상은 모두 혼탁하고 시대는 오랫동안 혼미하므로 반딧불로는 능히 한밤의 어둠을 제거(除去)할 수 없고, 아교로써 능히 황하(黃河)의 탁류를 막을 수 없다”고 하며, 항상 어두운 현실을 보니 실로 삶의 길이 싫어졌다. 건녕(乾寧) 7년 3월 9일 힐단(詰旦)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이르되, “삼계(三界)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만연(萬緣)은 함께 고요한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하였다.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입멸(入滅)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5세요, 법랍은 56이었다. 이때 하늘빛은 창망하였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은 모두 눈을 잃은 듯 하였고, 세상은 함께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門下)의 제자들이야 오죽 하였겠는가. 모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제자들은 함께 슬픈 표정으로 천축(天竺) 구시라(拘尸羅)의 법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하고, 사리 천과(千粿)를 습득하였다. 그 날 밤 황양현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이 말하되, “석단(石壇) 위에서 자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더니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주워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원중(院中)에 가서 자세하게 그 특수한 상서를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전해 듣고 깜짝 놀라 쌍림(雙林)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일백여 과의 사리를 습득하게 되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였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마지아니하였다. (결락) 의(矣) (결락) 이는 강안(江岸) (결락) 현읍(縣邑)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산사(山寺)와의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바다의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스님들만이 살고 있으므로, 마치 절벽에 매달린 제비집과 같았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시고 동림(桐林)으로 돌아가서 천우(天祐) 3년에 높이 석탑을 세우고 그 금골(金骨)을 안치하였다. 대사(大師)는 영악(靈岳)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선천적으로 지혜로웠고, 선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무생(無生)의 언덕에 올랐으며, (결락) 가는 곳마다 선(禪)의 종지만을 물었고, 거주(居住)하는 장소마다 현리(玄理)를 참구하였으니, 진승(眞乘)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중은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모인 사람은 바다와 같았으며, 학인(學人)을 지도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스님은 중생을 위해 현생(現生)하였으며 곳을 따라 교화하여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니,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선관(禪關)을 크게 열고 대교(大敎)를 천양하여 말세(末世)에 있어 마군을 소탕하고, 삼조(三朝)에 걸쳐 왕도(王道)를 부호(扶護)하여 풍거(風竅)와 같이 숙연한 위엄을 떨쳤으며, 항상 (결락) 우로(雨露)가 만물을 생성케 하는 것과 같이 덕을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 밭에 뿌렸고, 심지어는 깊은 진리를 가르치고 도타운 뜻을 일러 주었다. 이와 같은 위업이 혹은 학도(學徒)들의 입으로 전파되기도 하고, 혹은 승사(僧史)에 실려 있기도 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는 여종·홍가·신정·지공(如宗·弘可·神靖·智空) 등 1천여 인이나 되었다. 이를 모두가 석성(石城)이 무너질까 염려하며, 함께 사리를 모신 높은 언덕이 능곡(陵谷)으로 변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금님께 표상(表狀)을 올려서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주청하였다. 효공대왕은 일찍부터 스님의 빛나는 도풍(道風)을 앙모하여 항상 불교를 존숭한 까닭에 시호를 징효대사(澄曉大師)라 하고, 탑명을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어 한림학사이며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인범이 왕명(王命)을 받고 비문을 짓기 전에 와병으로 죽었으니, 장학(藏壑)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결락) 그리하여 이 일은 문인(門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방진(芳塵)은 점차 사라지고 아직 정석(貞石)을 새기지 못하게 되자 문인들의 뜻을 모아 행장(行狀)을 초안해서 내운(乃雲) (결락) 학려(鶴唳)와 같은 애절한 진정(陳情)을 임금께 알렸다. 이 때 상(上)이 신기(神器)와 빛나는 보도(寶圖)를 전해 받고, 천명(天命)을 이어 선왕의 뜻을 계승하며, 이를 뒷사람들에게 널리 보여 주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법답게 높은 공적을 찬양하라 하시지만, 인연(仁渷)은 재주가 토봉(吐鳳)이 못될 뿐만 아니라 학문도 망양(亡羊)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계과(桂科)에는 비록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나, 제구(虀臼)에 대해서는 상수(傷手)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는 바는 억지로 붓을 잡아 비문을 지었으니, 이로써 국왕의 은혜를 갚고 아울러 문인(門人)들의 뜻을 위로함이니, 앞의 뜻을 거듭 밝히고자 이에 명(銘)을 짓는 바이다.

대각의 대승법이여! 묘도(妙道)를 열어주고,

능인(能仁)의 비밀법(秘密法)이여! 중생을 인도하네.

진위(眞僞)를 분간함이여! 시대(時代)를 깨우쳤고

범부(凡夫)가 곧 성인(聖人)이여! 모두가 부처로다.

오산(鼇山)에 빼어남이여! 기골(奇骨)을 받아 낳고,

학수(鶴樹)서 열반함이여! 보신(報身)을 화장했네.

비로소 그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빛난 그 이름! 날마다 새롭도다.

장례의 법요무(法要式)이여! 정성을 다하였고,

법을 계승한 제자는 천명(千名)이 넘네!

달빛이 조문(弔問)함이여! 햇빛은 침침하고,

나원(奈苑)에 뿌려줌이여! 그 감로(甘露) 사라졌네.

▨▨장로(▨▨長老)

운초장로(雲超長老)

▨지주인화상(▨持主人和尙):형서(夐栖)

예홍장로(乂洪長老)

용덕(龍德) 4년 세차(歲次) 갑신(甲申) 4월 15일에 비문은 완성되었으나, 국가가 다난(多難)하여 이기(二紀)를 지낸 후에야 비로소 사군(四郡)의 연진(煙塵)이 사라지고, 일방(一邦)의 전란이 평정되었다.

천복(天福) 7년 갑진 6월 17일에 세우고, 최환규(崔奐規)는 글자를 새기다.

  

[비명에 있어서 有唐新羅國, 有明朝鮮國의 해설]

비의 처음은 (元和五年庚寅六月三日~)과 같이 시간적 배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660년 唐平百濟碑에는 ‘大唐平百濟碑銘’으로 비제를 쓰고 있습니다. 660년경의 백제석조각자에는 ‘大唐平百濟國碑銘’으로 비제를 쓰고 있고, 676년 泉南生墓誌에는 ‘大唐故特進行右衛大將軍~’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681년 문무왕릉비에는 ‘國新羅文武王陵之碑’로 비제를 쓰고 있고, 682년 부여융묘지에는 ‘大唐故光祿大夫~’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승려들의 부도비로 813년에 처음으로  건립된 단속사신행선사비에는 ‘海東故神行禪師之碑’로 비제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872년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는 ‘武州桐裏山大安寺~’로 비제를 쓰고 있고, 884년 보림사보조선사창성영탑비에는 ‘新羅國武州迦智山~’으로 비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887년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有唐新羅國故智異山雙谿寺~’로 비제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有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890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는 ‘有唐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大朗慧和尙~’으로 비제를 쓰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찬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작성된 887년 이후에는 이러한 ‘有唐’이라는 표현이 관례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후 924년 찬술되었으며 944년에 건립된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에는 有唐新羅國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역시 924년에 찬술되었으며 933년에 음기가 기록된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에도 有唐新羅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후삼국시대까지 이러한 표현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高麗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有明朝鮮國이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라는 표현에서 '故國師諡眞鏡大師'는 '돌아가신 국사로 진경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이'라는 의미이고 '有唐新羅國'은 진경대사의 소속국가명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당제국의 속국인 신라라는 의미입니다. 나라가 자주성이 없을 때는 이러한 표현을 씁니다. 광개토왕비문이나 신행선사비문에는 이러한 표현이 없습니다. '有明朝鮮國'도 동일한 표현입니다.

출처 : 물견의 자취
글쓴이 : 물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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