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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창공(安昌恭)-1派11世직장공파-충순위(忠順衛) 승절교위(承節校尉)秉節校尉

자라가슴 2012. 3. 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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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공(安昌恭)

1派11世

 

 

충순위(忠順衛) 승절교위(承節校尉)秉節校尉

 

교위(校尉):조선 초기의 무관직. 일명 오위(伍尉) 또는 위(尉)라고도 하며, 오(伍)라는 단위부대의 지휘관이다.

오는 대략 두 개의 대(隊)로 편성되어, 교위는 2인의 대정(隊正 : 隊의 지휘관)을 거느렸다.

 

 

 

秉節校尉安公舊居碑 甲寅

 

 士大夫之相厥攸居者莫不以都圻爲至善爲其密邇王化出入遊息周旋乎禮樂文物之間德成而名易徹材達而用不滯進之可以贊黼黻聲明之治處不失爲簪纓閥閱之望也然而其或値乘除更迭之際而猶且濡忍貪冒徼倖於利害之塗而卒罹滔天之禍用殄夫名家之世者亦未

嘗不在乎是自非明哲君子炳幾於將然割戀於姑息視外至若懸疣之思決者其孰能脫然遐翹自沈於荒野之曠而不見知而不悔哉聖人之於易以遯尾爲厲而豫二之不終日爲介石之貞吉其旨微矣巴陵之茅谷里其墻西一區爲安氏之庄安氏自勝國來世爲畿輔巨室若文成公晦軒先生若文順公于器文淑公牧文惠公元崇景質公瑗贈判書從約道學勳烈胙土錫謚史不絶書至判書之孫秉節校尉諱昌恭與弟監察昌廉始謝京輦之舊乃南遜于遙遙千里之鄕自甘爲耕鑿之伍而不思所以克恢先蔭以昌耀其來昆豈公之異於常情也其亦有甚不得已者焉爾夫使世家賢胄決擧而長往者邦國之不幸也噫當恭僖王朝相國安貞愍公爲一時善類所宗主引進趙文正諸賢泰茹彙征駸駸有夬庭孚號之幾凡百君子莫不彈冠相慶而匝域含生方拭目以俟時雍之休惟公以貞愍同堂切屬旣通名庠籍發迹蔭階若可以夤緣汲綆躋

躐亨衢享鍾鼎綺紈之逸樂者而乃知微於羸豕之蹢躅觀象於過涉之滅頂凛然若蹈春氷而履虎尾矣遂乃低回遠引淪落於草萊之汚而祛聰黜智爲聾爲痴不自齒於賢士大夫之列而彼睢盱者亦無從以知世間之有校尉安公矣及夫北門夜開而文正諸賢竝罹一網貞愍與諸子亦次第及禍殆無噍類獨公不錄於株連之籍而夷然起處於茅谷之衡門不失爲昭代之逸民而遺子孫以安夫非所謂明且哲者歟公則旣自晦矣其平日行治之詳不可得而述矣其若子若孫俱能敦修世美不永錮於仕路至其曾孫監察慜府使憙昆弟倡義于壬辰之難勳績頗著而慜竟殉節于金海其子郡守信甲値丁酉再訌亦殉節于山陰公雖若果忘於世者而蹟其貽謨於後者蓋不以鳥獸同群爲至而忠君愛國之忱不以疏逖而間者玆可推知矣今其遺裔式繁分布于檜山金官之域而猶以茅谷爲宗守之區乃相與諗曰使吾祖而安常重遷隨衆遲回於當
日賢良之列豈不翠其蓋而朱其輪乎其得有我後嗣於今日乎然則是區也吾祖之所尋眞卜吉藏用蓄祉以基我後嗣於無極者凡在我後嗣其於此致敬致重曷少遜於采食之邑系貫之鄕哉盍斲石以表之得出入瞻式庶幾有所奉藉而典守之無怠也僉曰諾石旣具屬灝烈在瑩二君問余以識其槪者余復之曰夫相時而能遷者知也傳業而能守者仁也蓋亦莫非義也然而公之得有後於今日者豈亶地之是賴哉惟其冲虛寡慾澹泊明志九陌之熱而我襟之凉群車之騖而我趾之徒造物者無所猜而福集于謙爾持此而往夫何地而非茅谷也爲公後者其欲嗣守公業亦惟體公之心不爲物先不與利爭約而不濫遯而不憫腴其內而不慕乎外而已則天下之物將無與安氏競奪者而公之業其永不墜矣其止其遷亦無往而非茅谷也二君曰唯唯請以此歸刻之石用詔夫吾之子子孫孫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九  碑   곽종석(郭鍾錫)

士大夫들이 그들의 할 바를 보는 들이 누구나 莫論하고 都邑이 있는 京畿道地方으로써 至善을 삼지 아니하는 가 없는데, 그것은 王化가 매우 가까와 出入하고 遊食하면서 禮樂 文物의 사이에서 周旋하여 을 이루면 이름이 쉽게 貫徹되고 才能 達通하면 登用이 막히지 아니하였고, 나아가면 可히 黼발 (임금) 聲明의 다스림이 도움을 줄것이며 野人으로 하여 있더라도 簪纓(관복) 閥閱(벼슬을 많이함) 明星을 잃지 아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或 乘除하고 변질하는 즘에 當到하여 오히려 忍苦에 젖고 탐욕을 무릅쓰고 가면서 요행스럽게 利害의 길을 걷다가 끝내는 洪水가 일어 나듯하는  하여 저 名家 世代를 무참하게 殺戮當하는 들도 또한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스스로 明哲 君子가 낌새를 밝게 알아차리고 將來를 꿰둘 듯 姑息한 미련을 잘라버리고 밖을 보는 것만 못하다. 가령 혹달린 生角으로서 判決하여 본다면 그것을 벗어 나듯이 발길을 멀리하여 스스로 荒野의 먼곳에 沈滯되어 살면서 알아줌을 알지 못하더라도 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낫다고 하겠느냐. 聖人께서도 周易 遯卦(天山遯?) 初六 說明 은 꼬리이기 때문에 가다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豫卦(當地豫?) 六二 說明 돌같이 단단하면 終日이 안되어도 하고 하리라 하였으니 그 뜻이 隱微하도다.

巴倰(成安) 茅谷里에 그 墻西(담장) 一區 安氏들의 田庄이다. 安氏 高麗時代로부터 世代로부터 내려오면서 京畿 輔佐하는 居室이 되었으며 가령 文成公이신 晦軒先生같은 분과 文順公이신 于器 文淑公이신  文惠公이신 元崇 景質公이신  判書 追贈받으신 從約과 같으신분들은 道學 勳烈 對土를 받으시고 謚號를 내리시어 歷史 紀錄이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며 判書公에의 孫子되는 兼節校尉(從六品官)이신 諱昌恭에 이르러서는 아우인 監察公(正六品官)이신 昌廉과 더불어 처음으로 서울의 옛집을 謝讓하고 그제야 쪽으로 멀고먼 千里 鄕里로 와서 隱遯하시며 스스로 밭갈이와 땅을 파는 隊伍가 되는 것을 甘受하며 生角하시는 바가  先朝任들 蔭德을 품으며 그 다가오는 後孫들을 昌盛하고 빛나게 하려 하였으니 어찌 公또한 日常人 과 다르리오만은 그것은 또한 매우 不得己한 점이 있었던 것이니 대저 世家 賢胃로 하여금 決斷코 긴 移住를 가는 것을 擧行하게 된 것은 國家로서도 不幸한 일이었다. ! 恭僖王(中宗) 때를 맞아 相國(左議政)이신 安貞愍()께서 한때 善類들의 宗主가 되시어 趙文正(光) 公等 諸賢들을 끌어다 進出시켜 泰茹 彙征하여 駸駸하게 快庭孚號하는 幾微가 있었으니 凡百 君子들이 누구나 다 을 털고서 서로 慶賀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둘려쳐진 城內 을 버리고 바야흐로 눈을 닦고서 和平 時代의 아름다운 政治를 기다렸는데 께서도 貞愍公 同黨人으로 懇切하게 이미 이름을 庠籍 하여 所屬됨이 있고 足跡 蔭官 品階 함이 있어 가령 充分히 두레박줄로 물을 길러올리듯 因緣하여 좋은 집과 맛있는 飮食과 비단 옷을 입는 逸藥을 누릴수 있었지만 파리한 돼지가 깡충깡충 뛰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을 건너온 가 이마를 하게 하여 마치 봄날의 어름을 밟듯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이 드디어 自己를 낮추어 멀리 草家의 더러움속에 淪落하여 聰明함을 버리고 智慧를 버리고 벙어리가 되고 어리석은 가 되어, 스스로 賢士大夫 班列에 오르내리지 않고서, 지내시니 저 눈을 부릅뜨고 사는 들도 역시 따라서 世間 校尉이신 安公이 계시는 줄을 알아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저 北門(乙卯士禍)  展開되자, 文正公 等 諸賢들이 모두 一網에 걸려들고 貞愍公과 여러 子弟들도 역시 차례대로 危殆함이 미쳐 살아남은 가 없었으나 홀로 께서는 株連  紀錄되지 아니하여 平安하게 茅谷洞 衡門(은자가 사는곳)에서 起居하고 居處하시며 昭代 逸民이 되시어 子孫들에게 平安함을 물려주셨으니 대저 이른바 밝고도 또한 어진 분이 아니겠느냐? 께서는 이미 自身을 감추고 사셨으니 그분의 살아게시던 날의 行績 治積의 자세한 內容 히 얻어서 記述할수 없구나. 그분의 아들이나 孫子들도 모두가  先世의 아름다움을 敦篤하게 닦아왔으나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혔으며 그분의 曾孫 監察公 慜 府使公 憙의 형제분에게 이르러서는 壬辰倭亂때에 의병을 일으켜 공훈과 업적이 자못 저명하였다 慜은 마침내 金海에서  殉節하셨고 그의 아들되는 郡守 信甲께서도 丁酉再亂때에 亦是 山淸에서 殉節 하셨으니, 께서는 비록 世上에서 잊혀진 것 같지만 行績의 그 아름다움은後孫들에게 남겨준 것이 대개 鳥獸 同群이 되지 아니하였고 至極하였던 忠君愛國의 精 䟽遠하고 먼것으로서 離間 가 없었으니 이것으로서  推測하여 알 수 있으리라. 지금 그분의 後裔들이 模範的으로 蕃盛하여 檜山(現昌原) 金管(現金海) 聲域 分布하여 있으나 오히려 茅谷으로서 宗守 區域을 삼고 있으며 그제야 서로가 하여 말하기를 우리 祖先任으로 하여금 常情 安住하면서 하게 遷擧되어 大衆들과 같이 當日 賢良 班列 徘徊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그 日傘이 푸르고 그 수레가 붉었으리니 그렇다면 우리 後嗣들의 今日이 있었겠느냐. 그렇다면 이  無窮한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무릇 우리 後嗣들이 그야말로 여기에 恭敬을 이루고 重大함을 이루어 어찌 조금이라도 菜食 과 系의 고을에 謙孫하지 아니하리요? 어떻게 碑石을 다듬어 表를 하여두고 出入하면서 瞻望하고 矜함을 얻어서 거의 奉籍하고 典守하는 바가 있으니 게으름이 없지 아니하리요.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옳다하였다. 碑石 具備하여 놓고는 灝烈君 在營 等 二君에게 付託하여 나에게 그 大槩 紀錄하여 달라고 하였다. 내가 對答하여 말하기를 대저 時代 보아서 히 옮겨 사는 것은 (슬기)이고  하여 히 지켜나가는 것은 이니 대개 역시 아님이 없다. 그러나  後孫 今日이 있게 된 것을 얻게 된 것은 어찌 오르지 땅의 힘입은 것 뿐이리요. 오직 그 沖하고 寡慾하며 첨박하고 明志하여 九陌 에 우리들 옷것은 서늘하고 群車가 놀라도 우리 발길은 조용하였으며 造物者 猜忌하지 아니하여  謙讓에 모였으니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간다면 저 어느 地方을 간들 茅谷里가 아니겠느냐?  後孫 들은 그  을 이어서 지켜가고저 한다면 역시 의 마음을 體驗하여 物慾으로서 于先을 삼지 말고, 이익 으로서 다투지 말며, 절약하여 람용하지말고, 은둔하여 悶忙하지 말고서 그 內實을 살찌우고 그 外飾 思慕하지 아니하여 간다면 天下 萬物 張次 安氏들과 더불어 競奪 가 없을 것이며 公의 이 그야말로 永遠 失墜되지 아니하리라. 그리하여 그치거나 그리하여 옮겨간들 어디를 가든  아님이 없으리라. 하였더니 二君 그렇습니다 하고 對答하고는 컨대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碑石에 새기어 저기 우리 子子孫孫들을 詔勅하려 하노라.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九 -碑 -곽종석(郭鍾錫)

 

 

 

 

 

 

 

 

 

 

 

 

 

 

 

 

 

 

 

 

 

 

 

 

 

 

직장공파(直長公派)

 

 

8世 안원(安瑗)         ㅣ9世 안종약(安從約)         ㅣ10 안수(安琇)           ㅣ        안창공(安昌恭)ㅡㅡㅡ안창렴(安昌廉)ㅡㅡㅡ안창직(安昌直)           ㅣ                             ㅣ        안우(安

          안환(安環)---안염(安琰)---안종(安瑽)            ㅣ                                 ㅣ안공벽(安公璧)안공진(安公軫) 안공의(安公義)

           ㅣ                                  ㅣ

안민(安慜)안희(安熹)              안희정(安希禎)

      ㅣ                                         ㅣ

안신갑(安信甲)안명갑(安明甲)

    안상문(安尙文)

                                               ㅣ

                                        안중윤(安重胤)---안중신(安重信)

                                              ㅣ                      ㅣ

                                      안서용(安瑞龍)   안성용(安成龍)ㅡㅡㅡ안호문(安好問)

                                         ㅣ                      ㅣ

                                      안여웅(安如雄)   안여반(安如盤)

                   ㅣ                     ㅣ                    ㅣ

                안홍제(安弘濟)-안홍적(安弘迪)  안홍조(安弘祚)-안홍상(安弘祥)

 

 

안창공(安昌恭)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姓     名  안창공(安昌恭)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충순(忠順) 出仕方法  未詳
 
出 仕 日  
 
子     女  男 : 1       女 : 3       總 :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112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안창공(安昌恭)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창공
安昌恭
안수
安琇
안종약
安從約
안원
安瑗
안원숭 安元崇    
원 元    

     
     

       
     
       
     
           
     
       
     
         
     
       
     
◆ 배우자 : 이(李)-재령(載寧)人 이개지(李介智)
◆ 자 녀 : 안(安)-진주(晋州)人 강정순(姜正純)
안기(安琪)
안우(우(+))
안(安)-성산(星山)人 이순조(李順祖)


안(安)-여주(驪州)人 이란(李鸞)

 

처부(妻父)

이개지(李介智)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姓     名  이개지(李介智) 性     別  남 (男)
 
本     貫  재령 (載寧)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子     女  男 : 3       女 : 4       總 :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氏族源流 77
기본 文科榜目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인적관계 父 : 李午(贈 兵曹參議) 祖 : 李日善 (司宰寺令) 外祖 : 工曹典書:南毅(宜寧人)
 
 
 
이개지(李介智)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이개지
李介智
이오
李午
이일선
李日善
       
     
       
     
         
     
       
     
           
     
       
     
         
     
       
     
◆ 배우자 : 하(河)
◆ 자 녀 : 이맹현(李孟賢)
이(李)

 

 

자(子)

안우(安+祐)+祐

안우(安우(王+祐))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姓     名  안우(安+祐)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충순(忠順) 出仕方法  未詳
 
出 仕 日  
 
子     女  男 : 2       女 : 1       總 :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자녀 文化柳氏嘉靖譜 640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112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인적관계 父 : 安昌恭
 
 
 
안우(安우(王+祐))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우
安우(王+祐)
안창공
安昌恭
안수
安琇
안종약
安從約
안원 安瑗    
남 南    

     
     
         
     
       
     
           
     
       
     
         
     
       
     
◆ 배우자 : 권(權)-안동(安東)人 권창(權昶)
◆ 자 녀 : 안(安)
안공벽(安公璧)
안공진(安公軫)

 

자(子)-처부(妻父)

권창(權昶)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姓     名  권창(權昶) 性     別  남 (男)
 
本     貫  안동 (安東)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朝鮮  世宗  18年 
 
死 亡 日  
 
最終官職  판관(判官) 直長 出仕方法  蔭敍
 
出 仕 日  
 
子     女  男 : 1       女 : 1      總 :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安東權氏成化譜 22
기본 安東權氏成化譜 87
기본 安東權氏大同譜  
인적관계 文化柳氏嘉靖譜 89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431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출사방법 안동권씨대동보 : 蔭補로 社稷署令이 되었다
 
 
 
권창(權昶)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권창
權昶
권온
權溫
권복
權復
권숙
權肅
왕중귀 王重貴    
기 奇    

민중립 閔中立    
허 許    

       
     
       
     

조혼
曹渾
       
     
       
     

정윤숭
鄭允崇
정수 鄭壽    
     
       
     
◆ 배우자 : 김(金)
◆ 자 녀 : 권조(權操)
권(權)

 

 

 

 

 

출처 : 순흥안씨 찬성공파
글쓴이 : 바른정보(안정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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