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畿湖學派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에 대한 총칭이다.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김창협(金昌協)·송시열(宋時烈)·송익필(宋翼弼) 등이 대표적이다.
이이는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정리하고 이기일원론적 이원론(理氣一元論的二元論)을 확립하였는데, 곧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으나, 이와 기는 공간적·시간적으로 분리 내지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고,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아닌 일원적이라 하였다.
이러한 이이의 학설을 계승한 김장생은 최명룡(崔命龍)·정경세(鄭經世) 등과의 논쟁을 통해 이이의 성리설을 변론하였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서 이덕홍(李德弘)·기대승의 주장을 이이의 관점에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론을 통해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관한 이이의 성리학설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승하여 그의 문인에게 전수함으로써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의 아들인 김집은 부친의 성리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하였다. 또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에서 권근(權近)이나 이황이 이기를 분리시킨 것을 비판하고 이이의 성리설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김창협의 경우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이이의 학통을 이었지만, 학문적 경향은 이황과 이이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절충적 이론을 내놓았다. 즉 그는 《농암속집(農巖續集)》에서 주자와 이황이 사단칠정을 主理·主氣로 구분한 것에 대해 동의하면서, 이기의 발(發) 문제에 있어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이이의 적통(嫡統)으로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중심인물인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로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논박하고 이이의 성리설을 변호하였는데, 이를 조작이 없는 것, 기를 운용작위(運用作爲)하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영남학파의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을 반박하였다.
그는 영남학파의 입론 근거가 된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말이 주자의 말이 아님을 확신하고서 영남학파의 입론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고, 이황·기대승·성혼(成渾)은 물론 이이에 대해서도 더러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신봉자로 심오한 이론을 전개하였으나, 강한 이단의식으로 견해가 다른 학설을 배척하는 등의 배타적인 면모를 보였다. 또 송익필은 《태극문(太極問)》에서 태극과 동정(動靜)과의 관계에 대해 <동정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함유한 것을 태극, 동과 정의 양단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 즉 동정하는 것은 기, 또 그 동정의 소이(所以)를 태극>이라 하여 이이가 주장한 <발지자(發之者)는 기, 소이발자(所以發者)는 이다>에 동의하였다.
이들은 기호지방의 불안정한 지주·관료층을 대변하며, 현실문제에 있어서 타학파보다 민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