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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산·정병산 위치의 진실
자라가슴
2012. 9. 2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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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이하 기고자)이 창원박물신문 제9호(2012. 8. 15)에 ‘창원의 봉림산(鳳林山)과 정병산(精兵山)의 명칭 배경’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주장이 사실과 달라 오랜 망설임 끝에 비판의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기고자 글의 핵심을 요약하면 첫째, 애초 창원대 뒷산의 이름은 봉림산이었다. 둘째, 정병산은 일제 때 지어진 이름인데,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봉림산을 대신해 쓰이게 되었다. 셋째, 현재 대암산의 옛 이름은 전단산이었다. 넷째, 창원컨트리클럽이 있는 산은 500m도 되지 않는 낮은 산이기 때문에 창원의 전통 지도에서 산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기고자가 창원대 뒷산을 봉림산으로 보는 근거는 첫째, ‘정병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지리서에는 나오지 않고, 1916년도 일제가 만든 지도에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둘째, “전통 지리지 기록에는 전단산은 부(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25리에 있고, 봉림산은 부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용지제(龍池堤: 용지못)’라는 못이 역시 부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용지제는 오늘날 창원중앙역 자리에 있다. 따라서 ‘부남(府南) 15리’라 기록된 봉림산의 위치는 용지못 뒷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고자의 글은 진실을 왜곡한 것인데, 그 까닭은 첫째, 창원대 뒷산을 봉림산으로 둔갑시키는 데 동원된 결정적 증거가 ‘용지못’인데, 그 용지못은 창원시청 근처에 있다. 창원중앙역 자리에 있는 못은 ‘용동못’인데, 이 못은 1968년에 완공된 것이다. 둘째, ‘정병산’은 18세기 이후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우리 조상이 부른 이름이다. 1740년에 대사간 신헌조(申獻朝) 선생이 쓴 ‘가락왕릉기(駕洛王陵記)’에 이미 ‘정병산’이 등장한다. 창원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노경종(盧景宗) 선생의 묘갈명은 허전(許傳, 1797~1886) 선생이 지었는데, 거기에도 ‘정병산’이 나온다. 셋째, 전통 지리서에는 낮은 산들도 ‘산(山)’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봉림산은 통일신라시대 때 선문구산의 하나였던 ‘봉림사’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 창원컨트리클럽이 있는 야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아래에 있던 마을 이름이 ‘봉림리’(대봉림·소봉림)이었던 것이다. 넷째, 지금의 대암산이 이전 전단산에서 바뀐 이름이라는 주장은 어이없다. 기고자의 주장대로 창원대 뒷산을 봉림산이라 치자. 봉림산은 부(府)에서 ‘남쪽 15리’에 있고 전단산은 부에서 ‘동쪽 25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창원대 뒷산이 부에서 남쪽 방향이라고 하면, 대암산은 부에서 볼 때 더욱더 남쪽 방향이다. 어찌 그것이 동쪽이 될 수 있는가? 다음 사실도 정병산이 전단산임을 웅변해 준다. 필자의 고향은 창원대학교 본관 등이 있는 곳으로 ‘상촌(웃안골)’으로 불렸는데, 김해 김씨 단산공파 집성촌이었다. ‘단산공파’의 ‘단산’은 ‘전단산’에서 ‘전’자를 뺀 것이다. 산 이름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면 창원대 뒷산의 애초 이름은 ‘전단산’이었다. 조선 후기에 전단산에 대한 새로운 이름인 ‘정병산’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불리기 시작했다. 봉림산은 전단산(정병산)에서 갈라져 나간, 창원컨트리클럽이 있는 야산의 이름이다. 다시는 내 고장 산 이름을 왜곡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정대(경남대 문과대학장) ※여론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