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가슴 2019. 8. 27. 18:00

변상태卞相泰

  • 이명: 卞敬宰
  • 출생-사망: 1889-10-11 - 1963-11-02
  • 본적: 경상남도 창원 蒼遠 진전 일암리175
  • 훈격(서훈년도): 애족장(1990)
  • 운동계열: 3.1운동
  • 공적개요:

    1910년 金山高等學校 在學時 學生運動을 통하여 獨立運動을 전개한 것을 비롯하여 大東靑年團에 加盟 軍資金을 모집하였으며, 3.1運動 당시에는 경남 서부 지역 一帶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 ■경남 남부지방

  • 제1절 마산(馬山) 지역
    마산은 옛부터 상업도시로 알려져 왔고, 근대 마산 개항 당시 즉 1900년을 전후하여는 노일 세력(露日勢力)의 각축지(角逐地)로 외세의 침투가 어느 곳보다도 빨랐다.
    즉 일본은 이때 노국(露國) 세력의 침투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 육군성(陸軍省)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이곳 일대의 토지를 매수하였을 뿐 아니라 이곳에는 일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가 설치되고, 또 한국강점기(强占期)에는 진해(鎭海)를 군항(軍港)요새지로 만들어 1911년 1월에는 마산항을 폐쇄하여 일본 본국에 한해서만 통상하도록 하였다. 또 일제에 의한 마산(馬山) 철도부지(鐵道敷地)의 수용(收用), 일인들의 마산 시장권의 탈취기도, 항만 매축권(埋築權)의 탈취 등, 근대 개항 후 마산의 모든 이권은 일제에 의해 일로 약탈되어 갔고, 또 일제 조선 강점 후는 더 한층 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근대 마산 항민들의 항일 저항의식은 어느 곳보다도 앙양되어 갔고 여기에 따라 항일투쟁도 한국 근대사에 빛나는 전통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1)
    이러한 항일투쟁은 3·1운동기에 있어서도 그대로 그 정신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이곳 구마산(舊馬山)의 장날은 음력 매달 5일, 10일에 열렸고 매 장날의 거래액도 어시장(魚市場)이 약 2백 원, 식량시장(食糧市場)이 약 70원, 구마산 약 1천6백 원에 달하여 경상 남동에서 큰 장이었고, 또 인구에 있어서도 한국인 1만 5천 8백 90명에 대하여 그 반수에 가까운 4천 4백 97명의 일인이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일제의 침략세력이 강한 항구도시였다.2)
    3·1운동 당시 이곳 마산은 기독계통을 통하여 서울과 긴밀하게 연락이 취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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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의환(金義煥) ≪조선을 둘러 싼 근대 노일(露日)관계의 연구≫, ≪아세아연구≫ 통권 31호 (고려대학 아세아문제연구소) pp.213~293.
    2) ≪최신 조선지지(朝鮮地誌)≫ 중편 조선 급 만주사편, 1918,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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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었다.
    1919년 2월 23일 청년 이갑성(李甲成)이 마산에 내려 왔다.
    경남에서 33인의 1사람을 추대하기 위해 교섭차 내려왔던 것이다.
    이때 마산에는 기독교계통의 유력한 유지로 이승규(李承奎)·이상소(李相召)·임학찬(任學瓚)·김용환(金容煥) 등이 있었다.
    이갑성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 임학찬을 만나
    “이곳 장로교중에서 유력한 인물 수명을 소생하여 달라.”
    고 의뢰하였다.
    이리하여 임학찬의 소개로 그곳 교회 장로인 이상소를 만나기로 하고 임학찬과 다른 교사 1명의 안내를 받아 이상소 집으로 갔다.
    이상소 장로 집에서 이상소·임학찬, 다른 교사(성명 미상) 1명, 이상소의 사위 등 4명이 모인 가운데서,
    이갑성(李甲成)은,
    “지금은 민족자결에 의하여 조선이 독립될 것이므로 우리들은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독립청원을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였으나 모두가 공포감을 가지는 표정이었다. 이에 이갑성은,
    “우리들은 일본 유학생들과 같이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또는 일본정부를 배척하거나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고 온화한 수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다.”
    고 말하였으나 그들은 찬동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였다. 이에 이갑성은 그들에게 서명 날인을 요구할 수 없어 그 사람들을 보고,
    “단지 대표자가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대표자가 되도록 권하여 달라.”
    라고 부탁을 하고 이상소 집에서 일박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2월 26일 이갑성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裵東奭)을 다시 마산에 파견하여 찬성 조인을 권하였으나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2월 28일 이갑성은 김창준(金昌俊)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6백매를 받은 후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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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이 일어난 3월 1일 이른 아침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相])을 자기 집으로 불러 그 가운데 4백매를 주어 대구와 마산에 전하도록 하여 3월 1일 오전 8시 이용상은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용상은 대구를 거쳐 3월 2일 마산에 도착하여 당시 마산부 표정(表町)에 살던 임학찬 집을 찾아가 2백매를 전하였다.
    임학찬은 이것을 다시 이형재(李瀅宰)에게 교부하고 그는 다시 30매를 김용환(金容煥)에게 교부하였다.
    3월 3일 김용환은 이 독립선언서를 마산 무학산에서 군중에게 배부하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마산 경찰서에 검거되니 마산에 있어서의 경찰의 경계와 감시는 더욱 심해갔다.
    이 무렵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도 독립선언서를 의신학교(義信學校) 여교사 박순천(朴順天)[당시의 이름 박명언]에게 전하였다.
    3월 1일 서울의 의거와 아울러 독립만세의 민족 함성은 방방곡곡으로 메아리쳐 갔다. 이러한 소식과 아울러 독립선언서가 마산에 전달되자 전통적으로 항일저항정신이 강하였던 이곳 애국인사들은 민족적 의기와 울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의 준비는 비밀리에 이루어져 갔다.
    즉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산하의 창신(昌信)·의신(義信) 학교 교사·학생들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창신 학교에서는 이승규(李承奎)의 아들 이은상(李殷相)의 공부방에서 한태익(韓泰益)·이정기(李廷紀)·이일래(李一來) 등 학생 대표가 모여 모의를 거듭하면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그렸고, 의신학교에서는 교사 박순천(朴順天)·김필애(金弼愛) 등의 지도를 받아 상급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 최봉선(崔鳳仙) 집에서 비밀리에 이러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3월 10일 에는 함안군(咸安郡) 칠원(漆原)의 기독교도들의 구마산의 교도들과 비밀 연락을 갖고 장날에 봉기하려다가 사전에 칠원주재소 경찰에게 탐지되어 엄중한 취체를 받았다.
    이 무렵 3월 11일 부산진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여학생들이 먼저 독립 만세시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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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횃불을 올렸다.
    이 소식은 창신·의신학교 학생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하였다.
    3월 12일 드디어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전 직원은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낱 시민의 입장에서 만세를 부를 것과 마산시내의 만세시위에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되 학교와 관련을 짓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한편 이러한 움직임과 아울러 최용규(崔鏞奎)는 이형재(李瀅宰)·명도석(明道奭)·이정찬(李廷讚)·최동락(崔東洛)·신택식(辛澤植) 등 동지와 협의하고 또 학생대표에게도 연락하여 거사일을 3월 21일 구마산 장날로 정하였다.
    3월 21일 장날, 장거리는 아침부터 시골에서 몰려드는 장꾼들로 부산하였다. 모든 준비물은 보부상(褓負商)을 가장하여 시중으로 운반되고 여학생들은 치마폭에 태극기를 감추어 장꾼 사이에 끼어 시중으로 잠입하였다.
    이날 오후 3시 장꾼은 가장 많이 모여 들었다.
    이 때 주동 인물들은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대서특필한 큰 기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면서 여기에 호응하였다.
    태극기의 물결 속에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드디어 3천 명 군중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을 위시하여 나무꾼과 장사꾼들도 흥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동 인물들의 시위행렬을 따랐다.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만세 소리에 놀란 일경은 행렬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한꺼번에 많이 몰리는 의기헌앙(意氣軒昻)한 군중을 막을 수 없었다.
    파장이 된 장거리에는 광주리며 농산물이 딩굴고 무수한 발자국 소리가 만세 소리에 섞여 흩어져 갔다. 처음에 어리둥절했던 일경은 나중에 칼을 뽑아 마구 휘둘렀으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같이 일경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마산 일군 중포병대대병(重砲兵大隊兵) 21명과 마산 일군 헌병분견소 하사(下士) 이하 7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총검으로 군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군중시위는 더 계속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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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오후 6시가 넘었다.
    일경은 주동 인물 50명을 검거하여 신마산에 있는 경찰서로 끌고 갔다.
    ‘대한 독립만세 !’
    검거된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다시 만세를 절규하였다.
    일경이 만세를 외친 나뭇꾼의 멱살을 잡아 쥐고 뺨을 때렸다.
    지게를 진 채 멱살을 잡힌 나뭇꾼은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경은 노발대발해서 나무꾼을 발길로 차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만세를 부른다고 때리는데 왜 자꾸 부르느냐?”
    “으음! 내 뱃속에 ”대한 독립만세‘가 가득 차 있어 네가 때리는 대로 만세가 쏟아져 나온다.”
    “이 놈아!”
    일경은 말문이 막혔다.
    이 같이 많은 애국시민들이 유치장에 갇히게 되자 갖은 힘을 다하여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애국자가 있었으니 이가 곧 이승규(李承奎) 장로였다.
    그의 보증으로 많은 학생 시민들이 석방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그가 마산의 최고 지사였고, 그의 힘을 왜경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동 인물의 1사람인 의신학교 교사 박순천도 이승규 장로의 보증으로 석방되자 그 후 일경의 눈을 피해 마산을 떠나게 되었다.
    석방되지 못한 주동 인물들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아 4개월 내지 1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이 가운데 김용환(金容煥)은 1년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창신학교 고등과 학생 최동락·최영조 등은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고 이듬해 김용조·조점록·김응·박광수·강종환·신경식 등은 마산검사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옥고를 치루었다.
    이상소는 배후 조종 협의로 마산검사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이관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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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술(上述)한 3월 21일의 제1차 구마산 독립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는 이러한 마산포 일대의 독립시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진해군항(鎭海軍港)으로부터 조무(朝霧)라는 군함을 마산포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남녀 학생들이 주동이 된 제1차 마산의거에 이어 3월 26일 장날에는 다시 시민들의 의거가 일어났다.
    즉 이날 오후 2시 40분 장꾼이 많이 모인 가운데 시민들이 단결하여 구마산 석정통(石町通)에서 다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약 3천 명의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산 일군(日軍) 중포병(重砲兵) 대대원(大隊員) 16명의 협력을 얻은 경찰 18명의 총검의 탄압으로 다시 진압되고 주동 인물 14명이 검거되었다.
    다시 장날에는 다시 제3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즉 3월 31일 오후 4시 역시 구마산에서 약 2천 5백 명[일 군경 기록 약 2천 명]의 군중이 다시 2시간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산 일군 중포병 대대원과 일경의 탄압으로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 후 4월 22일, 23일, 24일의 3일간에 걸쳐서 마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봉기하였다. 즉 학생들은 학교내서 애국가를 부르고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학교장이 이들을 제지하였으나 학생들은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4월 24일 이후 마산공립보통학교는 휴업으로 들어갔다. 1919년 3월에 마산에 있어서 5, 6차의 의거에 이어 1920년에 있어서도 마산 독립 만세시위가 계획되어 가고 있었다.
    즉 1919년 3·1운동 때 서울에서 활약한 바 있는 유천식(柳天植)이 1920년 9월 23,24일 마산 만정(萬町)에 살던 정철용(鄭哲用)과 오동동(午東洞)에 살던 이영국(李榮國)·이영진(李榮鎭) 외 수명과 모의하여 경고문 1백 50매와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하려다가 사전에 경찰에 발각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 받았다.
    이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마산에 있어서의 3·1독립투쟁은 한말의 항일저항정신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느 곳보다도 끈기 있게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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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절 창원군(昌原郡)
    1 창원읍(昌原邑)
    창원읍은 마산선 창원역에서 동쪽으로 7km쯤 되는 천주산(天柱山) 남록(南麓)에 있는 읍으로 이 부근 일대의 토지는 비옥하여 소위 창원미(昌原米)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3·1운동 당신 읍내 시장에서는 매달 음력 2일, 7일에 장이 열리고 한 장의 거래액은 3천원 내외에 오르는 큰 장이었다.
    따라서 매장마다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다.
    근대 개항 이래 마산포를 비롯한 이곳 일대의 연해(沿海)민들은 일제의 경제적·정치적 침략으로 많은 이권이 피탈되어 많은 문제가 야기된 곳으로, 따라서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은 역사적으로 그 저류를 이루어 온 곳이다.
    서울의 3·1운동에 이어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남도 각지에서도 독립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이곳 애국인사들도 비밀리에 의거를 서둘렀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3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반준비를 갖추어 갔다. 3월 23일 장날 비밀조직 확대와 연락을 통하여 다른 장날과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많은 장꾼들이 모여 들었다.
    드디어 오후 2시 20분경이 되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주동 인물들이 장 복판에서,
    ‘대한 독립만세!’
    를 고창하자 6천~7천 명의 군중이[일 군경 기록에는 약 5천 명]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드디어 만세시위로 들어가 장꾼들은 모두가 흥분해서 뒤끓고 항일 저항의 사나운 분위기가 감돌아 갔다. 이같이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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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간, 경상남도 경찰부 pp.8~9. ≪이갑성취조서(李甲成取調書)≫, ≪3·1운동 비사≫, 이병헌, (pp.283~324, ≪33인의 예심종결서(豫審終決書)≫, 이병헌, ≪3·1운동 비사≫, p.769,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169~170,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p.408~409, 439~440, 651 창신중·공업고등학교, ≪창신60년사≫, pp.75~78, ≪박순천자서전≫, ‘울밑에 선 봉선화야’≪여원≫1968년 4월호], 유천식(劉天植) 판결문[1921년 1월 2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변지섭(卞志燮),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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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 헌병 및 경찰관 주재소원만으로는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요청으로 마산 중포병 대대의 일군과 진해(鎭海) 요항부(要港部) 장교(將校) 이하 26명의 일군의 대병력이 동원되어 이들의 총검의 탄압으로 오후 5시 20분 군중은 부득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주동 인물 31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같이 놀랄 정도의 대군중의 호응과 시위는 저류를 이루어 가고 있던 연해민(沿海民)의 저항정신을 그대로 잘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이러한 창원읍의 제1차 의거에 이어 제2차 의거가 준비되어 갔다.
    즉 이곳 청년 15명은 의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4월 2일 장날을 재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면서 주변 지방에도 비밀연락을 취하였다.
    4월 2일 오후 3시 많은 장꾼이 모여들게 되자, 이들 15명의 청년 주동 인물들은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으로 들이 닥쳤다.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이에 호응하여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그곳 주재 일군 헌병 9명은 재빨리 마산 일군 헌병 분견소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물 1명을 검거한 후 총검으로 위협하여 만세시위는 일단 차단되었다. 일군의 만행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한 이곳 시장 상인들은 노점과 상점의 문을 닫고 장꾼들과 일단이 되어 다시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또 다시 6천~7천 명이 일시에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는 제1차 의거에 비하여 보다 강력한 형태로 전개되게 되었다.
    일경의 기록에도 이때의 만세시위를 ‘열광적인 소요가 야기되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때 군중들이 얼마나 항일의식이 치열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군중들의 시위는 수 시간 전개되었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이곳 일 군경의 연락으로 마산 일군 헌병분견소로부터 많은 응원병력이 급파되어 이들의 총검의 탄압으로 군중은 부득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주동 인물 20명이 검거되었거니와 일경 기록에는 이때를 가리켜, ‘겨우 해산시켰다’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군중들이 이 시위에서 얼마나 끈기 있는 저항을 하였던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창원면사무소 명부 소위 ‘일제하의 범죄자 명부’에 나타나 있는 창원읍의 의거 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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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은 창원면(昌原面) 중동리(中洞里) 거주의 설관수(薛灌洙), 창원면 북동리(北洞里) 거주의 공도수(孔道守)를 비롯하여 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신갑생(申甲生)·조희순(曺喜舜) 등으로, 이들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으로부터 각각 6개월 형을 언도 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1)
    2 진동면(鎭東面) 고현리(古縣里) 시장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 양촌(良村)에 거주하는 변상태(卞相泰)는 1919년 2월 하순[일자 미상] 서울에 있는 동지들로부터 즉시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곧 그의 동지인 김관제(金觀濟)·이시영(李始榮) [대구 사람으로 성재(省齋)와는 다름]에게 연락하여 같이 상경하였다.
    그들은 3월 1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이시영(李始榮)은 망명 동지들과의 연락사명을 띠고 만주로 향하고 김관제는 동부(東部) 경남 일원(慶南一圓)에 대한 의거의 책임을 변상태는 서부경남일원(西部慶南一圓)에 대한 의거의 책임을 지고 각각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각기 길을 달리하여 하향하였다.
    본가로 돌아온 변상태는 곧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때 함안(咸安)의 이희석(李喜錫)·조태식(趙台植)·이경형(李景蘅), 차원의 이수룡(李秀龍)·권태용(權泰容)·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변상헌(卞相憲), 고성(固城)의 황태익(黃泰益) 등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변상태(卞相泰)는 서울의거의 전말(顚末)과 앞으로 해야 할 거사의 민족적 사명을 의분에 넘친 어조로 설명하였다. 모두들 흥분에 넘쳐 민족적인 거사에 몸 바칠 것을 서로 맹약하고 돌아갔다.
    곧 이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권태용(權泰容)․변상헌(卞相憲)․백승학(白承鶴) 등은 본지방의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다가오는 고현시장(古縣市場), 즉 진전면(鎭田面) 오서리(五西里)장날(음력 2월 27일)로 약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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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북도 경찰부 pp.9~10,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한국독립운동사≫ II 국사편찬위원회 p.813, 이용락(李龍洛),≪3·1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 p.109,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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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부터 눈 코 뜰 사이 없이 그들은 바빴다.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 격문을 목판에 새겨 인출해 내었다.
    또 독립선언서 1천매도 작성하였다. 선전 격문은,
    ‘가로되 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나 물러서지 않는다.’
    (日我同胞 有進無退)
    라고 새겨 저항민족의 용감한 전통적 특성 대중에게 알려 더욱 용기를 북돋우었던 것이니, 이 판각은 이 방면에 조예(造詣)가 깊은 권태선(權泰璿)이 맡았다.
    이와 같이 거사의 준비를 갖추어 가는 한편 주동 인물들은 각 면·동으로 쫓아다니면서 동지와 대중 규합에 노력하였다.
    특히 백승학(白承鶴)은 태극기·격문(檄文) 작성에 협력함과 아울러 각 촌락의 연락 책임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약정한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어 많은 장꾼이 모여들게 되었다.
    드디어 권영대(權寧大)는 시장 중앙에 비밀히 만들어 놓은 임시단(臨時壇)에 올라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선창하였다.
    이때 시장 요소요소에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선전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에 5백~6백 명[일경 기록에는 약 4백 명]의 장꾼 주민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드디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 군중의 행렬은 시장을 돌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또 일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鎭東)으로 향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진동 일군 주재소에서는 마산 일군 중포대대와 기타 요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현지 일군 헌병 7명은 이들 마산 일군 중포대대 응원병과 기타 별도로 파견되어 온 방비대 장교 이하 24명과 합세하여 진동을 향해 시위해 오는 군중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으로 이들을 난타하였다. 맨주먹 군중은 시위를 더 계속할 수 없어 절치분개(切齒憤慨)하면서 헤어졌다. 때는 오후 5시 경이었다.
    드디어 그들은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11명의 주동 인물이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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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은 재기(再起)를 기도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후 검거된 주동 인물은 권영조(權寧祚)·권오규(權五圭)·권태선(權泰璿)·백승학(白承鶴)·백운태(白雲台)·노수환(盧秀煥)·박순조(朴淳祚)·이교영(李敎暎)·권오성(權五成)·김종호(金鍾灝)·이봉우(李鳳友) 등 11명으로, 이 가운데 권영조(權寧祚)·권오규(權五圭)·권태선(權泰璿)·백승학(白承鶴)·백운태(白雲台)·노수환(盧秀煥) 등 6명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각각 6개월 내지 1년형을 언도 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나머지는 태형 또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2)
    3 삼진(三鎭)[진전(鎭田)·진북(鎭北)·진동(鎭東)]
    삼진의거라 함은 4월 3일에 일어난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대의거를 말하는 것으로, 이 의거는 당시 수원(水原)선천(宣川)·수안(遂安)의 대의거와 더불어 4대 의거로 손꼽는 의거였다.
    이 항일 의거에서는 농민들의 완강한 투지가 그대로 잘 발휘되어 조선 민족을 멸시하던 포악한 일 군경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전술한 고현(古懸)시장 의거에서 재기를 기도하여 종적을 감춘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은 굳은 결심 아래 재의거일을 4월 3일 (음력 3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새로운 동지와 많은 대중을 규합해갔다.
    이곳의 애국유지(愛國有志)인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은 변상태·권영대·권태용과 긴밀한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의거의 준비를 서둘렀다.
    4월 2일 정오경, 진천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는 약 1백 명(재판기록에는 80명)의 농민들이 모였다. 변상태는 이곳에 나타나 이들 농민들에게,
    “민족 독립의 횃불을 들 때는 왔다. 우리가 독립하지 못하면 영원히 개·돼지의 처지를
    _______________
    2) 권영진(權寧震) [또는 영대(寧大)]판결문,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 p.90. 김정명,≪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p.435, pp. 439~440 pp.499~500.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慶南獨立運動小史)≫(상)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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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치 못할 것이며, 이는 후손들에게 말 못할 후환(後患)을 끼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항일 독립의 전선으로 궐기할 때다.”
    고 민족 독립으로의 눈물 어린 열변을 토하여 항일 농민들의 애국심을 더욱 북돋우었다. 권태용(權泰容)은 이날 김영조(金永鍾)을 찾아가 의거일에 대중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부탁하고, 기타 많은 사람에게 의거에 호응하기를 부탁했다. 변상헌(卞相憲)·황치순(黃致淳)·변상섭(卞相攝)·변상술(卞相述)도 그날 아침 진전면(鎭田面) 봉암리(鳳岩里)로 구장 구수서(具守書)를 찾아가 의거일의 대중 동원을 부탁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4월 1일 변상태·황태익은 변우범(卞又範) 집에서 모의한 후 그곳 동리 서당에서 변상태·변우범이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미리 동민들에게 비밀리에 배부해 주고, 황태익은 변우섭(卞又燮)과 같이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역시 비밀리에 동민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드디어 4월 3일은 닥쳐왔다. 회집장소인 진천면 양촌리 천변(川邊)에 큰 태극기가 세워지자 3면(面)의 군중은 운집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종(金永鍾)은 1백여 명의 군중을[재판기록에는 30명] 거느리고 오고, 구수서도 수10명[재판기록에는 약 10명]의 군중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속속 모인 군중은 오전 9시에는 이미 수천 명이 넘었다. 독립을 갈망하는 눈은 빛나고 또 투지(鬪志)에 만만하였다. 큰 태극기 아래서 변상태는 군중들에게 외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이며 자유국(自由國)의 국민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 서는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뒤이어 변상섭(卞相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변상태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태극기의 물결 속에 민중의 목 메인 독립만세의 함성은 한없이 계곡으로 메아리쳐 갔다.
    드디어 군중은 이곳 일인들의 거점이며 일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때 진동(鎭東) 방면에서는 이날 소풍을 가장한 인근 주민들이 진동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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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로 모여들었다. 정오를 기하여 백승학(白承鶴)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의 만세 함성은 성터를 뒤흔들었다. 백승학(白承鶴)은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지휘하여 시위로 나섰다. 시위대열은 남문(南門)을 지나 지장터을 돌아서 사동리(社洞里)로 향하였다. 이때 진동의 일인들은 겁을 집어먹고 상점을 폐문하고 몇몇은 마산(馬山)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진동 일 군경·진동 일본 재향군인들은 진동을 향해 시위 내습해 오고 있는 진전(鎭田) 군중시위대를 막기 위해 사동리쪽으로 향하였다 진동 시위대열은 이들의 뒤편을 따라 향교(香橋) 동편에 머물고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노도와도 같은 시위행렬은 선두에서 큰 태극기를 1번 휘두르면 만세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진전(鎭田)·진북(鎭北) 면장을 비롯한 연도의 군중이 모두 호응하여 군중은 약 5천명으로 늘어났다[일 헌병 기록에는 약3천 명]. 때는 오후 2시 시위행렬의 선두가 진북면 사동리 사동리교(社洞里橋)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급보에 접한 진동 주재의 일 헌병 및 보조원 8명과 현지 일본 재향군인 30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군과 맨주먹의 시위군중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일어났다. 김수동(金守東)은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북받쳐 오르는 의분을 참을 수 없어 맹호같이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군중을 독려하였다. 적병들이 김수동(金守東) 앞을 가로막고 총검으로 제지하려 하자 김수동은 한손으로 태극기를 잡고 한손으로 일군 헌병의 목덜미를 잡아 다리 아래로 던졌다. 다리 아래로 처박힌 일 헌병이 총을 발사하여 김수동(金守東)은 태극기를 잡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김수동과 나란히 전진하던 변갑섭(卞甲燮)은 김수동이 가졌던 태극기를 다시 잡아들고 적중(敵中)으로 돌진하였다. 노한 군중은 투석으로 이들에 대항하였다.
    드디어 일 헌병은 군도로 큰 기를 잡은 변갑섭의 바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의 팔과 함께 큰 기가 땅에 떨어지자 그는 왼 손으로 다시 기를 잡아들고 다시 적중으로 돌진하였다. 이에 일 헌병이 다시 왼쪽 어깨를 내리치자 변갑섭은 2어깨가 절단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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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도 울릴 애국 영웅들의 이 같은 장렬한 죽음은 당시 일제의 보도관제로 동포들이 알 수 없었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 현장에서 투쟁한 투사(鬪士)들이 비로소 생생하게 우리들에 밝혀 주는 것으로 이 영웅들의 독립투쟁은 청사에 길이길이 전해야할 귀중한 정신 유산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때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일 헌병 보조원인 주구배들이 일 헌병들보다 더욱 앞장서 동포들에게 총탄을 퍼 부은 사실이다. 김영환(金英煥)은 일 헌병보조원 심의진(沈宜震)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나를 죽인 놈은 심의진(沈宜震)이다. 이 원수를 갚아 달라.”
    라고 외쳤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통절한 유언인가! 이때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군중이 8명에 달하였고, 부상자는 성명을 알 수 있는 자만도 22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반면 이때 또 군중은 일군 헌병 및 보조원 3명을 때려 눕혀 중상을 입혔다. 오후 3시 적들의 야만적인 총탄세례로 맨주먹의 군중은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마산에서 다시 많은 일군 야포대대(野砲大隊)의 응원이 급파되어 왔다. 만일 이들의 도착이 1시간만 빨랐다면 군중들의 사상자는 보다 늘어났을 것이다.
    일 헌병은 일군 응원부내와 합세하여 군중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여 말 못할 고문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가족들은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위로하며 운반하였다. 부상자 치료에 있어서는 일 헌병대에서는 마산의 일인 병원을 지정하였으나, 부상자측에서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마산의 삼성병원(三省病院)[한국인 경영]또는 진주(晋州)의 배돈병원(培敦病院)[미국인 경영]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치료비도 애국 민중들의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즉 애국 부상자들이 입원하게 되자 진전면장(鎭田面長) 권오봉(權五鳳)은 인접 진북(鎭北) 면장(面長) 및 진동(鎭東) 면장(面長)과 협의를 거듭한 후 3면 각 구장 및 유지들에게
    “이번의 부상자들은 모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자들이므로 이들의 치료비는 우리 들이 갹출해야한다.”
    고 통지하자 애국 민중들은 자진하여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리하여 진동면에는 2백 33월 40전, 진북면에서는 94원 45전, 진전면(鎭田面)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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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액의[액수 미상] 성금을 모아 치료비를 완전히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항전에서 전사한 순국자와 부상자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殉國者) 8명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英煥)·고묘주(高昴柱)·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② 부상자(負傷者) 22명
    변현(卞炫)·박종숙(朴鍾淑)·고재록(高在彔)·고운석(高云錫)·황성봉(黃性鳳)·김동이(金銅伊)·변상준(卞相俊)·김대업(金大業)·권태문(權泰文)·권영달(權寧澾)·이몽재(李夢宰)·권영민(權寧民)·박금용(朴錦用)·조용옥(趙鏞玉)·문재수(文再壽)·변용섭(卞龍燮)·손삼룡(孫三龍)·구말서(具末書)·홍성오(洪性五)·박용한(朴龍漢)·김봉조(金鳳祚)·변정섭(卞貞燮)
    한편 일 군경 기록을 보면 이 삼진(三鎭) 의거에 있어서의 조선인 사상자 수를 사자(死者) 5명, 상자(傷者) 11명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 보면 3·1운동 당시 이러한 조선인 애국 사상자 수를 발표하는 것을 얼마나 은폐하였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판결문(判決文)에 나타난 삼진 의거의 주동 인물 10명을 들면 다음과 같다.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황태익(黃泰益)·변상섭(卞相攝)·변상술(卞相述)·구수서(具守書)·변상헌(卞相憲)·김영종(金永鍾)·변우범(卞又範).
    이들 가운데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은 경성(京城)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 받고, 황태익(黃泰益)은 무죄석방되고, 나머지는 1년형을 언도 받아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
    한편 삼진 의거 후 이곳 창원군내(昌原郡內) 애국 민중들의 항일 저항의식은 한층 더 높아갔다.
    창원 읍내 애국민중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이들에 대한 분격은 참을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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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 민중들은 당당히 일인 상점에 들어가 속히 이곳을 철수하여 귀국할 것을 종용하는가 하면, 북면(北面)에서는 속히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으면 무서운 화가 닥쳐 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또 대산면(大山面)에서는 일인들에게 고용을 거절할 뿐 아니라. 일인 상점에 외상금을 지불하지 않았고, 그들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등 일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또 창원군내 여러 곳에서는 소작료 지불을 거부하고 빌린 돈도 지불하지 않는 상태였다.
    삼진(三鎭) 의거는 선진적(先進的)인 애국사상을 가진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 주동 인물들이 연해(沿海) 농민들을 반일기치하(反日旗幟下)로 광범하게 규합 동원하여 대중적인 완강한 항일 저항투지를 여지없이 발휘케 한 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특히 변상태(卞相泰)는 고현시장(古懸市場) 의거를 주동한 후 숨어서 다시 보다 강력하고 대중적인 삼진의거(三鎭義擧)를 주동하고 이후 다시 종적을 감추어 다방면의 항일단체와 손을 잡고 활약하다가 이듬해 주구배의 밀고로 검거되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그가 얼마나 선진적인 애국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규합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그는 위대한 농민군의 전술가였다.3)
    삼진(三鎭) 의거를 길이 기념하고 이 같은 독립투쟁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길이길이 후세에 남기기 위해 1963년 10월 이곳 삼진 지방민 일동이 8의사(八義士)가 쓰러진 격전지인 진전면(鎭田面) 사동리교변(社洞里橋邊)에 창의탑(彰義塔)을 세웠다.
    창의탑에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 4일[필자주 ; 3일의 잘못] 김수동·변갑섭·변상봉·김영환·고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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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권영대(權寧大) 외 9인의 판결문, 1919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변상태(卞相泰) 외 9인의 판결문, 1920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 변상태(卞相泰) 외 9인의 판결문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권태용(權泰容) 판결문 1921년 2월 28일 경성복심법원.≪백승학의거록(白承鶴義擧錄)≫, 필자 소장, 변지섭, ≪영남독립운동소사≫(상) pp.5~8.≪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김정명,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399, 506, 744,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한국도립운동사≫ II. 국사편찬위원회, p.811, ≪조선3·1독립소요사건(朝鮮三一獨立騷擾事件≫, 조선 일군 헌병사령부, p.144,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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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봉·김호현․홍두익 등 8의사는 수천 군중의 앞장에 서서 우렁찬 조국 독립만세를 외치다 왜병의 총칼에 무참히도 쓰러졌다.
    이에 우리 지방민은 8의사가 쓰러진 바로 이 자리 탑을 세워 길이 그 뜻을 알리며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