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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정중수기-안두유 안두철6대조

자라가슴 2022. 4. 5. 12:15

                                                                                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

 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
愚嘗讀文穆公寒岡鄭先生觀海亭詩序 撮其大要曰 丁亥秋 始得此地 偶因朋友會叙 酒且半 題此詩 坐中有取以爲擔當之計者 而張文載適假居其傍 協力成就 窃幸三十年宿願 畢竟得遂 襟期之爽 仁智之樂 何可與他境界比喩也 文正公眉叟許先生 謁廟文 略曰先生 高厚之道 純一之德 其可見於言爲動作者 而令遭亂 遠來至南海上 謁先生之廟 始得其所依歸而從之 以是夫而暨 仁祖朝甲戌 鄕之先父老 議諸同志 質于文長 刱建廟宇妥 亭鄭文穆公而其浚 肅廟朝戊子追配 許文正公 此實陶山老先生書中所云 苟有先正遺塵播馥之地 莫不立書院 則將見吾東方文敎之大明也矣 鳴乎 斯亭之建 實爲本院刱設之關捩 則豈非吾林中爲一宮墻也歟 奧在 正廟辛丑 余之從王考 適爲任司於重修之時 告厥工而跋其文 以彰金公昌臣氏之美 其義也尙 其讓也厚矣 歲久而亭復傾頹 去乙卯 族員安斗喆甫 時以院首 謀諸鄕之士兪琦柱 琦柱 窃悶然先賢之遺韻幾歇 後學之藏修失所 迺獨捐銅而重葺焉 其尊賢衛院之誠 迨於時儒而罕覿矣 寧不偉哉 令年春 不侫 忝在齋席鄕之諸長老 嘉其事 付諸剞劂氏 而囑記于斗維 噫 斗維非其人也 詎其以藐然寂寥之談 自任其先後之耶 歸之於同任金斯文思彦甫 不自其文望而推之於余 余再辭不獲者 以若是從王考動勞之地 而重違諸長老謬託之意 强爲之贅一辭 然此皆兩先生遺稿中拈得 而有司重修槪略也而己 實非僣妄而傳會之云
歲在著雍敦牂端陽月下澣後學順興安斗維記 

 

(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해문]
내 일찍이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관해정시(觀海亭詩) 서문을 읽었는데 그 대강을 발췌하였다. "정해(丁
亥) 가을 비로소 이 땅을 얻어 우연히 벗들이 모이는 자리로 인하여 술이 반쯤 되었을 때 이 시를 지었는데 좌중에서 이것이 담당
할만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장문재(張文載)가 마침 옆에 살아 협력하여 성취하였다. 다행이 삼십년 숙원 했던
일이 드디어 이루게 되었으니 옛 약속의 또렷함과 인(仁)과 지(월)를 좋아함이 어느 다른 것의 경계가 이것에 비유할 수 있겠는
가."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선생이 묘당에 알현한 글에 "선생의 높고 두터운 도(道)와 순정하고 전일한 덕(德)으로
그 말이 행동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혼란을 당하여 멀리 남해 바닷가에 와서 선생의 묘당을 배알하니 비로소 그 귀의하
여 따를 바를 얻었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인조() 갑술(甲戌; 1643)년에 이르러 고을의 어른들 중 뜻이 같은 사람이 논의하여
문덕(文德)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물어서 허문정공(許文正公)을 배향하니 이는 실로 도산(陶山)선생 글 중에서 말한 바로 진실로
선조의 올바로 남긴 자취가 향기를 풍기는 자리이니 서원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우리 동방의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짐을 볼 것이다. 아아! 이 정자를 세움은 진실로 본원의 창설에 관련 되는 것 이니
어찌 우리 사람의 한 울타리가 아니겠는가. 정조(正廟) 신축(辛丑; 1781)년에 내가 조부를 따라 왔다가 마침 중수를 하였는데 유
사를 맡았다. 공사가 끝나고 발문을 쓰는 것은 이창(以彰) 김창신(金昌臣)씨의 아름다움이다. 그 뜻이 고상하고 그 사양함이 두
텁다.
세월이 오래 되어 정자가 다시 무너져 내리니 지난 을묘(乙卯; 1795)년에 집안사람인 안두철(安斗喆)이 서원의 수장으로 있을 때
고을의 선비 유기주(兪琦柱)와 의논을 하니 기주(琦柱)가 선현들이 남기신 풍토가 거의 고갈되고 후학들이 학업을 닦을 장소가
없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혼자 돈을 내어 중수하니 그 현인을 존중하고 서원을 보존하려는 정성이 이 시대 유림에 보기 드문 것이
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금년 봄에 내가 재실의 자리에 있을 때 고을의 장로들이 그 일을 축하하며 판각을 하는 사람에게 부탁
하고 두유(斗維)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아! 두유(斗維)가 비록 합당한 사람은 아니나 어찌 그 적막한 말을 하겠는가. 그
앞뒤에 일을 맡았던 김사문(金斯文) 사언(思彦)에게 돌리니 사언은 그 스스로의 문장이 볼 것이 없다고 나에게 미루었다. 내가
거듭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할아버지를 따라 힘써 노력한 때문으로 거듭 여러 장로들의 부탁하는 뜻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억지로 군더더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선생의 문집에서 따온 것이며 유사와 중수의 계략일 뿐
이니 실제 분수없이 내뱉는 말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무오(戊午; 1798)년 10월 하순 후학 순흥(順興) 안두유(安斗維)가 기록하다.

해제(解題)

**「회원서원 관해정 중수기」**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숭정기원후 292년), 경상남도 고성 지역의 대표적 유학 교육기관이었던 회원서원(檜原書院) 내 **관해정(觀海亭)**의 중건 과정을 기록한 기문(記文)이다. 필자인 **안두유(安斗維)**는 순흥 안씨 출신으로, 고성 유림의 서원 운영에 관여한 인물이다.

관해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유학자 **정양용(鄭良容, 자 한강寒岡)**이 고성에 낙향하여 벗들과 함께 풍류를 나누며 지은 정자로, 이후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정문목공(鄭文穆公)**의 위패를 모시는 사우를 창건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허목(許穆, 문정공) 또한 추향되어, 회원서원은 정허 양현을 배향하는 대표적 서원이 되었다.

이 기문은 정자의 유래와 의미, 사우 창건 및 중수의 역사, 유림의 단합과 선현 숭모의 뜻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서원과 정자를 통해 전통 유학과 교육의 맥을 잇고자 했던 지역 지식인층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문체는 전통 한문 기문 형식을 따르면서도, 과거 유고를 인용하고 후학의 사명감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원의 역사성과 후속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는 서원 문화의 전개와 향촌 지식인의 역할, 그리고 그 유산의 재건과 의미 부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요 인물 및 용어 각주

  1. 회원서원(檜原書院): 경상남도 고성군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선 인조 때 창건되었으며, 정양용과 허목을 배향하였다. 지역 유학의 중심이 되었던 교육·제향 공간이다.
  2. 관해정(觀海亭): 정양용이 낙향한 후 고성에서 벗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여 ‘관해’라 명명되었다.
  3. 정양용(鄭良容, 자: 한강寒岡, 호: 문목공文穆公):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예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벼슬을 지낸 뒤 낙향하여 고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4. 허목(許穆, 자: 미수眉叟, 시호: 문정공文正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정치가로, 남인계 학자. 허목은 정양용을 기리는 제문을 남겼고, 이후 함께 회원서원에 배향되었다.
  5. 안두유(安斗維): 본 기문의 필자. 순흥 안씨로서 당시 회원서원 중수와 운영에 관여한 지역 유림 인사이다.
  6. 안두철(安斗喆): 1915년 정자가 다시 기울어졌을 때, 당시 서원장을 맡아 정자 중수의 실행을 주도한 인물. 본문에서는 그의 후의와 실천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7. 유기주(兪琦柱): 고성 향리 유림의 한 사람으로, 안두철과 함께 관해정 재건을 논의하고 사비를 들여 정자를 중수한 공로자이다.
  8. 정문목공(鄭文穆公): 정양용의 시호. ‘문목’은 그의 문덕과 절의를 기린 시호로, 유림 사회에서 학덕이 높은 이에게 부여되었다.
  9. 허문정공(許文正公): 허목의 시호. 예학과 정론으로 남인 정통을 이은 인물로, 유교적 절의의 표상으로 높이 추앙받았다.
  10. 숭정기원(崇禎紀元): 명나라 숭정제를 기준으로 하는 기년법.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 유학자들이 사용했다. ‘숭정기원후 292년’은 서기 1925년에 해당한다.
  11. 단양월 하순(端陽月下澣): 음력 5월(단오월)의 하순을 의미. 단오(端午)는 전통적으로 음력 5월 5일이며, 하순은 21일 이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