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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村先生遺集 이정

자라가슴 2020. 3. 23. 13:20

 

 

       1. 서지 사항
이 책은 茅村 李瀞(1541-1613)의 시문집으로, 5권 2책의 목판본이다. 表題·內題·版心題 모두 ‘茅村先生遺集’으로 되어 있다. 원집은 2권 1책이었는데, 후에 부록 3권 1책을 덧붙여 총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四周雙邊에 界線이 있고, 半廓의 크기는 가로 16.6㎝×세로 20.1㎝이며, 책의 크기는 가로 19.7㎝×세로 29.3㎝이다. 每面은 10行 19字로 되어 있다. 版心에는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가 있으며, 注는 雙行으로 되어 있다. 본 해제는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 소장된 『茅村先生文集』(등록번호 1712)을 저본으로 하였는데, 晉州의 第一印刷社에서 1988년 5권 2책의 문집을 영인 간행한 것이다.
 
 
간행 경위

2. 간행 경위
이정의 시문은 본래 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5권 중에 原集은 2권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3권은 모두 부록이다. 그 이유는 잦은 兵火로 인해 유고가 많이 유실된 데다,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해 제때에 유문을 수습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모촌집』은 이정이 졸한 지 3백 년이 지나도록 간행되지 못하다가, 1901년에 이르러 비로소 간행되었다.
『모촌집』은 이정의 후손 李有完과 李壽亨이 흩어져 있던 유문을 모아 집안 사람 曉山 李壽瀅(1837-1908)에게 청하여 年譜를 편수해 붙이고 편차를 정하여 만든 것이 현전하는 2권 1책의 原集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원집의 내용만으로는, 간행 시기 및 경위, 그리고 편찬자 등에 관한 기록이 없어 그 전모를 살필 수 없다. 문제는 현전하는 『모촌집』의 판본이 2권 1책의 원집과 5권 2책의 두 종류라는 데에 있다. 추정컨대 1901년 문집을 간행할 적에 원집을 마련하고, 거기에다 곧바로 부록을 붙여 동시에 편찬한 것 같다. 따라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간행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모촌집』은 기존의 5권 2책이 그대로 영인 重刊되었으니, 이는 1988년 晉州의 第一印刷社에서 발행한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책의 후미에 국한문 혼용체로 해석한 이정의 행장과 간략하게 만든 家系圖表와 이정의 12세 후손 李仙浩가 쓴 重刊跋이 붙어 있는 것뿐이다.
 
저자 소개

3. 저자 소개 : 李瀞(1541-1613)
李瀞의 자는 汝涵, 호는 茅村, 본관은 載寧이다. 증조부는 부제학을 지낸 李仲賢이고, 조부는 영남 서도 수군 虞侯를 지낸 李珷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李景成이고, 어머니는 驪州李氏로 李鶴의 딸이다. 이정은 1541년 咸安 茅谷里 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의 집안은 5세조인 茅隱 李午가 고려 패망 이후 절의를 지키기 위해 凝川에서 茅谷으로 이사 온 후, 계속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정은 南冥 曺植의 제자로 守愚堂 崔永慶, 東岡 金宇顒, 寒岡 鄭逑, 覺齋 河沆, 大笑軒 趙宗道 등과 교유하였다. 젊어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남명에게 수학하였는데, 程朱學에 심취하였다. 스승의 덕을 기리기 위해 병화로 소실된 德川書院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였다. 1592년 왜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咸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관직에 나아가 沙斤道 察訪에 제수되었고, 이어 丹城縣監·昌原府使·淸州牧使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던 晉州 元塘에 우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내용 개요

4. 내용 개요
茅村先生遺集序(13)
이 서문은 1901년 拓庵 金道和(1825-1912)가 지었다. 매면 5행에다 8-10자의 초서로 되어 있다. 남명의 제자 이정이 학덕을 겸비하였다는 점을 서두에서 말하고, 이어 의병활동과 지극한 효성, 그리고 덕천서원 건립을 주도한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또한 이정에 대한 寒岡 鄭逑, 東岡 金宇顒, 眉叟 許穆, 葛庵 李玄逸 등 제현들의 칭찬을 인용하여 기리며, 이정의 후손 李鉉九가 유집 한 책을 보내 서문을 청하여 쓰게 된 점도 말하고 있다.
【권 1】

簾賦(2)
발의 여러 가지 기능과 유용성을 찬미하면서도 발을 아름답게 치장할 줄만 알고 본래 의미를 잘 새길 줄 모르는 세태에 대한 유감을 드러낸 내용이다.
詩(18)
•5언절구(2수)
鄕梅窩寓興詠白, 鄕梅窩寓興詠紅.
•5언율시(4수)
挽李汝宣偁, 又次軒壁韻示趙致遠, 到茅谷本庄賦感, 哭鄭任重承尹.
•7언절구(14수)
茅屋(附 諸賢贈詩), 和河寧無成應圖還居德山韻, 挽李忠武舜臣, 挽李汝宣偁, 挽成仲珍景琛(3수), 又次竹齋詩一絻, 次趙致遠任道示韻, 鄕梅窩寓興, 封疏後賦感(2수), 登觀海亭追次鄭寒岡逑原韻幷小序.
•7언율시(9수)
敬次曾王考提學公次伯氏提學公酬詔使金太僕湜西門嶺韻, 次魚灌圃韻, 中秋夜賦懷, 簾紋, 官衙雨後, 鄕梅窩春夜懷鄕作, 槐陰, 衙退會鄕士雅讌謫居李修撰同其座, 千秋節登觀德亭.
•7언배율(3수)
志以道寧詩, 次人謁飛鴻閣楊龜山畵像韻, 挽成仲珍景琛.
【권 2】

與安陰鄕校校長(4)
安陰의 鄕校 校長에게 보낸 글로, 葛川 林薰이 지은 남명의 만시 가운데 ‘桐江’이라는 한 구절을 자신이 ‘伊川’으로 바꾸었다는 것에 대해 변론한 내용이다.
上地主鄭寒岡(2)
이정이 47세 때인 1587년 寒岡 鄭逑에게 보낸 서신이다. 迂拙齋 朴漢柱(1459-1504)의 공적과 유적을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알리고 祠宇를 지어 제사를 모시자고 청한 내용이다.
答地主鄭寒岡(1)
한강 정구가 『咸州誌』를 만들 적에 자문을 구한 것에 대하여 답변한 내용이다.
上招諭使金鶴峯(1)
초유사였던 鶴峯 金誠一에게 올린 글이다. 왜적의 침입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올림과 동시에 병사와 군량미 등 필요한 품목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答鄭凞叔大淳(1)
죽기를 맹세하고 적과 싸움에 있어 식량과 사졸을 지원해 준 鄭大淳에게 답례하며 결초보은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與鄭凞叔(1)
재주와 덕을 갖추고 있는 鄭大淳이 산속에 묻혀 명철보신하려는 것을 경계하며 적에게 대항할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다.
答鄭任重枅(1)
鄭枅에게 답한 편지이다. 고려 말 圃隱 鄭夢周와 이정의 5대조 茅隱 李午이 고려 말 충신으로 도의지교를 맺었던 점을 언급하고, 할머니도 鄭氏라는 점을 들어 두 집안 사이의 각별한 인연을 말하고 있다. 그런 각별한 인연의 집안에 자손이 없음을 걱정했는데, 후사를 잇게 되어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與李水使雲龍(2)
이정의 족손이었던 水使 李雲龍에게 군수 1백 석을 청한 글이다.
與河重遠弘度(1)
河弘度에게 보낸 글로, 만난 지 오래 되어 이야기도 나누고 싶을뿐더러 과거도 이미 지나갔으니, 泉石間에서 함께 노닐자고 제안한 글이다.
與河重遠(1)
河弘度에게 보낸 글로, 자식의 관례에 賓으로 참석해 달라고 간청한 내용이다.
答李和甫光友(1)
이정은 70세 때인 1610년 竹閣 李光友에게 답한 글로, 三憂堂 文益漸의 사당 건립에 논의한 내용이다.
答李和甫(1)
먼저 새 쌀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내일 方伯이 고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있기 때문에 방백을 뵙고 碑閣 건립과 관련하여 간청을 해야 하지만, 병이 생겨 여의치 않음을 말하면서 李光友에게 당부하는 내용이다.
答三從弟涵(1)
삼종제 李涵에게 답한 글로, 형제지간에 서로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면서 친밀하게 지내야 하지만, 처지가 달라 그럴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가을에 만날 것을 기약하는 내용이다.
與朴甥君震英(1)
생질인 朴震英에게 보낸 글인데, 重試에 나아가지 않은 이유를 묻고, 계속 수양할 것을 권한다. 錄勳에 들지 못한 것이 불만족이었는데, 참의 趙叔由의 녹권에는 실려 主簿라고 쓰여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與朴甥君(2)
생질인 박진영에게 보낸 글이다. 관료로서의 몸가짐과 고을에 부임 후의 처신에 대해 훈계하고, 자신의 기대를 서술한 뒤, 부임지에서 생산되는 왕골자리를 청하는 내용이다.
答朴甥君(2)
생질인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생질의 집에 말이 죽은 것과 고향에서 만나지 못하였음을 탄식하고, 나무를 보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망친 올해의 농사를 설명하고, 늙고 병든 자신을 갈무리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벼슬할 것을 권하고, 노비 필산이 도망간 것에 대해, 그의 누이가 사는 곳과 이름을 가르쳐 주며 찾아보라는 내용이다.
答朴甥君(1)
생질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갑작스럽게 집안의 상을 당해 임시로 매장을 했다가 가을에 옮겨 매장하겠다는 내용이다.
與朴甥君(2)
생질 박진영에게 보낸 글이다. 姜士俊에게서 일본 장관의 성명을 모른다는 것을 듣고 통신사의 행차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과 인삼은 돈으로 바꾸되 일을 꼼꼼히 처리하라고 당부하였으며, 팔고 남은 가죽으로 가을에 말과 바꾸자는 의견과 약간의 인삼을 보내 주겠다고 하며, 생질이 그 일에서 언제 돌아올지를 묻고 있는 내용이다.
答朴甥君(1)
생질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과자 대신 귤을 보내며 예물을 갖추지 못해 안타깝다고 하였다. 삿갓에 질 나쁜 옻칠을 해서 잘 안 말라 좋은 옻을 구하려 한다고 하였으며, 매를 구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 아내와 함께 도망쳐 버린 일을 토로하였고, 제물로 약간의 참기름만 보낼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答朴甥君(1)
생질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제수용 물고기 다섯 꾸러미를 보내고, 방에서 건조 중인 옷칠한 삿갓이 상할까 염려하고 있으며, 신주를 만드는 사람이 자리에 없어서 이 일은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答朴甥君(1)
생질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자신의 고질병이 심해져서 주위의 만류에서 불구하고 떠날 것을 말하며, 생질에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오는지를 묻고 있다. 말을 사고 싶지만 돈이 없으므로 농사짓는 소 두 마리를 팔고자 하는데, 누구와 값을 논하고 또 그 값이 얼마쯤 될지를 묻는 내용이다.
答朴甥君(1)
생질 박진영에게 답한 글로, 생질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의 차도를 물으며, 자신이 아플 때 생질이 와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지금 자신은 차도가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월초에 뵙겠다고 한 생질의 말을 듣고는, ‘낙엽소리가 마치 발자국 소리 같다’며 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내용이다.
與宗侄而栢(4)
이정의 나이 45세 때 宗姪 李而栢에게 준 것으로, 『中庸』을 읽을 적에 단순히 암기해서는 안 되니, 이해하는 요령을 터득하라고 경계시킨 내용이다. 뒤에 別紙가 붙어 있는데, 『중용』의 요지를 간춘려 기록한 것이다. 中和는 性命의 근원을 극론한 것이요, 費隱은 道體의 은미함을 推明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答或人問目(3)
心과 性과 氣에 대하여 논한 내용이다. 心과 性은 하나는 아니지만, 존양을 하면 둘이 되는 것도 아니니, 虛靈不昧한 것이 心이요, 純善無僞한 것이 性이다. 또한 心·性·氣는 ‘합하여 말하면 一理이고, 나누어서 말하면 一物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이정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祭文
祭伯兄薇村公㴐文(2)
맏형 薇村 李㴐의 죽음을 애도한 내용이다.
祭再從弟義士大亨文(2)
재종제 李大亨의 죽음을 애도한 내용이다.

咸安鄕案重修序(3)
이정이 63세 때인 1603년 11월에 咸安鄕案을 중수하고서, 그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雜著
軍約(2)
의병을 일으킬 때 행동지침으로 금지사항을 규정한 내용이다.
傳檄游倭文(3)
왜장들에게 그들의 부당한 침략을 질책한 것이다. 먼저 이웃 사이의 도리를 설명하고, 백성을 죽이고 궁궐을 불을 지르는 등 악독한 짓만 골라서 자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니, 하루 속히 회개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철병하여 천벌을 면하라는 내용이다.
元塘洞約文(2)
만년에 자신이 살던 진주 원당의 동약이다.
元塘洞約文附約條(5)
원당 동약의 부록으로 붙인 동약의 각 조항 세부 규정이다.
家狀
伯五代祖溪隱府君家狀(4)
이정의 5대조 李午의 형인 溪隱 李申의 행적을 기록하고 공을 기린 내용이다.
五代祖茅隱府君家狀(4)
이정의 5대조 茅隱 李午의 가장이다.
曾王考副提學栗澗府君行錄(22)
이정의 증조부 栗澗 李仲賢의 행록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권 3】
附錄
年譜(21)
이정의 후손인 曉山 李壽瀅(1837-1908)이 지은 것이다. 이 연보에 실린 李瀞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41년 咸安 茅谷里 집에서 태어났다. 5세조 茅隱 李午가 凝川에서 茅谷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그곳에 살게 되었다. 7세 때 아버지 李景成에게서 『孝經』을 배웠는데, 벌써 부모님 사랑과 어른 공경의 절도를 알았다. 8세 때 백씨 薇村 李㴐에게 19史를 배웠다. 15세 때 남명 선생이 모곡리 집으로 내방하였는데, 이정 형제가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18세 때 咸安趙氏와 결혼하였다. 19세인 1559년 봄 남명 선생에게 나아가 『大學』·『中庸』·『心經』 등에 대해 질문하였다. 20세 때 남명 선생을 찾아 뵙고, 經史子集을 두루 보았는데, 班固와 司馬遷의 책을 매우 좋아하였고, 문장을 지을 적에 그들의 雄深하고 雅健한 체를 본받았다.
26세 때 봄에 남명 선생을 모시고 葛川 林薰 선생을 방문하였다. 覺齋 河沆, 大笑軒 趙宗道, 寧無成 河應圖, 潮溪 柳宗智도 함께 모시고 가다가 玉溪 盧禛의 집에 들렀다. 玉溪가 介庵 姜翼과 諸公들에게 安陰으로 같이 가서 갈천을 방문하자고 했다. 제생들이 그 자리에 모여 남명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27세 때 省試에 불합격하자,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29세 때 남명 선생을 찾아가 뵈었는데, 守愚堂 崔永慶, 東岡 金宇顒이 같이 수학하고 있었다. 이정도 그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다.
36세 때인 1576년 봄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등과 德川書院 창건에 대해 의논하였다. 40세 때 덕천서원으로 가서 院規를 확정짓는 데 참여하였다. 여름에 창녕의 任所에 있는 寒岡 鄭逑를 방문하여 의심나는 예를 질문하였다. 43세 때 아버지 참판공의 상을 당하였다.
45세 때 河覺齋·柳潮溪 등과 拱玉臺에서 修契하였다. 종질 이백에게 편지를 보내어 『중용』에 나오는 性命의 근원에 대해 논했다. 46세 때 鄭寒岡이 지주로서 내방하였다. 47세 때 한강 정구에게 서신을 보내어 朴迂拙의 祠宇를 짓자고 했다. 篁巖 朴齊仁, 篁谷 李偁과 더불어 『咸州志』를 도와 편수하였다.
49세 때 凌虛 朴敏이 내방하여 經史를 강론하고, 함께 朴篁巖을 방문하였다. 50세 때 각재 하항, 松庵 李魯, 思湖 吳長, 寧無成 河應圖, 황암 박제인·雪壑 李大期, 暮軒 河渾 등과 陜川鄕校에 모여 崔守愚堂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 상소하여 구원하자고 의논하였다. 51세때 茅村精舍를 창건하였다.
52세 때 왜구가 쳐들어왔다. 도굴 당한 증조부 提學公의 墳塋을 개축하였다. 5월에 忘憂堂 郭再祐, 松巖 金沔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안에서 李篁谷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로 인해 그 달에 咸安召募官의 差使를 임명 받았다. 約軍十條를 지었다. 6월에 진주로 가서 초유사를 알현하였다. 7월에 천거되어 司圃署 別坐에 제수되었다. 12월에도 沙斤道 察訪 겸 咸安義兵將에 차출되었다. 동생 葛村 李潚과 더불어 왜적을 막을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奇兵을 출병시켜 大峴과 岐湖를 지켰다.
53세 때 초유사를 찾아뵙고는 전사한 장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낼 것을 권하였다. 4월 그믐 초유사가 진양에 있는 진영에서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竹牖 吳澐·忘憂堂 郭再祐·大笑軒 趙宗道·存齋 郭䞭·松庵 李魯·大庵 朴惺 등과 함께 예제에 맞춰 장례를 치렀다. 玉峯 鄭大淳에게 답하는 글을 썼다. 54세 때 司憲府 執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서 丹城縣監에 제수되었다. 57세 때 왜구가 다시 침입하자, 조정에서 岳堅山城을 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58세 때 통제사 이순신이 세상을 떠나 조문하였다. 선생의 족손이었던 水使 李雲龍에게 군수 1백 석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12월에 淸州牧使에 제수되었다. 59세 때 도의지교를 맺었던 東岡 金宇顒이 세상을 떠나 조문하였다. 60세 때 免職하고 돌아와 처가가 있는 진주 元塘으로 이사하여 鄕梅窩를 지었다. 61세 때 덕천서원을 중건하여 崔守愚堂을 배향하였다. 河覺齋 등과 함께 萬柳亭에서 藍田舊約에 의거하여 元塘洞約을 수정하였다.
63세 때 善山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7월에 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64세 때 鄭仁弘과 사이가 벌어졌다. 형이 정인홍을 싫어하였고, 동생도 陜川郡守가 되었을 때에도 정인홍을 싫어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돌아왔었다. 『南冥集』을 편찬할 적에 정인홍이 독립적으로 晦齋와 退溪을 비방하며 배척했기 그와 사이가 멀어졌던 것이다. 66세 때 덕천서원에 들어가 院錄을 수정하였다. 그 때 竹閣 李光友, 滄洲 河憕, 松亭 河受一, 日新堂 李天慶 등이 참여하였다.
68세 때 덕천서원 山長으로서 서원에 들어가 河謙齋를 맞아서 師門의 문집에 관한 일에 대해 강론하고 확정지었다. 69세 때 덕천서원에서 寒岡 鄭逑, 桐溪 鄭蘊, 无悶堂 朴絪, 龍潭 朴而章, 東溪 權濤 등을 만났다. 71세 때 封疏를 올려 시사를 논하였다. 73세 때인 1613년 元塘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咸安 大山의 선영에 장사지냈다. 1721년 鄭寒岡을 모신 함안의 道林書院에 배향되었다.
【권 4】
附錄
行狀(6)
葛庵 李玄逸(1627-1704)이 지었다.
書行狀後(3)
閔昌道(1654- ? )가 지었다.
墓碣銘(3)
立齋 鄭宗魯(1738-1816)가 지었다.
碑陰記(3)
凝窩 李源祚(1792-1871)가 지었다.
家狀(12)
이정의 종5대손인 李命培가 지었다.
晉州大覺書院奉安(1)
息山 李萬敷(1664-1732)가 지었다. 진주 대각서원에 배향될 때의 봉안문이다.
常享文(1)
牧使 李奎年이 지었다. 대각서원 향사 때의 축문이다.
咸安道林書院奉安文(1)
郭在一이 지었다. 함안 도림서원에 봉안할 때의 봉안문이다.
常享文(1)
郭在一이 지었다. 도림서원 제향 때의 축문이다.
摭遺(14)
『南冥師友錄』, 『寒岡集』, 『鶴峯先生年譜』, 『忘憂堂集』 등 20餘節 關聯記事를 적은 내용이다.
遺事(5)
訥庵 朴旨瑞(1754-1819)가 지었다.
【卷 5】
附錄
奉呈茅村令公詩幷小序(1)
謙齋 河弘度(1593-1666)가 지었다.
書茅村大人次韻二詩後(2)
澗松 趙任道(1585-1664)가 지었다.
鄕梅窩記(2)
松亭 河受一(1553-1612)이 지었다.
挽詩(8)
篁巖 朴齊仁(1536-1618) 등 21人이 지었다.
祭文(19)
浮査 成汝信(1546-1632) 등 12人이 지었다.
跋1(1)
後孫 李有完이 지었다.
跋2(2)
後孫 李壽亨이 지었다.
跋3(10)
後孫 李壽亨이 지었다.
行狀解釋文(6)
葛庵 李玄逸이 지었다.
家系圖表(2)
十二代祖孝茅村先生文集重刊跋解釋文(1)
12대손인 李仙浩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