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堈 / 기년편고(紀年便攷v18) / K2-37 / 디지털아카이브(TXT_ARC_AA
又剛直不能典意循入 宣祖朝登武科
壬辰以前奉事與兄倡義討倭起兵雖不
多能得其心臨陣以身先之與鄭起龍安
信甲齊名而御衆之才過之與李達赴援
晉州乘馬馳突竟夕鏖戰士民頼而得全
望之者指為千古勇將錄原從功一等官
海堈不從遂歸郷里後贈兵判與兄同時
贈謚義肅
현대어 번역
최강(崔堈)은 균(均)의 아우로, 자는 소계(蘇溪), 고성(固城)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공부하였으며, 담략(膽畧)이 있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여 세상의 뜻에 영합하거나 관직에 아첨하지 않았다.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봉사(奉事)로서 형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비록 군사는 많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싸움에 임해서는 몸소 앞장섰으며, 정기룡(鄭起龍), 안신갑(安信甲)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군중을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을 능가하였다.
이달(李達)과 함께 진주로 달려가 구원하였으며,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밤을 새워 치열하게 싸웠다.
백성과 군사들은 그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바라보는 이들은 그를 가리켜 “천고의 용장(勇將)”이라 불렀다.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왜 장수를 사로잡고 광해군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조동(喬桐)의 별장으로 좌천되었다.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형과 함께 같은 시기에 의숙(義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상세 주석
1️⃣ 崔堈均弟號蘇溪居固城
→ 최강은 최균의 아우로, 자는 소계(蘇溪), 본관은 고성이다.
🔹 최강의 가계와 자(號), 본관을 밝힌 부분.
2️⃣ 少而業文有膽畧
→ 어릴 적부터 글을 공부하였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성장했음을 나타냄.
3️⃣ 又剛直不能典意循入
→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아첨하거나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다.
🔹 청렴하고 곧은 성품을 강조.
4️⃣ 宣祖朝登武科
→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 최강이 무관으로 출세한 시기를 명시.
5️⃣ 壬辰以前奉事與兄倡義討倭起兵雖不多能得其心
→ 임진왜란 이전에 봉사로서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비록 병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 왜란 초기 의병 활동과 민심 수습을 말함.
6️⃣ 臨陣以身先之
→ 싸움에 나아가서는 몸소 앞장섰다.
🔹 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
7️⃣ 與鄭起龍安信甲齊名而御衆之才過之
→ 정기룡, 안신갑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으며 군중을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을 능가하였다.
🔹 최강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언급.
8️⃣ 與李達赴援晉州乘馬馳突竟夕鏖戰士民頼而得全
→ 이달과 함께 진주를 구원하러 달려가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밤을 새워 치열하게 싸웠다. 백성과 군사는 그 덕에 살아남았다.
🔹 진주성 전투에서의 공적을 서술.
9️⃣ 望之者指為千古勇將
→ 보는 이들이 “천고의 용장”이라 칭송하였다.
🔹 최강의 용맹을 칭송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
10️⃣ 錄原從功一等官
→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나라에서 내린 포상.
11️⃣ 止捕將忤光海黜為喬桐別將
→ 왜 장수를 사로잡은 일로 광해군의 미움을 사 조동의 별장으로 좌천되었다.
🔹 광해군과의 정치적 불화.
12️⃣ 令殺臨海堈不從遂歸郷里
→ 임해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 충절과 의리.
13️⃣ 後贈兵判與兄同時贈謚義肅
→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형과 함께 의숙(義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사후 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