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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堈 / 기년편고(紀年便攷v18) / K2-37 / 디지털아카이브(TXT_ARC_AA

자라가슴 2020. 3. 6. 16:34
崔堈 / 기년편고(紀年便攷v18) / K2-37 / 디지털아카이브(TXT_ARC_AA

 

崔堈
崔堈均弟號蘇溪居固城少而業文有膽畧
又剛直不能典意循入  宣祖朝登武科
壬辰以前奉事與兄倡義討倭起兵雖不
多能得其心臨陣以身先之與鄭起龍
信甲
齊名而御衆之才過之與李達赴援

晉州乘馬馳突竟夕鏖戰士民頼而得全
望之者指為千古勇將錄原從功一等官
004左(원문:3a)
止捕将■忤光海黜為喬桐别將令殺臨
海堈不從遂歸郷里後贈兵判與兄同時
贈謚義肅

현대어 번역

최강(崔堈)은 균(均)의 아우로, 자는 소계(蘇溪), 고성(固城)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공부하였으며, 담략(膽畧)이 있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여 세상의 뜻에 영합하거나 관직에 아첨하지 않았다.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봉사(奉事)로서 형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비록 군사는 많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싸움에 임해서는 몸소 앞장섰으며, 정기룡(鄭起龍), 안신갑(安信甲)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군중을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을 능가하였다.
이달(李達)과 함께 진주로 달려가 구원하였으며,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밤을 새워 치열하게 싸웠다.
백성과 군사들은 그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바라보는 이들은 그를 가리켜 “천고의 용장(勇將)”이라 불렀다.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왜 장수를 사로잡고 광해군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조동(喬桐)의 별장으로 좌천되었다.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형과 함께 같은 시기에 의숙(義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상세 주석

1️⃣ 崔堈均弟號蘇溪居固城
→ 최강은 최균의 아우로, 자는 소계(蘇溪), 본관은 고성이다.
🔹 최강의 가계와 자(號), 본관을 밝힌 부분.


2️⃣ 少而業文有膽畧
→ 어릴 적부터 글을 공부하였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성장했음을 나타냄.


3️⃣ 又剛直不能典意循入
→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아첨하거나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다.
🔹 청렴하고 곧은 성품을 강조.


4️⃣ 宣祖朝登武科
→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 최강이 무관으로 출세한 시기를 명시.


5️⃣ 壬辰以前奉事與兄倡義討倭起兵雖不多能得其心
→ 임진왜란 이전에 봉사로서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비록 병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 왜란 초기 의병 활동과 민심 수습을 말함.


6️⃣ 臨陣以身先之
→ 싸움에 나아가서는 몸소 앞장섰다.
🔹 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


7️⃣ 與鄭起龍安信甲齊名而御衆之才過之
→ 정기룡, 안신갑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으며 군중을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을 능가하였다.
🔹 최강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언급.


8️⃣ 與李達赴援晉州乘馬馳突竟夕鏖戰士民頼而得全
→ 이달과 함께 진주를 구원하러 달려가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밤을 새워 치열하게 싸웠다. 백성과 군사는 그 덕에 살아남았다.
🔹 진주성 전투에서의 공적을 서술.


9️⃣ 望之者指為千古勇將
→ 보는 이들이 “천고의 용장”이라 칭송하였다.
🔹 최강의 용맹을 칭송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


10️⃣ 錄原從功一等官
→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나라에서 내린 포상.


11️⃣ 止捕將忤光海黜為喬桐別將
→ 왜 장수를 사로잡은 일로 광해군의 미움을 사 조동의 별장으로 좌천되었다.
🔹 광해군과의 정치적 불화.


12️⃣ 令殺臨海堈不從遂歸郷里
→ 임해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 충절과 의리.


13️⃣ 後贈兵判與兄同時贈謚義肅
→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형과 함께 의숙(義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사후 영예.